[속 빙점] 꽃샘 추위
나쓰에가 현관에서 숄을 벗으려고 할 때 때마침 다쓰코가 연습장 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머, 참 멋진데, 그 숄.”
“어머니날에 요코가 짜서 선물해 준 거야.”
나쓰에는 벗으려던 숄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층에서 샤미센 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정말 반가운 얘기구나. 엷은 자주색 무늬가 드문드문 있는 게 참 우아해.”
다쓰코는 나쓰에의 어깨를 가볍게 톡톡 치고는 숄을 자기 어께에 걸치고 거실로 들어가 버렸다. 나쓰에가 거실로 들어가 보니 구로에를 비롯한 패거리들이 여전히 모여 있었다. 그 중 한 패는 장기를 두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우시군요.”
누군가가 말했다. 숄을 걸치고 벽에 걸린 거울을 들여다보던 다쓰코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날 두고 한 말 같지는 않은데요?”
“다쓰코 씨, 괜히 토라지지 말아요. 나도 다쓰코 씨를 미인이라고 칭찬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말을 했다가는 다쓰코 씨한테 따귀라도 얻어맞을까봐……”
“괜찮아요, 위로해 주지 않아도…….”
다쓰코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보다도 모두들 이것 좀 보세요. 이 숄이 바로 요코가 어머니날 선물로 준 거래요.”
“허, 다쓰코 씨한테요?”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이 어머니께 말이에요.”
“자식이 없는 다쓰코 씨에겐 부러운 일이겠군요.”
“뭐, 그럴지도 모르지요.”
다쓰코는 숄을 접어서 나쓰에 앞에 놓았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바로 어머니날이군. 난 지금까지 어머니께 아무것도 해 드린 게 없어.”
장기를 두고 있던 젊은 남자가 말했다. 아직 서른도 안 되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의 푸른색 신사복 어깨가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이 젊은 남자까지도 무엇에 이끌려 이 집에 드나들게 되었을까 하고 나쓰에는 이상하게 생각했다.
“난 작년 어머니날에 어머니께 게다를 사 드리고 초밥집에 모시고 갔었지.”
스케치북을 펴서 다쓰코를 스케치하기 시작한 구로에가 말했다.
“허!”
벽에 기대어 말없이 나쓰에를 바라보고 있던 사나이가 맞장구를 쳤다.
“그렇게 감탄할 일도 못 돼요. 사내 대장부가 게다 한 켤레와 초밥이라니 그 어머니가 가엾네요.”
“나도 동감이요, 다쓰코 씨. 하지만 어머니는 게다와 초밥만으로도 눈물겨워하시니까요.”
“평소에 부모님께 불효를 했다는 증거 같군요.”
“야, 이거 너무하는데요, 다쓰코 씨…….”
“그건 그렇고, 어머니날이라는 것이 과연 필요한 걸까요? 선물을 받는 어머니야 기쁠 테지만, 아무것도 받지 못하는 어머니에게는 쓸쓸한 날이 아닐까요?”
구로에가 스케치하던 손을 멈추지 않고 말했다.
나쓰에는 자신을 스케치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다쓰코에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머니날은 그래도 괜찮아. 난 그 노인의 날이라는 거 말이야. 정말 싫어. 해마다 그 날이 되면 노인 자살 사건이 몇 건은 보도되거든.”
그때까지 말없이 장기 두는 것을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구레나룻을 기른 남자가 참견을 했다.
“그래, 괜히 노인의 날이라는 걸 만들어 놓아서 죽고 싶도록 쓸쓸한 노인도 생기는 거야. 실제로 죽지 않더라도 거의 그럴 정도로 견딜 수 없는 심정에 빠지는 노인도 있을 테지.”
“그건 그래. 모두들 일년 내내 노인이나 어머니를 잘 모셨다면 노인의 날이나 어머니날 같은 것은 필요 없을 테니까. 그 증거로 아버지의 날은 없잖아.”
“아냐, 생길 거야.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노인의 날에 아버지의 날, 어머니의 날에 어린이날이라. 구색은 잘 맞는군.”
“그건 말하자면 노인도 부모도 어린이도 모두 소중히 위해 주지 않고 있다는 증거야.”
“그래, 아이들도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버림을 받기도 하니까…..”
“아냐, 과보호라는 것도 있는데, 그건 인권을 무시하는 거야.”
“우리 어머니께서 말씀하시더군. 양로원 같은 곳이 텅 비는 교육을 해야 한다고 말이야.”
“옳은 말씀이야.”
패거리들이 그런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옆에 있던 나쓰에가 다쓰코에게 말했다.
“연습은?”
“오늘은 없어. 임시 휴업이야.”
“토요일인데도 어쩐지 조용하다 했지.”
“너도 토요일엔 나오기 어렵잖아? 선생님이 집 보시니?”
“아니, 그이는 삿포로에 갔어. 다카기 씨 집에.”
나쓰에는 옆에 놓인 숄을 바라보았다.
“이상한데. 거기 무슨 볼일이라도 있어?”
“저 ….오타루의 그 사람이 다카기 씨 집에 온대. 그래서 그이도 이 기회에 한 번 만나 보고 싶다고……”
나쓰에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흠, 만나서 어떡하게?”
다쓰코는 미간을 찌푸리고,
“이층으로 가는 게 좋겠군.”
하고 말하며 일어났다.
나쓰에는 복도에 서서 계단을 쳐다보았다. 샤미센 소리가 같은 가락을 되풀이해서 연주하고 있었다.
“왜 그래?”
다쓰코가 올라오지 않는 나쓰에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위에서 샤미센을 켜고 있잖아?”
나쓰에는 어쩐지 유카코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다른 방이니까……..”
나쓰에는 할 수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유카코의 방 미닫이는 닫혀 있었다. 샤미센 소리가 끊겼다. 나쓰에는 숨을 죽이고 맞은편에 있는 다쓰코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선생님은 오늘 밤 삿포로에서 주무시는 거야?”
긴 화로를 사이에 두고 나쓰에는 다쓰코와 마주 앉았다.
5칸짜리 방에는 맞춤 장롱 세 짝이 나란히 놓여 있고, 도코노마에 있는 수선화가 꽃힌 화병이 산뜻한 느낌을 주었다.
“응, 다카기 씨 집에서 묵고 올 거야. 부인한테는 폐가 되겠지만……”
“그럼 그 넓은 집에 너 혼자 자야 하는 거야?”
“어머, 아직 내가 말 안했니? 며칠 전부터 쓰기코의 조카딸인 하마코가 와 있어.”
“그거 잘 됐네. 몇 살인데?”
“열여섯 살이야. 중학교를 갓 졸업했는데 쓰기코를 닮아서 그런지 얌전하고 일도 잘해.”
“쓰기코의 집도 가까워서 서로 편리하겠구나. 넌 보기보다 훌륭해.”
“어머, 그게 무슨 소리야?”
“쓰기코가 오랫동안 도와주었고, 그 조카딸까지 와 있는 걸 보면 말이야. 요즘은 사람을 쓰기가 어려워. 참을성 있는 아이가 드물어서 주인 쪽에서 상전 모시듯 해야 하고.”
“쓰기코의 성격이 얌전하기 때문이었어.”
나쓰에는 끊임없이 들려오는 샤미센 소리가 왠지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그쪽과 만나서 대체 뭘 어쩌겠다는 거야?”
나쓰에는 다쓰야와 요코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래서 양쪽 부모가 다급해진 거로군.”
“난 어쩐지 불안해. 요코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날까봐 걱정이 되어 견딜 수가 없어.”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오히려 일이 잘 해결되지도 모르겠네.”
“그럴까? 난 다쓰야란 학생이 왠지 꺼림칙해.”
나쓰에는 잘 닦은 긴 화로의 가장자리를 예쁜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제자가 차와 찹쌀떡을 갖고 왔다.
“유카코의 방에도 갖다 줘.”
제자는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나쓰에는 문득 다쓰코가 언제까지 유카코를 데리고 있을 건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요코하고 그 동생이 같은 대학에서 만나게 되리라고는 부처님도 미처 몰랐을 거야.”
다쓰코는 찻잔을 양손에 받쳐들었다.
“그래. 그런데다 같은 학년이라니….그것도 어쩐지 마음에 걸려.”
“어쨌든 나쁜 짓은 할 게 못 된다는 말이지?”
“…..지금쯤 그이는 그 사람과 만나고 있을 거야.”
나쓰에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차라리 네가 만나러 갈 걸 그랬지?
“싫어, 난.”
“어째서? 나라면 요코를 낳은 친어머니를 만나 보고 싶을 거야.”
“너하고 난 입장이 달라.”
“그럴까?”
“어머, 이 차 참 맛있네.”
“이거 구기자차야. 보통 산지에서만 마실 수 있다나봐…..어머, 누구세요?”
인기척 소리를 듣고 다쓰코가 미닫이를 살며시 열었다. 그러자 콧수염을 기른 무라이가 불쑥 안으로 들어왔다.
“어머, 어쩌려고 콧수염을 다 길렀어요. 흉하잖아요?”
다쓰코는 거침없이 말했다. 무라이는 나쓰에에게 눈인사를 하고 긴 화로 옆에 앉으면서 이죽거렸다.
“수염 없는 사람하고 하는 키스는 버터 없는 토스트와 같다는 말이 있어요.”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군요. 이래서 여길 못 오게 해야 한다니까. 무라이 씨 미리 말해 두겠는데, 이 집 이층에는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올라오지 못해요. 항상 오는 친구들도 올라와 본 적이 없어요.”
“그럼 이거 참 영광이군요.”
“용건이 뭐죠?”
“이 집에 따로 용건이 있어 오는 사람은 하나도 없잖아요? 다쓰코 씨 얼굴을 보러 왔다고 말하고 싶지만, 미안하지만 오늘 그게 아니에요. ….댁에 전화했더니 이쪽에 가셨다고 해서 쫓아왔어요.”
무라이는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요?”
나쓰에는 미심쩍은 듯이 말했다.
“뭐 그게…..원장님이 안 계셔서 쓸쓸해하시지 않을까 해서요.”
“어머…….”
“정말 질렸어요. 바깥양반이 없는 틈을 노리다니 좀도둑 아닌가요?”
다쓰코가 따끔하게 말했다.
“천만에요. 충성스런 부하지요. 토요일 오후인데 빈집 문안까지 다니니 말입니다.”
무라이는 다시 이죽거리며 웃었다.
“불쌍해라……대체 무슨 인과응보로 이런 남자가 태어났을까. 무라이 씨, 당신 다카기 씨하고 친척이라면서요? 그런데 어떻게 그분과는 하나도 닮지 않았죠?”
“꼭 닮았지요, 판에 박은 듯이…….”
무라이는 이러헥 중얼거리며 밖을 내다보았다.
“아니, 저 십자가는 뭡니까? 교회인가요?”
흐린 하늘 아래 높은 지붕의 십자가가 바로 뒤쪽으로 보였다.
“교회에요.”
“나하고는 인연이 없는 곳이군.”
“무라이 씨 같은 분이 가면 좋을 텐데요. 그렇지, 나쓰에?”
나쓰에는 난처한 듯이 미소를 지었다.
“아니죠, 다쓰코 씨, 나 같은 나쁜 놈을 구해 줄 하나님은 없을 거예요.”
“제법 사람다운 말을 하시네요. 하지만 불량배나 악인이 가장 구원하기 쉽대요. 자신을 진정으로 불량배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잖아요. 그런 사람을 제일 손쉽게 구원할 수 있다는 거예요. 힘든 건 인간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나 나쁜 짓은 하나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 거예요.”
“그럼 원장님 같은 분은 구원하기 어려울까요?”
하고 무라이는 다시 나쓰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쓰지구치 선생님 말이에요? 그분은 그야말로 품행이 바르신 분이에요. 그분은 좋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쁜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언제나 반성만 하고 있어요. 그러니 절대 구원받기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구요.”
다쓰코는 몇 해 전 겨울 어느 날, 교회 앞에 서 있던 게이조를 떠올렸으나 입밖에 내지는 않았다. 게이조의 진지한 모습도 무라이에게는 놀림거리밖에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럴까요? 그럼 다쓰코 씨는 어때요?”
“물어 볼 필요도 없어요. 가장 구원받기 어려운 사람은 바로 나예요. 난 바로 옆에 교회가 있는데도 아직 한번도 죄를 뉘우치러 가거나 기도하러 갈 생각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참, 나쓰에는 어때? 부처님이나 하나님 같은 건 필요 없다고 생각해?”
“잘 모르겠어. 날마다 불단 앞에서 합장을 하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무엇을 향해 손을 모으는 건지 알 수 없어.”
“인간이란 다 그런 게 아닐까? 가미다나(집안에 신을 모셔 놓은 감실)에 합장은 하지만, 그 안에 신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잖아. 불단 앞에 앉아 있지만 그 안에 부처님이 있다고도 생각지 않아.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향해 손을 모으고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닐까?”
“맞아요. 무의미한 일을 하고 있어요. 하여간 하나님 따위는 없어요. 그러니 안심해요. 다쓰코 씨.”
“아녜요. 하나님이 안 계시면 안심할 수가 없어요. 난 다급한 일이 생기면 하나님께 기대고 싶어지거든요.”
“아니, 방금 기도하러 갈 생각 같은 건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했잖아요?”
“하지만 앞일은 모르는 거예요.”
“하지만 가장 구원받기 어려운 사람은 자신이라고 말해놓고선.”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말아요. 구원하기 어렵다고 해서 구원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어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구원해 주는 분이 하나님 아닐까요?”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보다는 아사히야마로 드라이브하러 가지 않겠어요? 벚꽃도 반쯤 피었다던데요.”
“사양하겠어요. 무라이 씨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아직은 무라이 씨와 함께 죽고 싶지 않거든요.”
“싫다면 할 수 없죠. 그럼 어때요, 부인은?”
“전……꽃구경 가본 적이 너무 오래 되었어요.”
어떻게 들으면 거절 같고 또 어떻게 들으면 승낙 같은 나쓰에의 대답이었다.
“몇 해째 꽃구경을 못하셨다면 어떠세요. 오늘 한번 가보시지 않겠습니까? 반쯤 피었을 때도 싱싱한 게 꽤 볼 만하죠. 아사히야마의 벚꽃은 유명해요.”
무라이는 열심히 권했다.
“하지만…….저 혼자는…….”
나쓰에는 다쓰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됐네. 두 분께서 사이 좋게 다녀오세요.”
“모처럼 제안해 주셨는데, 전 다음에 갈래요.”
나쓰에는 다쓰코의 얼굴색을 살피면서 마지못해 거절했다.
“아사히야마까진 20분밖에 안 걸려요. 오늘은 꽃구경 온 사람들로 엄청 북적거릴 거예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이니 공연히 절 경계하실 필요도 없잖아요?”
“그래도…….”
나쓰에는 다시 다쓰코의 얼굴색을 살펴보았다.
“사양할 것 없어. 가고 싶으면 가면 되잖아?”
“다쓰코 씨는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그냥 함께 꽃구경을 가자는 것 뿐인데…..”
“그러니까 가고 싶으면 가라고 하잖아요? 하지만 무라이 씨도 좀 생각해 보는 게 어때요? 굳이 남의 부인을 꼬여내지 않더라도 꽃구경을 함께 갈 상대는 얼마든지 있잖아요? 도둑고양이 같은 짓은 그만두세요.”
“이거 참, 다쓰코 씨도 꽤 구닥다리군요.”
무라이는 쓴웃음을 지었다.
“난 구식이 좋아요. 구식이라고 반드시 나쁘다고만 할 수 없어요. 무라이 씨. 낡을수록 가치가 있는 것도 있으니까요. 나쓰에의 태도도 못마땅해. 그래도 어쩌고 하지 말고 딱 잘라 거절하면 좋잖아.”
“이래서 다쓰코 씨는 무섭다니까요.”
무라이는 그다지 무안해하는 기색도 없이 찹쌀떡을 집어 볼이 미어지도록 쑤셔 넣었다. 또다시 샤미센 소리가 들려왔다.
“시험림 안에 있는 그 제방 아래의 벚꽃, 그거 참 아름답지?”
다쓰코는 상냥한 얼굴로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다쓰코의 집에서 돌아온 나쓰에는 외출복을 입은 채 경대 앞에 앉았다.
피부도 피로해 보이지 않았으며 눈도 반짝반짝 생기가 돌았다. 이따금 게이조도 말한 것처럼 아직 삼십대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나쓰에는 만족스러운 듯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엷은 올리브색 기모노에 같은 계열의 짙은 색 허리띠가 잘 어울렸다. 나쓰에가 허리띠를 풀려고 했을 때 가정부 하마코가 방 밖에 와서 꿇어앉았다.
“저…….아주머니께서 나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무라이 선생이라는 분한테서 전화가 왔었어요.”
“어머, 그래?”
나쓰에가 거울에 비친 하마코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이자, 하마코는 일어나 거울 속에서 사라졌다. 나쓰에는 허리띠를 풀다가 망설여졌다. 문득 무라이가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무라이가 다쓰코의 집에까지 자신을 쫓아왔던 일, 꽃구경을 가자고 간절히 청하던 일, 그런 것들이 나쓰에를 흡족하게 했다. 그런 들뜬 마음이 나쓰에로 하여금 산책하고 싶은 마음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나스에는 일어나 부엌에 있는 하마코에게 말햇다.
“잠시 시험림을 산책하고 올 테니 혹시 손님이 오면 마루에서 불러줘.”
“누가 오시나요?”
“그렇지는 않겠지만…….”
“저………, 저녁 식사는 뭘로 준비할까요?”
“글쎄……..”
어쩌면 무라이가 진짜 찾아올지도 모른다. 나쓰에는 순간적으로 두사람이든 세 사람이든 좋은 메뉴를 떠올렸다.
“전골로 해.”
“원장님께서 돌아오세요?”
“아니, 하지만 고기를 한 사람 분 정도 더 많이 준비해.”
하마코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왼쪽 숲 속에 목련이 눈에 확 띌 만큼 하얗게 피어 있고 땅 위에는 풀이 짙푸르게 돋아나 있었다. 산비둘기 울음소리가 왠일이지 오늘 따라 밝게 들려왔다. 나쓰에가 처음 쓰지구치 가로 시집왔을 당시만 해도 시험림은 너무 울창하여 발을 들여놓기가 무서울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은 무척 밝아져서 언제나 숲 속에서는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쓰에는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꽃샘 구름이 핀 하늘이 마치 숲 위에서 잠들어 있는 것처럼 고요햇다. 숲 속을 완만한 커브를 그리며 뻗어 있는 제방 아래에 벚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활짝 피려면 아직 며칠 더 있어야 하겠지만 무척 아름다웠다. 자연히 돋아나 자란 벚나무일까. 소나무 숲을 등지고 있는 벚나무는 퍽 화려해 보였다.
나쓰에는 시험림 바로 옆에서 여러 해를 살아왔으면서도 이곳에 벚나무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집안에 틀어박혀 살다시피 한 나쓰에는 이 벚나무가 꽃이 필 무렵에는 숲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나쓰에는 바로 눈앞에 두고도 아직 그 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 몹시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다쓰코가,
“시험림 안에 있는 그 제방 아래의 벚꽃, 그거 참 아름답지?”
하고 말했을 때도 나쓰에는 어디에 벚나무가 있었는지 생각나지 않았었다.
산책을 좋아하는 게이조는 이곳에 벚나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벚꽃이 피어 있었다고 말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분명 게이조는 혼자서 꽃을 보고 즐겼을 것이다. 나쓰에는 문득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등뒤에서 타박타박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대여섯 살 가량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벚나무 옆으로 뛰어왔다.
“아, 없어.”
남자아이가 발돋움을 해 아래 가지에 손을 뻗었다.
“뭐가 없어?”
나쓰에가 가까이 다가가서 물어보자,
“비밀이에요.”
하고 남자아이는 약간 얼룩이 있는 둥근 얼굴을 나쓰에에게로 돌렸다.
“맞아, 비밀이야.”
덧니가 난 여자아이가 이렇게 말하고 나서 방긋 웃더니,
“이거예요, 아줌마.”
하며 휴지에 싼 것을 펴 보였다. 그것은 마노 빛깔을 띤 작은 수지(樹脂) 덩어리 몇 알이었다. 나쓰에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자신도 어렸을 때 새하얀 벚나무 수지를 새끼 손가락에 감고 논 적이 있었다.
“어디 손가락에 한번 감아 봐.”
하고 나쓰에가 말했다.
“네, 감아 볼게요.”
남자아이가 조금 큰 수지에 침을 발라 엄지손가락과 집게 손가락으로 그것을 짓이겼다. 거미줄 같은 가느다란 실이 뽑혀 나오자 그것을 왼쪽 새끼 손가락에 감기 시작했다.
“참 잘하네.”
남자아이의 새끼 손가락은 점점 흰 실에 싸여 갔다. 이윽고 누에고치처럼 탱탱하게 감길 것이다.
“고마워, 참 재미있었어.”
하고 나쓰에가 말하자, 두 아이는 제방 위로 뛰어올라가 뒤를 돌아보고는 나쓰에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고는 곧 제방 저편으로 사라졌다.
나쓰에는 자신이 어렸을 때 하던 놀이가 아직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데 놀라움을 느꼈다. 그것은 언제부터 누가 시작한 놀이인지 나쓰에도 모른다. 아무튼 먼 옛날부터 있었던 소박한 놀이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보니 새끼 손가락 끝을 누에고치처럼 수지의 실로 감는 노이는 어딘지 꺼림칙한 느낌도 들었다. 새끼손가락 끝이 번데기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느끼는 것은 어른의 감각으로, 이미 동심을 잃어버린 증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나쓰에도 제방의 계단을 올라갔다.
할머니 한 분이 제방 위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쓸쓸한 표정으로 제방 아래 갈대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험림을 양쪽에 두고 제방 길이 똑바로 뻗어 있었다. 거기에서 7,8백 미터 저편으로 자동차가 끊임없이 오가는 료진 다리가 조그맣게 보였다. 나쓰에는 다리 쪽을 향해 제방 위를 발길이 가는 대로 마냥 걷고 있었다.
능선자락이 밋밋한 먼 산등성이에 번갯불 모양의 흰 잔설이 남아 있었다. 가까이 서 있는 연둣빛 포플러를 잠시 바라보고 나서 나쓰에는 발길을 돌렸다.
할머니는 입을 반쯤 벌린 채 여전히 같은 자세로 갈대숲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쓰에는 멈춰 서서 말을 걸었다. 이런 행동은 그녀에게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었다.
“날씨가 꽤 따뜻해졌네요.”
할머니의 눈이 천천히 나쓰에를 바라보았다.
“누구시더라……..?”
“이 근처에 사는 쓰지구치라고 해요.”
“이곳으로 이사 온 지 얼마 안 돼서 누군지 잘 모르겠군요.”
입 근처에 주름살투성이였다. 할머니의 쪼글쪼글한 손에는 민들레 한 송이가 쥐어져 있었다. 여든도 넘어 보였다. 나쓰에는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할머니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좀 전에 보았던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어두컴컴한 독일가문비 숲 속에서 나타나 제방 위로 뛰어 올라왔다.
“저 아이들은 벚나무 수지를 찾고 있어요.”
“뭐라고요, 벚나무 수지……..?”
“그 수지를 새끼손가락에 감고 노는 거예요.”
나쓰에는 새끼손가락에 수지를 감는 시늉을 해 보였다.
“아, 그래, 나도 옛날엔 그런 놀이를 하고 놀았어요. 그래그래, 이렇게 말이에요.”
할머니도 같은 손짓으로 수지의 실을 감는 시늉을 했다.
“그래요, 오재미놀이도 했어요. 빨갛고 파란 천에 팥을 넣어 만들었지요. 하지만 우리 집은 가난해서 팥 크기 만한 작은 돌을 많이 주워서 안에 넣었어요.그걸로 맞으면 몹시 아팠어요. 친구들은 아무도 내 오재미를 건드리지 않았어요. 하지만 내 친구 셋짱만은 가끔 내 오재미를 갖고 놀기도 했지요.”
나쓰에는 할머니의 어렸을 적 모습을 머리 속에 그려보면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는 눈 아래가 몇 겹으로 처져 있었다. 할머니는 입 속으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가만히 들어 보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하고 외고 있었다.
“난 이제 곧 저승으로 가게 되요……”
“네?”
“죽고 싶진 않지만 할 수 없지요. 차례가 오면 어쩔 수 없으니까요.”
“아직 정정하신데요, 뭘. 요즘은 젊은 사람들이 오히려 교통사고니 뭐니 해서 많이 죽잖아요……”
나쓰에는 이렇게 말하여 할머니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그래요. 어째서 젊은 사람들이 일찍 죽는지 모르겠어요. 우리 아들도 전쟁에 나갔다가 죽었어요. 싱가포르에서 전사했다는 종이 쪽지 한 장이 관청에서 받은 유골 상자 안에 들어 있었어요. 나도 아들이 죽은 곳에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어느새 여든을 넘겨 이제는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되었어요.”
할머니는 매달리는 듯이 나쓰에를 쳐다보았다. 움푹 들어간 조그마한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싱가포르라는 곳은 미국에 있나요, 러시아에 있나요?”
이 말에 나쓰에는 가슴이 메는 듯했다. 할머니는 자기 아들이 어디서 죽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뭣 때문에 살아왔는지 모르겠어요. 가난에 쪼들리고, 영감은 바람이나 피워대고, 아들은 죽고……그래도 죽고 싶지 않다오.”
나쓰에는 할머니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다. 자신도 늙으면 무엇 때문에 살아왔나 하고 중얼거리며 숲 저쪽 강변에서 내 딸 루리코가 흉악한 살인범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 남들에게 넋두리를 할 것 같았다.
무라이는 찾아오지 않았다. 사실 지금은 나쓰에도 무라이를 기다릴 기분이 아니었다. 유카코를 범한 무라이 따위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느껴지는 때도 있으면서 어째서 그가 유인하면 마음이 움직이고 마는지 나쓰에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나쓰에는 하마코와 둘이서 전골로 저녁 식사를 마쳤다.
아홉 시가 지났을 즈음 게이조에게서 전화가 왔다. 욕실에서 막 나온 나쓰에는 얼른 잠옷을 걸치고 전화를 받았다.
“내일 도오루와 요코와 함께 마루야마에 가서 꽃구경이나 하고 돌아갈 생각이오.”
“그쪽은 활짝 피었나 보죠?”
“벌써 다 졌소. 역시 아사히가와보다는 날씨가 많이 따뜻해.”
게이조는 미쓰이 게이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당신, 만나셨어요?”
“응, 만났소.”
“어떻게 되셨어요?”
“음, 집에 돌아가서 천천히 말해 주리다.”
“그래요. 그럼 편히 주무세요. 다카기 씨하고 부인께도 안부 전해주세요.”
하고 나쓰에는 수화기를 놓으려다가 문득 생각나서 물었다.
“여보, 당신 시험림에 벚나무가 있는 거 알고 계셨어요?”
“응, 제방 아래 있는, 꽃이 아름답게 피는 그 나무 말이오? 알고 있어요. 연못 쪽에도 아마 있었지.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요?”
별걸 다 묻는다는 듯한 게이조의 목소리였다.
“아뇨, 그냥 알고 계신가 해서 여쭤 봤을 뿐이에요.”
역시 혼자 보고 즐기고 있었구나 하고 생각하니 나쓰에는 잠자리에 들고 나서도 괜시리 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