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열매 1. 사랑 <갈라디아서 5:22-23>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사랑을 떠나서는 기독교에 대해서도 하나님에 대해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복음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는 요한복음 3장 16절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로 시작합니다. 요한일서 4장 8절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God is Love” 곧 하나님과 사랑은 동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유일하신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3:34). 율법과 선지자가 외쳤던 메시지를 요약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마22:37-40)입니다. 사도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그야말로 ‘사랑’으로 도배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에게 보낸 하나님의 사랑의 편지입니다.
인간이 사는 이유도 사랑 때문입니다. 대중가요의 99%는 사랑에 대한 노래입니다. 모든 TV 드라마들도 사랑을 빼놓고는 재미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일이나 어떤 이상도 중요하지만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영웅호걸들도 결국 사랑의 품 안에서 안식을 합니다.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입니까?
헬렌 켈러의 일화입니다.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정말 외부와 의사소통할 수 있는 주요 수단들이 모두 차단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오직 만지고 느낄 수만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7세 무렵에 설리반 선생을 만나 글자를 배우기 시작합니다. 한 손에 물건을 쥐어주고 다른 손에 그에 해당하는 글자를 써줌으로써 헬렌 켈러의 글 배우기는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으로 알게 된 단어는 ‘인형’(doll)이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우물가에서 시원한 물을 느끼며 그것이 ‘물(water)’임을 알게 됩니다. 이렇게 사물의 이름들을 하나씩 알아갔지만 헬렌 켈러는 추상명사를 배우는 단계에서는 그만 벽에 부딪치게 됩니다. 만져야 알 수 있는데 ‘사랑’이란 것은 만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헬렌 켈러가 설리반 선생에게 제비꽃을 꺾어 주었습니다. 이 꽃을 받고 기뻤던 설리반 선생은 헬렌 켈러의 손에 “I Love Helen”하고 써 주었습니다. “Love”라는 단어가 생소했던 헬렌 켈러가 설리반 선생에게 “사랑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습니다. 설리반 선생은 헬렌 켈러의 손을 심장에 대며 “그것은 여기에 있단다.” 하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만져서 알던 헬렌은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비꽃 향기를 맡으며 “사랑은 꽃의 달콤함 같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아니라고 하자 헬렌은 이번에는 따뜻한 태양을 마주보며 “이것이 사랑이 아닙니까?” 하고 묻습니다. 설리반은 그것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날은 지나고 말았습니다. 며칠 후, 아침부터 온종일 구름이 뒤덮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소나기가 잠깐 내리더니 갑자기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헬렌은 기뻐하며 물었습니다. "사랑이란 이런 것이 아닙니까?" 헬렌이 당시는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설리반 선생은 사랑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사랑이란 태양이 비추기 전 하늘에 있는 구름과 같은 것이란다. 너는 구름을 만질 수는 없지만 비를 느낄 수는 있다. 너는 꽃들과 목마른 대지가 온 종일 뜨겁게 달구어졌다가 비를 맞을 때의 기쁨이 어떠한지 잘 안다. 그처럼 너는 사랑을 만지지 못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 위에 부어질 때의 달콤함은 느낄 수 있다. 사랑이 없다면 너는 행복하지도 않고 놀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헬렌 켈러는 그 때의 감회를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그 아름다운 진리는 내 마음을 뛰게 만들었다. 나는 내 영혼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보이지 않은 끈들로 연결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임할 때 우리는 살고 그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그녀가 장애를 극복한 것만 알고 있지 그 이후의 삶은 어떠했는지 잘 모릅니다. 헬렌 켈러는 1930년대에 사회운동가로 변신하여 불의에 맞서고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싸웠습니다. 헬렌 켈러가 가난한 노동자를 지지하여 사회당에 입당하여 파업 현장에 가고 투쟁했던 것은 미국 당국을 곤혹스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녀는 인종차별 반대운동, 아동 차별 금지운동, 사형제 폐지 운동 등을 벌였습니다. 그녀는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들 중 첫 번째 열매가 사랑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어로 “the fruit of the Spirit is love, joy, peace ...” 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복수 ‘are’가 아니라 단수 ‘is’가 사용되는 것에 주목하십시오. ‘열매들’이라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 ‘열매’입니다. 그것은 이 아홉 가지 열매가 모두 성령이라는 한 나무에서 열리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령의 아홉 가지 성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태양을 프리즘에 통과시키면 일곱 개의 색으로 갈라지듯 성령도 아홉 개의 성품으로 갈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열매는 나무에 잘 붙어 있으면 저절로 열립니다. 성령의 열매는 성령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열립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그렇지만 우리 안에는 죄의 욕구 또한 함께 있습니다. 마치 우리 안에 선한 늑대와 악한 늑대가 싸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둘 중 누가 이기겠습니까? 우리가 계속 해서 먹이를 주는 것이 이깁니다. 우리가 성령님을 묵상하고 성령님에게 순종할 때 내 안에는 성령의 열매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감사의 양식과 기쁨의 양식과 기도의 양식과 사랑의 양식을 부지런히 줄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백 배의 열매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죄의 욕구만을 좇아 살 때는 죄가 뿌리를 내리게 되고 성령님은 한쪽 구석으로 밀려 나고 말 것입니다. 우리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랑은 여기 있으니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맺기를 원하시는 첫 번째 열매는 ‘사랑’의 열매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독특한 것은 사랑은 먼저 사랑을 받아야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마치 물을 퍼주는 것과 같습니다. 내 안에 물이 차 있지 않으면 나누어 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의 독특성은 인간이 하나님을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했다는 데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과 11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고 이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이웃을 사랑하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옳습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내 안에 에너지가 고갈되어 있다면 누구를 도울 수 있겠습니까? 내 안에 불과 가시로만 가득하다면 그런 사랑은 곧 주변 또한 다 불태우고 상처투성이로 만들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서 우리가 먼저 할 일은 그 분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그대로 다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떤 봉사나 헌신이나 다른 일들에 대해서 먼저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랑이 먼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세 전부터 예정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항상 곁에서 지키셨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5-16)
하나님은 그의 사랑하는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엡2:4-6)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느니라”(롬8:17-18)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이 사랑을 알고 이 사랑을 느껴야 우리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의 사랑은 부모의 사랑과 같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적에는 철저히 부모의 품에서 보호를 받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이 부모의 품을 떠날 때가 있습니다. 그 첫 시기는 아마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인 것 같습니다. 처음은 부모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가다가 몇 주가 지나면 이제 혼자 다니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육교를 건너서 좀 걷게 되면 학교 정문에 들어서게 됩니다. 신학기가 되면 이 육교가 부모와 자녀들이 이별하는 장소가 됩니다.
그런데 공통적인 것은 부모들이 아이가 먼발치로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느 때는 아이들이 사라지고 한참 후에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이 그렇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지 하나님은 우리를 항상 지켜보시며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그동안 받지 못했지만 지금부터 받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깨닫는 것이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나는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단 한순간도 이 사랑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충만한 사랑을 받아야 다른 사람 또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우리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호소합니다.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3:17-19) 가스펠 송 중에 ‘그 사랑 얼마나’란 찬양이 있습니다. 이 찬양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어린 시절 충분히 사랑받고 자라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록 물질적으로 가난할지라도 사랑에서는 가난해서는 안 됩니다. 부모나 가족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자녀는 평생 동안 쓸 수 있는 무한한 사랑의 에너지라는 자산을 보유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성인이 되어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사랑을 잘 하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고, 이 사람이 인생의 승리자입니다.
부부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대방 배우자의 얼굴은 자기가 만든 것입니다. 상대방의 얼굴에서 기쁨과 알 수 없는 광채가 흘러나온다면 그것은 그 배우자의 사랑이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어떤 분이 병원에서 한 노년의 부부를 보았습니다. 그 아내는 나이가 들었고 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얼굴에 광채가 나고 있었습니다. 알 수 없는 기쁨과 자비가 흘러나왔던 것입니다. 이 빛이 어디서 흘러나온 것일까 궁금했던 이 사람은 한 순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나는 그 모든 것이 어디에서 흘러나온 것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서로 서로 이야기하며 그들의 눈동자가 서로 마주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순간 나는 그녀가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챘습니다.” 많이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큰 바위에 태양 빛이 계속해서 비추면 그것이 밤이 되어서도 따뜻한 온기를 발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상대방을 메마르게 만들고 자신 또한 시들어 버립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받는 자로 용납하지 않는 자도 역시 메말라 죽어버리게 됩니다. 사랑은 사랑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는지를 좀 더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흔히 하나님의 사랑을 값없이 주는 사랑이라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본질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아가페 사랑과 에로스 사랑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가치가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요, 에로스 사랑은 가치가 있는 것을 사랑합니다. 우리 사랑은 에로스 사랑이 대부분입니다. 상대방의 미모나 재물이나 성격이나 효용성이나 나에게 이익이 있기 때문에 사랑합니다. 『이기적 유전자』를 썼던 진화학의 대가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가 숭고하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자식 사랑도 사실은 자기의 유전자를 보호하기 위한 이기심에서 발생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이익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가페의 사랑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도, 조건도 없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을 in spite of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입니다. 로마서 5장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롬5:6-10) 우리가 연약할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주님께서 먼저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아가페 사랑의 위대함은 이렇게 가치 없는 존재를 사랑하지만, 사랑 받은 사람이 그 사랑 때문에 위대한 존재로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을 사랑하니까 가장 요긴한 모퉁잇돌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뛰어난 사람들을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세리 죄인 어부 열혈당원 그 모두를 가리지 않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그들을 교회사에 빛나는 위대한 사도들로 만들었습니다. 사랑이란 것이 그 사람 안에 있는 보배로운 것들을 발굴해서 밖으로 드러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매우 모험적인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한 사람들과 오물 투성이인 사람과도 함께 하며 그들 속에서 참된 영상을 끄집어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이런 일들을 흔히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가치 있는 존재로 대우하면 그 사람이 그 가치에 맞는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세상은 의심스러운 사람은 재정이나 회계를 맡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람의 과거를 묻지 않고 그대로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모험을 각오한 사랑이 이 사람을 그 안에 감추어 있던 능력과 정직이라는 놀라운 가치를 창출해 냅니다. 물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괘의치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험적인 사랑입니다.
자본주의 체제는 끊임없이 가치를 매기고 그 유용성을 판단합니다. 저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되고 나에게 어떤 도움이 될지 따집니다. 그 사람의 지위나 그가 사는 동네나 그가 굴리는 차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사람들의 가치를 그 사람이 받는 급여로 측정을 합니다. 그래서 가정부나 청소부는 하찮게 보고 월급을 많이 받는 전문직이나 사장님 앞에서는 비굴할 정도로 태도를 공손히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할 대상으로 보는 것에 익숙합니다. 교회도 가치를 가지고 따집니다. 내가 다닐 만한 가치가 있는지 서비스가 되어 있는지 따집니다. 여기에 맞추어 교회도 성도라는 손님의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만들어 ‘장사’를 합니다.
이런 우리들의 눈으로는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세상의 가치로 매길 수 없는 더 영원한 가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바라볼 때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지위 형편 능력을 보지 않습니다. 그 안에 담긴 영혼의 아름다움과 영원한 가치를 바라봅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그의 몸을 희생하셨고,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눈동자와 같이 지키신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사실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밖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루터가 우리의 의에 대해서 ‘밖으로부터 온 의’ ‘낯선 의’라고 말했는데 사실입니다. 우리의 가치는 우리 안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영혼 안에는 아름다운 보석들이 숨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큰 가치는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데서 주어집니다.
어떤 학교에 한 말썽꾸러기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만 없으며 학교가 한결 나아질 것 같습니다. 별로 효용성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이 아이를 미워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아이의 부모를 보는 순간 그런 생각이 싹 사라지고 맙니다. 그 아버지가 그 아이의 손을 잡고 학교까지 데려다 주고, 그 아이의 어깨에 손을 얹고 볼을 톡톡 치며, 학교로 들여보내며 손을 흔드는 순간, 우리는 갑자기 그 아이에게서 어떤 광채가 빛나는 것을 봅니다. 사랑이 바로 이 아이에게 이런 불가침적인 존엄성을 가져다준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 사회가 가진 윤리나 건강성의 척도는 가난한 자, 연약한 자에 대한 태도나 정책에서 볼 수 있습니다. 장애인이나 노약자, 빈곤층 등 사회적 약자를 얼마나 배려하고 대우하는가로 그 사회의 도덕성 더 나아가서는 행복도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서로를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결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 눈이 바뀌지 않은 이상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이란 책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나는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힐 용의가 있다. 그러나 나는 저 거지와 하룻밤을 잘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는 사람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 영혼은 천하보다 소중하고 무겁습니다. 그는 자기 이상에 취해 있는 사람이지 사랑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은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는 참 사랑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어떤 강도 만난 사람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사장도, 레위인도 다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들은 그 순간에 여러 생각이 스쳐가고 빠르게 계산을 했을지 모릅니다. 이 사람을 도와주면 내게 손해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냥 지나쳐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그곳을 지나치다 강도 만난 자를 보고는 치료를 하고 끝까지 보살펴 주었습니다. 성경은 “보고 불쌍히 여겨”(눅10:33)라 말씀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먼저 눈부터 달랐습니다. 그의 눈은 가치를 따지지 않는 눈이었습니다. 그가 같은 동포인가, 그가 나에게 유용한가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 어떤 가치를 따질 수 없습니다. 눈이 다르니 사랑의 행동이 곧 따라 나옵니다.
예배라는 것은 우리가 사람을 가치로 판단하는 것을 금하고 하나님의 소중한 영혼으로 볼 수 있도록 교육하는 시간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눈으로 사람을 보는 시간입니다. 그가 원래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창조되었던 그 형상의 눈으로, 그리스도가 그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매우 존귀한 존재로 바라봅니다. 그러면 모두가 존귀합니다. 모두를 존귀히 보는 데서부터 사랑은 시작됩니다.
이제 충분한 사랑을 받았고 눈이 바뀐 우리를 향하여 주님은 사랑을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선한 사마리아의 비유는 “내 이웃이 누구냐?”는 율법사의 질문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 율법사는 영생에 대한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사는 그 대답도 알고 있었습니다.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눅10:27) 이 말씀을 듣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도 이 율법사는 망설입니다. 이번에는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내가 사랑해야 할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고는 행동으로 나서지 않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와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면서 묻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주님은 “내 이웃이 누구냐”는 자기중심으로부터 나온 질문의 방향을 바꾸어버립니다. 누가 고통 받는 자의 이웃이냐? 자기로부터 나오면 자기 이익을 계산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고통받는 자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우리는 쉽게 결정할 수 있고 모든 것이 명확해집니다. 율법사는 “자비를 베푼 자입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이 대답을 듣고 예수님께서 최종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 주님의 말씀의 핵심은 너도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이 자비로운 행동을 하라는 데 초점이 있습니다. 영생이 바로 이 행함에 달려 있습니다.
문제는 행동입니다. 우리에게도 문제는 행함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행동은 말보다 더 큰 소리를 냅니다. 요한 사도는 사랑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요일3:14-17)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것, 형제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릴 수 있는 것, 재물로 궁핍한 형제를 돕는 것, 이것이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런 사랑을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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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