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예술의 전당 서는 재즈 하모니시스트 전제덕 음악이 날 구원하리라… 빛 잃은 '소년'의 소리 여행 "내 하모니카 스승은 유튜브… 오케스트라 악보도 귀로 외운다" 한현우 기자/조선일보 : 2012.04.14. 산악인들이 정복(征服)이란 말을 쓰지 않는 것처럼, 장애인들이 극복(克服)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는 사실을 전제덕(38)에게서 배웠다. 1급 시각장애인인 그가 하모니카에 매진(邁進)하는 것은 극복이 아니라 성취를 향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고 칭찬한다. 그만큼 리듬감이 뛰어난 데다 스티비 원더 노래를 즐겨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수사(修辭)는 맹인(盲人)이란 전제에서 출발했다. 전제덕을 추어올리려면 '한국의 투츠 틸레만스'가 낫겠다. 투츠 틸레만스(90)는 벨기에 출신의 재즈 하모니카 거장(巨匠)이다. 전제덕이 5월 3일 예술의전당 무대에 처음 오른다. 60인조 오케스트라가 그의 반주를 맡았다. 한국 대중음악인들이 '꿈의 무대'라 부르는 이곳에, 2004년 한국 첫 재즈 하모니카 독주 음반을 내며 데뷔한 지 불과 8년 만에 서게 됐다. 2시간 분량 레퍼토리를 통째로 외우며 연습하는 그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만났다. ◇'꿈의 무대'에 서다 ―예술의전당 무대에 선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세종문화회관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 무대이니까 영광스러운 자리죠. 외국 대중음악가들은 자주 서는데 국내 뮤지션들에겐 덜 개방돼 있거든요. 그렇지만 제 음악이 아니라 클래식 레퍼토리로 서는 거니까 좀 의미가 다르긴 해요. 언젠가 제 음악만으로 이 무대에 서면 정말 의미가 각별하겠죠." ―무대 분위기가 다릅니까. "큰 무대는 공기가 달라요. 특히 객석이 꽉 차면 완벽한 느낌이랄까, 무대와 객석 사이에 벽이 형성돼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이 많아서 우레 같은 박수가 터지면 압도된다는 생각이 들죠." ―악보를 거의 다 외웠다면서요. "공연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으니까요. 음(音) 하나하나에 매달리는 재즈와 달리 클래식은 악보가 정말 중요하거든요. 게다가 처음 연주하는 21분짜리 3악장 하모니카 콘체르토가 있어서, 하모니카뿐 아니라 오케스트라 악보 전체를 외워야 해요. 1월 초에야 곡목이 확정됐을 때 너무 불안했어요. 악보를 볼 수 없으니까 무조건 외워야 한다는 강박감이 있는 거죠." 전제덕은 이번 공연에서 브라질 작곡가 빌라―로보스의 하모니카 콘체르토를 국내 초연(初演)한다. 이 밖에도 조지 거슈윈과 제임스 무디의 곡들도 오케스트라와 협연할 예정이다. "장애를 극복? 다 헛소리" 그 불편을 어떻게 극복하나… 절박함에 악착같이 음악만 더러운 꼴 안 봐서 좋겠다? 당장 눈 멀어봐라, 좋은가 "다만 굴복하지 않았다" 드럼 신동, 국악 기린아… 그러다 하모니카에 미쳐 한국의 '스티비 원더'라니 내 롤모델은 백남준 ―악보를 볼 수 없는데 어떻게 외웁니까. "음반을 듣는 거죠. 점자 악보가 없는 음악이라 그 방법밖에 없어요. 외국 연주자들이 녹음한 음반을 듣고 또 듣는 거죠. 그래도 예전에 들어봤던 음악이에요. 그때는 '이거 진짜 어렵구나. 내가 이런 곡을 연주할 일 있겠어?' 하면서 그저 듣기만 했죠. 그런데 정작 연주하게 되니까 그때 열심히 들으면서 멜로디를 익혔던 게 도움이 됩니다." ―하모니카 연주가 어렵다는 건 어떻다는 건가요. "하모니카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악기로 소리를 내는 것 같아요. 입으로 부는 오르간이라고 할까. '텅 블록(tongue block)'이라는 테크닉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하모니카의 낮은 도와 높은 도 사이의 음들을 혀로 막은 뒤 입을 양쪽으로 벌려서 두 도를 동시에 내는 식이죠. 이런 클래식 하모니카 주법을 최근에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런 주법을 가르쳐 줄 사람이 있습니까. "없죠. 물어볼 사람이 없으니까 연습하는 데 애를 먹어요. 소리를 들어보고 그것과 똑같은 소리가 날 때까지 연습하는 거죠. 다행인 건 유튜브에 그런 하모니카 강의 동영상이 많이 올라와 있어서 그걸 다운받아 들으면서 연습할 수 있어요." ―유튜브를 어떻게 검색합니까. "앞이 안 보이는 사람들도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해요. 아이폰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죠. 스티브 잡스가 음성 프로그램을 잘 만들어 놓아서, 스크린을 터치할 때마다 그걸 음성으로 알려주니까요. 보여줘야 설명이 쉬워요." 그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 들더니 왼쪽 귀 가까이 대고 오른손으로 화면을 건드렸다. 그의 손가락이 아이폰 화면에 닿을 때마다 빠르게 말하는 여자 음성이 들렸다. 그는 이내 토미 레일리라는 캐나다 하모니카 연주자의 동영상을 유튜브에서 찾아 보여줬다. "하모니카 렉처(harmonica lecture)라고 입력하면 동영상이 엄청나게 많아요. 그중에서 골라 연습하는 거죠. 컴퓨터로는 이것보다 훨씬 빠르게 검색됩니다." 전제덕은 인터넷이 상용화되던 1990년대 말 "하루의 절반은 하모니카를 불고 나머지 절반은 컴퓨터에 매달려 있었다"고 할 만큼 일찌감치 컴퓨터를 활용해 왔다. 그는 "아마 내가 국내 시각장애인 중 아이폰을 맨 먼저 샀을 것"이라고 했다. 모든 터치를 음성으로 변환해주는 '보이스 오버(voice over)' 기능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출시 2주 만에 샀다고 했다. ―아이폰이 새로운 세계를 열어줬군요. 스티브 잡스에게 고맙죠. 일찍 죽어서 섭섭하기도 하고요. 삼성이나 LG 전화기에는 모든 터치를 음성으로 알려주는 기능이 없어요. 키패드를 누르면 몇 번인지 알려주고, 문자가 오면 문자를 읽어주는 정도죠. 아이폰을 만든 스티브 잡스는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제품을 완벽하게 만들려고, 한 제품 안에 모든 것을 집어넣으려고 한 것은 감사한 일이에요." ◇안마시술소에서 접을 뻔한 꿈 전제덕은 생후 보름 만에 시력을 잃었다. 열이 43도까지 오르는데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이 눈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뒤에야 병원마다 찾아다녔고, 치료가 되지 않자 무당을 불러 굿도 했다. 평생 아들의 실명(失明)을 자책했던 그의 어머니는 2007년 간암으로 작고했다. ◀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께 불효를 많이 했나요. "불효 많이 했죠. 나는 늘 뭔가 하고 싶을 때 바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데 엄마는 자꾸 '나중에 하면 안 되겠니' 하면서 말리는 쪽이었어요. 그러면 엄마한테 성질 내고 화풀이하고…. 그래도 음악에 관한 한 엄마는 나를 간섭하지 않았어요. '그거 해서 밥 벌어먹겠느냐'고 걱정은 했지만. 엄마가 살아계셨으면 올해 환갑인데…. 아버지는 노골적으로 나를 말렸지요. 앞도 못 보면서 무슨 음악이냐. 쉬운 일을 해라, 그런 식이었죠." 그는 수원에 홀로 사는 아버지와 떨어져 서울에 산다. 아버지에 대해 묻자 그는 "아버지와 나는 잘 안 맞는다"며 대답을 피했다. ―시각장애인에게 쉬운 일은 뭡니까. "침술이나 안마는 학교에서 배우기도 했고 선배들이 끌어주니까 비교적 쉬워요. 안마시술소에서 일한 적도 있어요. 스무 살 때쯤 안산에 있는 안마시술소에서였는데, 당시 돈으로 월 300만원씩 벌었어요. 돈 벌어서 좋았지만 완전히 폐인이 되는 것 같았어요. 낮에 자고 밤에 일하니까요." ―학교에서 안마를 배웁니까. "특수학교에서는 침술과 안마가 고교 정규과정에 있어요. 의대 1학년 때 배우는 과정을 배운다고 봐야죠. 재미있는 건 안마 선생님이 시험 때 온종일 학생들한테 안마를 받는다는 거예요. 처음엔 시원하겠지만 나중엔 아주 고역이죠. 더 웃긴 건, 그 선생님이 침술도 가르쳐요. 시험 날이면 1학년한테 안마 실컷 받고 2학년한테는 계속 침을 맞아야 해요. 어린 마음에도 '저 선생님은 월급 많이 받아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전제덕은 특수학교인 인천 혜광학교에서 초·중·고 과정을 마쳤다. ―안마는 왜 그만뒀나요. "안마시술소에 24시간 대기해야 해요. 보통 밤 9시부터 이른 아침까지 일하고 나면 안마사들끼리 아침부터 술을 마셔요.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그리고 손님들이 대개 술 취한 사람들이에요. 아무한테나 반말이죠. 특히 여자 안마사들한테 '이년, 저년' 할 때는 옆에서 안마하다가 열불이 터져서…. 손님과 싸움도 하고, 그러다가 얻어맞기도 하고. 게다가 안마시술소가 성매매하는 데잖아요. 나는 고3 때 '밤 문화'란 걸 처음 알았어요. 안마시술소 실습을 나갔는데 아가씨들이 손님 방에 들어가고, 취객과 싸우고 하는 몰골을 처음 본 거죠. 이전에 전혀 몰랐던 세상이었어요. 그때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안마는 하지 않을 거야'라고 다짐했는데, 학교 졸업하고 딱히 돈 벌 수 있는 일이 없으니까 일하게 됐던 거예요. 음악을 하려고 해도 우선 돈을 모아야 했으니까요." ― 안 보인다는 사실을 언제 처음 자각(自覺)했습니까, "다섯살 때였어요.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다른 애들이 책을 보면서 깔깔 웃는 거예요. 나는 친구들이 도대체 왜 웃는지 알 수 없었어요. 나도 분명히 책을 손에 들고 있는데 '도대체 여기 뭐가 있는 거지? 애들은 왜 웃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때 친구들과 내가 다르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나쁜 건지 좋은 건지는 몰랐죠." ―친구들이 말해주지 않았나요. "아니에요. 너무 어려서 그랬나. 나는 그때만 해도 어디 도랑에 빠지거나 나무에 부딪혀도 '그럴 수 있지' 하고 생각했어요. 앞이 안 보인다는 생각은 못하고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친구들이 책을 보며 깔깔 웃는데 많이 당황스러웠어요." ―언제 다시 장애를 깨달았습니까. "특수학교에 입학해 점자를 배울 때 알았어요. 선생님이 '너희는 앞이 안 보이니까 손으로 만져서 글을 읽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때 깨달았죠. 내가 친구들처럼 책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손으로 만져서 읽어야 하는구나, 나는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사실을요." ―왜 시력을 잃었는지는 언제 알게 됐습니까.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엄마가 기도하는 소리를 우연히 들었어요. '우리 아들이 열 오르는 줄도 모르고 잘못해서' 어쩌고 하는 내용이었어요. 처음 듣는 얘기였죠. 그래서 물어봤더니 비로소 가르쳐 줬어요. 엄마가 내 눈을 어떻게 해보려고 별짓을 다 했는데, 마지막에 안과에서 충격적인 말을 들었대요. 그때 의사가 '얘는 눈 암(癌)이고 열 두살까지밖에 못 산다'고 했답니다. 그 뒤로는 병원에 가지 않았대요. 고치기를 포기한 거죠." ―처음 접한 악기는 드럼이었죠. "초등학교 2학년 때 밴드반에서 드럼을 쳤어요. 아마 타고난 리듬감은 있었나 봐요. 학교 전체에서 제가 제일 잘 친다고 했었으니까요. 그때 드럼을 열심히 친 게 나중에 사물놀이 할 때 밑거름이 됐겠죠." 평생 기도한 엄마 고열로 실명한 날 두고 자책 병원 찾아다니고 굿 하고… 별짓 다하는 걸 의사가 말려 "얜 12년 밖에 못 삽니다" 다섯 살, 앞날이 캄캄 길 가다 나무에 부딪혀도 누구나 그런 줄 알았는데 친구들만 나 모르게 깔깔… 나만 다르단 걸 처음 알아 하모니카는 내 운명 김덕수 사물놀이패 시절 택시 안에서 우연히 들은 처연한 하모니카 발라드… 아이폰으로 강의 듣고 배워 안마시술소서 접을 뻔한 꿈 졸업 후 돈 벌 일이 없더라 술 취한 손님이 욕하면 열불이 터져 싸우고 맞고… 음악하려 이 악물고 일해 내 꿈은 '오디오 아티스트' 내달 60인조 오케스트라와 예술의 전당서 클래식 협연 세상 모든 소릴 배경으로 하모니카 독주를 꿈꾼다 ―사물놀이는 언제부터 했나요. "중1 때 북을 치면서 사물놀이를 시작했는데 장구 리듬이 북보다 훨씬 멋있게 들렸어요. 혼자 밤낮으로 열심히 연구해서 장구 채를 잡았는데, 얼마 안 돼 세종문화회관에서 국악관현악단과 협연을 하게 된 거예요. 그게 중 3 때였는데, 그 협연이 내 음악인생에서 대단히 큰 경험이었어요. 그전까지는 모든 걸 안 보이는 사람들끼리 했는데 처음으로 '앞이 보이는 사람들과도 앙상블을 이룰 수 있구나', '내가 해낼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을 강렬하게 받았어요." 하모니카를 불기 전 전제덕은 김덕수 사물놀이패에서 장구를 연주하던 국악계의 기린아였다. 그는 고1 때 '제1회 세계 사물놀이 겨루기 한마당'에서 특별상을 받고, 고교 졸업 후인 1993년 같은 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MVP에 뽑혔다. ―어떻게 하모니카를 쥐게 됐습니까. "1996년인가 택시 안에서 라디오를 듣는데 하모니카 발라드곡이 나오는 거예요. 아주 처연한 발라드였어요. 무척 아름다운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DJ가 "투츠 틸레만스의 곡"이라고 소개를 하더군요. 그래서 그 사람 음반을 닥치는 대로 사서 들었어요. 그리고 따라 하기 시작했죠." 그가 하모니카를 처음 잡았을 때 연습을 너무 열심히 한 나머지 하모니카가 한 달 만에 고장이 나서 못 쓰게 됐다거나, CD 한장을 1000번 이상 듣다 보니 CD가 망가져 더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는 얘기는 음악계에 잘 알려져 있다. ―하모니카의 어떤 점에 끌렸나요. "그전까지는 하모니카를 반주 악기로만 생각했어요. 원더 아저씨(스티비 원더) 노래 중에 '이즌 쉬 러블리(Isn't She Lovely)' 같은 곡엔 하모니카가 꽤 나오잖아요. 그런데 투츠 틸레만스를 듣고 나서는 하모니카가 독주 악기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밴드나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해도 전혀 밀리지 않는 소리를 가진 악기예요. 이제야 성사가 됐지만,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은 그때부터 줄곧 꿈꿔 왔지요." ―하모니카로 어느 경지까지 이를 수 있을까요.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을 들으면 바이올린이란 악기에서 그처럼 무궁무진한 소리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죠. 이것이야말로 바이올린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장영주의 바이올린과 이차크 펄만의 바이올린을 듣기만 해도 구별할 수 있어요. 어느 쪽이 낫다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의 바이올린에서는 각각 다른 소리가 나요. 하모니카가 그런 면에서 연주하기 어려운 악기일 수는 있어요. 나도 언젠가 파가니니의 바이올린처럼 하모니카를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음악은 내 절박함의 표현" ―성공한 장애인들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은 장애가 아니다. 단지…" "단지 불편할 뿐이다, 그거죠? 저는 그거 모두 개소리라고 생각해요. 불편한 건 불편한 거고, 어려운 건 어려운 거예요. 장애를 극복한다고 하는데, 극복이란 단어도 싫어요. 뭘 극복해요? 장애를 어떻게 이겨내? 장애는 불편한 거고 극복이 안 되는 거예요. 그걸 인정해야죠.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사람들이 제 손을 꼭 잡으면서 '아이고, 눈이 안 보이는 게 오히려 낫지. 세상에 얼마나 지저분한 꼴이 많은 줄 아느냐' 이렇게 말하는데, 젠장, '당신이 지금 당장 눈이 멀어 보시오. 그러면 지저분한 꼴 타령할 것 같아?' 이렇게 쏘아붙이고 싶어요. 마음의 눈인 영안(靈眼)을 떠라? 웃기는 소리예요. 두 눈 다 보이는 사람들이 눈먼 놈한테 영안 어쩌고가 할 소리냐고요. 연주가 좋았으면 '연주 잘 들었다'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럼 '장애를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왜 나옵니까.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거고, 기자들이 그렇게 포장하기도 하겠지요. 장애인이라고 하면 신문·방송에서 전부 성자(聖者)처럼, 헬렌 켈러처럼 만드는 게 못마땅해요. 특히 보수적인 언론들이 더 심해요. '더러운 세상 안 보니 좋겠다'는 말은, 장애를 완전히 대상화하고 타자화(他者化)하는 거죠. 장애인들에겐 아주 모욕적인 말이에요. 나는 장애를 극복한 게 아니라 절박함으로 음악을 시작했습니다. 시각장애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안 돼요. 침술, 안마, 피아노 조율, 맹학교 선생, 그리고 잘 되면 목사예요. 음악을 하지 않으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절박함이 내게 있었어요." ―요즘 불편하게 느끼는 건 뭡니까.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하려고 하면 이름 주민번호 다 써넣었는데, '하단에 있는 문자를 그대로 옮겨써라'는 게 있어요. 그럴 때 좌절하죠. 그게 안 보여서 그렇게 사소한 걸 누구한테 부탁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자잘한 것에서 화가 나고 힘이 들어요. 요즘엔 이동할 때 콜 택시 부르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전화 한 통이면 전부 배달해 줘요. 그런데 당장 눈을 한 번만 뜨면 해결되는 일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게 힘들죠. 악보도 마찬가지예요. 볼 수만 있다면 바로 해결되는데 볼 수 없으니까." ―하모니카를 언제까지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죽을 때까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남들이 보기 안타까울 때까지. 투츠 틸레만스가 부러운 게, 나이가 아흔인데 지금도 미국이니 브라질이니 다니면서 연주하잖아요." ―어떤 연주를 해보고 싶은가요. "지금껏 대중음악에서 하지 못했던 시도를 하고 싶어요. 좀 뜬구름 잡는 얘기 같은데, 이 세상 모든 소리를 음악으로 표현해보고 싶어요. 음악은 반주를 뒤에 깔고 솔로 악기나 노래가 앞에 나서는 게 보통이잖아요. 그것처럼 사람들이 떠들고 그릇이 부딪치고 걸어가고 하는 소리를 배경으로 하모니카 솔로를 해보고 싶어요.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를 했듯이, 오디오 아트를 해보고 싶은 거예요." ―지금까지 잘 살아온 편이라고 자평(自評)합니까. "그런 편이죠." ―그렇게 살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내가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더 악착같았다는 생각을 해요. 경우의 수가 많으면 생각도 많아지잖아요. 내 인생은 '이것 아니면 안 돼'라는 생각뿐이었어요. 나는 음악과 나의 장애를 바꾸지 않았어요. 내 장애는 장애이고, 음악은 음악대로 최고가 되고 싶었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절박하고도 합당한 이유가, 나를 오늘까지 끌고 왔어요." 오로지 음악만이 그의 삶에서 절박하고도 합당한 이유였다. 다섯 살 때 친구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처음 안 그는, 결국 친구들과 다른 사람이 됐다. 인터뷰가 뜨거웠던 것은, 그가 하모니카를 불어 인생이란 화로를 쉬지 않고 풀무질했기 때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