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섭(金珖燮)
이산(怡山)
1905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24년 중동학교 졸업
1932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영문과 졸업, 극예술연구회 참가
1945년 중앙문화협회 창립
1950년 [문학] 발간
1956년 [자유문학] 발간
1977년 사망
시집 : [동경](1938), [마음](1949), [해바라기](1957), [이삭을 주울 때](1965), [성북동 비둘기](1969),
[반응―사회시집](1971), [김광섭 시전집](1974), [동경](1974), [겨울날](1975)
275. 생(生)의 감각
여명(黎明)에서 종이 울린다.
새벽 별이 반짝이고 사람들이 같이 산다.
닭이 운다, 개가 짖는다.
오는 사람이 있고 가는 사람이 있다.
오는 사람이 내게로 오고
가는 사람이 다 내게서 간다.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다.
깨진 그 하늘이 아물 때에도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
푸르른 빛은 장마에
황야(荒野)처럼 넘쳐 흐르는
흐린 강물 위에 떠 갔다.
나는 무너지는 둑에 혼자 서 있었다.
기슭에는 채송화가 무더기로 피어서
생(生)의 감각(感覺)을 흔들어 주었다.
([현대 문학] 145호, 1967.1)
김광섭의 문단 활동은 크게 해방 전후로 나눌 수 있는데, 해방 전의 문단 활동은 해외문학파로서의 활동, 연극평을 중심으로 한 평론 활동, 시작(詩作) 활동 등으로, 또 해방 후의 문단 활동은 해방문단에서의 좌익과 대항한 민족주의 문학 운동, 6․25 이후의 문단 활동, 투병기의 창작 활동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시는 1965년 시인이 고혈압으로 쓰러져 1주일 동안 무의식의 혼미 상태에 있다가 가까스로 깨어났던 자신의 체험을 구상화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생의 감각’은 바로 ‘생의 자각’, 곧 생명의 부활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시에는 인생론적인 면과 소생 과정의 극적인 면이 동시에 수용되어 있다. 화자는 부활의 시간적 출발점을 ‘여명’으로 잡고 있다. 여명은 밤으로부터 아침으로 연결되는 과도기적 시간으로, 밤이라는 절망에서 아침이라는 희망으로의 전이를 상징한다.
2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시간적으로 역순(逆順)의 짜임으로 되어 있다. 2연에서는 죽음을 눈앞에 둔 절망적 상황과 극복의 순간을, 1연에서는 병마로부터 벗어난 후에 느끼는 새로운 삶의 인식을 형상화하고 있다.
1연은 재생한 삶의 첫 새벽에서 바라보는 화자의 인생론으로, 청각과 시각을 통해 생명의 부활을 감각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새벽 종소리, 닭의 홰치는 소리, 개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화자는 비로소 자신이 죽음의 긴 터널을 빠져나왔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소생한 생명의 경이로움에서 새벽별을 바라보며 그는 마침내 자신이 산 자(者) 가운데 있음을 확인한다.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에서 공동체적인 삶의 의미를 강조하기보다는 내가 존재함으로써 비로소 세계가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화자의 깨달음을 엿볼 수 있다.
2연은 죽음에서 극적으로 소생한 과정의 회상으로, 삶에 대한 새로운 자각을 갖기 전까지 화자가 겪은 고통과 시련의 극복 순간이 형상화되어 있다. 화자가 ‘아픔에 하늘이 무너지는’ 육체적 고통과 ‘가슴에 뼈가 서지 못해서’와 같은 정신적 혼란을 겪으며, 소멸하는 생을 뜻하는 ‘무너지는 둑’에 서 있었던 중, 그 곳에 ‘무더기로 피어난’ ‘채송화’가 자포자기 상태이던 그의 생명에 새로운 삶의 의지를 깨우쳐 준 것이다. 60세라는 생의 원숙함에서 비롯된 개인적 체험이 모든 이의 보편적 정서로 확대됨으로써, 우리는 생명의 부활을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인의 깊은 자아 성찰 의식에서 진한 감동을 받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이 시는 고통과 절망으로 이어진 투병 체험 속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생명의 의미와 인간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을 서정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276. 성북동(城北洞) 비둘기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들을 성자(聖者)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쫒기는 새가 되었다.
([월간 문학], 1968.11)
이 시는 6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진행된 산업화, 도시화로 인해 황폐해진 자연으로부터 점차 소외되어 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성북동 비둘기’를 통해 보여 주는 작품이다. 따라서 비둘기는 사랑과 평화, 축복의 메시지 전달자라는 일반적 상징을 뛰어넘어 근대화, 공업화로 소외되어 버린 현대인을 비추어 주는 거울이며, 그에 대한 관찰자 내지 비판자로 형상화되어 있다.
기․서․결 3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1․2연에서 묘사를 통해 비둘기의 처지를 구체적으로 형상화한 다음, 3연에서 명시적으로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먼저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표현은 주택가가 들어섰다는 뜻이지만, 문명의 침투로 인한 자연의 파괴를 의미하며, ‘번지가 없어졌다’는 표현은 비둘기가 보금자리를 잃어버렸음을 뜻한다. 또한,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 ‘채석장 포성’ 등은 현대 문명의 병폐를 의미하며, ‘가슴에 금이 갔다’는 것은 이러한 문명의 병폐로 인해 파괴된 인간성, 즉 사랑이나 평화가 모두 사라졌음을 뜻한다. 그리고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와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와 같은 구절은 현대 문명에 의해 파괴된 인간 존재의 애처로움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기계 문명으로 인해 점차 세속화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 이제는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 낳지 못하는 쫒기는 새’가 되어 버린 그들이 ‘금방 따낸 돌 온기에’ ‘향수’를 느낄 수밖에 없는 비극적 정경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인간에 의해 저질러진 자연의 파괴로 말미암아 생존의 터를 상실한 비둘기가 채석장 포성에 지향없이 쫓기며 넉넉했던 옛날을 그리워하는 비극적 모습을 제시함으로써, 오늘날의 황폐화된 인간 삶과 그에 대한 연민을 통해 참다운 삶의 회복을 희구하는 한편, 인생에 대한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공존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시는 사랑과 평화가 상실되어 가는 현대의 비극적 상황의 폭로와 고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비둘기’를 통해서 현대 문명의 비정함과 소외의 비극을 제시하여, 사랑과 평화의 소중함에 대한 인식과 인간성 회복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는 것이다.
근원에의 향수와 사회 비평 의식에 입각한 김광섭의 시는, 이 작품에서 보여 주고 있듯 현대적 의미의 관념을 깊이 간직하면서도 관념어의 구사나 표현의 추상적 부분을 말끔히 제거하여, 구체적 표현의 미를 세련된 솜씨로 나타낸 것이 특징이다.
277. 산(山)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데서는
새벽녘이면 산들이
학처럼 날개를 쭉 펴고 날아와서는
종일토록 먹도 않고 말도 않고 엎댔다가는
해질 무렵이면 기러기처럼 날아서
틀만 남겨 놓고 먼 산 속으로 간다.
산은 날아도 새둥이*나 꽃잎 하나 다치지 않고
짐승들의 굴 속에서도
흙 한 줌 돌 한 개 들성거리지 않는다.
새나 벌레나 짐승들이 놀랄까봐
지구처럼 부동(不動)의 자세로 떠간다.
그럴 때면 새나 짐승들은
기분 좋게 엎대서
사람처럼 날아가는 꿈을 꾼다.
산이 날 것을 미리 알고 사람들이 달아나면
언제나 사람보다 앞서 가다가도
고달프면 쉬란 듯이 정답게 서서
사람이 오기를 기다려 같이 간다.
산은 양지바른 쪽에 사람을 묻고
높은 꼭대기에 신(神)을 뫼신다.
산은 사람들과 친하고 싶어서
기슭을 끌고 마을에 들어오다가도
사람 사는 꼴이 어수선하면
달팽이처럼 대가리를 들고 슬슬 기어서
도로 험한 봉우리로 올라간다.
산은 나무를 기르는 법으로
벼랑에 오르지 못하는 법으로
사람을 다스린다.
산은 울적하면 솟아서 봉우리가 되고
물소리를 듣고 싶으면 내려와 깊은 계곡이 된다.
산은 한 번 신경질을 되게 내야만
고산(高山)도 되고 명산(名山)도 된다.
산은 언제나 기슭에 봄이 먼저 오지만
조금만 올라가면 여름이 머물고 있어서
한 기슭인데 두 계절을
사이좋게 지니고 산다.
([창작과 비평], 1968.여름호)
해설 생략
본 해설집의 완전한 내용은 [한국현대시 400선 1, 2](태학사) 참조.
278. 시인
꽃은 피는 대로 보고
사랑은 주신 대로 부르다가
세상에 가득한 물건조차
한아름 팍 안아보지 못해서
전신을 다 담아도
한 편(篇)에 2천원 아니면 3천원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천직(天職).
늙어서까지 아껴서
어릿궂은 눈물의 사랑을 노래하는
젊음에서 늙음까지 장거리의 고독!
컬컬하면 술 한 잔 더 마시고
터덜터덜 가는 사람.
신이 안 나면 보는 척도 안 하다가
쌀알 만한 빛이라도 영원처럼 품고
나무와 같이 서면 나무가 되고
돌과 같이 앉으면 돌이 되고
흐르는 냇물에 흘러서
자국은 있는데
타는 놀에 가고 없다.
([동아일보], 1969.5.3)
이 시는 40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시를 써 온 노경의 시인이, 시인의 세계와 그 일생을 진지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화자가 생각하는 시인이란 존재는 ‘꽃’과 ‘사랑’으로 대유된 아름다움과 진실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부귀 영화에 대해 온몸을 내던지지만, 시인은 오직 시 한 편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다. 그러나 그렇게 노력해서 탄생시킨 시 한 편의 고료는 겨우 2, 3천원에 불과할 뿐이다. 세상의 부귀와는 분명 ‘가치와 값이 다르건만 / 더 손을 내밀지 못하는’ 것이 시인의 타고난 천성(天性)이다. 한편, 시인은 ‘늙어서까지’ 시간과 정열을 아껴쓰는 부지런한 정진을 통해 일견 어리석고 궂은 것처럼 보이는 ‘비극적 사랑’을 평생 동안 고독하게 노래하는 사람들이며, 때로는 ‘술 한 잔’으로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인생의 긴 여정을 쓸쓸히 가는 사람들이다. 신명이 나지 않을 때는 거들떠 보지도 않다가, ‘쌀알 만한’ 가치라도 있는 글감이라고 생각하면 놓치지 않고 그것을 작품화시킨다. 어떤 소재를 선택하든지 간에 시인은 그것과 혼연일체가 되어 자신의 영혼을 불어넣음으로써 마침내 그것을 살아 번득이는 하나의 위대한 예술품으로 만들어 낸다. 흐르는 강물처럼 세월이 흘러가도 시인의 정신은 한 편의 시로 남아 있음에 비해, 시인의 육신은 이미 그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 이렇듯 김광섭은 시인을 세속적 욕망과는 거리가 먼 사람으로, 고독의 깊은 늪에서 평생을 자신과 싸우며 오직 시 한 편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르는 거룩한 존재임을 밝히고 있다.
279. 저녁에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월간 중앙], 1969.11)
해설 생략
본 해설집의 완전한 내용은 [한국현대시 400선 1, 2](태학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