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독일어: Martin Luther 마틴 루타, 독일의 종교개혁가이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였으며, 훗날 종교개혁을 일으킨 인물이다.
본래 아우구스티노회 수사였던 루터는
거짓 평안(예레미야 예언자의 가르침을 인용함)이라고 비판했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했다.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 루터는 1517년 95개 논제를 게시함으로써
당시 면죄부를 대량 판매하던 도미니코회 수사이자 설교자 요한 테첼에 맞섰다.
1520년 교황 레오 10세로부터 모든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오직 성경의 권위를 앞세우면서 성서에 어긋나는 가르침들을 거부하였다.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도 마찬가지로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카를 5세로부터 같은 요구를 받았으나 거부함으로써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정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것으로 종교 개혁이 시작되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당시 종교와 사회에 큰 영향을 주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부패와 잘못된 교황의 권위에 항거하여,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논박하고,
성경이 지니고 있는 크리스토교 신앙에서의 최고의 권위와
크리스토에 대한 오직 믿음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통한 구원을 강조했다.
루터의 주장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크리스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Sola scriptura, Sola fide, Sola Gratia, Solus Christus, Soli Deo Gloria)이라는 표현으로 함축할 수 있다.
(다섯 솔라) 루터 본인은 자신이 ‘종교 개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종교 개혁이 하나님에게 이끌림을 받아, 할 수 없이 한 일이기 때문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복음주의자’로서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했고,
그러나 그의 삶 가운데 그가 행했던 일들은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개신교가 태동했을 뿐 아니라,성경번역, 많은 저작 활동, 작곡과 설교를 통해
사회와 역사가 크게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1483년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Hans Luder)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회의 타락을 묵인하지 않는 신념의 크리스토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에 부담을 느낄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진로문제도 자신의 적성과 흥미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정해야 했는데,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률가가 되게 하여 사회적 성공을 하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곳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법률가들만 모이는 단체다.
루터는 교양학부에서 삼학(三學, 라틴어: trivium)과 사학(四學, 라틴어: quadrivium)을
마치고서 1502년 9월 문학 학사학위,
1505년 1월 17명 가운데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루터는 예비학교를 마친 5월에 본격적으로 법 공부를 시작했다.
회심
루터가 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 하던 중,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7월 2일 슈토테르하임 인근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성 안나(성모의 어머니)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신부가 되겠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벼락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아들의 진로변경에 좌절을 느낀 부친의 분노어린 반대에도,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되었다.
루터는 죄인인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뇌했는데,
수도회에서는 루터가 비텐베르크 대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했다.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요한 폰 스타우피츠 교수는 루터가 성경에 대해 진지하게 공부하면 평안을 찾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루터를 성서학 교수 사제로 임명했는데,
이로 인해 루터는 신앙적인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
루터는 로마서, 시편, 갈라디아서 강의를 통해 의에 대한 개념을 새롭게 확립하게 되었다. 칭의란 오직 크리스토를 믿음으로 죄인이 의인으로 인정받는다는 교리다.
하나님의 의란 수동적인 것으로 하나님에 의해 은혜로 주어지는 의이며,
대표적으로 다음 구절을 들 수 있다.
중세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루터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라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다.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에 관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으로 설교 중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비텐베르크의 만성 교회문에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한다.
기존 교회와 본격적인 논쟁을 시작했으며, 이것이 종교 개혁의 시발점이다.
다만 루터가 논제를 교회에 게시했는지는 확인된 바 없다.
반박문은 루터가 수기한 후 인쇄해서 사람들이 읽었으며,
책으로 발간한 후에도 교회의 문 또는 인근에 이를 게시했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았다.교회 벽 게시를 최초로 거론한 사람은 필리프 멜란히톤이며,
루터 사후 자신의 저서에서 루터를 언급하며
반박문을 벽에 게시한 일에 관한 최초 기록이다.
1515년 루터는 10개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을 감독하면서
서신 교환과 방문 등을 통하여 새로 발견한 복음의 씨앗을 전파할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의 깨우침이 얼마나 급진적인지 알지 못한 채 계속
성서 연구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면죄부 논쟁을 계기로 그것이 공공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면죄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제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고백을 듣고 죄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 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는데
면죄부는 이러한 보속을 면해주는 증서였다.
그런데 면죄부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요 수입원이 되면서
교회는 면죄부 영업에 열을 올렸는데,
실제로 요한 테첼은 “금화가 헌금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천국 향해 올라가리라”고 신자들을 속였던 것이다.
그는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작센 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자
경계 근처에다 면죄부 판을 벌여 놓았으며,
성서도 적절히 인용하고 연옥에서 당신들의 부모가 고통을 받고 있다면서
감정에도 호소함으로써 순진한 신자들을 현혹하였다.
이러한 타락에는 교인들도 원인을 제공하였다.
실제로 중세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진지한 신앙생활보다는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죄의식을 면하려는 손쉬운 신앙생활을 좋아하였으며,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교회의 주장이
과연 성서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교구민들의 영혼을 염려하는 목회적 책임감에 움직여 루터는
이미 이전에 행한(1516년 10월 31일과 1517년 2월) 설교에서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고해 문제의 재고 요청들이 결국 실패하자 루터는
공개 논쟁을 요청하기로 결심하여 1517년 10월 31일, 제성기념일 전야에
95개 논제를 비텐베르크의 만인 성자 교회의 문에 내걸었다.
루터는 “우리의 주님이며 선생인 예수크리스토가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제1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제62조)이라고 역설하면서,
면죄부는 크리스토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제68조).
마지막 논제(제95조)에서 루터는 크리스토인은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고 결론내린다.
종교개혁
종교 개혁 운동은 로마 가톨릭의 문제를 논박함으로써 교회개혁을 주장하였다.
십자가의 신학을 이해하려면
먼저 루터가 말한 영광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파악해야 한다.
십자가의 신학
애당초 학자들간의 토론을 위해 내걸었던 95개 논제는
대량으로 인쇄되어 ‘마치 천사들이 전령이 된 것처럼’ 순식간에
전 독일로 퍼져나갔을 뿐 아니라, 전 유럽에 미치게 되었다.
95개 논제 발표후 5개월이 지난 1518년 4월에, 로마 가톨릭교회는 한 이름 없는 수도사의 주장 안에서 점차 비등하는 폭발력을 잠재우기 위해 그로 하여금 하이델베르크에서 열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독일 분회에서 자신의 신학을 소개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모임은 루터의 주장을 결코 억누를 수 없었다.
오히려 그의 바르고 강한 주장은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의 수도원 담을 훌쩍 넘어서
온 세상에 메아리로 번졌으며, 면죄부 판매 논쟁을 한층 더 고조시켰다.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십자가 신학’을 발표하여,
스콜라주의 영광의 신학,
즉 힘과 정복을 추종하던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신학을 비판하였다.
그의 십자가 신학은 인간은 구원을 받을만한 도덕적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던
영광의 신학을 부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을 주장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강조한
은혜의 신학이기도 하였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의 은신
카를 5세 황제는 루터에 대한 신분 안전 보장의 약속을 지키려 했다.
그래서 루터가 3주 이내로 비텐베르크로 돌아갈 것과 도중에 설교와 저술을 하지 말 것을 명령하였다. 루터는 아무도 모르게 동료들과 함께 보름스를 떠났다.
길을 가던 중 루터는 프리드리히 3세가 미리 주선한 대로 위장 납치되어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갔다. 여기서 루터는 게오르크 기사 행세를 하며 10개월간 지냈다.
한편 루터가 보름스를 떠난 후 황제는 보름스 칙령을 통해서 루터를 법에서 추방된 자라고 선언하였다. 이제 법적으로는 누가 그를 살해한다고 해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그의 가르침은 파리, 뢰번, 쾰른 대학교 신학부로부터도 정죄당하였다.
독일어 성경 번역
루터는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강제된 휴가’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알았다.
그는 이 기간을 성서 주석, 로마 가톨릭 학자들과의 서면 논쟁,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서는 1522년 9월에 출판되었기 때문에
‘9월 성서(Septemberbible)’로 불리게 되었다.
루터의 독일어 성서 번역은 독일 크리스토교인들을 교회의 권위에서 해방하고,
독일어 발전에 이바지한 신학적, 언어학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라틴어 성서였으므로 소수의 귀족과 성직자만이 읽을 수 있었는데,
성직자들은 이를 악용하여, 크리스토교인들을
자신들의 목회적 필요에 따라 조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루터가 고지 독일어로 성서를 번역하면서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게 되어,
독일 크리스토교인들은 성직자들의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성경을 읽고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루터가 성경 번역에 사용한 고지 독일어는 현대의 표준 독일어가 되었기 때문에,
루터의 성경 번역은 독일어와 문법이 통일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루터는 성경 번역을 훌륭히 수행하여
‘독일의 나이팅게일들이 로마의 방울새들 만큼 노래를 아름답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보여주고자 했다.
이것을 위해 보통 사람들의 언어를 사용하려고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슈팔라틴(de)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의 성서 번역의 원칙을 알 수 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번역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덕분에 빠르게 보급됨으로써
크리스토교인들은 성서를 성직자의 해석을 거치지 않고도
그들의 이성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는 성서를 축자영감설 등의 경전적 해석에서 벗어나, 사회학, 수사학, 사본들과의 비교, 역사 등의 학문적인 방법들을 이용하여 객관적으로 이해하려는 성서비평이 태동하는 거름이 되었다.
폭력 사용 반대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고 있는 동안
비텐베르크에서는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가 교회를 무력으로 개혁하려고 하였다.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세 명의 ‘츠비카우의 예언자들’도 합세를 했다.
성만찬에서는 그때까지 평신도에게 거부되었던 포도주도 제공되었으며,
혁신적인 예배양식과 예복이 도입되었고,
로마 가톨릭 미사를 거행하던 수도사들은 돌에 맞았으며, 성상들은 교회에서 제거되고 불태워졌으며 소요가 일었다.
루터는 믿음의 일로서 시작한 자신의 일이 오해받고 위협당하고 있다고 느끼자,
12월 중 비텐베르크를 비밀리에 방문하여 5일간 머물다 돌아갔다.
이 때의 느낌을 슈팔라틴에게 쓴 편지에서 루터는 저들이,
복음이 주는 자유를 강제 조항으로 만들었다고 비난하였다.
“ | 나는 어느 누구도 폭력과 피흘림을 가지고서 복음을 위해 싸우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말씀을 통해 세상은 정복되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구원받으며, 말씀을 통해 교회는 부흥한다. | ” |
소요가 계속되자 루터는 자신의 망명지를 떠나 1522년 3월 6일, 비텐베르크로 돌아와
교회에서 8일간 연속으로 설교하였다.
말씀만이 일을 해야 한다는 그의 원칙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안녕과 질서가 복구되었던 것이다.
개혁의 원리: 하나님의 말씀
루터의 종교개혁은 1517년-1520년 사이에, 로마 가톨릭교회와의 단절 과정을 겪었으나, 한편 개혁 진영 내부 세력들과의 차별화 과정도 겪었다.
먼저 안드레아스 카를슈타트, 토마스 뮌처, 농민들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과정들은 농민, 토마스 뮌처, 인문주의자들에게 루터가 외면을 받게 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급속한 발전을 막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했지만 ,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복음이 열광주의적 신비주의라든가,
인문주의적 계몽, 그리고 사회정치적 급진주의로 오해되는 것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과정들에 있어서 공통점은 루터가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성서가 정경화를 통해 등장하기 전에는 교회가 있었다는 이해에 따라
교회와 전통의 권위를 성서위에 올려 놓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
루터는 ‘성서만으로’를 주장하였고,
인간의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는 열광주의자들의 주관적인 계시이해에 대해서는
성서의 객관적인 말씀을 주장하였으며, 에라스뮈스의 인문주의에 대해서는
성서가 말하는 확실성을 주장하였고, 복음을 정치적으로 해석한 농민혁명에 대해서 복음은 오직 양심만을 상대한다고 하였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만 된다면 그 결과는 저절로 온다고 확신하였다.
“ | 나는 면죄부와 모든 교황주의자들을 반대하였으나 결코 무력은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설교하고, 썼을 뿐이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잠을 자거나 친구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de)와 함께 비텐베르크 맥주를 마시는 동안 말씀은 교황을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그 어떤 군주나 황제도 그 정도의 해를 입힐 수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말씀이 다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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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5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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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와 카타리나 폰 보라의 결혼식이 있었던
또다른 개혁의 날이라 할 수 있다.
사회 전방위로 퍼져 나간 루터의 개혁 정신은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영역까지 바꾸어 버렸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결혼 제도였다.
사제였던 루터는 마침내 결혼했고,
심지어 아내로 맞이한 카타리나도 수녀 출신이었다.
독신을 구원의 표상처럼 받아들며
부부간의 성적 결합마저 상스럽게 여기고 억압하던 중세에
사제와 수녀가 만나 결혼하는 것만큼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사건이 있었을까?
평범한 수녀 생활을 하던 카타리나에게 어느 날 루터의 개혁 운동 소식이 들려왔다.
카타리나와 동료들은 루터가 쓴 글도 읽게 되었고 그의 견해에 공감했다.
곧 그곳을 탈출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수녀의 신분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백방으로 연결하여 루터에게 자신들의 탈출을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그때 루터는 수녀원에 식료품을 배달하던 레온하르트 코페와 모의하여
탈출을 희망하는 수녀들을 돕기로 했다.
그리하여 열두 명의 수녀들이 무사히 탈출했고,
그중 아홉 명이 루터가 있던 비텐베르크로 오게 되었다.
비텐베르크로 온 수녀들은 돌아갈 가족이 없었던 탓에 루터의 고민 또한 깊어졌다.
그때 루터가 택한 방법은 그들에게 배필을 찾아 주는 것이었다.
다행히 수녀들은 차례차례 짝을 찾아 결혼했는데,
유독 카타리나만 그러지 못했다.
그때 카타리나가
루터에게 자신을 아내로 선택해 줄 것을 제안했다.
루터는 만인사제주의(성직자 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사제다.)를 주장하면서 성직자의 결혼에 대해서도 개방된 태도를 보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결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얼마간의 고심 끝에 루터는 카타리나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사제의 결혼과 부부간의 정당한 성관계를 옹호하던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오래도록 그에게서 후사를 바란 부모의 뜻을 받들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힘겨운 개혁의 노정에서 한 여인과 만남을 통해 위안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라도.
두 사람의 결혼은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종교개혁의 불길이 여전한 시절이었기에 루터의 상징성이 큰 데다가,
하필 결혼 상대자가 수녀 출신이라는 점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루터가 결혼하자 환호와 비난이 동시에 일어났다.
한쪽에서는 루터가 결혼을 통해 개혁의 정신을 완수하려 한다고 보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종교개혁이란 구실뿐이며 결국 결혼을 통해
음욕을 해소하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힐난했다.
이렇게 적지 않은 사연을 안고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은 이어졌다.
그런데 둘은 성정상 처음에는 썩 잘 어울리는 쌍이 아니었다.
루터는 마흔두 살 때 스물여섯 살의 아내를 맞이했다.
16년이라는 나이 차도 둘 사이의 친밀한 교류를 막는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다.
게다가 루터는 당시 평범한 남자처럼 여성을 조금 낮추어 보았고,
심지어 성질까지 급했다.
반면 젊은 아내 카타리나는 똑소리 날 만큼 영민하고 근면했으며
말솜씨 또한 일품이었다.
그러니 둘 사이에 처음부터 크고 작은 다툼은 일상이었다.
오죽하면 아내의 계속된 바가지에
루터가 악마 같은 여인네를 아내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소리까지 했을까.
하지만 루터에게 카타리나는 누구보다도 중요한 사람이었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루터는 대학교수로서 일정한 급여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루터 집안의 살림살이를 충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했다.
루터의 씀씀이가 남달랐기 때문이다.
루터는 제자와 지인을 늘 집으로 끌어들였고,
그중 몇몇에게는 무료로 숙식을 제공했다.
그의 식탁에는 늘 사람이 붐볐다.
이 모든 준비와 접대를 책임진 이가 바로 카타리나였다.
그는 묵묵히 이 모든 일을 챙기며 병약한 남편의 건강까지 지켜 낸 철의 여인이었다.
카타리나의 성실함과 살림 능력 때문인지 갈수록 루터 부부의 신뢰는 돈독해졌다.
말년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의 사랑은 꾸준히 무르익었고,
그 결실로 총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두 사람에게는 세 아들과 세 딸이 있었는데,
불행하게도 두 딸은 어린 나이로 명을 달리했다.
하지만 남은 자녀는 모두 무탈하게 성장했다.
카타리나는 주체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개척했고,
거침없이 남편감으로 루터를 선택하는 등 당시 여성으로서는 보기 드문 삶을 살았다.
카타리나의 그러한 당당함과 성실함은
루터의 개혁 운동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갈수록 카타리나에 대한 재발견 혹은 재해석이 힘을 얻어 가고 있다.
중세에 그만큼 주체적이고 자유롭고 열정적으로 살았던 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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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윤리 맞는 거룩한 가정 꾸려 세상을 성스럽게 하다
“건강한 가정 없이 건강한 영성이 가능할까”
이는 가정 사역자 찰스 셀의 질문이다.
영성이 관계성을 근거로 한다면 이 질문은 사실 피하기 어렵다.
그런 까닭에 루터의 길을 살펴 보면서 계속 궁금했던 것이
루터의 가정은 어떠했을까 하는 것이었다.
루터의 아내는 누구였을까. 루터의 가정은 행복했을까.
‘루터하우스’에 들어가자마자 질문의 답을 얻었다.
정원 입구에 루터 아내의 청동상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키는 크지 않으나 눈매는 매섭고 부지런한 듯 한 인상을 준 여자, 마치 바쁜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여 걷고 있는 것 같은 이 여인이
루터의 아내 카타리나 폰 보라(Katherina von Bora·1499-1552)이다.
우선 동상의 위치에 놀랐다. 루
터의 그 많은 유적들을 모은 박물관 앞에
카타리나가 마치 손님들을 맞이하는 느낌으로 서 있다.
누가 설계한 구도인가.
아마도 이는 이 집에서 루터가 35년간 살았고 또 카타리나와 결혼해
21년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루터가 아내의 동상을 만들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루터의 의도와 무관하게 만들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루터의 긴 개혁의 역사에서
카타리나와의 결혼만큼 중요한 사건은 없기 때문이다.
루터는 처음부터 성직자의 결혼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가능한 독신의 서원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리고 결혼으로 종교개혁이 방해를 받을까 염려했다.
실제로 그는 결혼으로 인해 로마교회의 많은 비판을 받았고
실제 상당수의 지지자를 잃기도 했다.
카타리나는 본래 수녀였다.
1523년 4월, 아홉 명의 수녀가 근처 수녀원에서 탈출하여
비텐베르크로 피신한 뒤 루터에게 보호와 도움을 요청한 일이 있었는데
그중에 카타리나가 있었다.
그는 본래 귀족 출신이었으나 가난했고 루터보다 15살 아래였다.
외모나 교양이 특출하지 않았으나 건강하고 총명하고 생각이 깊었다.
처음에 루터는 그를 다른 사람과 맺어주려고 했으나
카타리나의 마음은 처음부터 루터에게 있었다.
두 사람은 드디어 사랑의 결실을 맺어 1525년 6월 13일, 역사적인 결혼을 했다.
당시 루터의 결혼은 교회와 세상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그것은 1059년 라테란 회의에서 사제의 결혼을 금지한 로마교회 법을
정면으로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멜랑히톤이 루터보다 먼저 결혼했다).
교회역사의 처음 2세기까지는 교회 안에 독신제도가 없었다.
3세기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면서 자발적 독신운동이 일어났고
중세로 오면서 성직자의 독신주의가 의무화됐다.
초기 교회의 수도원 운동이나 중세교회의 성례전적 정결이
‘선행’이라는 믿음에 기초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혼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훨씬 더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선행적 사고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이다.
어거스틴의 원죄론도 독신주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거스틴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원죄는 성적 행위에서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가 결혼을 결심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중세에 널리 퍼진 미신적 신앙을 극복해야 했다.
중세인들은 배교한 수도사와 도망친 수녀 사이(영적인 근친상간)에서는
반드시 적그리스도나 장애아가 태어난다고 믿고 있었다.
과연 루터의 아이는 정상적으로 태어날 수 있을까.
다행히도(그리고 당연히) 루터의 큰 아들 요하네스(Johannes)는 건강하게 태어났다.
만약 루터의 아이가 장애아로 태어났다면 종교개혁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더 큰 핍박의 이유를 제공했을 것이다.
루터의 결혼은 다만 한 남자와 여자의 감정적 결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에 대한 응답이었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단지 교회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가정을 대표로 하는 세상에로의 부름이었다.
교회와 가정은 하나님 안에서 배타적 영역이 아니라
한 하나님이 다스리는 한 하나님의 나라였다.
독신주의가 개인을 ‘성인(聖人)’으로 만든다면 가정은 세상에 ‘성화(聖化)’를 가져온다.
이 믿음으로 가정을 이룬 루터와 카타리나는 21년간 같이 살았다.
그들의 집은 늘 사람들로 넘쳐났다.
방문이나 도움을 구하기 위해 온 수많은 사람들,
학생, 성직자, 동료, 고아가 된 친척, 방문객들에게
카타리나는 따뜻한 어머니의 환대를 제공했다.
카타리나는 자신의 네 아이뿐 아니라 고아가 된 6명의 친척 아이를 길렀고
1527년 비텐베르크에 흑사병이 덮쳤을 때는
자신의 집을 구호소로 바꾸어 그들을 치료하고 섬겼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여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딸 셋(두 딸은 어려서 죽음)에 아들 셋이었는데,
아들들의 이름은 한스(요한)와 마르틴, 파울이었다.
루터와 카타리나는 개신교의 목회와 윤리에 잘 맞는 이상적인 목회자 가정을 이루었다.
루터는 저녁식사이후 친구들 및 자녀들과 어울려 음악을 즐겼다.
독일어 및 라틴어 찬송과 세속음악을 함께 연주하며 불렀다.
그는 시, 회화와 모든 순수 예술을 좋아했다.
그는 음악을 신학 다음 자리에 두었다.
음악이야말로 우울증을 몰아내고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라고 생각했다.
루터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겼고, 나무와 꽃들을 사랑했고,
호기심 가득찬 눈으로 벌집을 관찰했다.
또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즐거워했고,
다시 찾아온 봄으로 젊음을 회복했고,
어디를 가든 자연을 지으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바라보았다.
루터는 집안일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모든 일을 현명하고 검소한 아내의 손에 맡겼다.
자신에 대해서는 태만하고 무심한 가장으로 평가했으나 아내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아내가 적은 소유에 만족하며 근검절약으로 가정과 자녀들을 돌본 것에 늘 감사했다.
그의 말년에 가정을 주신 하나님께 이렇게 감사했다.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거룩한 결혼보다 더 소중한 보물이 없다.
하나님께서 지상에 내리신 가장 큰 선물은 경건하고 활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가정을 지키는 아내이며,
그런 아내와는 서로 화목하게 살면서 재산과 몸과 생명을 맡길 수 있다.”
루터의 결혼은 어쩌면 그가 비텐베르크에 내건 95개 조항보다 위대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교회 안에 있었던 성직자 중심의 영성이
가정을 중심으로 세상에 퍼져나가는 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성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성화’를 위해서라면
반드시 가정을 가져야 한다.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변두리가 아니다.
창조의 완성이 가정이었듯이
종교개혁의 완성도 가정이었다.
루터의 긴 일정을 따라 가면서, 그리고 ‘루터하우스’를 떠나면서,
루터와 카타리나가 아름다운 가정으로 종교개혁을 완성하고
행복한 가정의 모범을 통해
훗날 모든 개신교 가정(훗날 쯔빙글리, 칼빈, 존 녹스 등도 결혼했다)의 귀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