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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7. 묵상글 (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 좋은 땅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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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7.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좋은 땅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땅은 다 좋은 땅입니다. 모래땅에서는 땅콩이 잘 자라고 진흙땅에선 미나리가 자라고 습한 땅에서는 버섯이 잘 자랍니다. 기름진 땅에는 콩이나 고추가 잘 자랍니다. 각기 주어진 땅에서 알맞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땅도 관리하지 않을 때 못 쓰는 땅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밭을 갈아엎고 거름을 주는 수고와 땀이 꼭 필요합니다. 물론 준비된 씨앗도 중요합니다.
우리 마음의 밭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우리 마음의 밭은 선합니다. 선하신 분께서 당신의 숨, 얼을 불어 넣어주셨으니 당연히 선합니다. 좋은 밭입니다. 이 좋은 땅이 어느새 길바닥으로, 바위로, 가시덤불로, 방치되지는 않는지 살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땅을 결코, 쓸모없는 땅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땅은 다 좋은 땅이 분명한데 관리를 하지 못해 폐허가 된다면 그 책임은 관리하지 않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씨의 운명은 그 씨가 떨어진 땅에 의해 좌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씨앗이 싹트지 못하고, 자라지 못할 땅이라면 지금 갈아엎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큰 은총을 주더라도 받는 사람이 잘 관리하지 않으면 곧 잃어버리게 됩니다. 많은 경우 자기가 잃어버리고는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갔다고 생각합니다. 은총을 은총으로 여기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주가 주어져도 소용이 없습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루카 8,15)을 두고 하는 말이니만큼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대로 행함으로써 우리 마음의 밭을 잘 가꾸어 좋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길바닥이라는, 바위라는, 가시덤불이라는 장애물들을 극복해야 합니다. 두려워 말고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한 발 내딛기를 소망합니다. 사랑이신 그분을 만나려면 사랑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 하느님의 숨을 받은 우리는 모두가 좋은 밭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하느님께서 책임져 주십니다. 그분께서 책임져 주시는데, 왜 주저하고 좋은 밭을 묵혀 두려 하십니까? 풍성한 열매를 기대합니다. 사랑의 열매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분명하게 기억할 것은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하신 말씀입니다. 듣고 싶은 것을 듣는 데 익숙하다면 들리는 것을 있는 그대로 들을 수 있는 마음을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 내 말을 적게 하게 될 것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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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7. 성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말씀나누기. 성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 김레오나르도. 2022.09.17 05:13
http://www.ofmkorea.org/ofmhomily/508466
* 그간 성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의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묵상글은
맨 아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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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7.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오늘 우리가 들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그 해설까지도 직접 해주셨습니다. 이 비유의 의미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씨”와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 뿌리는 사람”은 예수님이시며, 나아가서는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씨 뿌리는 사람은 그 길바닥이나 바위나 가시덤불이나 좋은 땅이거나 땅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곳에나 씨앗을 뿌립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씨앗도 그 영혼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에게나 뿌려집니다. 마치 “아버지께서는 악한 이에게나 선한 이에게나 똑같이 햇살을 비추시고 옳은 이에게나 옳지 못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듯이”(마태 5,45)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이에게 ‘같은 씨앗’이 뿌려집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이요, 그 씨앗은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요, 그리고 그것은 선사된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동시에 우리에게 씨앗을 틔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우리는 말씀을 실현해야 할 소명, 곧 사랑을 실현해야 할 과업을 짊어진 존재들임을 말해줍니다.
<둘째>는 “땅” 혹은 “밭”에 대한 것입니다. 좋은 씨가 좋은 열매를 맺듯, 열매는 씨앗에 따라 수확량의 차이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어느 밭에나 동일한 ‘같은 씨’가 뿌려졌습니다. 그러니 수확량은 ‘씨앗’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땅의 차이에서 오게 됩니다.
이는 씨앗이 싹을 잘 틔우도록 ‘땅을 일구는 일’과 잎이 잘 자라고 꽃이 잘 피어나고 열매가 잘 맺도록 ‘나무 자체를 잘 돌보는 일’입니다. 곧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귀 기울임과 응답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열매를 맺듯이, 죽어야 맺는 과정이요, 자신이 죽어서 타인을 먹여 살리는 열매가 되는 과정입니다.
<셋째>는 “결실”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결실은 자신을 떠나 타인을 위할 때만 타인 속으로 들어가 썩어 열매를 맺게 됩니다. 곧 자신을 내어주어야 그 열매를 맺는 이 과정은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맺어지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우리와 더불어 바로 이 일을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신 구원의 협조자요 도우미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의 구원에 공동작업을 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동반자요, 동행자들 입니다. 결국, 말씀의 씨앗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우리의 관계 안에서 이루어져 가며 열매를 맺게 됩니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장소요 공간이 됩니다. 말씀이 열매 맺어가는 자리요 거처가 됩니다. 따라서 내 형제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내 가정, 내 공동체가 바로 나의 소명이 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할 인인지요!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주님!
당신 밭의 일꾼이 되게 하소서.
당신이 뿌리신 말씀의 씨앗을 일구게 하소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 맺게 하소서.
형제들 가운데 당신 사랑 번져가고, 세상이 거룩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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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7.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어릴 때의 기억입니다.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는 ‘난 사람’이 있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다. 음악을 잘 하기도 하고, 그림을 잘 그리기도 하고, 운동을 잘 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든 사람’이 있다. 공부를 잘 해서 좋은 대학을 가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의사, 변호사, 정치인, 사업가가 된다. 세상에는 ‘된 사람’이 있다.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등대와 같아서 지친 이들에게,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이 되어준다. 여러분은 먼저 ‘된 사람’이 되어라.” 5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선생님의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예전에는 된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는데 요즘은 난 사람이나 든 사람이 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명예, 권력, 재물에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난 사람과 든 사람이 이끌어가는 사회는 건강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무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께서는 난 사람이기 전에, 든 사람이기 전에 먼저 된 사람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동창 신부님들 중에는 ‘난 사람’이 있었습니다. 운동을 잘하는 친구, 노래를 잘하는 친구, 사교성이 좋은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축구대회를 하면 선수로 뛰면서 멋진 골을 넣기도 했습니다. 예술적인 감각과 운동신경이 별로 없던 제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 중에는 ‘든 사람’이 있었습니다. 유학을 가서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교수가 되어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공부를 잘 하지 못했던 제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 중에는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지치고 힘든 친구의 짐을 기꺼이 대신 지고 가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남들이 싫어하는 일을 즐겁게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가 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듯이 동창들이 편히 쉴 수 있는 그늘이 되어주는 친구입니다. 소심하고, 이기적인 제게는 그림의 떡이었습니다. 재능이 뛰어나지도 못하고, 머리가 명석하지 못한 제가 그래도 닮을 수 있는 것은 ‘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열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된 사람에 가까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난 사람에게도 떨어집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난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지만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에 말씀에 온전히 의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삼손은 엄청난 능력이 있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힘에 의지했던 삼손은 유혹에 넘어가서 눈이 멀고 말았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자기 꾀에 넘어가는 것을 보곤 합니다. 도박을 잘 아는 사람들이 도박에 중독되곤 합니다. 율법과 계명을 잘 알았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하느님을 제대로 따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교만과 위선을 나무라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언제나 풍성하게 열매 맺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늘 칭찬하셨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황무지와 같은 마음이었을지라도 싱싱한 열매를 맺습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면서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자캐오와 같은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에게 구원받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놓는 사람들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는 그분들의 땀과 눈물이 열매 맺은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서 열매 맺지 못하고 있다면 지금 나의 마음이 난 사람만을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까요? 지금 나의 마음이 든 사람만을 바라보기 때문은 아닐까요? 내 마음이 된 사람을 지향하고 있다면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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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7.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는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이 오래되다 보니, “복권이라도 당첨되었으면”이라는 헛된 기대까지 하면서 매주 복권을 구매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선배가 “복권은 순간의 만족일 뿐이야. 더 힘들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자, 이 형제님은 순간의 만족이라도 좋으니 복권에 당첨만 되었으면 좋겠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사실 돈벼락을 맞아봐야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대학 졸업식, 결혼식, 직장 취업 등 살면서 경험했던 최고의 순간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런데 그 경험의 기쁨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까?
최고의 날이었는데도 그 시간을 지금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감정적인 힘이 서서히 줄어들어 행복하지 못한 내가 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여행 갔을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너무나 멋진 경관을 바라보면서 감탄합니다. 이런 곳에 살면 정말로 행복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날 밤 모기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래서 한숨도 자지 못했습니다. 집에 가고 싶지 않을까요?
특별한 날만을 떠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일상 안에서의 기쁨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순간의 기쁨을 바라보고, 만족스러운 지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예를 들면서, 주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솔직히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듭니다. 우리는 좋은 씨앗을 길이나 바위 그리고 가시덤불에 뿌릴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 시대의 농사는 지금 우리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먼저 씨를 휘휘 뿌린 다음 밭을 갈았습니다. 능률적이고 쉬운 방법이겠지만 씨앗의 허비가 많았습니다. 그러니 어떤 것은 길에, 바위에, 가시덤불에 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 안에서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 마음이 좋은 땅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좋은 땅이라 불릴 수 있는 마음은 특별한 삶 안에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농부들의 일상생활을 예를 드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의 보통 삶 안에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노력으로 좋은 땅이 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백 배의 열매를 맺게 될 때의 기쁨이 클까요? 아니면 아무것도 열매 맺지 못할 때의 기쁨이 클까요? 먼 훗날 주님 앞에 섰었을 때,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해 실망하고 좌절해서는 안 됩니다. 정반대의 모습인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기쁨을 주시기 위해 지금도 우리 마음 안에 씨앗을 뿌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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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부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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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917.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일어나는불꽃
-흐르는 물의 비유-
T.평화를 빕니다
예수님께서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와
그 비유에 대한 해석을 다 해주셔서
전 흐르는물의 비유에 대해서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흐르는물이 웅덩이 고여서 흐르지 않으면
그 물은 썩게 됩니다. 물이 썩으면
그 안에 있는 생명들도 살수 없게 되어
죽게 됩니다. 흐르지 않고 고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흐르는 물이 웅덩이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르게 되면 그 물은 살아나고
시냇물이 강이 되고 강이 바다가
되어서 물도 살게 되고 그 안에 생명도
살게 됩니다. 고이지 않고 계속 흐른다는
것은 산다는것의 의미이기도 합니다.
말씀은 생명이고 흐르는 물과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이 사람의 마음과 생각에만 머무르고
말씀의 실천과 복음적 삶으로 흘러가지
않는다면 말씀의 생명은 잃게 되고
그 사람도 역시 말씀이라는 글자와 관념에
묶여 생명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이 생각과 마음에 머무르고
말씀이 실천과 삶으로 흘러가게 될때
말씀의 생명은 더 힘을 얻게 되고 말씀을
간직한 그 사람도 더 큰 생명을 얻게 되어
마음속 평화와 기쁨이 더 커져갈 것입니다.
마치 흐르는물이 시냇물이 되고 강이 되어
바다가 되어서 수 많은 것들을 살게 하는것
과 같이 말씀을 받아 간직하여 실천하는 이들도
이와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도 말씀을 듣기만하여 간직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천할수 있는 은총을
청하는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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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의 김 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의 그간 묵상글
210917. 성 프란치스코 오상 축일-상처가 은총이 되게
http://www.ofmkorea.org/index.php?mid=ofmhomily&page=116&document_srl=426773
말씀나누기 김레오나르도 2021.09.17. 05:10
오늘은 프란치스코가 오상 받은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프란치스코의 모든 사건 중에서 오상 받은 것만 따로 떼어 기념하는 겁니다.
이참에 저는 상처받음에 대해서 성찰하고자 합니다.
얼마 전부터 상처받았다는 얘기가 너무 흔하고,
까딱하면 힐링, 힐링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저를 보고 여러분은 즉시 상처와 힐링을 얘기하는
요즘 행태에 대한 거부감이 제게 있는 것 아니냐
생각하실 분도 있으실 텐데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너무 쉽게 상처를 받기 때문이고,
-제 상처를 제가 키우기 때문이며,
-상처를 키우는 것이 공포증 때문이고,
-상처와 치유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트라우마라고 하고
힐링이라는 표현이 다분히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것처럼
상처와 치유를 영성이 아닌 심리학적으로 대처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힐링 남용에 대한 저의 비판의 근거는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프란치스코에게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오히려 상처를 당하게 해달라고 했고,
-상처를 하느님에게서 받았지 인간에게서 받지 않았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수난에 대한 공경심 때문에
매년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면 라베르나에 가 축일을 지냈고,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1224년 축일에
그는 두 가지 소원을 주님께 아뢰는데 그것이 하나는 죽기 전에
주님의 십자가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고 다른 하나는
얼마나 사랑이 크시기에 우리를 위해 그 큰 고통을 감수하시고
감당하셨는지 그 사랑을 할 수 있는 한 많이 느끼게 해달라는 거였지요.
그러므로 상처 치유의 해법도 프란치스코에게 있습니다.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과
-상처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승화시키는 겁니다.
상처를 좋아하거나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상처를 사랑하면 그것은 더 이상 상처가 되지 못할 터인데
그런데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쉽지 않지만 프란치스코처럼 상처를 사랑하면
상처는 더 이상 상처가 아니고 은총이 됩니다.
오늘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을 우리가 지내는 것이
바로 상처가 은총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리고 하느님에게서 받으면 은총이고
사람한테서 받으면 상처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신앙인이고 더 나아가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사람에게서 상처받지 말고 하느님에게서 받을 것이고,
사람이 준 상처라도 하느님이 주신 은총으로 치환하거나 승화해야겠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이렇게 살기로 다짐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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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용서받은죄인 2021.09.17 05:45:14
신부님의 말씀을 같은 전례시기에는 어떻게 묵상하고
강론하셨는지 비교하면 더욱 풍성한 내용을 알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올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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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받은죄인 2021.09.17. 05:44:17
18년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상처의 치유를 프란치스코에게 배우다.)
http://www.ofmkorea.org/148343
16년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어느 형제의 강론)
15년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큰 불길도 작은 불꽃에서부터)
14년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13년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나의 상처로 주님의 상처를)
12년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똑같이)
11년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상처 때문에 내게도 보물이)
10년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상처로 드러난 그의 사랑)
08년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
(얼마나 사랑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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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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