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軍捕虜 趙昌浩 中尉
작성일: 2020-09-07 01:01:13
안녕하십니까? 군사고문관입니다.
오늘은 국군포로 故 조창호 중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현재까지 대한민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북한 당국에 억류되어 살고 있고
북한 현지에서 사망한 숫자까지 포함하면 78,636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문재인 정부에 촉구합니다. 6.25 전쟁 당시 북한 당국에 의해 강제로 억류된 국군 포로 송환에 성실히 임해주길 바랍니다. 6.25 전쟁은 남과 북이 함께 전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북한에 의해 일방적으로 남침을 강행한 전쟁행위였습니다.
조창호 중위는 1994년 10월 23일에 인천항에 도착하여 꿈에도 그리던 조국,
대한민국에 귀향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2010년까지 북한 땅에서
대한민국으로 탈출에 성공한 국군 포로는 78명이었다.
경기도상 재학중 찍은 조창호
조창호 중위는 1930년 10월 2일 평양에서 태어났습니다.
「昌浩」라는 이름을 지으신 분은 조창호 중위의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당시 나라에서 첫손가락으로 꼽을 애국자가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 선생이라고 생각하여
집안의 대를 이어갈 손자에게 남의 이름을 차명(借名)하여 지었다고 합니다.
조창호 중위의 가족은 평양에서 기차로 30분쯤 걸리는 '중화'에 살았다.
조창호 중위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개화 집안의 장남으로
할아버지께서 숭실학교에 보내 공부를 마치게 하였다.
또한 서울의 YMCA에 유학을 가게되었으나 공부에는 뜻이 없어
다시 평양으로 돌아가 중화에서 과수원을 하게되었다.
어머니는 평양에서 금은방과 광산을 경영하는 평양의 장대재 교회 장로의 딸이었다.
결혼하기 전에는 진명 보통학교를 나와 숭의학교에 다녔다.
독실한 신자이기도 하였으며 주변의 영향으로
민족 사상에 철저하여 큰 누이를 낳기 전
3.1 운동 때에는 거리에 나가 만세를 불렀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개화된 집안의 며느리였다.
조창호 중위의 性氏는 배천(白川) 조(趙)씨로서 원래 조상은 이북 사람이었으나
조창호 중위의 할아버지께서 태어나서 사신 곳은 평안남도 순천이었다고 합니다.
할아버지는 상투를 자르고 예배당을 다니는 개화 청년으로,
선교사의 인도로 신식 교육 기관에서 서양 의학을 공부하였다고 합니다.
후에 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양의(洋醫)가 되어
평양에서 『제세의원(濟世醫院)』을 차렸다.
당시 몇 안되는 양의 의술로 운영했었던 '흥제의원' 조창호 중위의 할아버지가 운영했었던
제세의원도 이와 비슷했을 것으로 추정.
한의원 밖에 없었던 시절에 양의 의원은 항상 환자로 붐볐다고 합니다. 병원에 밀려드는 환자들로 쉴 틈이 없었다고 하며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고 할 정도 병원 운영은 잘 되었다고 합니다.
조창호 중위의 할아버지는 병원이 잘 운영되어 돈을 많이 벌었으나
청교도적인 생활을 하여 사치를 하는 행동은 없었으며 집에 손님이 와도
직접 냉면을 만들어 대접했다.
근검절약을 하는 품성에 1930년대 돈으로 거의 1백만원 쯤 되는 재산을 모았다고 하며 선교 사업을 하는 일에는 큰돈을 쾌척(快擲)하기도 하였다.
1933년에 조창호 중위의 아버지가
평양시내에 '유니온 상회'라는 자동차 부속품상을 차렸다.
그 당시 평양 시내에 차가 몇 대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매우 드물었다.
당시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일본 사람들이었거나 서양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곳인
조선인 거주지역에서 자동차 부속품상을 냈으니 장사가 잘 되기는 어려웠습니다.
할아버지는 마포에 커다란 한옥을 사서 거기에 사시면서
새로 개원하여 환자들을 진료하는 일을 계속하였고
남은 재산으로 서울에 와 있던 장대재 교회의 장로 두 분과 함께
수리 시설이 없어 농사를 짓지 못하는 능록 일산의 갈대밭을 헐값에 사들여,
이를 개간하고 수로를 설치해서
수리 안전답으로 바꾸어 엄청나나 투자를 하였다.
기생학교 "권번"
조창호 중위의 가족은 평양에서 서울 다옥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
다옥동 집은 청계천의 광교와 무교의 가운데 쯤 되는 시내 중심가에 있었다.
그리고 주변에 권번(券番)이라고 하는 기생 학교와 기생들이 나오는 요릿집이 있어
교육 환경으로는 좋지 못했다.
서울의 실정을 잘 모르고 집을 구한 탓이었다.
저녁에 문 밖에 나가면 기생집에서 기생들을 데려가는
인력거꾼들이 자주 다녀 길거리가 번잡스러웠다.
조창호 중위는 다옥동 집에서 인근 삼각동(三角洞)에 있는
청계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다녔다.
효자동으로 이사가자 학교 다니기가 멀어져서 중학교 2학년 때
경기도상(京畿道商)으로 전학을 하였다.
1910년도 당시 새문안 교회
경기도상에 다니면서부터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였고
집안에서는 서울에 온 뒤로 새문안 교회에 나가고 있었으나
교회가 너무 멀어 조창호 중위 혼자서 옥인 교회에 나갔다.
조창호 중위의 할아버지는 3.1 운동에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한 것으로 유명한
길선주 목사가 담임하던 장대재 교회의 장로이셨고,
어머니께서도 새벽 기도를 하루도 거르지 않을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다고 합니다.
조창호 중위가 어렸을 때 주일 학교에 가는 것이 귀찮아도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가는 것은 빼먹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그렇다고 해도 아침의 기나긴 기도시간이 지겨워 실눈을 뜨고
장난치는 평범한 아이에 지나지 않았다고 회상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얻은 신앙은 그 뒤에 포로가 되어 지옥과 같은 북한 땅에서 생활을 할 때 헤쳐 나갈 때에 튼튼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고 하였다.
조창호(가운데) 중위의 어렸을 적 누이와 동생들의 사진
* 서울 근교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포성소리
조창호 중위가 경기도상을 졸업하기 전 대학 진학을 앞두고 있었을 때
어머니께서는 장남이었던 조창호 중위에게
신학 대학에 가서 목사가 되기를 짐짓 바라셨으나 고심 끝에
연세대학교 교육학과로 진학하였다.
대학의 첫 학기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6월 25일,
일요일에 교회를 가기 전에 신새벽부터 멀리서 울리는 포성을 들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은근히 불안해졌으나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을 먹고 옥인 교회로 갔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포성을 들었다며 수군거리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도 포성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들려왔다고 합니다.
집에 와서도 불안감은 여전해서 라디오를 틀었더니 38선 전 지역에서 북괴군이 도발해 와 격전중이나 곧 격퇴될 것이라는 보도가 흘러 나왔다고 합니다.
밤이 되어서도 포탄 소리를 그치지 않았고,
그 소리는 이제 멀리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점점 가까이에서 울리고 있었다.
1950년 6월 26일 월요일, 북괴군의 남침으로 함락되기 전의 서울 상공 모습
6월 26일 상황을 살피느라 집을 나와서 시내 쪽으로 가보았고,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빨라져 있었으며, 자동차들도 평소보다도 훨씬 더 빨리 달리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지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불안과 긴장감이 뒤섞여 감돌고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 휩쓸려 중앙청 앞까지만 나가려던 걸음이 어느덧 남대문을 지나 서울역까지 나가 있었다고 합니다.
서울역에 이르자 기차편으로 들어오는 부상병들을 볼 수 있었다고 하였으며, 당혹감과 두려움이 엄습하였다고 합니다.
지프차에 실려 있는 한국군 부상병
27일에는 긴장감이 더욱 고조되었다고 합니다. 마치 서울이란 도시 전체가 긴장감으로 웅성거리는 느낌이었다고 하였으며 서울역과 미아리 방면으로 계속해서 부상자들이 밀려들었다고 합니다.
이날 라디오에서는 육군본부 보도과장이었던 이환수가 나와서 "국방군은 북으로 북상하고 있다, 서울은 사수될 것이다"라는 성명을 방송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거리에서 느껴지는 긴장감으로 말하자면, 어디에도 국방군이 북으로 밀고 올라가고, 서울이 무사하리라는 것은 느껴지지 않고, 일분 일초 다가오는 긴장된 촉박감만이 느껴졌다고 합니다.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불안함 마음으로 그날 밤도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는데, 밤 12시쯤 되었을 때 별안간 큰 폭음이 들렸고, 이 폭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한강다리를 끊을 때 터진 폭파 소리)
28일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가 보니 이미 정부는 후퇴했고, 인민군 탱크가 중앙청 앞까지 진주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고 합니다.
도저히 소문대로 믿을 수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와 라디오를 틀어 보았으나 방송은 이미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집에만 있을 수 없어 중앙청 앞까지라도 나가 보려고 다시 집을 나섰고, 효자동에서 중앙청까지 엎드리면 코 닿을 거리였으나 얼마 가지 않아 경복궁 담이 끝나고 중앙청 담이 시작되는 모퉁이까지 왔을 때에 군용 지프 한 대가 전복되어 있는 것을 보았으며
군용차임에도 군인은 보이지 않고 여자와 일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유혈이 낭자한 채로 엎어져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지프에서 빠져 나온 이브자리가 흐트러져 있고, 보따리가 끌러진 채로 나뒹굴어도 아무도 손대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서는 더는 나아갈 수 없어서 중앙청의 돌난간 사이로 중앙청 앞쪽을 훔쳐 보았을 때 소문 대로 중앙청 앞에는 낯선 인민군 탱크와 사이드카 부대가 진용을 갖추고 있을 정도로 아찔했다고 합니다.
그때 조창호 중위는 전날 들은 육군본부 보도과장의 방송 내용을 떠올렸으며 너무 분해서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 자리에서 한참을 부르르 떨었다고 합니다. 방송을 했던 이환수보다 이환수에게 그렇게 시켰던 신성모나 최병덕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 국군포로 교화소 생활
함께 형을 받은 국군 포로들과 맨 처음으로 이송된 곳은 원산이었다고 합니다.
원산 교화소는 정식으로 죄수 수용 시설을 갖춘 곳은 아니었으며 판결받은 죄수들을 임시로 학교 교실에다 수용하는 시설이었습니다.
사방에서 국군 포로들이 이 원산 교화소로 밀려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원산에 도착하자 그 동안 덥수룩하게 자란 머리를 밀었으며 이제는 죄수로 갇혀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기만 하였다고 합니다.
포로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도 그래로 입고 있었던 군복을 원산 교화소에서 벗어야 했으며 옷을 벗으라 하고는 내복을 안 주고 붉은 죄수복 한 벌만 던져 주었다고 합니다. 죄수복은 탈주하지 못하게 하려고 쉽게 눈에 띄는 붉은 색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단추는 달려있지 않았으며 끈으로 묶게 된 헐렁한 자루같은 옷이었습니다.
당시 북한 당국은 국방군 포로들을 남으로 내려보낼 사람들과 북에다 억류해야 할 사람들로 분류해 내기 시작했었던 것 같았다고 하였으며
분류된 사람들 가운데 북한 태생이거나 아니면 남한 출신이라도 보낼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사람은 따로 모아서 교화소로 보냈다고 합니다.
일단 교화소로 보내진 사람들은 포로 신분이 아닌 죄수 신분이라고 해서 포로 교환 때 제외시키려는 속셈이었습니다.
수용 시설들이 여기저기에 나누어져 있어서 확실히 헤아릴 수는 없었다고 하며, 남으로 송환하지 않고 교화소에 잡아 놓은 포로 수만 어림 잡아서 3만 명에서 5만 명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1953년 포로 교환 때 고작 7천 명 정도만 남으로 보냈다고 하니 그 보다 몇 곱절이 넘는 수많은 국군 포로들이 북한 당국에 의해 고스란히 수용소에 갇힌 채 비참하게 살아가야만 했던 것이었습니다.
1953년 9월 북한에서 남으로 송환된 마지막 국군 포로들의 모습
조창호 중위가 국군 포로들을 죽이거나 교환하지 않고 잡아 둔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술회하였는데,
우선 국군 포로들이 남쪽으로 내려가 활동하게 되면 대한민국의 귀중한 인적 자원이 되는 셈이고, 사회주의 선전에도 큰 지장을 준다고 생각했을 것이란 점.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포로를 죄수로 치면 이들이야 얼마든지 부려먹을 수 있는 노동력이 된다고 생각한 점.
실제로 국군 포로들은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여기저기 끌려 다니면서 북괴에 의한 필요에 따라 일을 해야 하였던 점.
교화소 생활 초기에는 국군 포로들을 정치범으로 취급해서 다른 잡범들과 구분하였고 거의 일을 시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국군 포로가 필요할 때에는 강냉이 밥 한 덩이를 주면서 언제든지 국군 포로들을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견디다 못해 죽으면 시체만 내다 버리면 되니 그보다 편리한 노예가 없었던 셈이었습니다.
당시 조창호 중위는 원산에서 닷새 정도 있었는데 여전히 전쟁 중이라 폭격 때문에 방공호에 들어가 지낸 시간이 많았다고 합니다.
(제가 수집한 자료에 의하면 6.25 전란 당시 북한의 원산, 함흥, 안변, 고성, 월비산 주변에는 수많은 방공호가 있었으며 이 방공호는 미 해군 함정들의 함포 사격을 피하기 위한 목적과 우편, 물자등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었습니다. 당시 동해안 쪽에 있었던 북쪽 당청 관리들 중에 일부는 휴전 소식을 일본 방송을 통해서 라디오로 청취해서 알았다고 하였으며, 오히려 북한과 남한측의 방송보다도 일본 방송을 더 신뢰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포로들이 웬만큼 모여 인원이 차면 포승줄로 묶어 이동해 갔다고 합니다.
전시(戰時)라서 국군 포로들의 이동에 차를 타지 않았고 몇 차례 이동이 더 있었지만 만포까지 갈 때 까지는 줄곧 걸어서 다녔다고 합니다. 이렇게 교화소를 옮길 때마다 걸어간 거리만 해도 몇 천리는 되었다고 합니다.
원산에서 계속해서 남서쪽으로 내려가서 평안남도 회창에 도착하였는데 회창은 금광이 있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회창에서 노무자 수용소에 철창을 설치하여 그곳에다가 국군포로를 가두었습니다.
아직도 수많은 국군 포로들이 북한 당국에서 운영하는 교화소에서 목숨을 잃거나 살아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루는 폭격이 심해지자 국군 포로를 금광 갱도에다 몰아넣더니 두꺼운 나무로 문짝을 짜서 굴 앞을 아예 막아버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폭격 때에 대피하는 틈을 타서 도망치지 못하도록 굴 앞만 지키면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갱도 안에서 국군 포로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상대방 얼굴을 보지 못하고 하는 이야기에는 금방 질력이 났다고 합니다. 깜깜한 굴 속에서 그렇게 몇 일을 지내고 나자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둠 속에서 시간도 모른 채 그렇게 가만히 앉거나 누워 있자니 적막감 속에서 생겨나는 것은 절망감뿐이었다고 합니다.
열흘을 넘게 갱도 속에 있었던 것 같았으며 말이 열흘 이었지 몇날 몇일인지는 알 수 없었다고 합니다. 끼니 때 마다 돌멩이에다가 하나씩 그어 놓은 금을 보고 짐작한 것이었습니다.
굴에서 나온지 얼마되지 않아서 평안남도에 있는 덕천 교화소로 끌려갔으며 덕천에도 큰 탄광이 있었습니다. 국군 포로들을 수용한 곳은 광산이 아니라 광산 근처에 있는 학교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는 이미 끌려온 포로들과 잡범들이 약 4백 여명 정도 수용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 4백 명을 다섯 반으로 나누어 한 교실에 80명 정도씩 수용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는 일도 시키지 않고 죄수들끼리 말도 못하게 하였으며 일어서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아침 6시부터 저녁 8시까지 하루 종일 꿇어앉혔다고 합니다.
교도관들은 나무 몽둥이를 들고 죄수들을 지켰으며 어디에서 말소리가 들리면 그 쪽으로 다가가 사정없이 매질을 하였습니다.
하루종일 꿇어앉아 있으면 피가 통하지 않아 다리가 마비되어 나중에 움직일 수도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취침시간이 되면 칼잠을 자면서 손으로 몇 시간씩 다리를 주물러도 풀리지 않았습니다.
국방군 포로에게는 배고픈 육체적 고통 말고도 괴로운 것들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가족이 그립고, 집이 그리웠습니다.
잡범들이야 형기를 마치면 가족들에게 다시 돌아갈수 있지만 국군 포로들은 그렇지가 않았으며 집을 생각하고 가족들을 생각하면 감옥 생활은 은 그야말로 절망의 한가운데나 다름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절망감 속에서 생활하다 보면 배고픔보다 삶의 의욕을 잃는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모두들 그런 괴로움때문에 하나 둘, 병들기 시작했습니다.
열악한 환경과 부실한 식사 때문에 약해져 있는데다가 삶의 의지마저 없어지면 더욱 빨리 병마가 찾아들었습니다. 어쩌다 열이 나며 꿇어앉아 있다 쓰러지기도 하였으며,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서 보면 죽어 있었다고 합니다.
국방군 포로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병들어 갔으며 덕천 교화소에 있는 한달 남짓동안 벌써 몇 십명이나 죽어 나갔다고 합니다.
43년만에 북한 땅을 탈출하여 귀환, 중위 진급 신고를 하는 故 조창호 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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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창호(趙昌浩, 1930년 10월 2일 ~ 2006년 11월 19일)는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한국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포로로 납북되어 전사자로 처리되었다가
43년만인 1994년 대한민국에 귀환한 인물이다.
1930년 10월 2일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평양의 부유한 가정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지난날 한때 1932년 일가족과 함께 경기도 인천 제물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1934년 일제 강점기 경기도 시흥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1936년 가족이
일제 강점기 경성부(지금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로 본격 이주하였다.
경성 경기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50년 연희대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교육학과에 입학하였다.
국군 자원 입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19살때 연희대학교 교육학과를 중퇴하고
1950년 10월 대한민국 국군에 자원 입대,
육군종합학교를 수료하고 1951년 4월 포병장교로 임관하여 육군본부 포병여단 관측장교를 거쳐 육군 수도연대 포병 제101대대 관측담당 소위 및 소대장으로 참전하였다가, 1951년 5월 강원도 인제 한석산 전투에서 중국 인민해방군에 포로로 붙잡힌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끌려갔다.
포로 및 강제 억류 생활
이후에 조선인민군에 편입되었으나, 1952년 동료 포로들과 탈출을 계획하다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치부에 발각되어 '월남기도'와 '반동분자'의 혐의로
13년간 황해북도 서흥군, 평안남도 덕천군, 함경남도 함흥시, 함경북도 경흥군 아오지읍, 자강도 강계시 광산 등지의 강제 노역소에서 복역하였다.
13년 동안의 강제 노역소 생활을 마친 후에는 자강도 자성군에 광부로 배치되어서
노역에 동원되었으며, 오랜 광산에서의 노역을 통해 지병인 규폐증을 얻게 된다.
후일 그의 증언에 의하면 하루 약 10시간여의 중노동에 동원되었으나
일일 식량 배급량은 300그램 정도였다고 한다.
탈북 및 대한민국 귀환
북규폐 증세가 심해져서 자강도 중강군 중강진면의 산간촌으로 보내지게 되는데
이 때에 알게 된 중화인민공화국 상인을 통해서 귀환을 결심하게 되어,
결국 압록강 기슭에서 목선을 타고 중국을 통해 북한을 탈출, 해상을 표류하다 1994년 10월 23일 새벽 대한민국 수산청 어업지도선에 의해 구출되었고, 병원에 입원하여 가족 상봉을 하였다. 이후 국군수도병원으로 옮겨지고, 같은 해 10월 25일에는 입원한 병실을 찾아온 이병태 국방부 장관에게 귀환을 보고하였으며, 10월 27일에는 김동진 육군참모총장에게 귀환을 보고하였다.
11월 25일에는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현충탑 지하 영현 봉안실의 대리석 위패에
새겨져 있는 자신의 이름을 손수 지웠다.
왜냐하면, 전쟁 중에 실종 처리되었다가 1977년에 전사자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같은 날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육군 중위로 진급하고,
군인 정신에 귀감이 된 점을 높이 평가받아 보국훈장 통일장을 받았다.
다음날 11월 26일에는 육군사관학교에서 전역식을 가짐으로써
44년 3개월이라는 최장기록의 군생활을 마감하였다.
그는 한국 전쟁 당시에 포로로 잡힌 많은 국군포로들이
여전히 북한에 생존하고 있음을 증언하였고,
이는 북한에 생존해 있을 많은 국군포로들과 강제 납북자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을 환기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들이 처한 참혹한 인권환경에 대한 논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말년에 그는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
북한에 남아있는 국군포로와 납북자들의 생활상을 증언하고
그들의 귀환을 위한 활동을 벌여왔다.
2006년 11월 19일, 북한에서의 오랜 노역으로 얻은 지병이 악화되어
서울대학교 부속 병원에서 사망하였으며, 11월 21일에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군인 정신의 귀감
그는 1994년 11월 26일 전역식에서 길고 참담했던 포로생활을 이겨낸 힘은 전쟁터에서 배운 군진수칙이었다고 회고하였다.
한국 전쟁 당시 국군 포로 가운데 약 320여 명이 북한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여 전향했다는 점에서, 43년만에 이루어진 예비역 육군 중위 조창호 선생의 귀환은 '진정한 군인 정신의 귀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