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방미인 중에 명인없다"는 말은 대개의 경우 틀린 이야기가 아니지만 르네 데카르트는 그 중에서도 "특별한 예외"에 해당한다.
데카르트가 가진 지성의 힘이라는 것은 필설로 형용하기 힘들다. 무협소설식으로 따지자면 그는 소림과 무당,개방에 이르기까지 구파일방의 모든 절기를 한 몸에 두루 섭렵했고, 그 무공들의 화후중에서 입신의 경지에 이르지 않은 것이 단 하나도 없을 만큼의 초절정 고수였다. 우리가 이처럼이나 모든 학문에 박식하면서도 위대하고 독창적인 족적을 가진 팔방미인 대학자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데카르트 이전, 과거를 무려 2천년 가까이나 거슬러 추적해야 "아리스토텔레스'라는 거인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데카르트 이후로는 아직까지 그에 대등한 팔방미인이 나오지 않고 있다. "라이프니츠"가 거론되긴 하지만 그가 "당대 최고"의 반열일 순 있어도 아리스토텔레스나 데카르트처럼 "고금최고 중 하나"가 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부족해보인다.
데카르트의 학문적 이력을 들먹이면 많은 사람들은 극히 내성적인 성격에 썪은 골방냄새가 폴폴거릴거라 지레짐작하기 쉽겠지만 대답은 "천만에요 아니올시다"이다. 데카르트의 성격은 쾌활했고 우수한 펜싱실력과 뛰어난 댄스솜씨를 함께 보유했다. 학문밖에서도 팔방미인이었던 것이다. 데카르트는 "독신"을 지론으로 삼고 있었으나 즐기는 연애에 관해서라면 꽤나 개방적이었던 것 같다. 여성를 유혹하는데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그의 훌륭한 칼솜씨는 "찜"한 여성을 차지하기 위하여 연적과의 연인쟁탈의 결투에도 유용하게 사용되었다고 하니 이채로우면서도 부러운 인물이다. 그의 평생 골치거리이면서도 자신이 갈고 닦은 학문처럼 사랑했던 "호적"에 오르지 않은 딸 역시 바람둥이 데카르트가 만든 걸작이라면 고인에게 실례가 될 지 모르겠지만...
데카르트가 다른 학문에서 쌓은 업적은 놓아두고 물리학,수학 그리고 철학이라고 하는 학문중의 학문들이라 불릴만한 세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그리고 사실 나는 신학이나 법학 의학등 다른 분야에 관한 데카르트의 업적을 그저 말로만 들었을 뿐 책으로 접해본 바 없다고 사실대로 고백해야겠다.
"물리학자" 데카르트의 많은 업적 중 일부는 데카르트와 함께 무덤속에 묻혔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굳게 믿고 있었는데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을 살아 생전 경험한 세대이므로 제 자신의 물리학적 이론이 가진 종교적 위험성을 알아차릴만큼 현명했던 그가 어느 정도 교리에 위배되는 부분을 은폐했다고 보는 것이 정당하리라. 후세 학자들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그의 물리학적 이론을 발표한 경우라도 이 부담감 때문에 일부러 애매모호하게 표현했을거라 주장하기도 한다. 사실 데카르트는 열렬한 유신론자였다. 그는 그의 이론이 얼마든지 성경에 부합될거라 믿었다. 하지만 로마 교황청은 데카르트와 다른 생각을 가졌나보다. 그래서 그의 와동 우주론과 좌표 기하학 그리고 방법적 회의가 실려있는 위대한 "방법서설'을 금서목록 리스트 수위에 올려놓았다.
데카르트의 물리학적 업적을 이야기하는데에 있어서는 근대 과학의 집대성자 아이작 뉴턴을 연관시키지 않고서는 설명이 불가능할 것 같다. 뉴턴이 태어난 해는 갈릴레이가 죽은 1642년 이었고 그가 케임브리지 재학 시절 전유럽을 휩쓸고간 흑사병을 피해 고향으로 내려가 있었던 1665년에서 1666년의 기간 동안, 후일 미적분법의 소유권을 놓고 격한 감정 대립을 보였던 라이프니츠의 표현을 인용하자면 "아담에서 뉴턴 이전까지의 축적된 과학적 업적보다 더 많은 진보"를 이 1년 남짓의 시간내에 성취해 내었다. 자잘한 것들은 놓아두고 대충 큰 건더기만 건져내보아도 만유인력 법칙의 착상과 이항정리, 미적분법의 발명-비트겐슈타인의 수학관에 입각하여 나는 수학에 있어서 발견보다는 발명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리고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의 체계를 구상하였다.
뉴턴은 물리학자인 동시에 위대한 수학자였다. 유클리드와 아르키메데스,데카르트,오일러와 가우스 정도만이 수학에서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뿐이다. 그렇지만 어떤 난문제가 주어지면 이 문제에 대한 방법적 통로를 "통찰"하는데에 있어서의 순간적인 집중력에서 뉴턴에 대등한 수학자는 오로지 오일러 하나뿐이다. 그러나 오일러와 뉴턴은 그 색깔이 다르다. "미로찾기의 명수""희대의 알고리스트""수식 조작의 연금술사"로 불리는 오일러는 어떤 문제가 주어지면 기존에 존재해 있었던 알려진 법칙들을 가지고서 기가 막힌 모자이크를 하는 재능에서 고금 제일인자라면 뉴턴은 자기 스스로 방법적인 통로를 "창조"해낸다. 그 유명한 사이클로이드 문제는 유럽의 전 수학자들이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헛물을 들이키게했던 문제였는데 어느날 오후 이 문제를 받아든 뉴턴은 그날 저녁 가족과 즐겁게 식사를 하고 제시간이 되어 잠자리에 들었음에도 그 해답이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다음날 이 문제를 출제한 베르누이가 서명도 찍히지 않고 잉크자국조차 채 마르지 않은 이 답안을 보고서 단숨에 뉴턴의 작품이란걸 알아내고서는 대갈일성 "사자는 발톱만 보아도 안다"고 외쳤다. 뉴턴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고작 수시간동안 집중했을 뿐이며 수학에서 "변분법"-지금의 수학과정은 잘 모르겠지만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나는 변분법의 기초를 고등학교 2학년때 배웠었다.-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어내어 이 문제의 수학적 도구로 삼았다니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뉴턴의 최대업적은 근대과학의 "집대성"에 있을 것이다. 그의 유명한 주저인 "원리"-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를 뜻하는데 흔히 프린키피아라는 영어를 쓰지만 나는 원리라는 말을 더 좋아한다.-의 고무적인 면은 새로운 법칙을 창조해내는 것 보다는 그 이전 위대한 선배 과학자들이 일구어놓은 근대 과학의 건축자재들을 가지고 "반석위의 집"을 만들었다는데에 있다. 알려진바 운동의 세가지 법칙 중 뉴턴 자신이 발견한건 세번째의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하나이다. 그러나 뉴턴은 이 세가지의 기초자재만을 가지고서 전우주를 완전히 "기술"했다. 그건 "가설"이 아니라 "기술"이다. 우리는 "나는 가설을 세우지 않는다"라는 그의 말에서 일종의 낭만적인 자부심을 느낀다. 원리의 위대한 점은 자신이 개발한 미적분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고 직접적으로 만유인력을 언급하지도 않았다는데에 있다. 한마디로 과거의 물리학의 지식들만을 가지고서 공전절후한 이론적 "체계"를 만든 것이다. 그는 정말로 진인이었다.
아이작 뉴턴-근대 과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뉴턴의 세가지 기초자재중 첫번째 주춧돌에 해당하는 운동의 제일법칙인 "관성의 법칙'을 최초로 구체화한 인물이었다. 그리고 데카르트 역시 뉴턴처럼 전우주를 하나의 체계 안으로 포섭하려는 획기적인 시도를 구상했었다. 흔히 "와동 우주론"이라고 불리우는 데카르트의 우주관은 "원리" 2권에서 뉴턴이 일정 지면을 할애하여 치명적인 반론을 전개할만큼 당대에는 영향력이 있었으나 대부분 거짓인 것으로 판명이 났던 모양이다. 그러나 그 내용의 가부를 떠나서 데카르트의 기획은 참신하고 대담하며 급진적이었다. 적어도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초지능이 아니라면 언감생심 불가능했을, 그러니까 당시 시대의 정황으로 미루어보건대 한 사람의 물리학자가 주장할 수 있는 최고 품격의 이론이었다. 소용돌이치는 우주 모델을 건립하는데 있어서 그에게 주어진 조건이라고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갈릴레이와 케플러가 일구어낸 단편적인 물리학 체계 뿐이었던 것이다. 단지 결과만을 가지고서 데카르트의 물리학을 평가하기에는 그의 발상이 너무나 아깝기만 하다.
"수학자" 데카르트의 영향력은 지대하고 또 지대하다. 우리는 그에게 흔쾌히 "근대 수학의 개조'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아무런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 데카르트는 위대한 아이디어로 수학에서의 중세와 근대를 분기했다.
데카르트의 다른 모든 수학상의 업적을 놓아두고 그의 "좌표 기하학"에 관해서만 이야기해보자. 우리는 "음수"에 대한 현실적인 개념을 갖고 있지만 사실 음수의 개념은 데카르트가 좌표로 현실화하기전까지만 해도 하나의 뜬구름에 불과했다. 도대체 "마이너스 두개인 사과"라는 개념이 우리같은 평범한 두뇌로 감이나 잡혔겠는가? 데카르트는 아주 쉽고도 눈에 확 들어오는 기막힌 착상을 하였다. 직선을 그은 후 그 중간에 0을 위치시키고 왼쪽으로는 음수를 오른쪽으로는 양수를 위치시켰다. 오늘날 초등학생도 이 데카르트의 일직선 좌표계의 위대한 단순명료함에 기인하여 "음수"에 관한 "현실적인 감각"을 가질 수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데카르트 불멸의 걸작은 x축과 y축을 수직으로 교차시킨 "2차원 평면 좌표"였다. 그러나 그것의 의미는 단순한 평면 이상이었다. 우리는 차원이 하나씩 증가할 때마다 좌표축을 하나씩 더 추가하기만 하면 차원을 "확장"할 수 있다. 오늘날 4차원 이상의 고차원에 대한 지식을 다루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데카르트의 아이디어는 결코 없어서는 안될 실용적 도구이다. 누군가의 표현에 의하면 "외발 뜀뛰기"의 n차원으로의 유비가 데카르트에 의해 가능해진 것이다. 그 뿐인가 하면 평면좌표의 한 축을 실수부로 한 축을 허수부로 교차시킨 수직좌표는 "허수"에 관한 실의미를 부여하게 만들었다. 허수는 결코 이상한 나라의 도깨비 개념이 아니다.
좌표기하학의 가장 위대한 점은 "대수학"과 "기하학"을 통합함에 있었다. 데카르트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그리스 수학의 본질이었던 기하학과 오리엔트 지방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대수학은 너는 너 나는 나라는 식의 따로국밥꼴이었으나 데카르트의 혜안은 이를 완벽히 하나의 체계아래로 포섭했던 것이다. 데카르트 이후로 그 어떤 "대수방정식"도 좌표로 그려질 수 있었고 그 역도 가능해짐을, 적어도 중등교과 과정을 착실히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동의할 것이리라. 쉽게 얘기해서 "수식"과 "도형"은 서로 연결된 하나의 전체로 자리매김되었다. 그 결과 수학은 말할 수 없이 단순해지고 명쾌해졌다.
데카르트의 아이디어가 별게 아니라는 사람은 지금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코흘리개를 간신히 면한 학생들도 순식간에 풀 수 있는 수학 참고서의 아주 초보적인 집합론 문제를 하나 끄집어내 보자. 아마 이 문제를 푸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담배 한 개비를 피울 시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데카르트를 생각하면서 "벤 다이어 그램"을 사용하지 않고 이 문제를 풀 수 있는지를 확인해보자. 식은죽 먹는 것보다 더 쉬워보이는 문제가 순식간에 정말로 풀기 어려운 난문제로 돌변해있을 것이다. 수식을 도형으로 도형을 수식으로 바꾸어 풀 수 있다는 데카르트적 사고방식이 보여주는 빙산의 일각도 되지 못한 사례이긴 하지만...
데카르트가 제기한 문제 중에서 수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악성 난제"가 하나 있다. 1과 제 자신만을 약수로 갖는 수를 우리는 "소수"라고 부른다. 예컨대 2와 3,5,7,11같은 수를 말하는데 데카르트는 2이상의 모든 짝수는 두 소수의 합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놀라운 예측을 제시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어, 이건 데카르트의 문제가 아니라 골드바흐 가설인데?" 라며 의구심을 표할 것이다. 이 문제가 "골드바흐의 가설"이 맞긴 맞다. 하지만 이 문제의 최초 입안자는 데카르트였고 이 문제가 학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것은 평범한 수학자 골드바흐가 당대 제일의 수학자 오일러에게 보낸 서신때문에 비롯되었기에 골드바흐의 가설로 명명된 것 같다. 사실 데카르트나 오일러는 수학적 업적에서 본다면 이 정도의 양보쯤을 골드바흐에게 해 주어도 대동강에서 물 한 바가지를 덜어 주는 정도 밖에는 안 될 정도의 손해 밖에는 없을 것이니, 수학적 극빈자인 골드바흐에게는 정말로 감사한 일이라 하겠다.
그리고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 역시 이 난제에 도전한 기억이 있다. 이 도전에 직면해서 가장 먼저 깨달은 건 임의의 2n(모든 짝수는 2의 배수이므로)과 n사이에 적어도 하나 이상의 소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먼저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어느 학창시절 겨울방학 동안 내가 느낀것은 내 수학적 무능에 대한 일종의 주제파악이었다. 나는 단 한걸음도 나갈 수가 없었다. 후에 안 일이지만 이 증명조차 데카르트 이후 거의 300년이 흘러서야 해결을 볼 수 있었던 난문제였다 이 증명의 가장 세련된 형태의 것은 내가 알기로 자국의 지폐에 초상화가 실려있는 유일한 수학자, 인도의 "스리니바사 라마누잔"이 만든 것이다.
라마누잔 이야기는 동화처럼 재미있어서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귀동냥으로나마 이 20세기 최고의 수학천재에 대한 일화를 단편적으로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요즈음 다시 새롭게 각광받고 있는 수학자이기도 하다. 20세기 후반부부터 물리학계의 혁신적 이론으로 대두한 "10차원 초끈 이론"의 방법적 도구로 라마누잔의 노트속에서 발견된 어떤 특정한 함수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중력을 계산하는데에 편미분방정식이 필수적이듯이 말이다.
데카르트와 같은 나라 동시대인이었던 "피에르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는 영국의 앤드루 와일즈박사에 의해 해결되었는데 골드바흐의 가설은 아직 미해결인채로 남아있다. 내가 알기로 이 흉악범에게 걸린 현상금은 이제까지 최고액으로 당첨된 로또 상금을 능가한다. 자신의 수학적 재능을 믿는 사람이 일생을 걸어봄직 만한 문제이다. 물론 그 후유증 역시 장담하지 못하지만...
데카르트는 프랑스 투르 근처의 라에이에서 1596년 3월달에 태어났다. 매우 흥미있는 것은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이전의 일도 또렸이 생각난다고 하는 믿기 어려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자궁안과 탯줄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고 자신있게 주장했다. 대개의 사람은 이 말을 믿지 않지만 그가 일구어낸 업적을 보아서는 "그럴 수도 있는 일"이겠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귀족이었다. 귀족이 가지는 특권이라야 별 게 아닌걸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사실 지배계급이 누렸던 기득권의 혜택은 무시못할 것이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자면 조선시대의 양반들은 오늘날 국민의 의무중 첫번째와 두번째를 차지하는 "납세의 의무"와 "병역의 의무"에서 아예 열외되어 있다. 세금을 안 내고 군대도 안간다는 것이니 오늘날로 따지자면 "처 죽일 것"들이 바로 양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민들이 내는 세금에 편승해 배를 채웠던 양반을 조상으로 둔 사실에 기뻐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것이 이 땅의 현실이다. 이상한 것은 조선시대 전체 인구의 10%도 되지 않았던 양반이 지금에 와서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두 양반의 족보를 가지고 있으니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우리의 신분제 사회가 붕괴된 것이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서인데 불과 100년만에 전 인구가 양반이 되었다니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다. 데카르트는 이런 식의 웃기는 귀족이 아니라 순수한 귀족 혈통이었다.
귀족 데카르트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지만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라플레슈에 있는 예수회 재단의 고급 학교에서 정통 코스에 의한 엘리트 교육을 받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유클리드의 기하학, 키케로의 수사학을 비롯하여 당시 학문용어였던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소화하는데에 있어서 이 소년을 방해할 거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비록 몸이 허약하여 다른 학생들보다 침대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이 학교를 졸업할 18세쯤 되어서는 당시 유럽에서 성행했던 전 분야의 학문에 관한 최신 모델의 전 이론이 그의 머리에서 차분히 정리되어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 때 이미 최고 학자의 반열에 올라 있을만큼 박학했다.
이 매력적인 청년은 이 시기 잠시 외도를 한다. 물려받은 귀족의 특권과 부유한 재산, 그리고 명문학벌을 갖춘 젊은 데카르트는 오늘날로 따지자면 '압구정동 오렌지족"쯤이 될 만큼의 유흥문화에 탐닉했다. 그렇지만 이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학문에 관한 데카르트의 열정이 너무나 집요했기 때문이다. 그는 화려한 유혹을 뒤로 한채 전원적 향기가 물씬거리는 교외로 거처를 옮겨 학문에 몰입했지만 과거의 이력이 탈이 되었다. 머리속에 든 거라고는 오직 말초적 쾌락밖에는 없었던 오렌지 시절의 친구들이 데카르트의 재능을 탐내어 틈만나면 자신들이 향유하는 소모적인 향락문화에 이 박식하고 신사적이었던 데카르트를 끌어들이려 한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내렸던 최후의 결론은 "군대"로 피신하는 것이었다.
전해진 바에 의하면 데카르트는 일급의 전투력을 지닌 용맹무쌍한 군인이었다고 한다. 더구나 귀족의 신분이었음에도 처음부터 사병의 길을 택한 우리 나라의 군가마냥 "멋있는 사나이!"였다.
그의 나이 스물 세살이 되던 초겨울 다뉴브강 근처의 노이부르크에서 데카르트가 소속된 부대 전체가 휴식을 취하고 있었을때 새벽에 꾸었던 세가지 꿈은 그 자신 뿐만이 아니라 이후 인류의 지성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을 하나의 분수령이었고 "판도라의 상자"였다. 이 꿈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은 분분하다. 프로이트 학파조차 이 꿈을 다루었으니까 말이다. 이 꿈의 내용이란 것은 보잘 것 없어보인다. 전체적으로 이야기해보면 음습한 기운의 바람에 데카르트가 날아가버리지만 그가 깨달는 것은 이 바람이 데카르트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걸 느꼈다는 내용이 이꿈의 대강적인 줄거리이다. 우리에게는 그저 개꿈으로 비추어질 평범한 꿈이 데카르트에게는 모든 학문적 진리의 기초가 되는 열쇠가 주어진 상징이 되었다고 한다. 데카르트가 비유적으로 표현한 이 열쇠에 대한 해석도 가지가지이다. 예컨대 수학자 데카르트에 무게를 두는 사람은 이 열쇠가 "좌표기하학"일 것이라 추정하고 철학자 데카르트를 배려하는 사람에게는 그의 위대한 철학체계를 가능하게한 "방법적 회의"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한 것 같다. 이즈음 데카르트의 학문적인 능력은 그의 인생에서 최절정기였으며 좌표기하학과 방법적 회의는 물론 와동 우주론까지 그 시기에 그의 머리속에서 거의 정리되었거나,아니면 최소한의 단서라도 잡혔을거라는 부인 못할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업적을 학계에 알린 것은 그로부터 거의 20년이 다 되어서였다.
서른 여덟살에 탈고가 끝난 "우주론"은 죽기까지 그의 서랍속에 있었고 그의 주저 "방법서설"이 세상에 나온 것은 또 그 이후로 3년 뒤였다. 정확히 1637년 6월 8일 이날은 바로 학문에서의 중세가 끝나고 "근대"가 시작된 날이다. 데카르트가 두려워한 것은 그의 돈독한 신앙심에도 불구하고 무신론자로 낙인찍힐 수 있다고 여긴 자신의 이론에 대한 급진성때문이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학설과 신의 존재가 양립할 수 있음을 추리할 뛰어난 지능을 가졌지만 이론의 표피만 살펴볼 무식한 성직자들은 그럴만한 두뇌도 인내심도 없다는 것을 데카르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데카르트는 군복무를 마치고서는 주로 네덜란드의 에그문트에 정착해 살았다. 그 사이 그의 명성은 지극히 높아져서 유럽의 저명한 지식인들은 그와의 친분을 자랑으로 삼았고 데카르트 역시 그들과 많은 서신 문답을 보내었다. 그는 엘리자베스 공주의 스승으로도 이름을 날리는등 세계적인 명망을 얻게되었고 데카르트의 학문세계를 접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은 무한한 존경심을 느껴 그를 자신의 "황사"로 맞아들일 결심을 한다. 본래부터 추위에 약했던 데카르트는 북구의 동토로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아 처음에는 이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지만 여왕의 수개월에 걸친 "삼고초려"는 유럽 최고의 지식인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녀는 데카르트를 위해 군함까지 호위로 딸려보내었다.
결론적으로 데카르트의 스칸디나비아행은 비극을 결과했다. 새벽잠이 많고 피부가 연약한 데카르트에게 여왕이 배정한 강의 시간은 새벽 다섯시였다. 이 시간은 가장 추운 시간대이며 오랜 늦잠을 신체 리듬으로 간직한 데카르트로서는 초인적인 인내심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슬프게도 오십이 넘은 그에게는 이런 초인적인 참을성이 남아있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재기불능의 치명적인 독감에 의한 폐렴으로 1650년 조국 프랑스와 한참 동떨어진 스웨덴의 스톡홀롬이라는 이국땅에서 아쉬운 일생을 마쳤다.
데카르트의 일생을 요약하고 나니 이제 남은 건 그의 철학적 발자취를 살펴보는 한 가지뿐인 것 같다.
데카르트에게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최초로 부여한 사람은 철학사에서 악명적으로 난해하게 글을 쓰기로 따지자면 거의 필적할 사람이 없는 "헤겔"에 의해서였다. 만일 상습적인 불면증으로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자연적인 수면제로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권할 것이다. 헤겔은 이것 저것 쓸어담아 하나의 밥그릇에 넣어 비비는 재주를 하늘로부터 타고난 것 같다. 그의 평가는 극과 극의 두가지다. 그가 만든 비빔밥을 개밥 취급하는 무리들과 일급의 전주 비빔밥으로 평가하는 두 부류이다. 어쨌거나 헤겔 이후 지금까지의 그 누구도 데카르트의 이 지위에 대해서는 결코 토를 다는 사람이 없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 하겠다.
데카르트는 철학이란 학문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수정궁의 토대 아래에서 정초되어야 한다고 믿었고 그러기에 의심 불가능한 종국적인 확실성을 가진 지식을 찾는 것을 "제일철학"이라고 생각했다.이리하여 데카르트가 가지는 철학의 첫번째 방향은 "인식론"으로 정해지고 인식론이야말로 이전까지 제일철학으로 치부되어온 형이상학, 또는 윤리학보다 우선적으로 논구되어야 하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게 된다.
확실한 지식을 얻는 방법으로 데카르트가 선택한 방법은 조직적이고 철두철미한 "회의"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는 우리가 지식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일단 의심이 정지되는 시점까지 철저히 의심해보는 그만의 노하우로 제일철학의 논의를 시작한다. 우리들이 지식을 얻는 방법은 아마도 크게 두 가지뿐인 것처럼 보인다. 첫째는 "경험"으로 얻는 방법으로 이를 테면 나의 시각에 붉은 장미가 보인다면 나는 장미의 색깔에 관한 경험적 지식을 얻는다. 그리고 두번째는 "추리"에 의해 지식을 얻는 방법이다. 예컨대 오늘 인천에서 부산까지 가는 여객선이 오직 한 척뿐이고 그 배에 나의 사랑하는 남편이 승선했는데 저녁 뉴스를 보니 그 객선이 침몰해 전원 사망했다는 속보가 전해졌다면 나는 통곡을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나는 내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직접 전해듣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남편의 죽음을 한척의 객선,전원 사망등의 자료를 가지고 "추리"를 통해 알아내었다. 아주 쉬운 일 같지만 이런류의 사고를 할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는 없다. 또다른 예를 보자. 어떤 마을 안에 철수와 영희 이외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는데 오직 이것만을 가지고서 나는 그 마을에는 두 명의 사람만이 산다는 사실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 이것도 아주 쉬운 일 같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사고의 힘이다. 객선의 경우 우리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원칙이라고 하는 "전체 개무율"-전체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부분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삼단논법의 대전제-이란 이름의 논리학의 법칙을 사용했고 나중의 경우는 1+1=2 라고 하는 수학의 원칙을 사용했다. 수학과 논리학을 통틀어 "형식학문"이라고 말하는데 형식학은 추리의 뼈대이며 골격이다.
데카르트 역시 인간의 지식이란 이 두 가지 부류밖에는 없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리하여 데카르트가 최초로 의심한 공격물은 "경험"에 의한 지식,그 중에서도 우리 감각기관에 일차적으로 나타나는 직접경험을 향해 전투의 포문을 열었다. 감각은 때때로 실수를 한다. 예컨대 우리는 먼 곳에서 보라색의 꽃을 보았다고 느끼지만 실제 가까이서 본 그 꽃의 색깔은 붉은 색일 수 있다. 심지어는 그것이 꽃이 아니라 열매를 착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까이서 붉은 꽃을 명확히 보고 있다고 자신해도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절대적 보장이 없다. 더구나 이를테면 간교한 악령이 있어 실제는 노란 참외를 붉은 장미로 보이게끔 우리의 감각을 기만한다는 상상을 해보라. 이리하여 감각을 통해 얻은 경험적 지식은 데카르트가 가진 회의의 십자포화를 맞고 절대성을 상실한채 도주할 수 밖에는 없는 입장이 되었다.
데카르트의 두번째 목표물은 추리의 근간이 되는 형식학의 지식들이었다. 데카르트는 수학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2=4 라는 것은 꿈에 나타난다고 해도 사실이다. 그러나 "꿈"이라는 장애물을 넘을 수 있을지 몰라도 "악령"이라는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는 건 감각적 지식과 마찬가지이다. 사악한 악령은 내가 더하기를 할 때마다 잘못 계산하게끔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다면 옳은 수학적 지식도 틀릴 수 밖에는 없다.데카르트가 언급하지 않았지만 논리학의 지식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지식을 얻는 두 가지의 통로 모두를 꿈이 아니면 악령의 고의적인 장난에 의해 매도당할 수 있다는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알아차린다.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인가? 데카르트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것이 꿈이건 악령의 수작이건 이 지식이 의심스럽다고 반성하고 묻는 존재인 "내"가 존재해야만이 무슨 회의이든 가능한 것이라고 데카르트는 주장한다. 즉 꿈을 꾸는 나이거나 지금 악령의 속임수에 넘어가고 있는 내가 있어야 이 모든 것이 성립될 수 있다. 회의하는 사유는 그 회의하는 사유를 가진 "내"가 존재한다는 전제하에서만 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저 유명한 코키토는 이제 절대로 의심될 수 없는 데카르트 철학이 가지는 "아르키메데스의 제일점"이 되었다.
방법서설의 1637년 초판
그렇다면 "나"는 어떤 존재인가? 물론 사유하는 존재이다. 여기에서 나는 순수한 정신적 존재를 의미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육체는 원래 아메바처럼 생겼을 수도 있는데 악령의 교활함에 의해 나의 시각은 그것이 아메바가 아니라 지금의 모습으로 혼동되게끔 우리를 잘못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데카르트는 엄격한 심신이원론을 확립한다. 의심할 수 없는 나의 정신과 의심될 수 있는 나의 육체는 각각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한편 내 자아의 확실성에서 데카르트는 곧바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의심을 하는 존재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아의 "완전한 확실성"이 결과될 수 있는건 완전하고도 확실한 그 무엇이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기에 가능할 것이다. 그 존재는 다름 아닌 신이다. 그리고 신의 존재에서 다시 예전에 의심했던 지식들을 제 위치로 복원해 놓는다. 완전하고 확실한 신은 선한 존재이다. 그 이유는 악한 것이 완전함에 부합될 수 없는 개념인 탓이다. 선한 신은 당연히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예전에 의심했던 경험적 지식이나 형식적 지식 모두 의심하고 있지 않을 평상시에는 그걸 믿으려는 강한 경향성을 가졌다. 신은 이 인간의 자연스런 강한 경향을 옳은 것이라 인정했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속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리하여 모든 지식은 다시 구축되고 신과 나의 존재도 함께 성립된다.
방법적 회의 외에도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는 여러가지 이론이 나오지만 그 중요함에서 이 방법적 회의에 비교될 수는 없다. 참고로 말하자면 방법서설의 원제목은 "이성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학문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방법에 관한 서설, 그리고 그 방법에 의한 시론으로서의 광학,기상학,기하학"이라는 길고도 긴 이름을 가진다. 아마 그 시대는 이렇게나 늘어진 제목의 글이 유행이었나 보다. 이 책은 라틴어로 쓰여진 일종의 에세이 형식이었다. 문체는 눈에 보이는 일인칭 시점으로 문학적으로도 아름답다고 말한다.(라틴어 원문을 해독할 능력이 없는 나로서는 어찌 평가해야 할 지 모르지만) 러셀처럼 삐딱한 냉소주의자가 그가 노벨 문학상을 받는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대저 "서양철학사"에서 데카르트를 일컬어 우리는 이렇게나 문학적인 사람을 근대 철학의 시조로 둔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는 개인적 견해를 피력할 정도이니 명문장의 부류에 들어가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데카르트의 인상적인 의심의 방법와 그에 의해 도출되는 결론은 옳은 것일까? 잘라 말해서 제대로 되었다고 인정되는 건 단 하나도 없다고 봐야함이 정당할 것이다.
우선 인간의 자연적인 경향이 신의 선함과 같은 맥락이란 것은 이상하게 보인다. 기독교의 입장은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성악설"쪽이다. 우리는 죄를 지을 수 밖에 없는 속성을 아담의 원죄에서 타고났기 때문이다. 순자는 말하기를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부족한 부분을 메꾸려는 욕망을 타고난다고 한다. 이를테면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찾고 가난하면 돈 벌기를 원한다. 그래서 선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의 경향과 신의 선성을 결부시키는 것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어 보이지가 않는다.
한편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데에 있어서 원인론적인 증명과 존재론적 증명을 교묘히 결합했는데 지금 신앙을 가진 사람치고 "논증"으로 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경에 쓰여진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진복자"라는 말을 상기해보자. 후기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빌리자면 이성으로 무엇을 증명하는 언어놀이와 종교의 언어놀이는 "룰'이 다른 언어놀이이다 신의 존재는 신을 경배하는 자의 무조건적이고 전적인 "믿음"으로 그 뿐이며 여기에 합리적 이성이 끼어들 공간은 추호도 없을 것 같다. 만일 그 누군가가 논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반증하는 말을 한다면 비트겐슈타인은 "언어가 공회전"하는 대표적 사례로 간주할 것이다. 그건 반의미적이다.
완전한 신이 "원인"이 되어 내 완전성의 개념을 "결과"해 준다는 건 모든 것에는 원인이 있다는 이른바 충족 이유율이 필연적으로 옳을 경우에만 참이다. 그러나 현재의 양자이론의 유명한 "불확정성 원리"는 인과관계에 대한 끈을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건 필연적인 참이 아니라 다만 통계학적이고 확률적인 값일 뿐이다. 데카르트 이후에 등장한 "흄"은 그의 파괴적인 "원인과 결과의 분석"에서 인과관계는 단지 개연적일 뿐이라는 충격적인 주장을 했으며 그의 분석은 내가 보기에는 전적으로 옳다. 존재론적 증명이란 완전함의 "개념"에서 존재를 이끌어내는 것이다. 즉 완전하다는 것은 존재하는 쪽이 그 반대보다 완전성에 가깝다는 것인데 칸트는 존재론적 주장을 금고의 비유로서 비꼰다. 금고에 현찰이 들어있는데 그 액수만큼 꼬리표를 달아 금고밖에 붙여둔다고 가정하자. 칸트는 말하기를 내가 그 꼬리표에 0을 수십개 더 적어놓는다 해도 금고 속의 현찰이 더 늘어난다고 생각하는건 어리석다고 일침한다. 존재라는 현찰을 가져와야지 꼬리표라는 개념은 필요없다는 뜻이리라. 나는 완전하고 확실한 일곱발 달린 새의 개념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 칠족조는 존재한다는 추리는 가당찮은 것이다.
데카르트의 회의는 이상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만일 데카르트가 조금 더 일관적이게 회의를 밀고 갔다면 그 회의는 "자기파괴적"이다. 예컨대 그의 눈에 보이는 붉은 장미를 악령에게 농락된 감각의 환영이었다고 가상해보자. 그는 자신이 회의하는데에 있어서 사용한 "붉다" 또는 "장미"라는 단어가 실제 회의에서 쓰여지고 있는 그 개념 그대로 문장의 용도에 맞게 제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를 먼저 의심해보아야 한다. 심지어는 "의심" "회의"라는 단어까지도 "내가 이 뜻을 확실히 알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이런식으로 계속하다보면 회의하는 것 자체가 산산조각나게 되리란걸 알 것이다.
만일 러셀의 "유형이론"을 신봉하는 사람에게라면 위의 반론은 의미가 없을 지 모른다. 유형이론에 의하면 자기지시적인 문장은 규칙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는데 그런 맥락에서 "회의 자체를 의심하는 회의"란 자기지시적인 회의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가 대답해야 할 반론은 아직 두 가지가 더 남았다.
우선 경험론자들의 반론이다. 여기에 보이는 붉은 장미가 악령의 간계에 의한 환상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원래는 노란 참외인데 내가 그걸 착각하여 보고 있다고 가정해도 좋고 설사 꿈이라고 상상해도 좋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지금 내 감각에 "붉은 장미"로 보인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고 데카르트에게 묻는다. 그것의 본래 속성을 놓아두고 일단 나의 감각에 "붉은 장미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이 설령 노란 참외라 한들.
두번째의 반대는 조금 더 결정적이다. 흔히 "자아의 동일성"내지는 "자아의 지속성"문제라고 불리우는 것으로 흄의 치명적인 공격을 데카르트는 방어해야 한다. 즉 어제 저 사람이 비트겐슈타인인지를 의심하는 나와 오늘 이 축구팀이 아주리 군단인지를 의심하는 내가 "동일한 존재"라는 것을 어찌 증명할 수 있겠느냐고 흄은 질문한다. 데카르트는 자아의 동일성을 회의의 대상으로 고려하지 않고 옳은 것으로 은연중 전제하고 나서야 논의를 시작하는 것 같다. 이것은 분명 모든 것을 의심해본다는 그의 취지에서 열외되어 있다. 그리고 회의하는 사유의 주체가 "나"라고 단정짓는 이유 또한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악령이 존재한다면 타인의 정신이나 사유를 가지고도 그게 내 사유인 것처럼 위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엄격히 분리된 심신이원론은 물론 아주 잘못된 것이다.우선 그는 내 생각대로 움직이는 내 다리에 대해서도 설명하지 못한다. 도대체 어찌하여 범주가 다른 두 종류의 것이 그렇게나 즉각적이고도 자명한 인과관계를 갖는 것일까? 데카르트가 도입한 가설은 "송과선" 즉 심신을 연결하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송과선은 정신적인가? 물질적인가? 오늘날 일반적인 의미로서 "데카르트 주의"가 뜻하는 바는 심신이원론자를 통칭해서 쓰이는 개념이다. 흄은 정신도 물질도 모두 버리고 "중성적인 지각"에 의해 정신과 물질을 "구성"하며 경험론의 전통을 따르는 철학자들은 대개의 경우 이 노선을 따른다. 그리고 오늘날에 와서는 정신과 육체에 관한 많은 전통적 철학의 명제들이 "언어가 헛도는" 사이비적이고 반의미적인 명제의 전형으로 꼽히고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옥스퍼드의 한 강의에서 데카르트의 코키토를 두고서 만일 누군가가 "나는 내일 비가 올거라고 생각해.그러므로 나는 존재하지"라고 했다면 나는 그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한다. 아마 비트겐슈타인은 데카르트의 명제가 "언어가 휴가간" 대표적인 경우로 생각한 듯 하다.
내 개인적인 입장에서 심신 문제는 축구에서의 공격과 수비문제와 비슷한 것 같다. 토탈 혁명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공격수는 공격만 하고 수비수는 수비만 하는 것이 축구의 기본이었는데 네덜란드의 토탈 패러다임이 유입되면서 이른바 "전원수비,전원공격"이라는 말 그대로 현재에 이르러서는 양자간의 구분이 영 불분명하게 되었다. 육체와 정신문제도 뭐 그런 것이 아닐까? 나는 굳이 양자를 어거지로 구분하는 식이란 건 싫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는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가 이 문제를 다룰 때 신중하지 않으면 "언어의 마법에 최면'이 걸리기 때문이다.
데카르트 철학의 결론 중에서 오늘날 살아남은 것은 하나도 없다고 봄이 현명하리라. 그런데도 왜 데카르트는 위대하며 그의 철학이 근대 철학의 시발로서 인정되는 것일까?
데카르트 이전까지만 해도 "신의 존재"는 최초의 가정이었고 대전제였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것을 역전시킨다. 신의 존재 이전 사유하는 나의 존재, 그 자아의 확실성이 규정되고 난 이후라야 신의 존재도 나타나는 철학이란 중세 신학이나 형이상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것이다. 이런식의 근본적인 관점전환(신에서 인간으로)이 일어난 것은 서양 철학사에서 고작 세차례가 일어났을 뿐이다. 첫째가 플라톤 (소크라테스는 단 한 권의 책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사상은 대개 제자 플라톤의 책 속에서 전해진다. 그런데 그것이 소크라테스 개인 것인지, 플라톤이 더 첨가를 했는지, 어디까지가 소크라테스의 것이고 어디서부터가 플라톤 것인지를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는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이 만들어낸 가공 인물이라는 설도 있다. 아마 낭만주의자에게는 신화적인 소크라테스를 남겨두는 것이 좋을 지 모르지만 이 분야의 전공자들은 대개의 경우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이론을 한데 묶어 이를 플라톤의 이론으로 취급한다)에 의한 세계에서 인간(외부에서 내부)으로의 관점 전환이고 둘째가 데카르트의 신에서 인간으로의 관점전환, 마지막이 니체의 보편적 인간에서 구체적 인간으로의 관점전환이다.
데카르트의 관점전환은 우리가 흔쾌히 근대의 출발로 부르는 학문 이외 다른 분야와의 공통점에서도 일치한다. 르네상스란 결국 인문주의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수학에서와 마찬가지로 철학에서 중세와 근대를 분기했다.
그리고 그는 철학의 물줄기를 바꾸었다는 점에서 "주류 철학의 시조"라고 불릴 만하다. 그가 정초한 인식론은 그의 말대로 제일철학이 된 듯 싶다. 20세기 서양 철학의 양대 주류라 할 만한 현상학과 분석철학은 많이 다른 전통이긴 하지만 "인식론적 전통"을 계승하는 면에서는 다를바가 없다. 오늘날 인식론의 전통을 한걸음 물려세운 전통들 예컨대 니체주의나 실존주의 구조주의등은 여하한 경우라도 "비주류 철학'이라는 딱지를 떼어내지 못한다. 어쩌면 데카르트가 없었다면 우리들은 아직도 윤리학이나 형이상학을 제일철학으로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적 관점이 좋든 나쁘든 그것이 철학의 현재 모습을 결정한 기본적인 노선이라는 데에는 추호의 변함도 없다.
만일 나에게 지난 일천년간 가장 위대한 사람을 한 사람 들라하면 나는 조금의 망설임없이 수학과 철학에 근대개념을 도입한 이 불후의 프랑스인을 꼽을 것이다. 그의 이름은 르네 데카르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