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题西林壁(제서림벽)
/ (北宋) 苏轼(소식)苏东坡
朴今玉讲解
* 들어가기
송나라 하면 문학가중에서 아마 제일 처음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소씨네 삼부자 일 겁니다.
오늘은 그중의 소식(소동파)의 시를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칠언절구지만 구체적 분류에서 철학적 이치를 담은 시이기에 한번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설명
1) 题西林壁:서림사(西林寺)의 벽에 쓴 시이다. 서림사는 루산(庐山)의 서쪽 기슭(西麓)에 있다.
题:쓰다. 西林:서림사,장시 루산(江西庐山)에 있다.
2) 横看:정면으로 보다. 루산은 늘 남북방향이다. 가로로 본다는 것은 동면에서 서면을 본다는 의미이다.
侧:측면
3) 各不同:서로 다르다.
4) 不识:알지 못하다. 분별하다. 真面目:루산의 진실한 경치, 모양.
5) 缘:왜냐 하면, 때문에. 此山:이 산, 루산을 의미한다.
* 번역문
정면, 측면으로 루산을 보면 기복이 심하고 산봉우리가 우뚝 서 있으며
먼 곳, 가까운 곳, 높은 곳, 낮은 곳에서 루산을 보면 서로 다른 모양을 보여준다
내가 루산의 제대로 된 면모를 보아내지 못하는 것은
내 자신이 루산중에 있기 때문이다.
* 작품소개
송나라 문학가 소식의 시이다.
이 시는 시중에 그림이 있는 경치를 쓰는 시이기도 하고(写景诗) 또한 철학적 이치를 담은 시(哲理诗)이기도 하다.
철학적 이치는 루산(庐山)경치에 대한 묘사에 내포돼 있다.
앞 두 구절은 루산의 다른 형태변화를 묘사한다. 가로로 보면 끊임이 없이 구불구불 이어졌고,
높은 산과 험준한 령(崇山峻岭)이 울창하고 옆으로 보면 산봉우리가 기복이 심하게 이어져 있고,
괴이한 산봉우리가 우뚝 솟아있기도 하고 구름속에 파묻혀 있기도 하다.
먼곳과 가까운 곳에서 본 루산은 산의 특색과 기세가 다르다. 뒤의 두 구절은 심사숙고후의 느낌이다.
다른 방향에서 루산을 보고 다른 인상이 있는 것은 ‘이 산에 몸이 있기 때문’ (身在此山中)이다.
즉 루산을 멀리 떠나 루산의 둘레를 벗어나야 루산의 진정한 의태를 파악할 수 있다.
전체의 시편은 산을 구경하고 나서 본인의 독특한 감수를 이야기하며 루산의 이미지를 빌려
통속한 언어로 철학적 이치를 표현하기에 친절하고 자연스러우며 깊은 여운을 남긴다.
* 창작배경
1084년에 소식은 황주(黄州)에서 여주(汝州)로 발령이 났으며 여주로 갈 때 구강(九江)을 지났는데 친구 参寥와 함께 루산 구경을 했다.
아름다운 산수가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여 루산에서 여행하면서 몇 수의 시를 썼다.
《题西林壁》는 루산을 구경하고 나서의 총정리이다.
* 작품감상
이 시는 루산의 변화무쌍한 모습과 경치를 빌어 이치를 말하면서 문제를 관찰할 때
객관적이며 전면적이어야 하며 만약 주관적이고 단편적이면 제대로 된 결론을 얻어내지 못함을 알려준다.
첫 두 구절인 “横看成岭侧成峰,远近高低各不同”에서는 산을 구경하면서 본 바를 실사구시하게 적어놨다.
루산은 언덕과 골짜기가 얼기설기 섞여 있으며 산봉우리가 기복이 심하게 이어져 있다.
여행자가 처한 위치에 따라 보게 되는 경물로 다르게 보인다.
이 두 구절은 형상적으로 천차만별의 루산풍경을 개괄하고 있다.
마지막 두 구절인 “不识庐山真面目,只缘身在此山中”에서 경치를 빗대어 이치와 체험을 말한다.
루산의 진실된 모습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몸이 루산중에 있기 때문이며 시야가 루산의 산봉우리에 국한돼 있어
루산의 산봉우리, 언덕, 골짜기 등 국부적인 것만 보게 되어 이는 필연코 단편적일 수 밖에 없다.
이 두 구절은 기발한 생각으로 독자들에게 되새기고 상상력이 질주하는 공간을 제공해준다.
이것은 산수를 구경하다가 터득하는 이성적인 인식뿐만이 아니다.
산수를 구경하는 것도 이러하지만 세상의 사물도 관찰하면 대체로 이러하다.
이 두 구절은 풍성한 의미를 내포해 사람들이 사람됨됨이와 일처리를 하는데의 이치를 깨우치게 한다.
사람들이 처해있는 위치에 따라 문제를 보는 출발점이 다르며 객관적 사물에 대한 인식도 일정한 단평성을 가지며
사물의 진정한 모습을 인식하려면 반드시 협소한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 선입견을 떨쳐버려야 한다.
어진 사람은 어질게 보고 지혜로운 사람은 지혜롭게 본다(仁者见仁,智者见智).
자그마한 시가 사람들에게 무한한 되새김과 심사숙고를 하게 만든다.
이 시는 단지 루산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하는 것만이 아니라 동시에 소식이 철학자의 안목으로 얻어낸 이성적인 인식이 포함돼 있다.
이러한 인식이 깊이가 있기에 객관 규칙에 부합이 되며 산봉우리의 수려한 모습이 사람들에게
미적 감수를 줄 뿐만 아니라 또 깊고 영원한 철학적 이치로 마음속의 지혜를 깨우쳐준다.
그래서 이 작은 시는 함축적이며 깊고 오래도록 사고하게 만들며 사람들로 백번을 읽어도 싫어하지 않게(百读不厌) 해준다.
이 시에 함유된 의미는 아주 깊이가 있으나 사용한 언어는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이것이야말로 소식의 언어적 특색이다. 소식은 시를 쓸 때 전혀 문구를 수식하지 않으며 시인이 원하는 바는 소박하고 화려하지 않으며 유창한 언어표현이며 참신하고 이전 사람들이 얘기하지 않았던 경지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지는 또한 수시로 철학적 이치의 빛을 은은하게 드러낸다. 이 시에서 보면 언어의 표현은 간단명료하며 의미는 풍성하다. 언어 자체는 형상성과 논리성의 고도로 된 통일성을 가졌다. 시인은 네 구절중 루산의 형상적 특징을 묘사했고 또 정확하게 산을 볼 때 요령을 장악하지 못하는 이치를 밝혔다. 선명한 감성과 명확한 이성이 어우러져 서로 인과가 되면서 시의 형상은 이성적 왕국의 전형으로 승화된다. 이는 사람들이 왜 천백번이나 시의 뒷 두 구절을 철학적 이치의 경구로 여기는지의 원인이 된다.
만약 송나라 이전의 시가가 지향을 말하거나(言志) 혹은 정을 호소하거나(言情) 했다고 한다면 송나라에 와서 특히 소식에서는 이치를 말하는 것을 특색으로 하는(以言理为特色) 새로운 시의 기풍(诗风)이 나타났다. 이러한 기풍은 송나라 사람들이 당시이후 새로 개발해 낸 풍격이다. 이러한 종류의 시의 특점은 언어가 간단하고 명료하며 의미가 깊고 사물로 이치를 이끌어낸다.
* 철리시(哲理诗,philosophical poem)
이 단어는 서양에서 유래되었고 고대 그리스에서 기원했다. 시인의 철학적 관점, 철학적 이치를 반영하는 시이다. 이러한 시는 내용이 깊이가 있고 함축적이며 철학의 추상을 선명한 예술적 형상중에 내포하고 있다. 고대에는 대체적으로 네 구절의 절구가 많다. 크게 두가지로 나누는데 하나는 일정한 시적 의미가 있으나 함축적이지 못하고 ‘개념이 형상보다 크다’. 다른 한가지는 생동하고 함축적이며 형상중에 이치를 함유한다.
대표작: 《老子·道德经》; 曹操·《龟虽寿》; 白居易·《长恨歌》;苏轼·《琴诗》;陈毅·《冬夜杂咏.青松》
* 소식
(1037—1101, 64세), 소동파라고도 한다. 당나라 초기 대신 苏味道의 후손이다. 소식의 아버지 苏洵은 《三字经》에서 언급된 ‘27에야 노력하기 시작’(二十七,始发奋)한 “苏老泉”이다. 소순이 비록 늦게 분발했지만 그래도 아주 열심이었다. 소식의 이름 중 “轼”은 차앞의 손잡이라는 의미로 묵묵히 위험한 것을 부축하고 어려움을 구함에 있어 없어서는 안됨을 의미한다.
문학과 예술적 영역에서 전면적으로 꽃을 피운 천고의 모든 재능을 다 가진 사람(千古全才)이었다. 그는 북송 중기문단의 리더였다. 시, 사, 산문, 서예, 그림 등 방면에서 아주 높은 성과를 취득하였다. 시의 주제가 광범위하고 말고 호매롭고 과장과 비유를 잘 운용했으며 독특한 풍격을 띠었다. 결국 豪放派 대표가 되었다. 산문에서는 구양수와 함께 당송팔대가에 이름을 올렸다. 그림은 문인화(文人画)를 잘 그렸다.
20세에 진사에 급제했다. 1080년에 ‘오대시 사건’(乌台诗案) 때문에 黄州团练副使로 강직되었다. 만년에 신당집정 때문에 惠州, 儋州로 강직되었다.
구경하기를 엄청 좋아하는 소식은 새로운 임명을 받아 떠나는 길에 몇몇 친구와 루산에 갔다. 루산이 워낙 명성이 자자해 소식전에 이미 많은 문인들이 좋은 작품을 많이 남겨 소식은 더 이상 사족을 가할(画蛇添足)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출발전에 큰소리를 떵떵 쳤다. 이번에 루산에 갓 절대 시사 한수나 글짜 하나 그림 하나도 남기지 않는다고 말이다. 하지만 루산에 가서 얼마 안돼서 자기 뺨 때리는 격이 되고 말았다. 루산의 명성도 컸지만 소식의 명성은 더 커서 산위의 스님이 소식이 온 것을 알고 흥분돼 많은 사람들에게 ‘대문호 소식이 왔으니 빨리 가서 서명을 받자’고 했다.
소식은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희노애락이 얼굴에 다 드러났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추대를 하니 매우 득의양양해 했고 결국 참지 못하고 한꺼번에 ‘루산에 처음 들어와’라는 시 세 수를 썼다. 기쁜 마음을 한껏 표현했다. 하지만 루산 여행중 쓴 시에서 제일 유명한 시는 《题西林壁》이다. 루산의 폭포수에 관해 이백과 徐凝이 시를 썼는데 백거이마저 徐凝의 시에 대해 이기지를 못하겠다고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다. 苏轼의 《题西林壁》와 이백의 《望庐山瀑布》는 후세 사람들에게 루산을 묘사한 시 중 ‘두개의 비할바 없이 훌륭한’(双绝) 작품이라 일컫는다.
대표작: 《念奴娇·赤壁怀古》, 《水调歌头·明月几时有》, 《江城子·十年生死两茫茫》등이다.
* 苏轼的书法作品
* 왕안석과 소식
왕안석과 소식은 한명은 백관의 첫 사람인 승상이고 한명은 만사람이 승복하는 문단의 리더로 북송 송신종 시기의 제일 빛나는 두개의 별이라 일컬을 수 있다. 정치적으로 그들은 의견대립이 팽팽한 정적이며 성격상으로는 서로의 재능을 아끼는 지기였으며 문학적으로는 막상막하인 절세의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일반적으로 정치적 성과는 왕안석이 소식위에 있고 문학적 성과로는 소식이 왕안석 위에 있다. 왕안석의 관직이 소식보다 더 컸으나 그의 모든 정치적 소견이 다 소식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소식의 재능이 더 우월했으나 그의 모든 문학적 성과가 다 왕안석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哲理诗를 쓰는 수준은 두 사람은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당시는 정을 중요시하고 송시는 이치를 중요시한다’(唐诗重情,宋诗重理) 라는 말이 있듯이 송나라는 성숙하고 안정적이며 사고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시대였고 송시의 제일 큰 특징은 철학적 이치를 내포하고 사상이 깊이가 있다. 왕안석과 소식은 바로 송시의 철학적 이치와 깊이를 최고조로 밀어붙인 두 사람이다.
소식의 시는 ‘사건속에 휘말려 있는 자는 헷갈려 하며 방관자는 냉정하게 본다’(当局之谜,旁观者清)는 관점을 표현했으며 심오한 내용을 알기 쉽게 말해 오래 되새기게 만든다. 이 시를 쓸 때 소식은 47세로 세태의 만상을 겪으면서 많은 걸 내려놓고 버리려 하고 요란스러운 명예와 이익의 세계에서 벗어나려 했다. 상황과 심경이 사물을 보는 안목과 결과, 결론에 영향을 줬다.
* 문인화(文人画, Literati painting)
사대부의 사의화(写意画)이다. 사의화란 사물의 형식보다 그 내용, 정신에 치중해 그리는 그림을 의미한다. 민간과 궁정화원의 회화와 다르다. 당나라 王维에서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사회현실을 회피하고 산수, 화목에서 주제를 찾아 개인의 성격을 표현하며 민족압박이나 부패한 정치에 대한 불만의 정도 표현할 때가 있다. 서예, 문학 등 소양과 그림중 경지의 표현을 중시한다. 문인화는 인품, 학문, 재능과 정서(才情)와 사상의 요소를 가지고 있어야 완벽하다 할 수 있다.
대표인물:
위진남북조: 顾恺之; 隋唐五代:吴道子; 北宋:苏轼; 明朝:唐寅; 清朝:郑板桥
* 동산재기(东山再起)
1084년 황주를 떠나 여주로 부임을 가는 길에 길이 멀고 험해 여정이 어려움이 많았기에 소식의 어린 아들이 불행하게 요절했다. 길을 아직 먼데 비용도 다 떨어지고 아들을 잃은 아픔에 상소문을 올려 임시 여주에 가지 않고 우선 常州에 가서 거주하기를 희망했는데 허락을 받았다. 소식은 상주를 본인의 생애를 마치는 곳으로 선택했다.
1085년에 송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조금씩 관직이 올라갔다. 그때 조정은 신흥세력이 목숨을 걸고 왕안석 그룹의 인물들을 압제하고 신법을 폐지하였는데 그들의 행위가 왕안석그룹과 별반 차이가 없다고 보아 소식은 조정에 간(谏议)을 했다. 그는 구당이 집정후 폭로된 부패현상을 공격했다. 이리하여 그는 보수세력의 반대를 일으켰고 다시 모함을 받았다. 결국 소식은 신당이든 구당이든 다 용납을 하지 못하는 인물로 전락해 다시 스스로 외지로 임명받아 가기를 자청했다.
* 동파육(东坡肉)
소식은 미식가였다. 소식이 발명한 미식에 대한 기록은 아주 많다. 1090년에 절강성 서부에 큰 비가 내려 태호(太湖)가 범람을 했고 소식은 서호를 치리하고 둑을 쌓았는데 후에 사람들이 그의 성을 넣어 소제(苏堤)라 불렀다. 항주(杭州)백성들이 감사한 마음에 설을 쇨 때 돼지고기와 술을 한가득 들고 그를 찾았는데 소식은 돼지고기를 네모나게 썰어 요리하게 해서 모든 사람에게 대접했다. 이것이 동파육의 유래이다.
*소감
기본으로 시 배우기 150편에 들어가는 널리 알려진 시입니다. 이 시를 쓰고 나서 소식이 루산을 쓰는 시는 이제 끝났다고 벽에 썼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본인도 이 시에 굉장히 만족을 한 것 같습니다. 내가 서있는 위치에 따라 보이는 것도 다르고 거기에서 얻어내는 결론도 다르고 결과물도 다르다는 겁니다. 내가 알고 보고 느끼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의미합니다. 어쩌면 더 높은 위치에 있으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백도 천리안이 끝을 보려면 더 한층 높은 루각에 올라가야 한다(欲穷千里目,更上一层楼)라고 했겠지요. 다시 겸손함을 불러 일으켜 주는 시이기도 합니다.
모든 부분에 다재다능했던 것을 보면 참으로 부럽습니다. 그림이나 서예에서도 많은 지식을 쌓아가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물론 미식가로서 동파육 말고 또 어떤 음식을 만들었는지 찾아보는 보는 것도 소식을 알아가는 좋은 과정이 되겠군요.
* 생각해보기
1) 전반적으로 여러가지 재능을 다 가진 사람은 또 누구인가?
2) 그렇게 여러번 강직되면서도 본인의 원칙을 버리지 않고 파벌의 싸움속에 묻혀버리면서도 정치적 소견을 굽히지 않은 부분에서 무엇을 배우게 되는가?
* 나가기
철학적 이치가 담긴 시 한수를 배웠습니다. 서정적인 면에서는 당나라가 이미 최고를 찍었기에 송나라 때는 다른 길을 새롭게 닦아 이치를 담은 시에 집중을 했던 것 같습니다. 더 이상은 없다고 할 때 보는 시각만 변화시키면 또 새로운 높이에 도전이 가능합니다. 시를 배우면서 이 한가지만 배우는 게 아니라 주변의 지식도 많이 넓혀져가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오늘은 문인화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아봤습니다. 그림에 대한 지식도 너무 흥미진진한 것 같습니다. 물론 서예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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