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성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하여 이화여대 국문과 졸업 9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목마동인
부산민예총 부회장. 민족작가회원이며 시집으로 『중세기로 간 친구』가 있습니다. 현재 부산 브니엘여자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입니다.
주소 : (집)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2동 선경 3차 아파트 311동 604호
전화 : 051 - 516 - 9196
(직장) 부산광역시 금정구 구서동 산57-1 브니엘 여자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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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바람 3
고 못된 바람이 그랬을 거야
시건방진 바람이 그 어린 진달래를 꼬드겼을 거야
인적 없는 호젓한 산길로 꼬여내
살금살금 만졌을 거야
철없는 진달래
속옷 한 장 걸치지 않고 나긋나긋 웃으며
맵고 시게 건드릴 때마다 수줍어하다니
고 어린것이 바람 시키는 대로
애처로운 암술을 저렇게 흔들어대다니
진달래 고년도 여간 화냥기 있는 게 아니었어
/벚꽃놀이
사랑한다 4월 문턱에 스러지는 혼백아 열정으로 붉어진 목덜미 잡고 물오르던 흰 손가락 자지러지게 사랑한다 잿빛 구름 안고 나뒹구는 희디흰 그대 허벅지 쓰러지며 취해 돌아 발 앞에 눕는 마지막 숨막힘 헝클어진 머리칼 쓸어 올리고 떨어지는 눈송이 슬프도록 어지러운 비명소리 미끄러지듯 떨어지는 살결을 사랑한다 뒹굴며 흘러라 비비며 날아라 뒤척이던 젖무덤 같던 흰 살 거친 언덕 숨가쁘게 치닫다 미쳐 버린 어깨춤 무슨 바람이든 쓸어안고 꺾어져 흐느끼는 갈대 숲 하현달 아래 흰여우 울음소리 사랑한다 그렁그렁 차 오르는 그윽한 눈 타는 혓바닥 잉걸불로 휘어져 하얗게 넘어간 창백한 꽃술 걸러 내고 걸러낸 섬유질로 남는 조용한 뼈들의 마른 계곡을 따라 쏟아지는 흰 이슬 타는 박명의 꿈 사랑한다 살아나라 떨어지는 나의 꽃송이 쌓여 그대 흰 피로 다시 살아 사랑하게 하라
/중세기로 간 친구
오늘에야 하늘과 땅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서 있는 지점에서
사람들은 조금씩 기울기가 달랐고
제각기 변수도 가지고 있었다
말과 행동의 가면 뒤로 그들은 얼마나 자유로운가
표현된 부분보다
표현할 수 없는 부분이 더욱 선명하다는 것과
나무나 짐승들이 나보다 훨씬 외롭다는 것과
전혀 무관한 것들이 나를 마구 흔들고 있다는 것과
철 맞춰 입는 유행의 폭력과
잎이 지고 잎을 틔우는 일도 같은 폭력임을
지하로 내려서는 사람들과
길 위를 걷는 사람들
산정을 오르는 사람들이
모두 서로 같은 장소에서 만난다는 것도
말함으로 더욱 어려웠던 일들과
행동함으로 더욱 쉬웠던 일들이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빛과 어둠으로 어떻게 배열되는 지도
나는 오늘에야 볼 수 있었다
나와 늘 꼴라쥬나 오브제를 하던 친구가
성경책을 끼고
문득 중세의 길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아도
이제는 놀라지 아니했다
친구여 부디 잘 가시라 쎌라
/바람
내가 불어야 할 바람은
소용돌이치는 회오리바람으로
추슬기며 고개 드는 높새바람으로
동녘을 향해 너울대는 하늬바람으로
불어야하는 바람이다
마른번개 일침 맞은 열풍이거나
마른 젖줄의 전설이 피로 묻는 꽃샘바람이거나
가을언덕에서 울어온 서녘의 목쉰 바람이거나
빙벽을 할키며 치닫는 칼날의 광풍이라도
바람으로 바람을 일으키며
살아올 수 있었던 나의 바램
이 바람을 안고 보람이 될 그 날까지
어떤 바람이든 바람은 불어야 된다
/
얘야,
여름저녁 잎으로 너울거렸던 정들이
얼마나 짐스러웠던지
관절을 삭이던 정이 아니더냐
외로움은 생각 말어라
무심한 시간에 띄워 보내면
어지간한 일들은 다 흘러간다
가다보면 맵집 좋은 산바람도 있어
창문을 온 종일 열어놓으면
친숙한 것들이 바람 속에서 바람소리를 내고는
바람으로 돌아가는 모서리가 된단다
얘야
나는 이제 거칠 것이 없단다
저 멀리 들리는 애들 고함소리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멀리 가까이 들리는 웃음소리
이런 소리들은 저녁나절 한층 더 정다와 보이고
나 홀로 여기 있는 것도 가벼운 바람이어서
그네들의 노래가 된단다
흐르다 순간 굽이에서 숨을 돌리기도 하고
창 밖으로 보이는 길과 그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한단다
/꿈 1
우리는 늘 꿈으로 가려한다
찻잔이나 빈 컵 앞에서는 컹컹 짖는다
달을 잃고 조명등 아래서 낄낄대는 개가 되기 전에
꿈을 다오
달 옆에 있었던 그 수많은 별들과...
가방 속에서 보름달을 꺼내 둘로 쪼개는
영옥이의 허허한 손가락이 보이네
꿈을 둘로 쪼갠 사르트르, 앙가주망
헐벗고 긴장된 위장 속으로 들어오네
영옥이가 나사를 끼우면 나는 주리를 튼다
이 도시 건물은 단단한가
그 뒤켠에서 나는 오물냄새 - 그네들에게서 나던
슬픈 냄새를 맡으며
블루 마운틴으로 냄새를 지우며
신랄한 정적의 미소를 띠며
우리는 공범자가 된다
그녀에게서 불어오는 바람
휘발유 같은 눈물을 쏟으며 울기라도 했으면
왜 나는 늘 배가 고픈지
영옥이가 내게 또 블루 마운틴을 먹인다
잠자지 못하는 밤에는 뭘 하나 벽을 만지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나를 속일지라도
사랑하는 영혼은 죽지 않고 나비가 되네
딱딱한 벽을 더듬어 스위치를 올리면
나비의 꿈 속 날개 돋친 장자가 보이네
베란다에 버려진 반달을 주워 다시 가방 속에 넣는다
* 앙가주망(engagement) : 계약·구속 등의 뜻으로 정치 및 사회의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가리킴. 여기서는 자기 속에 구속되어 상황에 대응하는 선택을 내리는 것.
/꿈 2
부서지는 달
부서지는 꿈은 소리가 되나니
조그만 바람에도 풍경소리가 되나니
깊은 우물 찬물소리가 되나니
잃어버린 전설의 동굴소리가 되나니
거미줄에 걸린 모기울음이 되나니
어두운 벽면을 더듬는 파리소리가 되나니
열기 없는 꽹과리소리가 되나니
소리들이여 꿈을 건너는 소리여
소리가 다리를 놓는 밤
건너다 부서지는 밤
개가 컹컹 짓는 밤
반딧불 소리들이 흩어지네
흩어진 소리들을 주워 가방에 넣네
가방이 훤히 빛을 내네 다시 보름달이 되네
/나의 방 2
나는 낡은 울타리 안에서 익숙해진다
걸레와 비누 도마와 칼
책과 연필 TV와 밥 침대와 잠 사이를 넘나들어도
나에겐 너무 번거롭고 넓다
나는 방에서 거실까지 가기도 꺼려한다
꼼짝 않고 누워 있을 수 있다면
아무도 날 찾지만 않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새로운 시도라니
낯설고 어눌한 말이라니
덫을 빠져나가는 자유인이라니
화두를 묻는 존재라니 거듭 태어난 존재라니
누가 묵은 벽지를 걷어내고 도배를 하고
낡은 제방을 무너뜨려 물줄기를 턴다
얼음장 밑으로 개울물 소리 흔들리는 마음이 보인다
관념과 피상을 헤치며 흔들려 기쁨이 되는 기호들
떡깔나무 사이를 휙 날아올라 신비가 되는 새들
도시의 늪 속에 늘 누워있어 근시안이 된 나를
달빛이 울타리 넘네 내가 나를 넘네
누워 조용히 눈을 감아보네
이 단순하고 은밀한 책장을 넘기며 나는
또 월장을 한다 어디든지 어떤 울타리든지
거침없이 떠난다
눈을 감고 누워 기호에 바람에 달빛에 실려간다
모두 만나 별이 된 하늘은 텅 비어 있어도 넘친다
/나의 방 3
서글픈 눈물에 찬밥 한 덩이 말아
마른 멸치를
고통이 껄찍한 종갓집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난 그대를 잊기로 한다
그대로 인한 시름과 욕정을 잊기로 한다
그대와 나 사이의 자식과
자식으로 인한 애착과 연민도 잊기로 한다
젊은 날 청대 같은 사랑을 밥에 얹어 우적우적 씹으면
자유는 우아하거나 눈부시지 않아 좋아라
속옷처럼 편안하고
먼지처럼 친숙하고 은밀한 방
드러나지도 숨기지도 않고 잠만 가득한 방
새벽도 저녁도 없는 에밀리 장미의 방
옴리버스식 액자소설에 있는 작은 액자 속에서
길고도 긴 푸른 잠을 자는 나의 방
/*에밀리 장미: 포크너의 단편 에밀리 장미에 나오는 주인공 에밀리는 정지된 시계를 차고 밀폐된 방에서 죽은 연인의 시체를 안고 살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강영환
/낯선 풍경 1
대체 무슨 풍경을 그렇게 잡아요 ?
그리운 빈자리가 수레에 남아 있거든.
바퀴가 네모나면 어쩌지요?
그럴 땐,
「괜찮아요 괜찮아요」라고
주문을 외는 거지
그런다고 유리창 밖의 풍경이 살아나겠어요?
앙금이 남으면 눈물이 나는 거야
너무 무거워 가라앉고 말 텐 데요?
실을 수 있을 때 많이 싣는 거야
수레가 가지 못하게 되면 어쩌지요?
가는 것은 수레바퀴니까 걱정 말아
무너지고 말 거예요
바닥까지 드러나 버릴 거예요
태초에 어둠이 있었어
수레가 고장나면 끝장 이예요
출발하지 않았으니 끝은 없어
늘 연속뿐이지
파멸하고 말 거예요
극복하고 말 거야
이렇게 병든 풍경을 삼키고도 괜찮다면
그건 망가진 꿈 이예요
환상 이예요
많이 실을수록 멋진 수레가 되지
어차피 수레란 짐을 싣는 도구이게 마련이니까
수레가 인간일 수 없잖아
인간도 수레일 수 없어요
/낯선 풍경 2
벌써 이 곳까지 와 버렸어
끝도, 넓이도, 깊이도 없는 땅,
서로를 의심하고 상대의 숨소리까지 부정하는
혼돈의 땅
광활한 가시밭을 건너
어디로, 어디로 가는 겁니까
미래로,
그래 허황된 수치로 표현된 미래를 향하여
쓸개를 저당 잡히고
껍데기로 춤추며 가는 거지
낙원이란 강의 저 편에도 있지 않고
이 편에는 더욱 찾을 수 없어
우리는 맹목적으로 가는 거야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면서요 ?
빛도 함께 있었어
어떻게 벗어나지요 ?
지금은 한 가닥의 빛도 비치지 않아요
공동운명체란 말을 생각해 보라구
합리적인 사고의 뒤쪽에는
언제나 함정이 마련되어 있어
그걸 피하면서
함께 침몰하지 않을까요 ?
위험은 예견되지만
지나치기가 쉬워요
그걸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서
열린 문은 쉽게 눈에 띄지 않는 법이야
허공에도 문이 있습니까 ?
물론 온갖 입과 이빨이 숨겨져서
터무니없이 졸아든 문은
눈가림을 하고 다가오지
문은 늘 흔들리는 모습으로 서 있어
그곳이 우리가 가야 할 곳이야
갈 수 있는 길은 편견을 벗어난 그곳으로
분명히 나 있어
태초에 빛이 있었다면서요 ?
그래, 그러나 잊지 말아
태초에 어둠도 있었다는 것을
/빨래줄 붉은 옷
산벚나무 가지가 흔들리자
빨래줄 붉은 옷이 흔들렸다
산과 이웃한 마을에서 바람은
바다 쪽으로 불어갔다
남겨 둔 마음이 없는
빈집을 지나는 흔들림이 외롭다
바람 없이도 흔들리는 옷은
약한 몸뚱이를 가졌나 보다
빈 몸뚱어리 끝에 봄이 돌아 와도
꽃 하나 피우지 못하고
바람 끝에 마음 하나 싣지 못한다
일터로 간 사람들이 남긴 빨래줄에
마른 옷이 한번 더
뼈를 말리고 있는 동안
둘 데를 찾지 못하는 내 눈에
어둠이 시작될 때까지도
흔들리는 노을이 떠나지 못한다
/내 마음의 모란
도시의 창 밖에도 모란이 피었다
모르는 사이에 챙 넓은 꽃잎을 열고
봄 빛 속에서 나를 기다렸다
모란의 문 앞에서 차마 말을 하지 못하고
내 생각만으로 뜰을 따라가 보았다
어느 깊이에서 뽑아 올린 색깔인지
가슴 붉은 꽃이 내내 침묵하였다
모란과 눈을 맞추고 있는 동안은
도시의 무거운 키가 보이지 않아
내 마음 끝에도 작은 모란이 피었음을 알았다
/내 마음의 투명한 우수
별이 보일 때까지
하늘을 갈고 닦아라
그대 가슴에서 어둠을 몰아 내고
별이 돋을 때까지
슬픔을 갈고 닦아라
그리고 투명한 네 마음을 보아라
어둠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아침을 갈고 닦듯이
그대 발바닥에서 풀이 돋고
그대 팔목에서 곁가지가 뻗을 때
슬픔은 드디어 별이 되리니
그때 투명한 네 길을 보아라
/길에 관한 명상·20
보따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의 손을 잡고
눈발 속으로 희미해져 가는 소년의 뒷덜미가
시리다 못해 따뜻하다 형제여
눈 내리는 길을 밟아 본 적이 있는가
눈 위에 눈이 내려 발자국을 덮는
그래서 걸어가는 소년의 길이 지워지고
눈발 속으로 묻혀가던 지평선을
산도 들도 강도 외면하여 발을 숨기던
눈에 갇힌 길은 밖을 나서지 않고
아침이 와서 마을을 밝혔을 때
누가 발자국을 찍어 주기를 기다렸다
길이 되어 풀려나고 싶었다
/틈
하늘과 땅 사이
틈을 보았다
어디서든 보아도 상관없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꽉 끼어서
사람들은 비명을 지른다
한 치 뒤돌아 볼 공간도 없어
앞으로만 무작정 갈 수밖에
어떤 사람은 그 틈을 내부로 들여 놔
운신의 폭을 넓히기도 하지만
성미 급한 사람은 동사로 쓰러져
정신 병원에 실려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그 죽은 틈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