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1월 제플린은 영국의 맨티코어 스튜디오에 들어가
미국 순회공연을 위한 연습을 시작했다
당초 연주여행은 2월부터 시작할 예정이었으나 로버트의
편도선염이 도져서 어쩔 수 없이 4월로 연기했다
3월에는 존 본햄이 빠진 다른 멤버들이 딘 힐의 Crocodile pub에 출연,
왕년의 락 넘버들을 연주하기도 했다
연주여행은 4월 1일부터 시작되었다
이 연주여행은 미국의 신문잡지에 의해 크게 보도되고 이와 때를
같이해서 제플린에 관한 출판물도 많이 발간되었다
그 중에는 Led zeppelin vs Kiss라 이름 붙여진 것이 있는가 하면
호화판 프로그램을 모아 만든 화보집 An evening with Led zeppelin도 있었다
이 책은 초 대형판인데다가 스테이지의 컬러사진만도 42장이나 되었다
그런데 묘한 것은 한마디의 문자도 들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해 미국 연주여행은 모두 51회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 중에는 6일 동안을 연속 공연키로 되어있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일정도 포함되어 있었다
6월 21일부터 27일까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제플린 공연을 관람하고자 모여든 관중은 모두
12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로스엔젤리스 포럼에 몰려온 관중도 그 정도였다
11만 명의 청중들을 동원한 바 있는 오클랜드에서의 2회에 걸친 공연직후 로버트에게는
예기치 않았던 비보가 날아 들었다
5살된 아들 클라크가 전염병을 앓아 중태에 빠졌는데 이미 손을 쓰기는 늦었다는 소식이었다
7월 28일 목요일자 Daily express 지는 1면 머리 기사로 '록계의 억만장자,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잃다'
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었다
미국 연주여행을 마지막 10일 남겨놓고 뉴올린즈에 체제하고 있던 로버트는 부인 모린으로부터
국제전화를 받고 아들의 비보를 전해 들었다. 로버트는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이 때문에 남은
연주여행의 스케줄은 잠정적으로 연기되었다
그런데 연기된 연주회는 결국 취소되고 말았다
로버트의 아버지도 아무리 연주여행이 공적인 스케쥴에 의해 이루어지긴 하지만 이것이 한 가정의
단란함보다 더 소중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제플린 멤버들의 탄탄한 유대관계를 잘 알던 사람도 제플린의 해산이 다가오지 않을까 우려를 표명
하기 시작했다. 이미 해산의 기미는 로버트의 아들의 사망으로 서서히 노출되기 시작했다
다른 멤버들간에 비록 아들의 사망이 비극이긴 하지만 그로 인해 남은 공연을 취소할 것까지는 없지
않았느냐하는 불만의 분위기가 감돌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뒤 한동안 로버트는 침묵을 지켰다
침묵의 기간이 너무도 길었기 때문에 해산할 것 같다는 의혹은 더욱 짙어만 갔다
10월이 다 지나간 어느 가을날, 겨우 지미가 보도 관계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로버트를 엄습한 비극은 너무도 감당키 어려운 것이었다
이제 로버트에게 필요한 것은 가족과 함께 단란하고 조용하게 사는 것이다
우리 레드제플린의 단결은 예나 다름없이 탄탄하다
우리 멤버 전원은 공연 취소에 얽힌 일들을 잊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해산이란 도저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된다
제플린은 이미 제플린의 것이 아니라 세계 팬들의 것이다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게끔 제플린은 커있는 것이다
로버트는 언젠가 다시 노래를 시작할 것이다
다만 지금은 그의 뜻에 맡겨 결정을 내리는 마지막 일만이 남아 있다"
1978년 5월,제플린이 활동을 개시할 것이라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어떤 스테이지에서 연습을 한 일이 이러한 뉴스가 나오게 한 원인이었는데
새로운 앨범의 연습을 위한 것인지,연주여행을 위한 연습인지는 분명치가 않았다
6월에 접어 들면서 로버트는 로컬 밴드의 세션을 시작했다
우선 그는 Melvin hercules란 이름의 무몀의 밴드와 함께 작은 클럽을 돌며
스탠더드 넘버를 노래하고 있었다
한편 존 폴 존스와 존 본햄은 런던의 애비로드에서 폴 매카트니&윙스와 함께
수퍼 세션에 참가했다
이 세션에는 핑크 플로이드 등 다른 그룹도 참가했다
11월 런던의 Wembly empire pool 에서는 축구시합에 참가한 로버트의 모습이 보였다
이 시합이 있은 뒤 제플린은 런던의 리허설 스튜디오에 들어가 6주간에 걸친 연습을 계속했다
이 해가 더 저물 무렵 제플린은 스톡호름으로 건너가 아바의 레코딩 스튜디오 Polar를 방문했다
북구라파 특유의 음악적 환경과 아바의 단결력에 감탄한 제플린의 멤버들은 새로운 앨범에 대한
레코딩을 그곳에서 하기로 결정하여 당장 리허설에 들어갔다
레코딩에는 1979년 1월 한달이 거의 소모되었다
영국의 팬에게 있어 1979년 최대의 뉴스는 뭐니 뭐니 해도 제플린이 8월 4일 Knebworth 훼스티벌
에 출연한다고 발표한 사실이었다. 5월 말에 있었던 첫 번째 발표에서는 8월 4일 한번만 출연한다고
되어 있었으나 6월에 들어서서 다시 발표할 때는 8월 11일에 추가공연을 한다는 것까지 발표했다
Knebworth에서의 제플린 콘서트는 피터 그랜트의 협력을 받은 훼스티벌 조직위원 Frederick Bainster
에 의해 기획되었다. 제플린의 출연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11시까지의 연주시간으로 공연할 그룹은
제플린이 선정을 했다
콘서트가 열리기 1주일 전 콘서트장 주변에 캠프를 설치한 팬들은 사운드 점검을 위해 연주장을 방문한
제플린의 들을 수 가 있었는데 이때 존 본햄의 11살난 아들 제이슨 본햄이 존 대신 Trampled under foot
의 드럼 부분을 두들겼다
장난 삼아서 어린이가 연주를 한 것이었는데 그 드럼 사운드는
존의 것이 아닌가 착각을 할 정도로 세련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콘서트에서 제플린은 두곡의 신곡을 선보였는데 In the evening과 Hot dog가 바로 그것이었다
신곡 2곡을 포함하여 제플린은 3시간 30분 동안 23곡을 연주하였는데 청중들은 졸라 열광했다
레드제플린은 2년전의 능숙한 기량을 완전히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Knebworth Festival은 많은 사람들에게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고
특히 처음으로 제플린을 대한 젊은 팬들에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이 되었다고 한다
8월 20일 새로운 앨범 In through the out door가 전세계로 동시에 발매 되었다
재킷의 디자인은 Hypnosis가 담당했고 지미와 피터 그랜트도 이 계획에 참여했다
담황색으로 된 이 재킷 표지에는 앨범의 타이틀과 그룹의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첫째장의 표에는 바의 정경이었고 둘째 레코드의 커버는 흑백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앨범은 9월 중순에 접어들면서 서서히 저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양국에서 차트의 1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특히 미국의 앨범으로서는 최초로 7주 동안은 계속 No.1으로 버티었다
이러한 대히트는 제플린의 모든 앨범에까지 파급되었다
제플린이 지금까지 내놓은 모든 앨범이 빌보드 선정 탑 앨범 200에 들어간 것이다
이러한 사태는 레코드 사상 처음있는 일이었고 심한 불황으로 도산 직전에 있었던
미국의 레코드계를 돕는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미국에서는 이 앨범에 대해 음악적 다양성과 녹음기술의 세련됨이 크게 평가되었다
특히 기술적인 분야에 있어서 새 앨범의 초정밀 감각의 레코딩 수법은 1979년도에
있어 제일 가는 것이라고 호평을 받았다
수록곡중 Fool in the rain이 미국에서 싱글 커트되어 차트 20위까지 올라 갔다
여기까지의 이야기는 월간팝송 1987년 1월호 앵콜 레드제플린과
1986년 6월호 로버트 플랜트와 지미 페이지편에서 무단추출믹서를 한 것이다
자 그럼 지금부터 레드제플린의 8집에 대한 나의 허접한 감상문을 몇 자 적어보겠다
쪼까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여자가 이 앨범 재킷을 상당히 좋아했다.
그녀는 이 앨범 재킷과 비슷한 바를 찾아서 신촌을 헤메이다가 결국 이곳과 닮은 곳을 하나도 찾지 못하고 소돔에 머물렀다.
바에 앉아있는 흰색 양복 남자의 느낌은 약간 쌍커풀을 연상시키고 그 옆에 앉아있는 여인은 레드 제플린 영상을 보며 즐거워하
는 단골녀(엑스클래스 사장 누나 후배)와 많이 닮았군. 피아노를 연주하는 꼰대는 소돔의 윗층에 기거하며 2749일 내내
나에게 볼륨 줄이라고 가혹한 암바를 걸며 영업을 방해했던 영감탱이를 연상케하고 바에서 일하는 뚱뚱이 문신맨은 왠지 효자
일당의 롭과 닮았군.
암튼 어렸을땐 별 의미를 두지 못했던 재킷이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동종업소에서 일하다보니 가장 흥미로운 재킷이 되어버렸다.
In the Evening
이곡에서 지미 페이지는 1964년 록의 클래식 테마인 Gloria에서
사용했던 날카롭고 울리는 기타 오브리가토를 조절했다.
힘든 일을 마치고 집에 귀가하여 사랑하는 여인에게 열정을 호소하는
평범한 남자의 저녁 일상을 담백하게 담은 내용이다.
가끔 신청 받았던 걸로 기억된다.
확실하게 신청 받은 기억은 딱 한 번 인데~~
흐린 기억 속에서 두랑고와 올드 넘버 세븐이 빚어낸 안개 속에서 어느 누군가로부터 신청을 받았을지도 모르는 곡이다.
워낙 유명한 곡이기에 분명히 누군가 신청했을 것이다.
그건 내가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실은 알고 있는 진실이다.
South Bound Saurez
존 폴 존스와 로버트 플랜트가 같이 만든 곡으로
스윙 풍의 리듬이 꽤 매력있다.
존 폴 존스의 발랄한 피아노 연주가 좋은 느낌을 전달해 주었고
지미 페이지 특유의 다소 산만한 듯 하면서도 찢어질 듯한 느낌의
솔로는 역시 제플린다운 미묘한 쾌락을 발산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로버트의 목소리가 너무 탁하다는 것 정도....
나름대로 리듬도 잘 타고 감정도 넣어서 잘 부르는 것 같긴 한데~~
가래가 한 웅큼은 섞여 있는 듯한 허스키한 목소리가 왠지 좀 듣기 거북하다.
이것도 어느 누군가가 신청했던 것 같다.
맨 정신이었을때는 리퀘스트받은 기억이 없는데 앞에 있는 손님이 주는 폭탄주를 열라 빨고 존나 꼴았을때 누군가가 신청한것 같다.
이상하게도 나는 어떤 밴드를 막론하고 그들의 후반부 앨범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후반부 앨범들의 어떤 곡은 제목만 보아도 생소한 것들이 있다.
이것도 그중의 하나인데 아무래도 많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초창기 앨범들에 비하여 손이 덜 갔기 때문이 아닐런지~~
암튼 이 노래 이 제목 처음 보는 것 같다.
만약 어떤 술집에서 술 마시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옆에 앉아서 이곡의 제목을 말하며 이거 누구 노래냐구 물어보면
한참 머리를 싸메고 지랄하다가 결국에는 모르겠다고 대답할 소지가 충분히 있는 곡이다.
그만큼 나는 밴드의 후기 앨범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이언 메이든도 주다스 프리스트도 블랙 쌔벗도 머틀리 크루도 퀸스라이크도 딥 퍼플도...... 그들의 후기 앨범들은 많이 들어보
지 못했고 어떤 곡들이 담겨 있는지 기억도 명확하게 나지 않는다.
레드 제플린도 마찬가지인것 같다.
피지컬 그래피티부터 시작하여 인 쓰루 디 아웃 도어, 코다(이것도 후기로 쳐야하나??) 이런 앨범들은 왠지 정이 안 간다.
프레젠스 앨범이야 좀 좋아하긴 하지만 그건 앨범이 통째로 좋다기 보다는 앨범 속에 들어있는 몇몇 킬링 트랙과 그것들로부터
분사된 메모리가 너무 소중했기에 좋아하는 것이고 순수하게 앨범의 사운드에 매료당했다고 보기엔 좀 거시기한게 있지.
암튼 이 노래 어느 누군가로부터 신청 받았는데 누가 신청했는지는 잘 모르겠고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을걸 보면 그리 산뜻한 인물이 신청한것 같진 않다.
ㅋ 이러다 어떤 사람이 '내가 신청했다' 이렇게 댓글 달면 존나 민망할것 같군 ㅋㅋㅋ
Fool in the Rain
싱글 커트 되어 20위까지 랭크된 전적이 있는 곡이다.
이곡에서 로버트의 목소리는 아주 편안하고 듣기 좋다.
이 앨범에서 그의 보컬은 디스트가 걸리지 않은 본연의 톤이 오히려 더 듣기 편하다.
개인적으로 그리 좋아하는 곡은 아니지만 들으면 들을수록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든다.
리듬이 참 재미있고 위트가 넘쳐 흐른다.
흑인 필이 넘쳐 흐른다고나 할까??
존 본햄의 파워풀한 드럼만 쏙 빼놓고 게 들어보면
흑인 재즈 밴드의 그것과 흡사한 영역도 많이 보인다.
초장에 언급했던 이 앨범 재킷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바를 찾아 돌아다니던 여자가 신청했던 기억이 난다.
재밌는건 그때 사람이 너무 많아 이 노래 못 틀었다는~~ ㅋㅋ
그 여자 말고도 다른 누군가 이 곡을 언제인가 신청한 것 같기도 한데 명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암튼 별로 안 틀었다.
Hot Dog
로커빌리 풍의 노래....
존 폴 존스의 피아노 소리가 유달리 명쾌하다.
로버트의 목소리는 얼핏 들으면 락앤롤의 황제였던 엘비스 프레슬리 느낌이 난다.
목소리 자체는 내가 좋아했던 그의 톤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만.....
로버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정말 음악에 맞추어 센스있게 잘 부른다는 느낌이 지배적이다.
양놈들이 가끔 신청했던 것 같다.
이 앨범에서 내가 좋아하는 몇 안 되는 것으로 어린 시절에도 이 곡 하나 만큼은 진심으로 좋아했다.
Carouselambra
런닝 타임이 10분이 넘는 대곡이다.
존 폴 존스의 신서사이저 연주가 전반을 휘황찬란하게 수놓으며
존 본햄의 폭발력 강한 드럼이 역시 쉴새없이 휘몰아치는 역동적인 곡이다.
레드제플린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
앨범 수록곡중 가장 하드락 적인 색채가 강렬한 곡이다.
레드 제플린의 스튜디오 곡 중엔 In my time of dying 다음으로 가장 길다.
난 어린 시절부터 이 곡을 정말 싫어했다.
지루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곡이라고나 할까??
나이 들어서 들어도 여전히 루즈하다.
이런 나를 보며 진정한 제플린의 사운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족속들도 더러 있긴 한데~~
뭐 그 사람들이 말하는 트루한 사운드가 뭔지 모르겠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적어도 내가 알고 있는 레드 제플린 팬이라 할 수 있는 인간들 중에 이 곡에 대하여 좋다고 언급하는 사람들은 단 한 명도 못봤다.
그 결과 이 곡에 대한 신청은 one이었다.
확실하게 기억하는데 어느 누군가 이 노래를 신청했다.
그때의 느낌이란 참 묘했다.
이건 마치 틈새사업이라고나 할까??
토킹바 같은데서 아무도 상대하지 않는 맥주 마시는 새끼에게 다가가 친절하게 대해주어 그 놈으로 하여금 양주만 존나 까게하는
유능한 바텐더의 틈새 사업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느낌에 사로잡혔다.
새로 온 매니저가 틈새 사업을 성공시켰을때 원래부터 그 맥주 마시는 새끼를 잘 알고 지내며 홀대했던 기존의 바텐더 같은 경우
는 이런 상황에서 상당히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아니 저 새끼 왜 우리들이 일할때는 맥주 마시다가 새로운 매니저가 오니까 양주 까는 거야??'
모 요로코롬 자괴감 더하기 모멸감 콤보를 동시에 느낄 것이다.
음악도 마찬가지이다.
레드 제플린 팬을 자처하면서도 잘 안 듣는 레드 제플린 곡을 신청하는 어떤 사람과 조우했을때의 그 느낌이란 실로 신묘하다.
아~~ 나는 레드 제플린 팬이 맞나??
뭐 이런 생각과 함께 아~~ 쪽팔리다라는 모멸감도 살짝 들구......
하지만 이런 틈새 사업으로 인한 자멸감은 순간일 뿐이다.
곡이 흐르는 10분여의 시간이 흐른 후 나의 기억은 다시 이 노래를 망각하게 되었고 별다른 데미지를 받지 않게 되었다.
결국 이 글을 쓰는 이런 순간에나 이 곡에 대한 기억이 살포시 떠오를 뿐이다.
All My Love
역시 존 폴의 신서사이저 연주가 전반을 미려하게 장식하는 고급스러운 느낌의 발라드다.
이곡에서 로버트는 청년의 느낌을 완전히 벗어난 중년의 지적인 중후함과 완숙미를 들려준다.
하드락적인 멋은 그리 강하게 묻어 나오지 않지만 분명히 매력적인 곡이다.
이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 충분히 이해할수 있다....
레드 제플린을 좋아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냥 록 매냐들 마저도 아주 많이 신청했던 파퓰러한 곡이었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곡으로 레드 제플린이라기 보다는 그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기 팝 넘버라고나 할까??
암튼 그런 느낌이 아주 강한 곡이다.
어린 시절에 나는 이 곡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주혹새 하기 전만 해도 나는 이 곡을 별로 그닭 즐기진 않았다.
들어서 기분이 나쁘진 않은데 들었을때 와 좋다 죽인다 요로코롬 닭살 돋을 정도로 소름 끼치는 전율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다.
근데 주혹새 하면서 신청곡 많이 받아 듣다보니 알게 모르게 세뇌되었나??
지금은 너무나도 좋아하는 곡이다.
특히 후렴구가 굉장히 마력적이다.
별 거 아닌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사람의 심회를 끄는 강력한 거시기가 있다.
I'm Gonna Crawl
고백하건데 이 앨범에서 유일하게 좋아했던 노래다.
로버트 플랜트의 마지막 절규를 들을 수 있다고 자위를 하며 참으로 슬프게 들었다.
지금은 거물급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손석희 사장이 내가 고딩시절 그러니까 80년대에 어떤 라디오 방송을 진행했다.
그 역시 레드 제플린의 광적인 팬이었는데 1987년 봄에 손석희씨는 자신의 방송에서 레드 제플린의 앨범을 하나하나 소개하며
그들의 대표곡을 송출해주셨다.
그때 이 앨범을 소개하며 그가 이런 멘트를 하며 이 곡을 틀어주셨다.
"로버트 플랜트의 마지막 절규를 들을수 있는 곡입니다."
아 그때 어린 맘에 손석희씨가 하신 이 멘트가 어마무시하게 멋있게 느껴졌다.
그는 나 못지않게 로버트 플랜트의 광적인 팬이었는데 매 방송마다 로버트의 불가사의한 가창력에 대해 극찬에 극찬을 거듭했다.
아마 냉소적인 주혹새 회원들은 그런 그를 보며 영혼없이 빨아준다고 한심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의 어린 나에게 손석희씨의 그러한 광신도적인 모습은 엄청나게 멋지게 보였다.
암튼~
이 노래를 끝으로.... 손석희씨는 더 이상 레드제플린 시리즈를 하지 않았다.
레드제플린에서 로버트 플랜트의 절규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어서였을까??
(나는 존 본햄 사후 발매된 레드제플린 음반은 순수한 그들의 앨범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정말 알 수 없는 아련한 기분에 사로잡혀 우울하게 들었던 곡이다.
지미 페이지의 기타도 마지막으로 키스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어떤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고
존 본햄의 드럼도 그렇고....
존 폴 존스의 베이스도 그렇고.....
로버트 플랜트의 보컬은.....
흡사 아무도 없는 어둠 속에서 홀로 외로이 울부짖는 것만 같다.
그의 목소리가 울부짖을 때 나의 마음 한 구석은 미어졌다.
레드 제플린이 공연에서 단 한번도 연주하지 않았던 곡으로 로버트 플랜트의 가슴을 찢어발기는 애절한 목소리가 압권이다.
참으로 오래만에 듣는 그의 샤우팅은 약간 맛이 간 듯 하면서도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생전의 존 본햄은 이 곡이야말로 진정한 로버트 플랜트의 가창력이 발휘된 곡이라고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론 이 곡이 가장 좋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앨범에서 확실히 좋다고 말할수 있는 곡은 바로 이 I'm Gonna Crawl하나 뿐이었다.
나머지 곡들은 그냥 뭐 아주 나쁘지 않다.
낫 뱃 이 정도이구 확실하게 나의 심장에 꽂혀 파르르 떨린 곡은 이것이 유일했다.
신청을 많이 할만한 곡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외면한 곡이었다.
올 마이 러브같은 경우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신청했는데 그에 반해 아임 고나 크로울은 거의 개차반이었다.
앨범에 담긴 음악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음반이 좋은 이유는 역시 이 재킷 때문이라 할 수 있겠다.
여러가지 형태로 변형된 재킷은 하나같이 술집에서 고독하게 술을 마시고 있는 남자와 그를 둘러싼 술집 사람들의 일하는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데 동종업소에서 다년간 일했던 사람 입장에서 상당히 흥미로운 사진들이다.
어렸을때는 이 앨범 재킷을 보면서 정말 별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다 성장한 이후에도 술집 사장 하기 전에는 이 앨범 재킷 보면서 별 생각 없었다.
비로소 주혹새 하면서부터 이 앨범의 다양한 재킷 버전을 보며 매우 강한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내가 만약 조금만 더 일찍 바에 관심이 있었다면 이 앨범 재킷에 나오는 이런 바 디자인을 구상했을 것이다.
웨스턴..... 나무..... 쥬크 박스......
왠지 낭만적인 70년대의 정서가 뭉클하게 솟아오르는......
첫댓글 In Conspiracy with Sat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