획득, 생산, 보전 이라는 일차적 필요성에 의해 지배받는 타산적인 평온의 세계는 편리한 환상일뿐이다.
인간의 삶은 세상의 소모의 운명과 일치할때만 의미를 지닌다.
인간의 삶은 법적 실존만이 아니어서 천체에 떠있는 지구 위에서라면 밤과 낮,
이 지방 저 지방의 구분없이 편재하며, 어떠한 경우에도 합리적 개념들이라는 닫힌 체계안에 가둘 수 없다.
인간의 삶-버림, 흐름, 뇌우로 이루어진 인간의 삶- 은 위의 닫힌 체계가 거두어질 때만 비로소 가능하고 표현될 수 있다.
인간의 삶이 질서와 보존 차원에서 인정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질서와 보존의 힘이 그 어느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 목적을 위해서 해방되고 사라질 때만 의미가 있다.
인류가 물질적 사물들의 조건없는 찬란함속에 고립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은 초라한 것일지언정 그러한 불복종을 누리기 위해서다.
명예와 의무가 금전적 이익을 위한 위선적 수단이라면,
신과 정신은 닫힌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몇몇 사람들이 지적 혼란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가면이 아니던가.
시는 표현 기능을 떠맡는 사람의 삶을 담보로 잡는다.
시적 소모는 시인으로 하여금 가장 기만적인 형태의 행위,
비참함, 절망과 현기증 또는 분노 외에는 아무것도 줄수없는 일관성없는 환여을 추구하게 한다.
종종 시인은 오직 자신의 파멸을 위해서만 단어를 사용할 수 있을 뿐이며,
오물이 삶에서 배척받듯이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척받는 운명을 선택하느냐
아니면 저속하고 피상적인 요구들에 만족하는 평범한 삶을 ㅅ사느냐 둘중 하나를 선택햐아 한다.
순수한 신을 요구하다가 결국 신을 추방하거나 인간을 신과 더욱 분리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이 현재에서 점점 멀어지고 기업을 위해 살게 되면서 이제는 사물이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물의 지배는 온전한 것일 수 없고, 하나의 희극에 불과하다.
사물은 외눈박이의 지배력을 행사할 뿐이며, 새로운 진실이 어둠을 타서 폭풍을 준비한다.
과학은 의식을 대상에 한정할 뿐 자의식에 이르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과학은 기만적인 것이긴 하지만 우리를 정확성에 적응시켜
-과학은 스스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결코 자의식에 이를 수 없음을 고백하기 때문에-
각성상태에 머물게 하는 기능을 한다.
그런가 하면 사상은 산업발전에도 불구하고 유용한 행동너머
본래의 자기자신을 회복하려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를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의 관료적 종교적 거짓의 가면을 벗겨서 자신의 본래모습을 되찾고싶어한다.
그러나 인간 자신으로서의 회귀는 빵이나 망치를 손에 쥐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를 유혹하는 것과 우리의 자원을 증대시키는 것 사이에 선택을 해야 하는 일이 종종 있는 데,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욕망을 포기하는 일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우리가 유복한 상태에 있을 때는 어렵지 않다. 합리적 계산이 쉽게 작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진맥진한 상태라면 그러한 해이한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은 공포와 광기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