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을 엿듣다 외 1편
홍재석
가로등 하나 없는 밤길
절벽이 된 어둠 위를 걷는다
휘청거리는 몸짓으로 한 줄기 빛을 낚고 있던
나는 허공이 된다 밤이면
마음의 끝에서 잠들었던 소리만이 생생해질 뿐
살아 숨 쉬는 것들도 오로지 소문만으로 존재하는 이 길
어느 구석에도 어둠이 닿지 않은 곳이 없다
밤길은 소리를 근거로 하여 뻗어 있고
아무것도 볼 수 없던 나는
그저 짐작의 길을 엿들을 뿐이다
나는 밝은 빛을 찾아 어둠의 사막을 헤매는 방랑자
검은 낙타 한 마리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채
불안한 나를 태우고 간다
밤하늘엔 별도 없는데
어둠은 또 한 겹의 짙은 어둠을 덧입고
나를 삼킨다 밤길을 엿들으며
너에게 가는 길
소리의 사금파리들을 따라 행로는 완성된다
때가 되면 이 길
무수한 빛을 배설할 것이다
난파難破
공간이 시간 사이로 스며들고 있다 어둠이 바다 가운데로 일제히 계단을 펴고 뭉그대고 있던 구름을 해구海溝 쪽으로 굴러 떨어뜨린다 바다 밑에 숨어있던 물뿌리들은 지나가는 달빛을 끌어내어 파도에 흉터를 쏟아내고 바람에 피딱지를 말린다 낡은 배가 위태롭게 외롭게 비스듬히 심장 위를 달리고 있다 쉿! 정적이 흐른다
젊은 바람 소리가 귓가에 맴돌기 시작한다 까마귀들은 날갯짓을 거두고 죽은 공기 끝에 걸터앉자 벌름한 공기를 뒤집어 눈깔만 조록조록 굴린다 공간 위에서 시간이 살금살금 기어가다 순간 꽝! 폭풍우가 몰아친다 낙뢰가 떨어진다 바닷길이 갈라지고 선체가 부서진다 돛은 정신을 못 차리고 고꾸라져 창자 깊은 곳을 쑤시고 있다 키를 놓친 사내가 파도에 부딪혀 뼛조각이 으스러지고 폭풍우에 쓸려 마음 조각이 갈라진다 마음 한구석에 다른 마음이 엉겨 붙어 갉아먹는 공간, 고독한 저주가 서린다 물 담벼락에 무너진 채 쪼그리고 앉아 속절없는 울음을 퍼붓는 사내가 있다 추스르고 추슬러 끄느름한 눈을 새롭게 치켜들고 가야 하는 시간, 바람 한번 확! 피고 싶은 날, 시간의 공간 사이로 스며들고 있다
홍재석|《좋은문학》, 《문학세계》로 등단. 한국시인상, 광명문학상, 계룡문학상 등 수상.
첫댓글 감사합니다
홍재석 시인님 글이 참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