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이야기] 아픈 과거를 동화로 바꾼 남자 토비 도슨(김봉석) 시장통에서 놓친 엄마 손… 길 잃은 봉석이는 '눈의 마을'로 갔다 [Why] [신동흔의 휴먼 카페] /조선일보 : 2012.04.14. "저는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사람이고 미국인이기도 합니다. 저는 제가 운 좋게 미국에 있었기에 누릴 수 있었던 기회를 한국과 다른 나라 어린이들에게 주고자 합니다. 2018년 동계올림픽의 평창 유치는 바로 그 희망을 위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미국의 올림픽 선수 토비 도슨과 올림픽 선수가 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지만 기회가 없었을 수도 있는 어린 한국 소년 김봉석 두 명 모두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스포츠를 통해 누릴 수 있었던 행운의 일부라도 드리고자 합니다."(2011년 7월 남아프리카 더반, 토비 도슨의 프레젠테이션 중에서) 토비 도슨(Toby Dawson·33)은 2018년 동계올림픽 강원도 평창 유치 프레젠테이션에서 다짐한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세살 때 미국에 건너간 한국계 입양아인 그는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 남자 모굴에서 동메달을 딴 이후 한국의 가족과 극적으로 상봉했고, 지난해 7월 동계올림픽 평창 유치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났다. 작년 11월에는 한국스키협회와 국가대표팀 코치 계약을 맺고 한국에 들어와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자신의 불운했던 개인사를 한 편의 동화로 바꿔낸 그는 이제 고국에 돌아와 또 다른 성공 신화를 쓰고 있는 중이었다. 그가 한국팀을 맡았다는 소식에 미국과 캐나다에서 개인적으로 훈련하던 젊은 선수들이 속속 한국으로 모여들었다. 국내 최초의 프리스타일 스키 실업팀(GKL스키단)의 감독도 맡았다. 동시에 그는 금융전문가에 대한 개인적인 꿈도 간직하고 있었다. ‘눈의 고장’ 콜로라도에서 온 그는 스키를 신자 몸놀림이 확연히 달라졌다. 표정도 밝아졌다. 지난 10일 경기도 부천 실내스키장 ‘웅진플레이도시’에서 토비 도슨이 국가대표팀 유니폼 차림으로 스키를 어깨에 둘러멘 채 웃고 있다. 270m짜리 슬로프를 다섯 번이나 오르내린 직후였지만, 그는 전혀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 김용국 기자 young@chosun.com 2006년 토리노, 모굴 스키 동메달 S자로 꺾으며 내려오는 '카빙' 기술 수만번 연습 끝에 완성해 모굴에 도입 그 땐 첫 시도라 안 알아줬지만 지금은 최고점 줘···메달色달랐을 수도 2018 평창, 또 한번의 드라마 은퇴 후 월스트리스行 꿈꿨지만 평창서 한국 금메달 보고 싶어 코치로··· 올림픽 선수로 자란 소년 봉석이처럼 한국 선수들과 내 행운 나누고 싶다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전의 '히든카드' ―남아프리카 더반에서 당신은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 주자, 히든카드였다. 언제 알았나. "더반에 도착할 때까지도 내가 마지막 순서라는 것을 몰랐다. 그들은 철저히 나를 숨겼다. 다른 프레젠테이션 멤버들과 달리 나는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했다. 호텔방과 식당, 프레젠테이션 연습장 사이만 오가야 했다." ―무대에 섰을 때 떨리지 않았나. "심리적 압박이 컸다. 다른 참가자들은 '너는 히든카드이고 마지막 순서이기 때문에 떨어지면 너의 책임'이라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그런데 그게 나에게는 농담만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큰 스키 대회를 나가본 경험이 프레젠테이션할 때 도움이 됐나. "100% 도움이 됐다.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과정은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과 똑같다. 매일 연습하고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마지막 날을 위해 에너지를 비축해둬야 한다. 처음 연습할 때 주위에서 내 스피치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스키 점프 대회에서도 절대 연습에서 힘을 다 쓰지 않는다. 마지막 날 본선에서 최대 에너지를 쏟기 위해 밸런스를 맞추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러니까 연습할 때는 최고의 스피치가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연설문은 누가 썼나. "나와 평창 프레젠테이션의 총지휘자 테렌스 번스가 같이 썼다. 그가 나를 추천했다. 아, 그리고 한국 배우 정준호씨도 일부러 찾아와 여러 가지를 조언해줬다." ―현재 당신은 2018년 평창과 강하게 연결돼 있다. 이후에는 어떤 계획을 갖고 있나. "한국과 미국 사이에서 계속 일하고 싶다. 그리고 입양아 단체를 위한 일도 당연히 시작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현재는 한국 모굴 스키팀을 세계적으로 가장 뛰어난 팀으로 만드는 것이 최우선이다. 다행히 한국에는 우수한 어린 선수가 많다. 나에게는 행운이다." ◇"한국 모굴 스키팀을 세계 최고로" ―원래 은퇴 이후 스키 지도자가 될 생각이었나. "솔직히 나도 내가 코치가 될 줄은 몰랐다.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이후 스키와 관련된 일은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2010년 올림픽을 앞두고 친구인 미셀 워크를 4개월간 기술 지도한 적은 있다. 35세의 노장 선수였던 그녀는 그해 미국 대표로 올림픽에 나갈 수 있었다. 그녀를 도운 것은 우리 가족과 매우 친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의 '압력'(?)이 심했다. 내가 가르치는 데 자질이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코치가 될 생각은 없었다." ―은퇴 후 무엇을 하고 싶었나. "대학으로 돌아가 학업을 마친 뒤 월스트리트나 헤지펀드 계통에서 일하고 싶었다. 나는 미국과 한국의 투자시장에 관심이 많다. 특히 미국 시장에 투자하는 한국의 연금펀드에 관심이 컸다. 한국은 베이비 부머 세대 등 은퇴자의 증가와 함께 점점 연금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연금 규모는 커질 것이고 미국 등 선진국 펀드에 투자하는 중개자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한국 대표팀 코치를 맡기로 했나. "올림픽 유치 기간에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스키협회로부터 피겨나 스피드 스케이트 종목처럼 스키에서도 훌륭한 선수들에게 훈련의 기회를 주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다. 듣고보니 2018년 올림픽에서 한국이 메달을 따는 것을 돕는 게 좋을 것 같아 생각을 바꿨다." ―지금은 코치 때문에 당신의 꿈을 접은 것인가. "아니다. 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틈틈이 준비할 생각이다. 훗날 2018년 올림픽을 통해 명성을 얻으면 금융투자 전문가로 일할 때도 도움이 될 것이다. 한국에서 MBA 코스를 밟을까 생각도 한다." ―한때 프로골퍼 입문 의사도 밝혔었는데.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리고 스코어의 기복이 심한 편이다." ―베스트 스코어는. "68타. 골프 시작한 지 2년 정도 됐을 때였다. 그런데 그 다음 날 바로 95타를 쳤다.(하하)" ―프리스타일 스키의 경우 서양인에 비해 체구가 작은 동양인이 유리하다는 말이 있던데. "프리스타일 스키는 매우 많은 움직임(Up and Down)이 있다 보니 작은 체구가 더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나는 한국 선수들의 체격 조건보다 태도를 더 중시한다. 나이는 어리지만 학교가 끝나고 학원에서 더 학업에 집중하는 한국인 특유의 경쟁 문화 때문인지, 매우 바람직한 자세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이런 점이 훗날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것으로 확신한다." ―현재 계약은 2014년 소치올림픽까지인데. "지금 일하는 분위기를 즐기고 있고, 좋은 성과를 내면 2018년 평창까지 연장되지 않을까?" ―소치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낼 수 있을까. "소치올림픽은 일종의 디딤돌이다. 코스 등 트레이닝 툴을 연구하고 이를 소치에서 적용해 보고 가능성을 확인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 선수로서 메달을 땄는데, 차라리 당신이 한국으로 국적을 바꿔 한국 대표로 나가보는 것은 어떤가. "나는 이미 나이가 많다. 한국팀 소속 선수로서 메달을 따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는 하다. 하지만 2018년 평창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일정 역할을 했기 때문에 나의 메달은 한국에도 기여한 것으로 생각한다." ― 도슨 이전과 이후, 모굴 스키 종목의 채점 방식에서 변화가 있었다고 들었다. "나는 나만의 턴 테크닉을 만들었다. 프리 스타일 스키는 말 그대로 선수가 자유롭게 탈 수 있지만, 동시에 피겨스케이팅처럼 심판들이 판정하는 종목이다. 슬로프를 내려오면서 높은 수준의 기술로 내려오느냐 낮은 수준의 기술로 내려오느냐는 점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항상 높은 수준의 기술을 개발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나는 그동안 미끄러지며 내려오던 슬라이드 방식에서 'S자'로 깎으며 내려오는 '카빙' 기술을 모굴에 처음으로 도입했다. 그런데 2006년 토리노에서는 처음 시도된 기술이어서 고난이도 배점이 돼 있지 않았다. 결국 동메달에 그쳤다. 이후 심판들이 채점 방식을 바꾸어 카빙 테크닉에 최고 난이도 점수를 주기 시작했다. 만약 바뀐 기준으로 채점한다면 나의 메달 색깔이 바뀌었을 것이다.(하하) 나는 그 기술을 4년 반 동안 혼자 수만번의 시도를 해서 완성했다. 지금은 다른 선수들도 하고 있다." ―현역 시절의 그런 경험과 기술을 한국 선수들에게 모두 전수해주면 좋겠다. "솔직히 한국 대표팀의 헤드코치는 너무 바쁘다. 선수들의 컨디션, 스케줄, 기술 훈련 등 모든 일을 내가 챙겨야 한다. 미국이나 캐나다 코치들이 오로지 테크닉 전수에만 신경 쓰는 것과 비교가 된다." (위) 미국 콜로라도에서 토비 도슨의 어린 시절. 어린 나이에 스키를 접한 그는 불운한 개인사를 극복하고 세계적인 선수가 됐다. (아래)토비 도슨이 지난 2007년 5월 고향인 부산에서 명예시민증을 받을 때 모습. 아버지 김재수(왼쪽)씨와 빼다 박은 듯 닮았다 /조선일보DB "스키 고글만 쓰면 난 아메리칸" 고아원 거쳐 입양 간 美콜로라도 스키 장비로 피부색 가리면 마음 편해 그래도 미국 어머니는 늘 말했다 올림픽 메달 따면 친부모를 만날 거라고 스물일곱, 생부와의 만남 모든 의문과 분노, 만나는 순간 녹더라 입에 음식 넣어주면서도 "배고프지" 물어 재혼한 어머니는 아직 안 만나··· 사투리까지 연습해 단 둘이 보고싶다 ◇눈밭에서 쓴 동화(童話) 부산에서 태어난 도슨은 3살 때 시장에서 어머니의 손을 놓쳐 길을 잃었다. 보육원을 거쳐 미국 콜로라도로 입양됐다. 그곳은 눈의 고장이었다. 소년은 눈 속에서 노는 것이 좋았다. 백인이 많은 동네에서 그는 항상 눈에 띄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두꺼운 옷을 입고 스키를 탈 때는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스키는 그가 정체성에 대한 불안감을 잊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가족들이 있는 부산에는 자주 가는 편인가. "지난 11월 한국에 들어 온 이후 2번 갔다. 집안 제사가 한번 있었고, 설에도 갔었다. 이번에는 GKL실업팀 창단 행사에 아버지가 서울로 오신다." ―아버지를 어떻게 부르나. "한국말로 '아버지'라고 부른다. 그는 나에게 '뭐가 필요하니' '뭘 갖다줄까' 끊임없이 묻는다. 그동안 나와 아버지 사이에서는 시간이 멈춰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나를 완전히 어린애 취급한다. 입에 음식을 넣어주면서도 '배고프지'하고 묻는다." ―당신을 잃어버린 후 아버지와 불화를 겪다가 이혼한 어머니는 만났나. "어머니를 찾기는 했다. 하지만 만나지는 않았다. 내가 나타난 이후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연락을 했다고는 한다. 하지만 재가해 잘살고 계신 분의 가정에 혼란을 주고 싶지는 않다. 내 한국어 실력이 어머니와 대화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을 때 단둘이 만나고 싶다. 통역도 미디어도 끼어들게 하고 싶지 않다. 그 순간을 기다리며 한국어를 익히고 있다." ―한국어 실력은 어느 정도인가. "말하는 것은 서툴러도 서울에서 사람들이 대화하는 것을 들으면 50% 정도는 이해되는 것 같다. '눈치가 빠르다'는 말도 안다. 그런데 아버지가 이야기하면 한마디도 이해를 못한다. 사투리 때문이다. 어머니도 부산 사투리를 쓸 것 아닌가. 그러니 더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해야 한다." ―아버지를 만나 많은 것을 물어보았나. "왜 나를 잃어버렸는지, 왜 찾지 않았는지 그를 만나기 전에는 정말 많은 의문이 내 마음속에 있었고 화가 날 때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의문과 분노가 사라졌다." ―아버지를 이해하게 됐다는 말인가. "아버지는 나에게 아직도 이방인이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다. 아버지는 유쾌하고 농담도 잘하는 분이다. 아버지의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함께 웃는다." ―당신은 스키를 통해서 친부를 찾았다. 꼭 만나리라는 확신이 있었나. "미국 어머니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면 한국 부모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하지만 나는 두렵기도 했다. 미국의 내 동생이 나보다 먼저 친부모를 만났는데 매우 실망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을 봤다. 나처럼 길을 잃어버려 입양된 경우는 행복한 결말을 맺을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입양아가 한국 부모를 찾고서 다른 형제 대신 자신이 버려졌다는 사실을 알고 혼란스러운 감정을 겪게 된다. " ―당신의 미국 부모는 훌륭한 분들인 것 같다. "나라면 미국 부모님처럼 못할 것 같다. 생물학적 부모님보다 나를 키워준 부모님에게 정말 큰 빚을 지고 있다. 내 인생을 통해 이러한 빚을 갚아 나갈 것이다. 그들과 정서적인 연결도 강하다." ―당신의 운명이 엇갈린 곳, 길을 잃어버렸던 그곳에 가봤나. "아버지가 나를 데려가 그 장소를 보여줬다. 매우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내가 있던 보육원도 가봤다. 나에 대한 기록은 이름도 봉석이 아닌 수철이었고, '항상 과자를 달라고 한다'는 게 전부였다. 이것만 갖고 어떻게 잃어버린 아들을 찾을 수 있었겠나." ―한국에서 어릴 때 기억은. "전혀 없다. 내 기억은 5살 때 시작된다. 그 이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최초의 기억은? "집 앞 마당의 눈 속에서 뛰어노는 모습이다. 행복한 기억에서 시작된다." ―처음 부모를 찾겠다고 했을 때 수백명이 한국에서 몰렸다. 어땠나.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 실망하고 싶지 않았고 실망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나를 대신해 한국관광공사에서 찾아줬다. 다행스럽게 외모가 너무 닮았기 때문에 단 한 사람만 DNA 검사를 하면 됐다." ―한국에 와서 많은 것이 달라졌을 것 같다. "우선 나이가 한 살 줄었다.(웃음) 78년생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79년생이라고 했다. 생일도 한국 생일은 5월이고, 미국 생일은 11월이라 두 번 생일파티를 한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보내진 아이, 토비, 아니 봉석은 한국으로 돌아와 스스로 두 나라를 잇는 역할을 해가고 있었다. 인터뷰 내내 잘 웃고 유쾌한 그에게는 확실히 슬픈 이야기도 아름다운 동화로 만드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