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개를 쓰다듬으며
발코니의 창을 연다. 밖에서 아우성치던 바람들이 죄다 동시에 밀려든다. 담배를 피우러 나왔지만 흠향하듯 즐기기는 틀렸다. 불 없는 담배만 입에 물고 공연히 상현반달이나 쳐다본다. 생각의 타래가 겨울 푸른 새벽 속으로 영혼처럼 하르르 풀려간다. 하늘거리며 날아가던 생각의 올 하나가 툭 불거진다. ‘사랑을 믿다’, 누군가의 소설제목이다. 나는 그 의미를 알 수가 없다.
맞은 편 동 층계참의 창으로 사내가 나타난다. 겨울이면 일주일에 두세 번쯤 이 시각 즈음에 그를 본다. 희끄무레 얼굴과 어깨부위만 보인다. 네댓 해 보아왔지만 거리가 멀어 여전히 형체가 뚜렷하지 않다. 나이 가늠도 안 된다. 길에서 만나도 모를 것이다.
그가 계단참의 창을 조금 여는가 싶어 나도 발코니의 창을 좁게 연다. 그와 나는 동시에 라이터를 켠다. 빨간, 그의 담뱃불이 피어오른다. 그도 나의 담뱃불을 볼 것이다. 나는 삼켰던 연기를 길게 내뱉는다. 직선으로 뻗은 연푸른 연기가 바람을 가른다. 연기와 어둠의 농도는 다르다. 연기는 날렵한 상현반달의 흰빛이 흩뿌려진 푸른 어둠 속으로 빠르게 존재를 감춘다. 그와 나의 담배연기는 서로 만날 수 있을까. 그와 나 사이로 무거운 침묵과 깊은 밤이 역사처럼 쌓인다.
그는 느릿느릿 담배를 피운다. 내가 두 모금을 할 때 그는 한번을 빤다. 나도 그를 따라 천천히 피운다. 오늘은 그가 먼저 돌아선다. 늘 내가 먼저 돌아섰는데. 복도 등이 켜진다. 그는 스테인리스 난간을 짚고 8개의 계단을 올라 407호 아니면 408호, 자신의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 아쉬울 것은 없다, 또 볼 텐데 뭐.
두 개의 담뱃불은 꺼지고 겨울새벽은 적막하다. 나는 사내를 상상한다. 그도 나를 생각할까. 그는 무엇을 했거나 하는 사람일까. 나처럼 은퇴했을까. 위층에 피해를 주는 시각도 아닌데 그는 왜 계단참에서만 담배를 피울까. 나처럼 겨울에는 발코니에서 피워도 되지 않을까. 아내의 성화 때문일까. 아내는 있을까. 있더라도 금슬은 좋을까. 그는 걱정이 많은 사람일까. 혹시 자신의 소망대로 자라지 못한 자녀들이 있는 건 아닐까. 여생은 고단하지 않을까, 고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별안간 아이 울음소리가 자지러진다. 귀를 기울이지만 방향을 모르겠다. 이어 그르렁그르렁 뭔가 목구멍에 걸린 듯 고통을 참아내는 소리가 들린다. 늙고 묵직하다. 두 소리가 갈마들며 화답한다. 무명 찢어지듯 높지만 불안하고 애절한 가락, 그리고 깊은 상실의 분노를 삼키는 듯 낮지만 무거운 음색. 무슨 사연이 있어 둘 다 저리 절절할까. 혹시 새끼 밴 암고양이가 아픈 것일까, 그래서 수고양이가 슬픈 것일까. 아니면 위험에 빠져 다급해진 수고양이 때문일까. 서로 어떤 상실을 예감한 것일까.
예전에 블록 담장 위를 비 맞으며 걷던 회색빛 털 고양이를 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말할 수 없이 울가망한 기분이 됐다. 고양이란 동물은 생김새며 울음소리며 하는 짓이며 청승맞다. 이런 나를 어떤 사람은 표현력이 부족하다고 했다. 고양이를 무지하게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긴 했지만. 어쨌거나 고양이는 사람을 참 슬프게 하는 존재다.
나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빤다. 저만치에서 누군가 어지럽게 떠드는 소리가 낭자하다. 나는 까닭도 모른 체 불평하면서 궁금하다. 창을 조금 더 연다. 청년 둘이다. 각각 바지주머니와 점퍼주머니에 양손을 찌른 채 어깨를 좁게 모으고 걸어온다. 하나는 캡을 꾹 눌러썼고 다른 하나는 점퍼 후드를 뒤집어썼다. 이십대 중후반쯤을 통과하고 있겠구나. 가까워지면서 졸가리 없는 둘의 상소리 섞인 불평불만이 분명해진다. 캡이 소리친다. “뭐, 취직도 하고 결혼도 하라고! Fuck it!(오라질, 엿 먹어라!)” 후드는 추워서인지 캡의 말에 대한 동조인지 모를 몸짓, 진저리를 친다. 나는 지하철 광고 카피를 떠올린다, 힘내라는 말 대신 힘을 주세요. 문득 캡이 나를 올려다본다. “아저씨, 담배 하나 던져 주면 안 잡아먹지.” 동무가 씨식잖게 철딱서니 없어보였는지 후드가 손사래를 치며 말린다. “……주제에 담배는 무슨!” 나는 담배를 갑 채 던져 준다. “나이스 피처, 라이터!” 나는 라이터도 던져 준다. 그의 불손이 조금도 불경스럽지 않다. 오히려 미안하구나. 직접화법으로 듣는 고충이 바늘처럼 찔러대는구나. 그대들이 취업과 결혼은커녕 사랑하는 마음조차 랩으로 둘둘 말아두고 사는데, 나는 고작 까닭 모를 불평만 했구나.
캡이 켜대는 라이터 불은 바람 때문에 자꾸 꺼진다. 후드가 점퍼의 지퍼를 내리고 품을 넓힌다. 캡이 그 속에서 불을 댕긴다. 옳지 둘이 함께 하면 되지. 나는 흐뭇하다. 캡의 입에서 빨간 불이 피어오른다. 후드가 그 불을 나눠 받는다. 캡은 나를 외면하여 연기를 내뿜고는 돌아보며 꾸벅 절한다. 그지없이 순진하고 공손하다. 나는 둘에게 손을 흔든다. 저만큼 멀어지는 둘의 뒷모습이 애잔하다. 삿됨 하나 보이지 않는다. 불량기는 본래 그들의 모습이 아니다. 가장 고운 시절에 고울 기회를 잃어버렸구나.
―나는 날마다 벽 앞에 서 있었다. 정말 다르게 살고 싶었다. 나는 며칠째 잘 먹지도 않고 먼 산만 바라보는 개를 품에 안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눈부신 집, 천국을 가기 위해서. 한달음에 달려 가 본 입구에 세워진 푯말에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버리시오. 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늙은 개도 보았고 누군가는 버려져야 했다. 나는 아주 잠깐 죽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늙은 개를 쓰다듬으며 벽 앞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짐했다, 너를 잃어야 하는 천국이라면 다시는 가지 않겠다고.
안희연 시인의 시 〈면벽의 유령〉을 내 식의 산문으로 읽은 것이다. 진정 눈부신 순간들은 이 도시에 있다, 는 카피 구절은 새빨간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럴지라도 늙은 개를 쓰다듬는 마음으로 이 겨울밤을 함께 걸어보면 어떨까. 눈부시지는 않을지언정 너를 잃지 않아도 좋을 순간들을 만날 수 있지 않으려나. 사람은 너를 사랑한 그 한때의 힘으로 곧잘 살아가기도 하니까.
세상이 강요한 관성대로 살다가 여기까지 왔다. 느낌표 몇 개쯤 있기를 바랐지만 총체적으로 쫄딱 망한 삶이었다. 당장 마침표를 찍어도 누구하나 안타까워하지 않을 생이다. 하지만 그나마 남은 인생을 위해 잠시 쉼표를 찍어둬야 할 것 같구나. 사랑을 믿다, 라는 말을 믿을 수 있을 것도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