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월 23일부터
5박 6일 일정으로,
- 직접 대면하고 담소한 기간은
끽해야 25일(?) 남짓일 뿐인데,
52년 가까이 우정을
이어온 신묘한 인연의 친구 찾아 -
불편한 몸 무릅쓰고 4년 반 여
만에 다시 만난 이바구 올씨다.
친구로서는
有朋自遠訪來니 不亦樂乎라
(멀리 한국에서 친우가 찾아오니
이 어찌 반갑고 즐겁지 않으랴!,
朋あり、遠方より來たる、
亦た樂しからずや)로
웰컴이겠지만
소생 상대방에게 신세를 지게
될 때 좌우명.
1. 상대방의 일상에 끼치는 폐해는
최소한으로
2. 능력 범위에서 가볍게 편의를
베풀 수 있는 일정 조율。
해서,
지난해 12월 초부터 LINE으로
열 차례 넘게 소통해
두 달 후의 친구 직장의 공식 여행
일정에 소생이 끼는 스케줄로 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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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페에 익숙하지 않았던
4년 반 전.
오직 第善 어르신 한 분의
댓글 소통에 기대어
주저주저하며 올렸던 '오키나와
기행 시리즈'를 취사 발췌, 비교하며
이바구를 열어 가리라 맴 먹었다.
아스라한~ 약 52년 전인
1972년.
첫 만남의 흑백 사진이다.
와~! 20대의 이 두 청년.
力拔山氣蓋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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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이 신묘한
인연의 청년을 소생 집에서
하루 묵게 해서 다음 날
배웅험시로, 한껏
폼 재고 찍은 사진이다.
( 빛바랜 위 흑백 사진들은 친구가
기적적으로 찾아내 2019년 5월에
SNS ‘LINE’으로 전송받은 것임)
한 인생을 살면서 사람끼리의
인연은
‘필연인가? 우연인가?’
이 친구와의 만남 – 헤어짐 -글고,
15년의 망각- 다시 18년 만의 재회!
인간의 인식 밖의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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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965년 한일협정을 맺고,
마산 창원 수출공단 준공을
일 년 앞둔 1972년 초가을이었다.
그 시절, 외국인 관광객은
눈 씻고 봐도 거의 없을 시기였다.
더구나 작은 지방 도시 전주임에랴!
우리 안경원에 꽤 지쳐
보이는 20대 초반의 외국인
한 명이 다소곳한 태도로 들어왔다.
미군정 하의 오키나와 하고도
타이완에 가까이 있고,
현금 중국과 영토 분쟁의 센카쿠열도
(尖閣列島)를 마주 보고 있는 섬
구메지마(久米島)에서 온
‘마츠모토 도오루(松元 徹)’군이다.
한쪽 안경렌즈가 깨져 있었다.
마침 소생은 일본어 학원에 다니는
중이어서 떠듬떠듬, 손짓 발짓으로
안경을 봐주고 자고 가라고 했다.
마츠모토 군을 하루 숙박시킨다고
‘전주 중앙직할파출소’에 신고
해야만 했던 기억은 확실하다.
이게 신묘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3년 후, 일본 신주쿠역
앞에서 그야말로 뜻하지 않게 조우,
신주쿠(?)에 있는 오키나와 유학생
기숙사에서 대여섯 차례 만나고는
소생은 귀국했다.
연하장으로 매년 인사를 나누다,
2004년(?)에 그의 고향 구메지마
(久米島)에 가 그의 집에 며칠을
묵었다. 대면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후 몇 번의 이사로 주소, 전화번호를
잃어, 피차 망각의 15년 세월이 흘렀다.
그랬던 게 최신 정보 통신 덕으로
‘LINE’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된
이 신묘한 인연.
새록새록 그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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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군정하, 오키나와의 본토 유학생
으로 선발되어 미야자키(宮崎) 대학
졸업. (이때 발길 닿는 대로의 세계
여행에서 소생과 만남).
주:
이번 만났을 때 그 속 깊은 내용을 들었다.
구메지마는 작은 섬이지만
자급자족이 가능할 정도로
물산이 풍부하여 14C 무렵
이미 독립된 부족국가를 형성,
중국의 明과 조선은 물론
동남아 제국과의 무역
중계항으로 경제 소강국이었단다.
이 경제력을 노려
明과 류큐왕국에 예속, 지배하로,
다시 명치유신 후 일본제국 치하로,
비참 극치의 '오키나와 전쟁' 후, 다시
미군정 치하로,,,,
끊임없이 외세에 핍박당하고 있는
역사 속에서, 친구는 '자기 정체성'에
심한 갈등을 겪었다고,,,
그 혼동과 갈등의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모모타로(桃太朗)'식 무모,
무작정의 해외여행을 했고,
첫 여행지가 우리나라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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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오이타(大分) 현 오이타 고교에서
화학 교사로 근무.
(기억이 흐미하나 오이타현 출신의
현 아내는 그의 제자다고 들었다.)
3. 오키나와 , 아니 류큐의 지식인으로
역사, 정치의식이 남 다르고,
자유 의지 또한 강하여 교사직을
내려놓고 구메지마로 귀향.
주 :
타이틀에 ' 슬픈 역사,,,'를
붙인 건 외세의 핍박과 착취는
현재 진행형임을 이번 여행에서도
나름 재확인해서다. 일본은 전쟁에서도,
현금도 오키나와, 아니 류큐를 捨石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아래는 4년 반 전 올렸던
'오키나와 기행'에서 발췌.
-------만물의 영장은 '인간'이라는
동물이라고 배웠고 그렇게 믿어
왔었는데, 이게 소생 낫살 꽤나
들어가면서 그 명제에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동물 중에 가장 하등은 인간이란
'모순체 ' 가 아닐까 하는
그런 직감적 의심올씨다.
서로를 처절하게 살육하는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란 동물.
잔머리 굴리는 것에 불과한
'지성 또는 이성'을 내세워
동물의 으뜸, 곧 영장인 체 하나,
같은 종인 서로를 잔인하게
대량 살륙하는 '사람'이란 동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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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동남북 아시아의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라는 그 덕(?)으로,,,
8세기 이래 중국의 수, 당, 명나라'에
조공하며 예속.
1600년 경 일본의 사쓰마 번
(지금의 가고시마현)의 침공으로
메이지 유신 廢藩置縣 때 류큐왕국은
일본의 오키나와 현으로 예속.
그리고
당시 인구의 1/3이 사망한 1945년
'오키나와 전쟁' 이후 쭈우욱 ~
미군, 아니 미국의 아시아 패권을 위한
전략 요충지로 역할하고 있다는 걸
이 번 여행에서 얻은 소생 나름의
느낌이다.
(친구가 읽기를 권유한 아래 책으로부터)
해서,
이 오키나와에 우리나라 청장년의 징병
또는 징용으로 전몰된 선대를
보낸 우리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미군의 오키나와 상륙전쟁의
비참하고, 슬프고 참 바보 같은 전쟁의
유적을 친구의 안내로 돌아봤다.
...............
오키나와
아니, 전쟁의 비참함을 온몸으로
겪은 류큐인의 일치단결된 언어는
'평화' 다.
오키나와에서는 그 어떤 단어도
'평화' 란 단어 앞에 설 수 없다.
오키나와 전쟁의 실상에
접할 때마다
(인간사에서) 전쟁 이상 잔인하고,
전쟁 그것 이상 (인간에게) 오욕 투성인
것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들 (오키나와인)의 생생한 체험
앞에 어느 누구도 전쟁을 긍정하고
미화하는 사람은 단연코 없으리라,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인간이지만,
그러나, 그것 이상으로 전쟁을
결단코 하지 않겠다는 노력하는 것
또한 우리들 인간이 아니겠는가!
전쟁이 끝난 그 이래로 우리들은
어떠한 명분의 전쟁도 증오하며
평화의 섬 오키나와를 건설하자는
굳은 결의를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너무나 엄청난 피해를 지불
하여 얻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우리들의 신조인 것이다.
(평화 전시관 출구에 걸린 표구에서)
오타사령관이 자결 7일 전
본토의 해군차관 앞으로
보낸 전문 요약.
'-오키나와 주민은 이렇게 싸웠습니다.-
이 전문이 해군차관에게 전해지길,,,
오키나와 주민의 실정에 대해선
지사가 보고해야 되나 모든 통신이
두절된 지금, 육군과 해군은
적의 공격에 대항 싸우느라,
남녀노소 오키나와 주민들이 어떻게
싸웠는지를 보고할 처지가 아니어서
소장이 본 최소한의 실상을 전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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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일본)는
후대의 오키나와 현민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주길
간곡히 부탁합니다.
(해군 소장, 오타 미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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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귀향 후 친구는 우리로 말하면 구청장
격인 촌장 선거에서 승리 도왔던 촌장의
비서실장에.
(2004년 소생이 구메지마를 방문했을
때 비서실에 가봤다. 그러니께 이번
그의 고향 방문은 20년 만이다.)
주:
이번 방문에서 친구는 구메지마를
'샹그릴라"로 만드는데 헌신,
정치 사회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섬의 유지라는 사실을 알았다.
교오토의 니시진(西陣) 과 어깨를 겨루는 久米島紬(つむぎ) 조합 이사장이었다. (소생 이번에 알았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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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쳐간 '52년 세월 바람' 타고 변한
소생과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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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 이제 썰은 접고, 떠납시다.
소생과 함께.
그야말로 '경이로운 70년'의 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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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오키나와 민요 '花'는 20년 전
처음 친구의 고향행 국내선 JAL에
탑승했을 때 신선한 토속 멜로디에
실려, 기창 아래 아름다운 남국의
푸른 바다 수평선에 이는 파도 포말을
보면서 , 애조 아늑하게
꽂힌 노래로, 일본인 친구들에
물어 물어 타이틀을 찾으려 무진
애를 썼던 노래다.
지금 보니 수많은 가수가 이를 불렀는데
민요는 토속성이 있어 그 지방 출신의
오리지널 음색을 가진 가수라야 한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4년 전 나하에서 친구와 상봉했을 때도
못 찾아 第善 어르신께 부탁드리기도
했다. 또 위 소생의 오키나와 기행
사진을 찾는 중 발견한 17845번
게시글에서 逸泉 어르신이 사모님의
청을 배경으로멋지고, 맛깔스레
편집한 노래이기도,,
낯선 이국을 여행 시 긴장이 따르는 건
당연지사, 내리자마자 사건이 터진다.
소바는 당연히 메밀인데
'오키나와 소바'는 메밀이 아니라
밀가루였던 것이다.
색깔이 좀 희끄므리 해도 그렁갑다고
먹었더니 3시간 후 복통이 와
애를 먹었다.
3년 전쯤에서 '밀가루 알레르기'가
생겨 먹는 음식도 제한이 있는 연식이다.
(여행 준비물 제1호는 주식용_ㅎㅎ
상비약과 비상약이다.)
식사 후 4년 반 전 타본 적 있는
모노레일 (ゆい レール) 탑승.
대중교통 이용에는 오키나와
교통전용카드 보다
동전이 훨 편리하다.
개찰대에서 승차권을 넣으려는데
투입구가 보이지 않아 옆 사랍을 보니
액정 파넬에 승차권을 텃취한다.
내 승차권을 살펴보니 QR코드가,,,
아항~ 드뎌!
텃췽 문명의 돼지털(digital) 천하로,,,
멘소레(めんそ~れ)!
- 이랏샤이마세,
웰컴,
환인꽝린-
그러니께
어서 오십시오!
의 류큐어다.
(일본 아그들은 '오키나와사투리'
라고 험시로 류큐란 말을 없애려
애를 쓰나
오키나와 보다 琉球신문, 琉球은행 등
琉球가 곳곳에 훨 많이 눈에 띈다.)
독서열, 독서 인구 세계 1위인
일본이었다.
현란 찬란하게 꾸며진 영상으로
습득(?)되는 것은 휘발성이 높아,
종이 위 활자로 전달되는
독서로 얻는 교양, 지식, 글고
정보 습득에 있어서 째비거리가
안 된다. 진서빨로 뱉자면
足脫不及이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은
백 번 천 번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아직,
일본은 희망이 있다고 나름 생각 킨다.
매년 아쿠다가와, 나오키 등
문학상 당선작 및 작가의 등단은
NHK를 필두로 모든 매스컴이
진지하고 화려하게
심사 과정에서부터 장 시간 대중에게
전파하고, 그 해의 문예상 수상작은
각 서점에 줄을 서서 사야 할정도고,
발표 후 한 달쯤이면 3쇄
이상이 되는 독서열이다고 하니 ,,,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스미마셍!
호텔 루트 인으로 가려는데요?'
'스미마셍!
저희 여기 여행객이어서,,,,'
날은 어두워 지고 행인들은 거지반
여행객들이어서 어쩔 수 없이 폰의
구글 지도 네비게이션, 곧 젊은이들
말로 '구글링' 하면서 가까운 거리면
약 10분 걸릴 거리를 내비게이터의
'다시 경로를 찾겠습니다.' 들어가며
25분 정도 빙빙 돌다, 겨우
찾았다. 아래 호텔이다.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두번째 날은 정기관광버스 여행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첫댓글 52년의 세월이라 중간중간 년도 계산에 오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참착 요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