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실록지리지 전라도 전주부 정읍현
◎ 정읍현(井邑縣)
본래 백제의 정촌(井村)이었는데, 신라에서 정읍현으로 고쳐서 태산(太山)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고부(古阜)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옛 부곡(部曲)이 1이니, 답곡(畓谷)이다. 진산(鎭山)은 내장(內藏)이다.【현의 동쪽에 있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순창(淳昌)에 이르기 19리, 서쪽으로 흥덕(興德)에 이르기 17리, 남쪽으로 장성(長城)에 이르기 23리, 북쪽으로 태인(泰仁)에 이르기 9리이다. 호수가 1백 30호요, 인구가 8백 58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9명이요, 진군이 10명이요, 선군이 1백 29명이다.
토성(土姓)이 5이니, 탁(濯)·이(李)·진(晉)·윤(尹)·정(井)이다. 땅이 기름지며, 간전(墾田)이 2천 6백 58결이다.【논이 5분의 3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뽕나무·삼·닥나무·왕골·목화이요, 토공(土貢)은 꿀·여우가죽·삵괭이가죽·잘·족제비털[黃毛]·칠(漆)·자리·대추·감·죽순·차[茶]이다. 자기소(磁器所)가 1이요,【현의 남쪽 소곡(所谷)에 있는데, 중품이다. 】도기소(陶器所)가 1이다.【현의 남쪽 천점(穿岾)에 있는데, 하품이다. 】
입암산 석성(笠巖山石城)【둘레가 2천 9백 20보요, 안에 시냇물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역(驛)이 1이니, 천원(川原)이다. 월경(越境)은 흥덕현(興德縣) 동쪽 어용포(於容浦)의 땅이 고부군(古阜郡) 남쪽 모조촌(毛助村)을 넘어서 현의 서쪽으로 들어왔다.
[원문] 井邑縣: 本百濟 井村, 新羅改井邑縣, 爲太山領縣。 高麗改爲古阜屬縣, 後置監務。 古部曲一, 畓谷。 鎭山, 內藏。【在縣東。】四境, 東距淳昌十九里, 西距興德十七里, 南距長城二十三里, 北距泰仁九里。 戶一百三十, 口八百五十八。 軍丁, 侍衛軍十九, 鎭軍十, 船軍一百二十九。 土姓五, 濯、李、晋、尹、井。 厥土肥, 墾田二千六百五十八結。【水田五分之三强。】土宜五穀, 桑、麻、楮、莞、木緜。 土貢, 蜂蜜、狐狸山獺皮、黃毛、漆、席、棗、柿、笋、茶。 磁器所一、【在縣南所谷, 品中。】陶器所一。【在縣南穿岾, 品下。】 笠巖山石城【周回二千九百二十步, 內有溪水, 冬夏不渴。】驛一, 川原。 越境, 興德縣東於容浦之地, 越古阜郡 南毛助村, 入于縣西。
[해설] 지금의 정읍시는 정읍, 태인, 고부라는 세가지 생활권이 일제강점기 1914년에 합하여 이루어졌다. 드디어 내년이 행정구역 통합 100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시점이기도 하다. 이에 고문서에 나타나는 정읍의 이야기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은 과거 정읍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나중에 고부와 태인에 관한 기록도 풀어보자.
정읍현은 삼국시대 백제의 땅으로 당시는 정촌현이라 하여 지금의 과교동 정해마을을 그 치소로 추정한다. 정해마을은 그래서 정읍사라는 노래의 발상지이기도 하다. 정읍현의 치소가 지금의 장명동으로 이동한 시점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정읍현은 통일신라시대에 태인의 영향을 받는 상황이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고부의 영향을 받는 속현이었다. 별도의 수령이 파견되지 않을 정도로 인구가 적었던 곳이다. 그러다가 조선왕조가 성립하면서 지방관인 수령이 직접 파견이 되었다고 보면 된다.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전주부에 속한 정읍현에 관한 역사지리적인 기술이 비교적 자세하게 되어있다. 당시 인구는 1천명이 채 안되는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의 12만 인구를 생각하면 600 여년만에 엄청나게 인구가 급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토박이 성씨가 탁(濯)·이(李)·진(晉)·윤(尹)·정(井)이라고 하는데 지금과는 많이 다른 것 같다. 흔히 정읍의 토박이라고 하면 현재 밀양손씨, 고흥유씨, 탐진안씨라 하여 흔히 '손유안' 이라 부른다.
특수행정구역인 향.소.부곡이 있었는데, 지금의 답곡마을에 부곡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내장저수지 부근의 쌍암동 답곡(논실)마을임을 알 수 있다. 경작지는 논밭을 비교하여 논이 5분의 3이라 하니, 평야가 드넓은 곳임을 알 수 있다. 다양한 특산품 중에는 여우가죽과 차나무가 눈에 띈다. 당시에는 정읍의 차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진상품으로 선정되었던 것이다. 도자기를 굽는 가마터도 1곳씩 소개되는데 지명으로 보아서는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군사시설로서는 입암산성이 소개되어 있다. 교통통신시설로서는 한양에서 천안을 거쳐 해남과 제주도까지 연결되는 이른바 삼남대로에 설치된 천원역이 기술되어있다. 지금의 입암면 소재지인 입암면 천원리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는데 현재까지도 안내판이 없어 아쉬움을 갖는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는 행정구역상 별도의 땅으로 떨어져있는 이른바 월경지역이 소개되었는데 그곳이 지금의 입암면 지선리 어룡포마을로 추정이 된다.
첫댓글 제가 첫 조각개인전을 답곡에서 준비했던곳인데 행정구역 부곡이 있었다는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확실하진 않지만 그쪽에 가마터가 있었다는 이야길 들은적이 있었어요 답곡에서 내장으로 더 들어가 어느 마을이였던것 같은데 기억이 확실치가 않네요 오래된일이라
井 씨가 있었군요...아주 옛날에는 井은 丁과 같은 글자였다고 하니....혹시...ㅎㅎ
.. 정극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