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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담진성[圓潭眞性] 大宗師 임종게[臨終偈] ■
來無一物來[본래일물래]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 종정법어 宗正法語 /영결식 ──────────────────────────────────
덕숭산德崇山에 신령神靈스런 광명光明 한 점이 천지天地를 감싸고
인연따라 모습을 나투고 세상을世上을 종횡무진하더니 오늘은 눈 앞에서 묘진妙眞을 나투어 두출두몰頭出頭沒하고 은현자재隱顯自在함을 보입니다.
나툴 때는 우리 종문宗門의 선지식善知識이신 원담圓潭 대종사大宗師이시고
성성惺惺하실 때는 선지禪旨가 대방무외大方無外하여 바다와 산을 눌렀고
입적入寂하시고는 형상形象없는 한 물건이 있어 허공虛空을 쪼개고
이 가운데 대종사大宗師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본지풍광本地風光이 드러나 있고 우리와 더불어 했던 주인공主人翁이 있습니다.
철마鐵馬가 허공虛空을 활보活步하고
身心都放下[신심도방하]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니
근본을 찾기 위해서 찾아 들어가는 법이 불교야. 이것을 알아야 해. 이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 것을 안다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形式이지 불교佛敎는 아니야.
나를 모르면 범부凡夫요 생사고해生死苦海에서 떨어져 버리는 거야. 나를 안다고 할 것 같으면 생사가 조금도 상관없는 것이고, 나를 안다고 할 것 같으면 저 삼라만상[森羅萬象]과 더불어 내가 둘이 아니야.”
대종사大宗師의 본관[本貫]은 부안김씨[扶安金氏]이며, 모친의 꿈에 한 스님이 나타나 이름 을 지어주었다고 해서 아명兒名은 몽술[夢述]이요 법명法名은 진성[眞性]이고 법호法號는 원담[圓潭]이다.
1926년 10월 26일 전북 옥구군 옥구면 수산리 217번지에서 부친 김낙관[金洛觀]과 모친 나채봉[羅采鳳]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고, 다음해에 충남 서천군 기산면 신산리 39번지로 이주하여 성장하였다.
1932년 신동우 선생 문하에서 한학을 수학하던 중, 장남인 형이 일찍 죽자 수명장수 기도 차 이모姨母인 비구니 스님을 따라 절에 오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승려 생활이 무척 고상하고 숭배하는 마음이 나서 집에 돌아와 부모를 졸라 출가하였고, 1933년 벽초[碧超 鏡禪] 스님을 은사로 만공[滿空 月面] 스님을 계사로 수계득도受戒得道하였다.
수계한 후 천장사天藏寺에서 다각茶角 소임을 하던 중, 방선 시간에 대중들이 ‘만법귀일[萬法歸一]’ 화두話頭에 담소하는 것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노스님, 저도 참선參禪을 해볼랍니다.”
노스님께서 ‘참선을 어떻게 할래?’하고 물으시니, “아까 어떤 수좌가 와서 노스님한테 법문을 묻는데,
만법이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갔는고…? 하나로 돌아갔다고 하는 하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고……?.”
이렇게 불언불어不言不語하며 일구월심日久月深 지어감에, 정혜사定慧寺에서 채공菜供을 하던 중 만공滿空 노스님이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머리통을 내리치시면서 ‘알겠느냐?’ 하고 물어서 얼떨결에 ‘예, 알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만공 노스님은 다시 주장자柱杖子를 들어 올리면서 ‘네가 알기는 무엇을 알았느냐?’고 다그쳤고, ‘딱 때리니까 아픈 놈을 알았습니다.’라고 답했다.
실實은 잘 모르면서도 또 맞을까 겁이 나서 뱉어버린 말이었기 때문에 그 후 늘 양심에 가책呵責을 느껴 주장자로 얻어맞고 아팠던 놈이 어떤 놈인가 열심히 참구參究를 했다.
하루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만공 노스님이 역시 머리를 딱 때리면서 ‘알았느냐?’ 하고 또 물으셨다. 거기서는 ‘예, 몰랐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니 노스님께서 ‘그러면 알아야지.
내가 닷새 동안 기한을 줄 테니 알아봐. 모르면 여기에 살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을 해놓고는 닷새 동안 잠을 안 자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도대체 알 도리가 없었다.
만공 노스님이 금선대[金仙臺]에 계실 때 심부름을 내려갔더니 역시 주장자를 가지고 달려들어 딱 때리기에 ‘아직 모르겠습니다.’ 했더니 그제야 ‘됐다. 짚신을 삼아라.’ 하셨다. 그때부터 시봉侍奉을 하게 되었고 노스님의 법을 신뢰하게 되었다.
만공[滿空]노스님이 주장자로 머리를 때린 것과, 세존[世尊]이 꽃가지를 잡아든 것과, 달마[達磨] 스님이 불안한 놈 잡아오라 한 것과, 육조[六祖] 스님의 한 물건이라는 법문과, 임제[臨濟] 선사가 두들겨 맞고서도 모르다가 황벽黃檗불법이 몇 푼어치 안 되는구나 하는 그 말과, 너무나도 일사분란하게 맞는 법문이라 비로소 이렇게 오도송[悟道頌]을 읊으셨다.
一片虛明本妙圓[일편허명본묘원] 한 조각 비고 밝은 것 본래 묘하고 둥글어
이것이 1943년 17세 때의 일이다. 이에 만공 노스님은 비로소 사미沙彌 진성眞性에게 글을 써주셨다.
眞性本無性[진성본무성] 참 성품에는 본래 성품이 없고
이후 대종사大宗師의 임운등등[任運騰騰]하고 활발발[活潑潑]한 선기禪機는 하늘을 끌어내리고 땅을 뽑아 올렸다. 대종사의 허광방달[虛曠放達]한 선지禪旨는 산꼭대기에서 파도가 일고 우물에서 먼지가 솟았으니 참으로 출격장부出格丈夫였다.
경허[鏡虛]·만공[滿空]의 법法을 이은 화상和尙의 가풍家風은 언답[堰畓,자갈논]을 일구고 땔나무를 나르는 중에도 평상심[平常心]의 도[道]를 내보이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한 불법을 체현體現한 행화를 보이고 사라짐이 변화무쌍하여 그 향방向方을 가릴 수 없었다.
적경회심適竟會心한 경계境界는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이었으며, 언제나 자신의 흉금胸襟과 감흥感興이 분출하는 마음을 주인공主人公으로 한 심지[心地]였다.
오가五家의 종풍宗風을 두루 갖춘 대기대용大機大用의 기봉機鋒은 당대 선장禪匠들을 뛰어넘어 홀로 보배롭게 빛났고, 방광불피조속放狂不避粗俗한 화상和尙의 해탈문解脫門은 불조佛祖의 정법正法을 이은 여법如法한 본분납승本分衲僧의 면목面目이었다.
남산南山에 구름이 일면 북산北山에 비가 오는 화상和尙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은 일생동안 덕숭산德崇山을 떠나지 않았으면서도 아침마다 달마達磨의 소림굴少林窟을 드나들고 저녁마다 육조六祖의 조계曹溪에서 발을 씻었다.
1958년 불교정화 당시 구례 화엄사 주지를 잠시 역임하시고, 1964년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되셨으며, 1967년 『만공어록』을 간행하셨고, 1970년 수덕사 주지로 취임하여 범종을 주조하고 범종각, 법고각, 청연당을 신축하여 사찰의 면모를 일신하셨다.
1986년에 덕숭총림 제3대 방장으로 취임하며 보임정수保任精修하시게 되었고, 1994년에는 원로회의 부의장을 역임하셨다. 2004년 대종사[大宗師] 법계法戒를 품수品受하셨다. 또한 승가사 조실, 용인 하운사 조실, 용인 법륜사 조실, 금산 금락사 조실, 향천사 천불선원 조실, 개심사 보현선원 조실을 역임하셨다.
30여 년 간의 결제·해제 상당법어[上堂法語]를 보면 마치 어둠을 밝히는 등불인 듯, 더위를 씻는 맑은 바람인 듯, 납자衲子들에게 길잡이가 되고 조도助道에 도움이 되는 지남[指南]이 되시었다.
2007년 12월 『원담대종사선묵집』을 간행하였으니, 그동안 일필一筆을 들어 먹으로 선계禪界의 풍류 속에서 개오開悟로 이루어진 서예의 예술은 많은 감화와 감동을 남겼다. 지난 결제 때에도 대중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셨지만, 육신이 가을 낙엽 마르듯이 쇠잔해지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문도門徒들이 마지막 한 말씀을 청請하니,
‘그 일은 언구[言句]에 있지 아니해. 내 가풍은 [주먹을 들어 보이시며] 이것이로다!’ 하시고,
來無一物來[거무일물래] 올 때 한 물건도 없이 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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