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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관한 시 모음
사진 속을 걸어가다
임 윤
낡은 사진을 전등 불빛 가까이 대보면
앞쪽에서 셔터를 누르신 아버지가 보이는 듯하다
반짝 터진 플래시에
나는 빛을 받으며 세상에 인화되었다
저녁나절에 찍은 아이 사진
방금 내려받은 디지털 사진 속에 나는 없다
이미 앞쪽에서 사진만 찍을 뿐이다
테두리 바깥에서야 보인 아버지
앵글 중앙에 서 있던 어린 내가 지워졌다
포커스를 조절하던 아버지가 사라진 뒤
사진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사진을 뒤적이며 꼬박 샌 날엔
아침 햇살이 창문 크기만 한 인화지에
나를 현상하곤 했다
―시집『레닌 공원이 어둠을 껴입으면』(실천문학사, 2011)
사진사에게
웃으라 하시기에 웃기는 하였으나 울고 싶었던 적이 훨씬 더 많았지요.
(유용선·시인, 1967-)
사진寫眞
꽃도 찍히면
더 이상 시들지 않는다
나무도 찍히면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새도 찍히면
더 이상 날지 않는다
사람도 찍히면
더 이상 늙지 않는다
(오정방·미국 거주 시인, 1941-)
사진
멈추어 선
시간
머물러 있는
모습 속에서
그때
스미어 넣은
마음을 찾는다
(오보영·시인, 충북 옥천 출생)
사진
삶의 한 순간이
멈추어져 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표정이
머물러 있다
나에겐 멈출 수가 없이
흐르고만 있는
삶의 시간이
인화지에 멈추어져 있다
아주 작은
삶의 한순간의 표정이
(용혜원·목사 시인, 1952-)
오래된 사진기
언제부턴가 렌즈는 흐려있었다
수건으로 꾹꾹 눌러 닦아도
부옇게 서린 김은 지지 않았다
들여다보면 군데군데
크고 작은 흠집이 나있었다
조리개를 열고
초점을 맞추고
앵글을 바짝 들이대도,
세상에는
찍히지 않는 것들이
참 많았다
낡은 사진기로,
골목에서 종일
호기심에 걸려 넘어지는
아이를 찍는다
민들레꽃 닮은 노란 옷의 아이는
부지런한 두 발로, 아장아장
렌즈에서 멀어진다
오십 년을 사용한
흐린 두 눈에
찰칵,
아이의 울음이 찍힌다
(마경덕·시인, 1954-)
사진사
내 사진은 내 삶 속에 있다고 공언했지요
사진 속에 삶을 담지 말고
삶 속에 사진을 담으라 했지요
그래야 좋은 사진이 된다고
좋은 사진사가 된다고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좋은 삶을 살아야겠지요
그러나 그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익어가지 않는 삶
감동 없는 삶
그 삶을 찍으려니
카메라 파인더에
한숨으로 남아
상처로 남아
시간을 끊어내지 못합니다
회한에 서성이고
지나간 시간에 딴지 걸리어
멈춰버린 시간
고독한 남자의 고독한 고백
그것은 패배의 모습인가요
진실의 늪인가요
오늘도 사진은 한 컷도 누르지 못합니다
셔터는 영영 누르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요
그래도 찍어야 한다는 숙명적인 운명
이것은 무슨 지독한 전생의 업보인가요
좋은 삶은 아직도
내 머리 속에서만 잉잉거리는 것을.
(남경식·사진작가 시인, 1958-)
사진 예술가
아마 그들은 내리쬐는 햇살만 봐도
가슴이 울렁이겠지
크지 않은 오목 혹은 볼록 조리개 속에
가는 숨 가만히 가만히 멈추어
우주를 담는다
해를 담는다
달과 별을 담는다
고운 풍광을 담는다
몇백만 분의 일초 사이 그 짤막한 순간을 얻기 위해
심장 박동을 정지시킨다
미세한 신경 따라 흐르는 붉은 피마저 정지시켜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꿈을 꾼다
아마 그들은 하루에도 몇십 번 몇백 번씩
저승과 이승을 넘나들어 수도승보다 뜨거운
가슴을 갖고 있겠지
(이승익·시인, 1951-)
사진사의 기도
이 세상을 아름다움으로 창조하신 하느님,
당신의 아름다움을 온 세상에 전하려는 사진사들에게
별처럼 반짝이는 창조력과 당신 은총의 손길을 찾아내는
정성스런 추구의 눈길을 주소서.
빛을 창조하시어 어두움과 밝음을 주시고
계절을 창조하시어 다양한 색깔을 주시고
공간을 창조하시어 삶의 굴곡을 주시고
숨결을 창조하시어 생명력을 체험하게 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어 생의 흔적들을 주시니
이 모든 것들을 삶의 그릇에 담으려는
사진사들의 정성에 함께 하소서.
사진사들의 노력으로 표현된 하나하나의 손길에서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게 하여 주시고,
사진사들에게 생의 존재 가치를 깨달아
생활 속에서 그리고 자연 속에서
당신 창조의 아름다움을 더욱 깊이 느껴
당신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
지나간 삶의 흔적들을 믿음으로 키워내고
하루하루의 삶을 사랑으로 행동하며
더 나은 내일의 꿈을 희망으로 그려내는
그러한 사진사들의 움직임에 함께 하소서.
(작자 미상)
사진 한 장
항상 가지고 다니는 사진 한 장
이제는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것이 되어버린……
손에 닿을만한 곳에 있으면
자주 보지 않는 이유는
바라만 봐야 좋다는 이야기
지금은 이해가 간다
(원태연·시인, 1971-)
사진을 박다
내 속은 시커멀까?
구렁이 몇 마리 똬리 틀고 있을까?
욕심을 먹으면 왜 배탈이 날까?
궁금한 마음에 찍은 시티 사진
의사가 느물느물 사진에 담긴 내 뱃속을 헤엄친다
집안 잘 보이는 곳에 사진을 박아놓는다
굼실굼실 살아있는 내 속
그게 구렁이라도 좋다
그 말고 탓할 데 없는 모습
하여, 살아갈 수 있다는 안도감
벽에서 떨어질까 못을 박는다
(최범영·시인, 1958-)
사진 한 장
너와 찍은 사진을 걸어 둔 날
내 마음도 얹어 걸어 놓았다
활짝 웃는 두 사람으로 인해
금새 벽이 환해졌다
몇 번이고 열어 보이던 네 마음이
내 生으로 걸어 들어오던 날을 생각했다
만발한 벚꽃 뒤로 숨어 버린
서로의 마음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무언의 약속조차 하지 않은 시간이
사진 속에서 탈속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사진 한 장
오래도록 내 마음에 걸어 두기로 했다.
(이정자·시인, 1964-)
사진
열 일곱 소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책상 위에 세워 두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사진이 넘어졌다
무릎에 바람 날 나이도 아닌데 자꾸만 넘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바람에 날리는 소녀들의 머리카락이 너무 가벼운 탓일까
배경으로 찍힌 철쭉이 너무 붉고 비탈은 숨가쁘게 가파르다
무게를 잡아도 옆으로 새는 웃음을 어쩌지 못할 때
넘어진 사진에 숨은 바람이 슬슬 새어 나온다
(강영환·시인, 1951-)
사진
나이가 한 육십쯤 되고 보니
이래저래 찍은 사진이 여러 장 된다.
아름다움에 찍힌 풍경은 물론이려니와
마음 아리게 지켜 온 우리의 살림 얼룩들
그 츱츱함까지도
이제는 추억 삼아 아득해 보이지만
집 머리맡에 국기처럼 걸려있는 사람
아직도 어려 보인다고
쑥스러워 하고 있지만
그리움에 감광된 마음으로
속이란 속은 다 타서
늙지도 못하는 옛날이
천연색으로 보는 꽃 시절 한 폭
제가 죽은 사람인 줄도 모르고
산 사람처럼 웃고 있는 철없는 사진
가훈처럼 적혀있는 그리움으로
나 혼자 늙느라고 이리 바쁜가
(서봉석·시인)
가족사진
그 사진 속에 나는 없다
나는 사진을 찍었나 보다
(강인호·시인)
가족사진
벽에 걸린 사진을 바라보는
달랑 둘이 남은 부부
시집간 딸과 군대 간 아들
사랑이란 글자만 남아있는
썰렁한 체온들
자식들이 떠난 식탁에 차려진
찬밥에도 아무 불평이 없다
기어다니는 아기를 바라보며
입이 귀에 걸린 부부
사진만으로도 가득 찬 행복
아기가 흩어놓은
살림살이에 따뜻한 온기들
젖병, 이유식, 우유들이
즐비한 식탁에 차려진
찬밥에도 아무 불평이 없다
(목필균·시인)
가족 사진
빗소리가 가늘게
문 밖에서 웅성거리는 날,
날개 달린 생각들이
밤늦도록 들락거리고
나와 함께, 방안에서
축축하게 눅지는 것들
그 중에서도 유독,
벽에 걸린 식구들 사진 몇 장이
두런두런 깨어나
소복이 모여, 나를 쳐다본다
내가 그들을 깨웠을까
쳐다보는 그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나
(신석종·시인, 1958-)
몰래 찍으신 사진
어머닌
웃고 계신다
80년 우시더니
몰래 찍으신 사진에선
웃고 계신다
젊어선 남편이 울리고
늙어선 자식들이 울리고
당신은 정녕 누굴 울려 보셨나
잠결에 가시고픈 어머니
이 세상 이렇게
웃고 간다 하실려고
머리맡 사진에선
웃고 계신다
끝까지 울지 말라고
웃고 계신다.
(구광렬·시인, 1956-)
사진첩
학교 때 앨범을
가만히 펼치면
흑백으로 나오는
앳된 얼굴들
자야, 숙이, 희야, 옥이..
술이, 범이, 식이, 열이..
지금은 어디
무얼 하구 사나,
종교같이 서러운 날도 있었는가,
산수유 꽃처럼 기쁜 날도 있었는가,
구겨진 마음 달구어
옛날을,
옛날을 다림질하면
묻어나는 산바람 향그러운 얼굴들
이별은 들꽃처럼 흔적만 남아
아른한 그리움에 세월만 따라왔다.
학교 때 앨범은
잊었던 젊은 날
꿈 어린 무지개.
(차성우·시인, 경남 거창 출생)
사진 속 어머니
엄마, 제 손으로 사진 한 장 찍을게요
그래 한 장 찍자!?
반가운 표정으로 말씀하시던 어머니
그 때 아무도 모르게 깊은 병 앓으시던 어머니
어떤 예감 같은 게 있었을까요
모처럼 모자 단둘이 집에 있던 날
어쩐지 천지 평화롭고 햇살 그럴 수없이 따사로와
마당의 몇 그루 나무의 숨결까지 선명히 들릴 것 같은 날
우둔한 이 아들도 어떤 예감 같은 게 있었을까요
장롱 속 깊숙이 들었던 한복 꺼내 단정히 입으시고
옷만큼이나 밝은 표정으로 사진 찍기에 응하신 어머니
자식 앞이라도 잠시 쑥스러워 하시며 카메라 바라보시더니
그날 이후 급작스레 기울어져
흙 되신 지도 까마득히 세월 흘렀네요
지금 어머니 사진 앞에서 석양의 이 아들
한숨 짓는 버릇이나 늘었을까요
어머니 생각하면 왜 이리 눈물 흐를까요
(오하룡·시인, 1940-)
어떤 사진
새로 산 디지털 카메라로
하얗게 밀려오는 파도를 배경 삼아
한 10년만일까.
몇 장의 부부 사진을 찍었다.
P.C에 꽂아 확대해보니
배경은 너무 선명하고 멋있는데
내 옆에 선 아내의 얼굴
자잘한 주름살 뚜렷이 드러나
가슴이 짠하다.
나는 주름살 제거를 클릭하고
주름진 부위에 마우스 칼을 움직여
정성스레 시술하는 성형외과 의사가 된다.
사각사각 주름살 갈리는 소리에
어느새 옛날의 고운 모습이 되살아나는 듯싶다.
그런데 완성된 사진 속에서
금방 서 있던 사람은 어디로 가 버리고
나는 딸아이와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었다.
(한승수·제주의 서정시인)
오래된 사진
곱다한 초등학교 시절
달맞이꽃 웃음으로 다가서던
앞가슴 볼록한 여선생님과 함께 찍은
빛바랜 사진을 보면
눈물 뜨거워지는 소중한 추억이 된다
마을이장이 된 영철이,
무거운 가방을 늘 들어주던 갑석이의
딱 벌어진 어깨와,
맨발에 새끼줄을 동여매고 선
굳건한 내 의지의 발가락과,
접시꽃 설렘으로 서 있는
첫사랑 순임이의 윤기 나는 단말머리는
아직도 봄 햇살을 붙들고 있다
가난이 강물처럼 불어나
고향 등지던 어둠의 날,
동구 밖 아버지 헛기침소리는
메아리 되어 가슴 먹먹하게 차올랐고
슬픈 이별 손잡고 방황하던 시절,
밤 새워 퍼마신 복사꽃 그리움은
어디서 찾을까
(박종영·공무원 시인, 목포 거주)
사진에 관한 보고서
몇 장의 사진을 봅니다
세월이란 점령군은
영웅의 가슴을 식게 만들고
미인의 눈가에 잔주름을 만드나 봅니다
사랑은 흘러가는 강물에 적셔지는
강변의 갈대와 같다고 누군가가 말했던가요
사랑은 가슴에 상처 입히기
쉬운 면도날이라 누군가가 말하지 않던가요
그대와 한 장의 사진을 찍고 싶지만
그러지 아니하는 깊은 맘을 이해해 주세요
그대가 내 곁에, 내가 그대 곁에
영원히 있다는 확률 1이 아닌 바에야
언젠가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인화지 속에서 그대 또는 내 곁에
없어질지도 모르는 서로를 그리워하며
우울해할 그대와 나의 마음을
가을 햇살 날려보내고 싶기 때문이죠
하지만 강변이 내려다 뵈는
커피숍 유리창에서
내려다보는 노을 속의 강물처럼
우리 인생도 흘러가고
몇 장의 사진만 남아 추억을
반추하는가 봅니다
그대와 나의 그림을 인화지에 남기고 싶지만
그러지 아니하는 깊은 맘을 이해해 주세요
그래도 그대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찍어도 보고 싶습니다
(백운호·시인)
희망사진관
단지 그렇게 기억되고 있을 뿐
결국 방향이 없는, 그리하여 종말이 없는, 단 한 번도 인화되지 않은 것들이 추억일까
어느 정지된 순간에 대한 덧없는 집착이 희망의 정체였을까
서울 출장길 늦은 귀가의 택시 속에서 만난 신안동 고갯길
희망사진관의 입간판이 낯설다; 아니, 정확히 말해
희망이란 낱말이 왠지 낡고 생소한 느낌이다
그런데도 길거리로 향한 형광 불빛 속에 드러난 사진의 얼굴들은
어찌하여 모두들 오래 행복한 표정들을 짓고 있는 것일까
어찌하여 그 많은 잊고 싶은 것들 속에서도
저처럼 끄떡없이 변치 않은 열망들로 살아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제 죽도록 미워할 사람도
사랑할 사람마저도 없는 내게 지금 묻는다면,
내가 짓뭉개고 외면해온 시간의 흔적들밖에 더 말할 게 없다
심지어 죽음마저도 뚫고 들어가지 못한 마음속으로
여전히 아니라고 도리질치며 지나가는 매서운 북풍소리
가장 가까운 것들조차 따스하게 대하지 못했던 불구의 시간들을 고백하고 싶어진다
보라, 그러니 저 사진틀 속에 영원히 멈춰 있는 것들조차
이미 존재했던 것이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건 오히려 미처 드러나지 못한 요청이었을 뿐
여전히 우릴 살아 불타게 하는 것들은
저 스러질 듯 서 있는 현실의 희망사진관 너머
아직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은 낯설음 속에
모든 희망들이 추문이 된 바로 이 세월의 그리움 속에
끝내 지워지지 않을 무모한 절정의 섬광들로 빛날 뿐
(임동확·시인, 1959-)
일식
윤의섭
서랍에는 미처 현상하지 못한 필름 한 통이 들어있다
무엇을 찍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가을 온통 노란 은행나무의 거리거나
이젠 얼굴도 가물가물한 첫사랑이거나
우연히 지나가다 찍힌 바람이든
다소곳이 들어앉은 산이든 바다든
지금쯤 모두 늙었거나 사라져 버린
그러니 가끔은 슬퍼해야 한다
이 필름 통속엔 불모지가 들어있다
현상하기엔 너무 늦어버린 망각의 사막
돌이킬 수 없는
필름은 태아처럼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영원하고 싶어 잠깐만이라도
나는 필름 통에다 대고 말을 건넨다
언젠가부터 나는 잘못 현상된 것이다
오전 열한 시 일식이 시작되었다
구름을 뚫고 나온 태양은 이미 달에게 뜯어 먹힌 채 빛의 피를 흘리고 있었다
—《현대시학》2009년 11월호
청사포 사진관
손순미
바다가 전용배경인 사진관은 비었다
가끔 파도가 들렀다 가고 벽에는 찾아가지않은 사진들이
유물처럼 걸려있다
그들은 추억을 포기한 것이다
점포세가 놓인 사진관은 종일 손님이 들지않는다
그들 삶은 다시 인화하고 싶지않은 것일까
밀물다방 오토바이 커피 대신 레지를 날라대는 소리
포구를 밀고간다
해의 긴 렌즈가 사진관을 포착한다
활어차가 지나가고 생선장수가 지나가고 술취한 사내들이
지나가고 저녁 어스름도 그 앞에서 포즈를 취하다가
고무대야에 얹혀간다
어디에도 정박되지 못한 사람들이 뱃머리를 돌리며 사진관쪽을 건너다 본다
삶은 더 이상 배경이 아니다
해의 긴 렌즈가 남아있는 빛마저 찍어간다
깜깜한 포구는 거대한 암실이다
사진관은 그 암실에 맡겨진다
밤새 현상된 풍경은 사진관에 다시 내걸린다
아무도 그 풍경을 찾아가지 않는다
-시집 『칸나의 저녁』(서정시학. 2010)
사진마을
김길나
사진 속에는
시간이 뒤로 감겨 있다
구름패랭이가 뒤따라와
꽃을 피웠다
기억이 뒤로 감기는 사람이
사진 속으로 손을 넣어
바닷물을 만진다
바람을 만진다
햇빛이 찍어놓은 정지는
햇빛을 추방한 암실 속에서
잘 구워진다, 눈썹이 잘 구워졌다
그 아래 눈은 흔들리는 암실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얼굴 한 장을 떠낸
공간이 네모로 잘렸다
곁에서 사람과 풍경이
수시로 잘려나간다
순간 포착으로 떠낸 공간에서
영구 정착하는 주민들을 만나러
늙지 않는 아이가 휘파람을 불며
사진마을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현대시학》2007년 10월호
김길나 : 1940년 전남 순천 출생. 1995년 시집 『새벽 날개』로 시단에 데뷔,
시집 『빠지지 않는 반지』『둥근 밀떡에 뜨는 해』『홀소리 여행』
무드셀라증후군
황경숙
사진가였던 그에게 꼭 한 번은
거쳐야 하는 어둠의 방이 있어
동굴 같은 상자 속에 손을 집어넣는 순간
박쥐를 파랑새로 피워내는 그는 맹인 마술사
피사체를 죽이기도 살리기도 했던 그에게
빛은 치명적인 삶이며 죽음이었어
어둠 속을 비쳐들던 그의 눈빛 한가운데
늘 나는 서 있었어
그 빛이 나를 키웠어
점자를 읽듯 손끝의 감각으로 필름 속
나무와 숲을, 가을 강아지풀의 안타까움을,
해바라기의 검게 그을린 씨앗까지
한 그림의 웃음으로 그려주었어
모든 풍경의 물음을 듣기 위해
그는 늘 두터운 커튼 뒤에
필름을 키보다 높이 걸어 두고서
하늘을 멀리 바라보았어
먹먹한 시간과 그의 웃음을 떠올리면
그가 누웠던 방은 눈부시게 환해져
아직도 어두운 방 틈새에서 풀려나오는
그 빛으로 나는 숨을 쉬고 있어
삼십 년 전까지 사진가로 사셨던 아버지,
다시 내게로 돌아왔어
즐거운 사진사
차승호
내 눈은 사각렌즈에 고정되어 있다 창문으로 내다뵈는 풍경들 경운기를 타고 트랙터를 타고 물장화를 신고 사람들이 지나간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떠간다 눈비가 지나갈 때도 있다 성격이 다르고 얼굴이 달라도 모두 다 내 자손들이다
12년 동안 나는 이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언뜻 보면 넌덜머리나는 시간일 것 같지만 한동안 지나지 않던 아이가 훌쩍 자라서 지나가고 훨씬 늙어서 그의 아비가 걸어가는 걸 보면 결코 지겨운 것만은 아니다
나는 재빨리 셔터를 누른다 사진은 시간이 떨어뜨리고 간 그림자의 각도와 밝기에 따라 생명이 좌우되는 법이다 고정되었다고 생각한 배경의 미세한 변화를 순간에 잡아내는 것은 얼마나 재미있는 일인가
아흔 넷? 아흔 다섯이던가? 퇴행성관절염도 내 몸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운 나이 문 밖을 그리워하지만 몸살나게 그리운 것도 아니다 사각의 광각렌즈에 고정된 내 눈은 유능한 조리개여서 먼 곳의 소식까지 ISO규격 고감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아주 가끔 내 기억의 창문을 왈칵 열고 오래 전 지상을 떠난 이들이 뛰어 들어올 때가 있는데 그것은 살다가 우연찮게 만나는 유쾌한 보너스 같은 게 아닐까 혹자는 아무 것도 찍을 수 없는 밤이면 그나마 무료한 낙도 없을 거라고 걱정하지만 모르시는 말씀 어둠이 그믐처럼 깊어갈수록 내 눈은 고양이처럼 빛난다, 낮에 찍은 사진을 현상하면서
카메라 루시다
최라라
사진을 찍을 때는
사진이라는 생각에 눈 맞추지 말아요
굳이 무엇이든 봐야 한다면 당신을 보세요
한 시간 전쯤의 당신이면 어떨까요
금 간 거울 속 당신이나
깜빡 잊어버린 순간의 당신이라도 상관없어요
카메라는 가장 아름다운 당신을 향해
신호를 보낼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두 팔 꼭 붙일 건 없어요
지금은 슬픈 타조처럼 날개를 활짝 펼칠 때,
사진 속 순간은 당신도 모르는
당신의 틈이니까요
거기엔 당신과 당신 사이가 들어 있답니다
웃으면서 흘렸던 눈물과
미안해, 사과부터 하고 싶던 생일날의 입술
혼자 먹는 밥상을 차리던 손끝
사진엔 그런 것들이 숨김없이 찍혀 있지요
참고로 나는 사진 찍을 때
그를 부른답니다 그 순간
한 시간 전의 내가 얼마나
환하게
따뜻하게
불려오는지,
-제18회《시인세계》신인상 당선작 中, 2011
사과밭 사진관*
윤진화
빨강 사과가 열리고 갓 낳은 아이가 자라고 아이는 빨강 사과 속에 숨고 곱사등이는 등에 빨강 사과를 짊어지고
사과가 파래지고 파란 잎사귀가 몰려와 둥지를 짓고 아이는 입을 벌려 지지배배 지껄이고 곱사등이의 입술 위로 파란 사과가 구르고
아이는 사과를 등 뒤에 숨기고 별 가득 베어 문 아이의 입에서 곱사등이의 사과가 열리고 사라진 사과는 푸른 하늘 은하수가 되어 흐르고
시인은 곱사등이의 등에 사과를 심고 곱사등이는 사과처럼 아이처럼 아삭거리고 시인의 손가락이 더듬더듬 사과를 쓰다듬고
* 2011년 10월, 신현림 시인의 사진전 《사과밭 전시관》을 만나다.
—《문장웹진》2012년 11월호
윤진화 / 1974년 전남 나주 출생. 2005년〈세계일보〉신춘문예에「모녀의 저녁식사」당선. 시집 『우리의 야생소녀』
그의 사진 / 나희덕
그가 쏟아놓고 간 물이
―시집『야생사과』(창비, 2009)
어느 사진작가의 고백1
박춘석
내 꿈은 영원을 채집하는 것이었죠.
찰나가 순간을 이동하려다
영원에 갇히듯 말이죠.
바람 위에 지도를 그려 넣는 셈이랄까요.
여하튼 따뜻한 피가 증발하기 전
싸늘한 빙점을 찍어야 하니까요.
씨줄 날줄의 현이 젖은 물방울 음색을 퉁기다
화석이 되는 일은 다반사였죠.
깜박깜박 전조등 같은 기억이 마중 나올 땐
믿어지지 않겠지만 시간도 닻을 내리죠.
정적의 늪에 빠지듯 말이죠.
아참! 봄소식이 사월의 계곡으로 아득히
추락하는 소리 들어보셨나요.
각도를 바꿔보면 사물이 빛을 향해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밤과 낮이 체위를 바꾸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러나 내가 넘지 못한 마지막 관문이 하나 있었죠.
찰칵!! 플래시가 눈을 뜨는 순간
벚꽃의 체취가 날아가 버렸죠.
그 후 몇 년 동안 꽃은 피어있는데
향기가 나지 않더군요.
내 카메라는 한 번도 영원을 가두지 못했다는 얘기죠.
그때 함께 플래시 안으로 들어온 여자는
아직 찰나 속에 유령처럼 웃고 있는데……
눈을 감으면 채집된 환영들이 걸어 나올 때도 있었죠.
젖은 기억은 꿈속에선 유효하니까요.
허공에 바람을 묻고 노을에 묘비를 세우듯 말이죠.
- <시안> 2002. 가을호 등단작
팬닝
손현숙
자라던 키가 정지됐다
23.5˚ 기울어진 지구여서
내 걸음은 피곤했다
신발 속에서 발가락 휘는 사이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애인은 떠나고 내 허리둘레는 반 인치 줄었다
헐렁해진 바지는 늘 나를 긴장시켰다
그러거나 말거나 꽃들은 바람에
제 몸을 얹어서 난분분 꽃잎을 털어낸다
저 바람을 어떻게 꽃잎에 담아낼까
바람과 꽃잎은 가는 길이 달랐다
고개를 꺾어서 키 높은 꽃나무
바라보기란 오지 않는 애인을 기다리는 것처럼
지루했다 바람에 꽃잎 속절없이 흘러갈 때
카메라의 눈도 따라 흘러갈 수 있다면
신발의 굽은 자꾸 높아졌다
꽃잎이 떨어지는 방향도 그 속도
바지를 줄이고 나서야 편안해진 허리처럼
느리게, 꽃잎을 따라가며 바람을 찍어내는
움직이는 중심이 편안하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지 않겠니?
*팬닝: 카메라를 흔들어서 흔들리는 사물과 속도를 맞추는 사진 기법.
—《현대시학》201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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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숙 / 1959년 서울 출생. 1999년 「꽃 터진다, 도망가자」외 9편으로 《현대시학》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손』. 사진 산문집 『시인박물관』.
카메라 옵스큐라 / 수피아
라면 봉지의 부스럭대는 소리로 허기를 채우던
사과 바구니 같은 작은 방
작은방의 벽지는 사방이 사과무늬로
가득하다 사과 바구니 같은 작은방에는
통통한 벌레처럼 내가 담겨 있다, 나는
내 근원이 궁금해질 때마다 출출해진다
동쪽 사과 하나를 갉아먹는다
수중동굴이 생긴다 감옥의 시작이다
빠져나가려고 툭툭 주먹으로 쳐보고 발길질도 해 본다
―엄마, 나를 가두지 마세요
동굴 껍질은 요동을 칠 때마다 고무풍선처럼 늘어난다
해발 몇 미터의 동굴을 가졌는지 알 수 없는 엄마의 속
굳이 말하자면 물은 따뜻하여 양수와 같은 해수면을 가졌다
출입문을 하나밖에 가지지 않은 부엌에 딸린 쪽방에서
280일째 되던 날 문을 발견하고 나는 운다
―처얼썩 처얼썩 엉덩이를 두드려보는 엄마, 제가 또 딸인가요
동굴을 나온 후로 자주 배냇잠을 잔다
잘 때는 사과를 갉아먹던 습관으로 입을 오물거리지만
―엄마, 젖에서 바다냄새가 나질 않아요
―제발 미역국을 주세요
내 어미의 시집살이 덕에 젖은 맵다
매워, 창호지 구멍이 사과 조각처럼 햇살을 뱉는다
그 때
작은방 문을 열고 쑥, 손 들어와 집어간다
백열등이 이르지 못한 곳에서
적당하게 포즈를 잡은 어둠 한 컷
* 카메라 옵스큐라(camera obscura) : '어두운 방'이란 뜻의 라틴어.
원래는 작은 구멍을 낸 어두운 방으로,
그 구멍을 통하여 들어간 빛이 방밖의 장면을 구멍의
반대쪽에 있는 방안 벽에 거꾸로 된 상을 만들어낸다.
- <시안> 2007 신인상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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