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빙점] 육교
교양학부 앞에서부터 포장 도로가 1킬로미터 가까이 남쪽으로 뻗어 클라크 회관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홋카이도 대학 구내에서 가장 긴 이 길을 학생들은 중앙로라고 불렀다. 그 중앙로를 5교시 수업을 마친 요코가 걸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벚꽃철도 지나고 구내에는 신록이 울창했다. 특히 공학부 앞의 단풍나무는 푸르름이 더해 그 밑을 지나가는 요코의 뺨이나 흰 블라우스에까지 푸른빛이 비쳤다.
“요코 씨, 오랜만이군요.”
뒤에서 요코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와이셔츠 차림의 기타하라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 기타하라 씨, 지난번에는 고마웠어요.”
요코의 입학식 날, 기타하라는 도오루와 함께 하숙집을 찾아왔었다.
“천만에요……아니, 요코 씨, 키가 좀더 자랐나…….?”
기타하라는 요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요. 아직도 한창 자랄 때니까요.”
“오늘은 벌써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회관에 잠시 들러 책을 사려고요……..기타하라 씨는요?”
“난…….실은 요코 씨가 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머!”
“미안해요. 난 이학부이고 요코 씨는 교양학부잖아요? 게다가 학생들이 수천 명이나 되니 학교 구내에서 요코 씨와 우연히 만날 때를 기다리다가는 언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어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기다리고 있었어요.”
“괜찮아요, 우린 친구 사이니까요.”
요코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괜찮아요?”
“그럼요.”
“그럼 앞으로 가끔 기다려도 괜찮겠어요?”
기타하라는 다그치듯 물었다. 조금 앞서 걸어가던, 약간 얼룩이 진 흰 가운 차림의 사나이가 기타하라의 말을 듣고 돌아보며 히죽 웃었다.
“너무 자주 기다리면 피차 공부에 지장이 있을 텐데요.”
“알겠어요. 아, 이제야 마음이 놓여요.”
기타하라는 정말로 안심한 듯이 말했다.
“기타하라 씨, 어린이날 준코 씨가 직접 김밥을 만들어서 갖다 줬어요.”
“그랬다면서요. 그녀한테서 전화가 왔었어요. 이번에 요코 씨랑 쓰지구치와 함께 드라이브하자고 하던데, 어떠세요, 요코 씨는?”
“함께 가고는 싶어요. 하지만…..”
요코는 잠시 망설였다.
“차멀미라도 하나요?”
“아뇨. 기타하라 씨한테는 미안하지만, 전 드라이브보다 걷는 걸 더 좋아해요…….”
“………….”
“전 말이에요, 기타하라 씨. 지금으로부터 30년쯤 전의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에요.”
“30년 전요? 그렇다면 1935년이군요.”
“그래요. 지난번에 우연히 그 당시 아사히가와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았어요. 자동차는 별로 없고 마차나 자전거가 많더군요.”
“그랬을 테지요.”
“이시카리 강도 깨끗해 연어떼가 강물을 타고 많이 올라왔더군요. 전 그 당시처럼 살고 싶어요. 물론 번거롭고 불편한 점도 많겠지만, 왠지 무척 시적이었던 것 같아요.”
“글쎄요. 그러고 보니 방금 지나온 작은 강에도 연어가 거슬러 올라오던 때가 있었겠군요.”
짙게 쌍꺼풀 진 요코의 눈이 기타하라에게는 퍽 아름답게 보였다. 이학부 앞에 심어져 있는 느릅나무 아래를 천천히 걸으면서 기타하라는 행복감에 젖어 있었다. 그는 이렇게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에 요코가 다시 자신의 가슴속으로 돌아와 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조급하게 생각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기타하라는 요코가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걸어 주는 것만으로도 지금은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0년 전의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모임 같은 걸 만드는 것도 좋겠군요.”
기타하라는 이렇게 말하다가 문득 요코의 시선을 느꼈다.
“그래요.”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기타하라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맞은편에 있는 후루가와 강당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무나 꽃이라도 보고 있나 했는데 딱히 그런 것도 아니었다. 기타하라는 요코의 시선을 쫓아가 보았다. 그러자 그 시선은 반대쪽 보도를 걸어가는, 오른쪽 어깨가 약간 올라간 학생의 등 뒤로 쏠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타하라 씨, 백년 후의 미래를 체험해 보는 모임이라면 몰라도 30년 전의 옛날을 추억하는 모임엔 가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요코의 시선은 여전히 그 학생의 등 뒤에 고정되어 있었다. 문득 그 학생이 홱 돌아서서 요코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내 빠른 걸음으로 정문 쪽으로 구부러져 갔다.
요코는 예쁜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그 학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부드러운 눈길이었다. 기타하라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친구인가요?”
“네? 아, 지금 그 학생요?”
그제야 요코의 시선이 기타하라에게로 돌아왔다.
“친구라기보다는……뭐라고 해야 할까요?”
요코는 머뭇겨렸다.
“어쩐지 그 학생이 노려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요코 씨와 함께 걸은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건가요?”
“어머, 왜요? 그렇지 않아요.”
기타하라는 더 이상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방금 본 학생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클라크 회관 안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학생들로 붐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왼쪽에 있느 ㄴ학생 서점으로 갔다. 요코는 곧 중앙 쪽으로 걸어갔다. 책을 주문해 놓은 모양이었다. 기타하라는 요코가 무슨 책을 사는지 알고 싶었지만 조금 떨어져서 옆에 놓인 문예 잡지를 집어 들고 차례를 펼쳤다.
‘메마른 바다’, ‘혼자 있는 시간’, ‘바람이 끝나는 곳’.
한결같이 고독한 제목이라고 생각하면서 기타하라는 방금 본 학생이 요코의 친구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오래 기다리셨죠?”
요코가 다가왔다.
“무슨 책을 샀어요?”
“<소공자>와 <소공녀>요.”
“네?”
“아이들이 읽을 책이에요, 놀랐나요?”
요코는 작년 여름에 친구가 된 고아원 아이들에게 책을 보내 줄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타하라에게는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아니, <소공자>나 <소공녀>는 우리가 읽어도 재미있어요.”
기타하라는 그런 책을 사는 요코가 문득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가서 차라도 마시지 않을래요, 요코 씨?”
“기타하라 씨, 목마르세요?”
“그렇지는 않지만……”
“그럼 좀더 걸어요.”
요코는 누구나 흔히 그렇듯이 곧장 다방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요. 요코 씨는 걷는 걸 좋아한다고 했죠? 요코 씨와 사귀려면 다리를 어지간히 단련시켜 둬야겠군요.”
교양학부에서 이미 1킬로미터 가까이 걸어왔는데도 구내인 탓인지 얼마 걸은 것 같지 않았다.
“미안해요, 제 주장만 해서……”
“아뇨, 오히려 요코 씨는 너무 자기 주장을 하지 않는 편인 걸요. 좀더 편하게 마음속에 있는 말을 했으면 좋겠는데……”
요코는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기타하라 씨, 아까 본 그 학생 말이에요, 그 학생…..교양학부 학생이에요.”
요코는 미쓰이 다쓰야라고 이름을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아까 만일 다쓰야가 기타하라를 소개해 달라고 말했다면 요코 자신은 어떻게 했을까? 아마 소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사정을 다 알고 있는 기타하라는 당연히 미쓰이의 성(姓)에 의문을 품었을 것이다. 기타하라의 놀라는 표정이 다쓰야에게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가?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었다.
지금 차라리 기타하라에게 말해 버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이렇게 도 생각해 보았으나, 요코는 역시 말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얼마전에 삿포로에 왔던 게이조가 도오루와 요코에게 다쓰야에 관한 얘기는 절대로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기타하라는 방금 한 요코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요코는,
“기타하라 씨, 아까 본 그 학생 말이에요, 그 학생…..”
하고 한참 머뭇거리다가,
“교양학부 학생이에요.”
하고 말을 이었다. 그 머뭇거리는 동안 무엇인가 그녀를 망설이게 만든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요코는 아마도 최소한,
“교양학부 학생이에요.”
하고 말하기 위해 망설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 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기타하라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아, 그래요? 어떤 사람인데요?”
“……….”
순간 요코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실례했어요. 그냥 궁금해서요.”
“……….”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기타하라는 진지하게 말했다. 요코는 미소를 지었다.
“저야말로 미안해요. 하지만 그 사람에 대해선 노코멘트예요.”
“알겠어요….그런데 왜죠? 아, 그렇지, 노코멘트라고 했지요?”
기타하라는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웃었다. 요코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잔디밭을 따라 심어져 있는 쥐똥나무 울타리 옆을 지나 정문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요코 씨, 나란 인간은 좀 바보 같은 데가 있나봐요. 지금까지 내가 감시하고 있었던 사람은 도오루뿐이었어요. 하지만 요코 씨를 노리고 있는 사람은 나와 도오루만이 아닌 것 같군요.”
“싫어요, 기타하라 씨. 노리다니……..”
“실례했어요. 요코 씨를 무슨 사냥감처럼 취급한 것 같군요. 사과할게요. 하지만 이 노린다는 말은 아주 정확한 표현이에요. 남자의 마음이란 그다지 고상하지 못하니까요.”
기타하라는 쾌활하게 말하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아무튼 도오루에게만 신경을 쓴 건 안이한 생각이었어요.”
“그런 말만 하시면 그냥 가 버릴 ㄹ거예요, 기타하라 씨.”
요코는 웃으면서 말했다.
“용서해요, 다시는 그런 말은 하지 않을 테니.”
기타하라는 짐짓 익살스럽게 말했다.
홋카이도 대학 정문을 나와 오른쪽으로 돌며 ㄴ헌책방과 다방, 잡화점 등이 늘어선 전찻길이 있었다. 앞쪽은 밋밋한 언덕이고 바로 근처에 낮은 육교가 있었다.
기타하라는 요코에 대해 조급하게 굴지 않으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뜻하지 않은 학생의 출현으로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린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육교로 가는 길을 걸으면서 기타하라는 좀 우울했다.
전차가 조용한 경적을 울리면서 두 사람 옆을 지나갔다.
요코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기타하라는 망설였다. 전에는 서로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믿고 있었기에 침착하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기타하라에게는 자신에 대한 요코의 관심도를 알고 싶은 초조감이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을 경박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기타하라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기타하라는 천천히 걸으며넛 되풀이하여 생각했다.
요코는 요즘 젊은 여성들과 어디가 다를까. 드라이브보다는 걷는 것을 좋아하고 볼링보다는 독서를 좋아한다고 한다. 고고춤보다는 다쓰코의 일본춤에 매력을 느끼고 다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잔디밭에서 대화하기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젊은 사람으로서의 기백이 없는 것도 아니다.
‘곧게 뻗은 몸매도 누구보다 아름답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기타하라는 요코를 바라보았다. 미소를 머금은 요코의 눈이 기타하라를 쳐다보았다.
육교 앞의 건널목에서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금세 육교의 한쪽이 자동차로 메워졌다. 두 사람은 왼쪽으로 돌아 파란 신호등 쪽으로 갔다.
“서클은 어디에 가입했죠?”
건널목을 지나 빨간 신호등을 쳐다보면서 기타하라가 말했다.
“흑백합회에요.”
“아, 미술부요?”
“네. 아버지도 학창시절에 흑백합회에 가입해 그림 공부를 하셨대요.”
흑백합회는 전통 있는 미술 서클로, 홋카이도 대학 구내에 많이 피어 있는 흑백합에서 이름을 딴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그림을 그리시나요?”
“솜씨가 상당하세요. 색조가 좀 어두운 편이지만, 전 아버지 그림이 참 좋아요.”
기타하라는 자신도 그림을 그려보고 싶었다.
신호가 파랑색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이 걷기 시작했을 때였다. 갑자기 스포츠 카 한 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사람들을 향해 왼쪽으로 꺾으며 달려왔다. 순간 기타하라는 요코의 팔을 잡고 얼른 뒤로 물러섰다. 다른 사람들도 간신히 차를 피했다. 머플러를 없앤 그 차는 부르릉 소리를 내며 달려가 버렸다. 길모퉁이에서 자주 보게 되는 무모한 운전이었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으나, 사람들은 저마다 화를 냈다.
“고마워요, 기타하라 씨!”
그 말을 듣고서야 기타하라는 잡고 있던 요코의 팔을 놓았다.
“큰일날 뻔했어요.”
탄력 있는 팔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조금 더 가서 육교의 난간에 기대섰다. 육교와 나란히 시내 전차의 레일이 뻗어 있고, 그 아래는 삿포로 역의 플랫폼이었다. 육교는 역구내를 크게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플랫폼은 낡은 과선교에 가려져 그 절반밖에 보이지 않았다.
기타하라는 방금 요코와 함께 그 차에 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며 플랫폼에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요코는 역이라는 곳은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도 어쩐지 서글픈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서 있는 육교 아래에서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갔다. 기차가 멈춰 서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행렬이 이리저리 흩어져 승강구 쪽으로 모여들었다. 승강구에서 승객들이 쏟아져 나온 다음 그 앞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다시 기차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플랫폼에는 배웅 나온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 중에는 기차에 다가가서 뭐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발차를 알리는 벨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배웅하는 사람들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손을 흔들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바람 탓인지 아니면 육교 위를 달리는 자동차 소음 탓인지 역에서 나는 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마치 텔레비전을 소리가 나지 않도록 켜 놓고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배웅하는 사람들도 걷기 시작했다. 금세 기차도 사람들도 플랫폼에서 사라지고 역원들만이 부동 자세를 취하고 잇었다. 요코에게는 그것이 몹시 쓸쓸하게 보였다.
“어째서 기차가 떠나자마자 사람들은 곧바로 돌아가 버릴까요?”
“옛날처럼 증기 기관차가 칙칙거리며 천천히 출발하는 시대라면 언제까지나 손을 흔들며 배웅할 테지만, 이제는 금세 떠나 버리기 때문이겠지요.”
“그래도 전 하다 못해 그 사람이 타고 있는 기차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는 배웅하고 싶어요.”
“그것이 참으로 작별을 아쉬워하는 마음이겠지요.”
“그래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상대에게 보이지 않더라도 전 손을 흔들며 서 있고 싶어요.”
“요코 씨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에요.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곧바로 등을 돌려 가버린다는 건 역시 박정한 거죠. 누군가를 배웅하는 마음에는 원래 아쉬움이 깃들여 있는 것이니까요.”
문득 기타하라는 자신이 요코를 배웅하러 나갔다가 기차에 뛰어 올랐던 일을 떠올렸다.
다시 기차가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또 거의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올라탓다. 무슨 일로 삿포로에 내리고 무슨 일로 여행을 떠나는 것일까? 이 역에 내리거나 떠나는 것으로 일생이 결정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왠지 역에는 운명적인 무엇이 얽혀 있는 것 같았다. 요코는 아무리 사람들로 붐비고 있어도 역에는 슬픔이 깃들여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진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플랫폼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행하는 사람들이 꽤 많군요. 대체 무슨 용무들이 있는 걸까요?”
삿포로 역의 5층짜리 스테이션 빌딩 벽에 눈길을 주고 있던 기타하라가 말했다. 그도 요코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출장을 떠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부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오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렇겠군요. 시집오는 새색시도 있을지 몰라요.”
기타하라는 요코를 흘끔 바라보고 나서 소리내어 웃었다.
기타하라의 말에 요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마을이나 도시에서 자란 여성이 결혼해서 낯선 삿포로 거리로 옮겨오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기타하라 씨, 결혼 때문에 고향을 떠나는 여성은 있어도 결혼한 여성이 사는 도시로 남자가 옮겨오는 경우는 별로 없겠지요?”
“그야 그럴 테지요.”
“그것만 보더라도 결혼에 따르는 어려움은 남자 쪽보다 여자 쪽에 더 많을 것 같아요.”
“하긴 그렇겠군요. 여성이 결혼 때문에 낯익은 도시나 부모 형제, 친구들을 떠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겠지요. 하지만 중요한 건 그 사실을 남편이 어떻게 받아들여 마음을 써 주는가 하는 것이겠지요.”
기타하라는 요코가 자신과 다키가와에서 일생을 함께 살아줄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요코 씨는 어느 도시를 좋아해요? 역시 아사히가와인가요?”
“글쎄요.”
요코는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질문의 타이밍이 빗나간 것 같군요.”
“어머!”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전 평지보다는 항구처럼 언덕이 있는 도시가 더 좋아요. 그래서인지 고베나 나가사키 같은 곳이 좋아요. 하코다테와 오타루도 좋고요. 오타루는…….”
요코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전 좀 무딘 편인가봐요. 나쁘게 생각지 말아요.”
“그렇게 신경 쓸 것 없어요. 오타루에는 초등학교 때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요. 전 오타루의 거리를 좋아해요.”
요코는 아까 학교 구내에서 본 다쓰야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쓰야가 태어나서 자란 거리라는 생각만 해도 오타루의 이미지는 요코의 가슴속에서 새로워졌다. 오타루는 이미 자신을 버린 어머니가 살고 있는 거리가 아니라 다쓰야라는 동생과 또 한 사람의 오빠가 살고 있는 거리였다. 요코는 그곳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아무래도 요코 씨가 나보다 훨씬 어른스럽군요…….항구 도시라면 아바시리도 깨끗한 거리지요. 형무소로 유명하여 좀 거친 도시처럼 느껴지지만, 마치 공원 속에 거리가 있는 듯한 아름다운 곳이에요. 그곳에 호수만도 네댓 개나 돼요.”
“어머, 멋있겠네요.”
“지나치게 아름답다고 여겨질 정도지요. 그리고 아바시리의 유빙(流氷)은 한번쯤 구경해 보는 것도 좋을 거예요. 언젠가 그걸 꼭 보여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유빙은 혼자 보는 게 가장 좋을지도 몰라요.”
요코는 혼자 보는 게 가장 좋다는 그 유빙을 보고 싶었다. 오타루를 경우한 하코다테 행 기차가 길게 꼬리를 늘어뜨리고 육교 아래를 지나갔다. 요코는 기차에서 눈을 돌려 오른쩍으로 보이는 키 큰 푸는 포플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