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극례(克禮), 호는 초은(樵隱).
할아버지는 성산군(星山君) 조년(兆年)이며,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 포(褒)이고, 동생이 인임(仁任)이다.
백이정(白頤正)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326년(충숙왕 13) 문과에 급제하여 복주사록(福州司錄)이 된 후
춘추공봉(春秋供奉)에 발탁되었다.
1342년(충혜왕 복위 3)에는 기거사인으로 원나라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대녕로금주판관(大寧路錦州判官)의 벼슬을 받고 돌아와 기거주로 승진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한 후 우부대언(右副代言)·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승진했고,
서연(書筵)에서 진강했다.
이어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올랐다.
1352년(공민왕 1) 조일신(趙日新)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1354년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政堂文學兼監察大夫)가 되었고,
이어 성산군에 봉해졌다.
1356년 원나라가 기씨(奇氏) 제거와 변방 침범을 용서하자 사은사(謝恩使)로 원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에 〈고금록 古今錄〉을 편찬했다.
1359년 수사공 상서좌복야 어사대부(守司空尙書左僕射御史大夫)를 거쳐
이후 참지중서정사(參知中書政事)·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첨의평리(僉議評理)·
삼사우사(三司右使)·서북면도찰군용사(西北面都察軍容使) 등을 역임했다.
1364년 찬성사(贊成事)로 단성좌리공신(端誠佐理功臣)에 봉해졌고,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공민왕이 복위한 것을 알리고 돌아와
정동행성좌우사낭중(征東行省左右司郎中)이 되었으나,
왕에게 신돈(辛旽)을 멀리할 것을 간하다가 파직당했다.
이듬해 흥안부원군(興安府院君)에 봉해졌으며,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371년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이색(李穡)과 함께 〈금경록 金鏡錄〉을 증수했다.
1373년 검교시중에 이르렀다. 평생 성리학을 존숭하여 불교를 멀리했고,
성품이 강직하여 옳지 못한 일을 보면 노기가 얼굴에 나타났으나
함부로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문장을 짓는 데 말이 엄하고 뜻이 깊어 기롱하고 풍자하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저서로는 〈초은집〉이 있다.
1375년(우왕 1) 충정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