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8:28-34
찬송가 301장 ‘지금까지 지내온 것’
남•북 연합군의 길르앗 라못 공격과 아합의 변장(28-30)
오늘 말씀은 길지 않은 말씀임에도 북이스라엘의 아합왕과 남유다의 여호사밧왕의 대조적인 인생사를 보여줍니다. 아합은 북이스라엘의 악한 왕 중에서도 악 중의 악으로 평가받는 왕이고, 남유다의 여호사밧은 남유다의 선한 왕들 중에서도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했다고 평가받는 왕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같이 길르앗 라못을 공격합니다.
(28) 이스라엘 왕과 유다 왕 여호사밧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니라
즉 악한 왕과 선한 왕이 같이 연합군을 형성했고, 전쟁 공동체로 묶였습니다. 사실 이러면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여호사밧의 큰 오판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정치적•외교적으로 필요했더라도 아합과는 한 배를 타지 않았어야 했는데, 여호사밧은 아합과 혼인동맹까지 맺고 맙니다. 왕국 통치에 있어 왕족끼리의 혼인은 동맹 유지, 화해무드로의 전환에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도 적국 관계로 전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아합과 여호사밧 시대에 큰 화해분위기가 생겼고, 이는 혼인관계로 이어졌습니다. 여호사밧의 남유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부강해졌고 주변국은 남유다와 싸우기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실리에 빨랐던 아합왕은, 오랜 시간 적국이었지만 강성해진 남유다와 더이상 싸우지 않고 동맹맺는 것을 빠르고 확실하게 진행했습니다.
화해무드였습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는 오랜만에 서로 적대하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 평화였습니다. 하지만 겉으로만 그럴 듯해 보이는 평화, 실제로는 같은 배를 탈 수 없는 평화, 한 배를 타고 있으나 서로 다른 방향으로 가고자 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라고 할 수 없고 오래가지도 못합니다. 남유다가 강성해짐으로 북이스라엘은 남유다와 싸우고 싶지 않았고, 남유다에게도 북이스라엘과의 적대관계는 통치에 있어 큰 부담이었습니다. 국경도 접해있고, 서로 왕래도 활발하며, 친인척관계도 아직 남아있는 두 나라의 전쟁은, 통치에 있어서도 여러 복잡한 이슈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따라서 평화로울 수 있을 때 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두 나라는 혼인으로까지 엮어, 그 연합을 더욱 공고히 합니다.
우리도 많은 상황에서 되도록이면 분란없이 안정적인 상황을 유지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저건 아니지 않나’ 하는 경우에도 그냥 넘어가고,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생각으로 대충 덮어놓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용서는 무한하시나, 용서 이전에 대충 넘어가거나 대충 덮는 일은 결코 없으십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시는데도 그것을 듣지 않고 만든 평화, 안정은, 곧 더 큰 분란과 곤욕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여호사밧도 다윗의 길로 행했었지만, 아합과 한 배를 타며 어설픈 평화를 유지했을 때, 하나님의 선지자인 미가야의 소리를 듣고도 그것이 하나님의 경고인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여호사밧의 눈이 어두워지고 귀가 막혀버렸습니다. 같이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자는 아합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것을 옳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평화가, 안정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거절해야 할 때는 분명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좋은 게 좋은 거야’ 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소리입니다. 우리는 눈과 귀를 열고 명확하게 분별해야 합니다. 여호사밧처럼 아합과 함께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다가는, 큰 곤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나오십시오. 거절하십시오. 아니라고 말하십시오. 길르앗 라못은 지금 우리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닙니다.
이렇듯 여호사밧의 입장에서는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이지만, 아합의 입장에서는 이런 현명한 선택이 없었습니다. 아합이 그 어떤 달콤한 사탕발림으로 여호사밧을 설득했고 외교•정치적 장치를 사용했는지 몰라도, 남유다와의 동맹은 아합의 큰 업적이었습니다. 강성해진 남유다를 적대해서는 북이스라엘에 도움이 될 것이 없었고, 또 다른 적인 아람과의 관계에서도 강성해진 남유다가 만약 아람과 동맹을 맺는다면, 감당하기 힘든 두 적이 연합한 것이기에, 남유다와의 관계에서 빠른 태세 전환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에 아합은 여호사밧과 동맹을 맺고 심지어 혼인 관계를 맺습니다. 이제 서로는 인척 관계입니다. 냉정한 국제정세에서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지만, 아합은 여호사밧에게 갑자기 살갑게 굽니다. 여호사밧이 사마리아의 아합에게 왔을 때, 아합은 양과 소를 많이 잡고 크게 대접하여 여호사밧의 마음이 풀어지고 기분 좋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사돈이며 한 배를 탄 동지’라고 세상 좋은 말들로 설득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합의 속내에서 결국 원하는 것을 끄집어 냅니다. 여호사밧에게 길르앗 라못을 같이 치기를 권한 것입니다.
길르앗 라못은 군사적으로 뿐 아니라 아람의 수도인 다메섹과 북쪽지역의 무역 통로로써,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아합의 아버지인 오므리왕 때 이곳을 아람의 벤하닷에게 빼았겼고, 그 후 아합이 이를 탈환했으나, 몇 년 후 다시 빼앗긴 것입니다. 그래서 아합은 이를 재탈환하고자 여호사밧을 설득합니다. 길르앗 라못은 아람과의 관계에서 뺏고 빼앗기는 과정이 반복되면서 아람과 북이스라엘 사이의 우위를 정하는 기준 같은 것이었기에 꼭 재탈환하고 싶었고, 남유다와의 관계에서는 동맹을 공고히 할 뿐 아니라 동시에 아람을 공격함으로써 남유다가 아람과 동맹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까지 있었을 것입니다. 아합의 이런 정치적 셈법은 여호사밧이 응락함으로써 아합의 뜻대로 이뤄지는 듯 했습니다.
(29-30) 이스라엘 왕이 여호사밧에게 이르되 나는 변장하고 전쟁터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으소서 하고 이스라엘 왕이 변장하고 둘이 전쟁터로 들어가니라 아람 왕이 그의 병거 지휘관들에게 이미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작은 자나 큰 자나 더불어 싸우지 말고 오직 이스라엘 왕하고만 싸우라 한지라
심지어 아합은 아람왕의 속내까지 알고 있는 듯이 대비합니다. 아마도 미가야 선지자의 예언이 못내 마음에 걸렸을 수도 있습니다. 이번 전쟁으로 자신의 신변에 문제가 생길까봐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먼저 여호사밧을 또 설득합니다. 자신은 변장하고, 여호사밧은 왕복을 입으라고 합니다. 누가봐도 자신만 살겠다는 술수로 보이는데, 그 어떤 말로 설득을 했는지 이에 여호사밧은 응합니다. “남북 연합군의 총대장은 여호사밧 당신이니 당신만 왕복을 입으십시오.”라는 사탕발림이었을 수도 있고, 간절한 부탁을 못 이기는 여호사밧의 성정을 이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 어떤 방법이었던 결국 여호사밧만 왕복을 입었고, 아합은 왕이 아닌 척 변장을 하고 전쟁터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전쟁터 반대 쪽에서 아람왕은 오직 이스라엘 왕과만 싸우라고 명령했고, 아합은 이미 그에 대비했습니다. 이제 아합의 큰그림은 그려졌고, 이대로 시행될 것입니다. 이번 싸움에서 남유다와의 연합으로 승리할 가능성을 높였고, 혹시 지더라도 남유다와의 연합은 더 공고해 질 것이고, 반면 아람과 남유다 사이는 멀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아람과 싸우다가 여호사밧이 죽기라도 하면 자신의 딸과 결혼한 여호람이 남유다의 왕이 될 것입니다. 됐습니다. 미가야의 저주가 살짝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모든 상황에서 수반되는 불편한 자의 불편한 소리일 뿐입니다. 이런 물 샐 틈 없는 계획으로 아합은 고조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아합이 전혀 기대하지 못한 방향으로 진행됩니다.
여호사밧을 이스라엘 왕으로 오인한 아람군의 공격(31-32)
(31-32) 병거의 지휘관들이 여호사밧을 보고 이르되 이가 이스라엘 왕이라 하고 돌아서서 그와 싸우려 한즉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매 여호와께서 그를 도우시며 하나님이 그들을 감동시키사 그를 떠나가게 하신지라 병거의 지휘관들이 그가 이스라엘 왕이 아님을 보고 추격을 그치고 돌아갔더라
여호사밧은 아합의 계획대로 혼자 왕복을 입고 전쟁터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왕과만 싸우라는 명령을 받은 아람왕의 지휘관들은 왕복을 입은 여호사밧이 아합인 줄 알고 그를 집중하여 공격합니다. 그러나 곤궁에 처해 곧 죽게 된 여호사밧이 소리를 지르자 하나님께서 그 지휘관들이 그가 아합이 아님을 알게 하시고, 추격을 그치고 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여호사밧이 무슨 소리를 질렀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소리쳤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 누구를 향한 소리가 아닌, 곧 죽게 되었으니 급한 마음에 무슨 소리를 질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소리의 내용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아시고 도우셨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찬양 가사 중에, 아마 대부분 교우님들도 아실텐데,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니”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기도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도, 상태도 되지 않아서 신음 밖에 못 내는데, 이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신음은 기도라고 하기도 힘듭니다. 보통은 자기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 신음에는 우리의 어려움과 갈급한 마음과 말로 표현 못하는 연약함이 있습니다. 이를 하나님께서는 놓치지 않고 보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신음은 아니지만, 너무 급박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살려달라는 소리이었든, 하나님께 기도하는 소리이었든, 아람 병사들에게 내가 아합왕이 아니라고 알려주는 소리이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소리 이면에 있는 그의 마음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그를 쫓는 지휘관들이 떠나가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지휘관들은 아합이 아님을 알았더라도 거의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끝까지 쫓아가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쫓기를 멈추었습니다. 이를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감동시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합왕이 아님을 알고 그를 놓아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는 의외의 행동이며 기대하지 못한 결과입니다. 추격하다가 갑자기 멈추는, 적을 살려주는 행동을 한 것입니다. 여호사밧은 한 배를 타지 말아야 할 사람과 한 배를 탔고 동조하지 말아야 할 것에 동조함으로써 죽기 직전의 곤궁까지 갔으나, 하나님께서 그 순간에 구해주셨습니다. 여호사밧은 그저 소리쳤을 뿐이었으나, 그 소리는 공중에서 흩어지지 않고 올곧이 하나님의 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혹시 나의 꽉 막힌 것 같은 상황에서 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어, 더욱 어려운 교우님 계십니까? “그래도 네가 정신을 차려야지, 힘을 내야지, 기도를 해야지, 열심히 살아야지.” 라는 격려에도 도저히 움질일 수 없는 상황 중에 있으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분들의 작은 신음도, 의미없는 소리도 들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립니다. 여호사밧은 본인의 잘못으로 인해 아합과 함께 전쟁에 나갔으므로 그 자리에서 죽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구하셨고, 여기에 여호사밧의 공로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도 공로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것도 하지 말고 손 놓고 있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 일생에서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손은 우리의 손을 쓸지 모르지만, 이는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사밧은 죽음의 전쟁터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습니다.
아람병사 화살에 의한 아합의 우연한 부상과 죽음(33-34)
(33-34)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겨 이스라엘 왕의 갑옷 솔기를 쏜지라 왕이 그의 병거 모는 자에게 이르되 내가 부상하였으니 네 손을 돌려 나를 진중에서 나가게 하라 하였으나 이 날의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이스라엘 왕이 병거에서 겨우 지탱하며 저녁 때까지 아람 사람을 막다가 해가 질 즈음에 죽었더라
이것은 아합의 인생으로도 명확하게 보여주십니다. 아합은 완벽한 계획을 가지고 전쟁에 참여했습니다. 어리석은 여호사밧과 아람의 병사들은 아합인 줄 알고 여호사밧을 쫓고 있습니다. 아무도 자신이 아합왕인지 모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 한 사람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언급할 의미조차 없는, 우연한 한 사람이, 무심코, 전혀 의도도 목적도 마음도 두지 않고 쏜 화살이 하필 아합의 갑옷 솔기를 맞추었습니다. 몸에서 중요부위에는 전부 갑옷으로 무장합니다. 다만, 중요하지 않은, 화살을 맞아도 치명적이지 않은 부위는 움직임을 편하게 하기 위해 갑옷들을 이어붙이는 솔기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빈틈, 단단한 갑옷 사이의 그 빈틈으로 화살이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화살을 맞은 부위는 치명적인 부위는 아닙니다. 그래서 아합도 빨리 돌아가서 치료하면 될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날 전쟁은 맹렬했고 서로 뒤엉켜 싸우니 자기의 진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합은 결국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고맙니다.
한 사람이 무심코 활을 당겼는데 갑옷 솔기가 맞았습니다. 그리고 하필 그날 전쟁이 맹렬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연입니까? 세상은 많은 우연들의 집합체입니다. 그런데 그 수 많은 우연들이 하나의 뜻과 의지로 운행되는 것을 느껴본 적 있으십니까? 이는 ‘죽을 사람은 죽는다’는 운명론과는 다릅니다. 온갓 대비를 한 똑똑한 아합과 그의 술수에 끌려다니며 빠질 때 빠지지 못한 여호사밧, 이 두 인생이 어떻습니까? 여호사밧은 죽음 밖에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살게 하셨고, 아합은 당연히 살 상황에서 죽음을 맞게 하셨습니다. 그 과정 가운데서 우연을 사용하기도 하시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용하기도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뾰족한 화살 촉이 그 좁은 솔기를 뚫을 정도로, 예리하고 한 치 오차도 없이 운행하십니다. 여호사밧에게는 은혜를 베푸셨고, 악한 아합에게는 그에 맞는 보응을 내리셨습니다. 물론 우리의 인생사가 모두 권선징악으로 끝나진 않습니다. 항상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고, 부조리와 악한 자의 득세를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수많은 시편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경에서는 그 부조리 속에서도 그 모든 것을 운행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남의 꼬드김으로 함정에 빠질 때, 바닥 혹은 죽음 외에는 내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또는 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될 때, 이 모든 때에도 하나님께선 운행하고 계십니다. 갈 곳 잃은 화살촉을 정확하게 꽂는 분이시고, 사람 마음을 움직여 가던 길도 돌이키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권선징악보다 더 크신 분을 보아야 합니다. 인간의 계획 이상의, 인간의 선함 그 이상의 하나님의 운행하심이, 오늘 말씀에서의 ‘한 사람’과 ‘무심코’ 같은 우연으로 드러났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 뒤에 계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신음까지도 들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 인생이 우리의 계획대로, 뜻대로 되지 않음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세상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 없지만, 자식도, 배우자도, 친구도, 회사도, 집도, 하다못해 나 자신의 몸뚱이도 뜻대로 되는 것이 없지마는, 제 뜻대로 하려했던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내려놓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겸손하게 구하는 자 되게 하옵소서. 저희의 오늘 기도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겸손을 간구하는 소리가 되게 하시며, 혹시 교우님 중에 기도도 할 수 없을 만큼 큰 절망과 바닥에 있는 분 있다면, 부지불식 간에 내쉰 한숨과 읊조린 의미없는 소리들도 간절한 간구로 들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며 아합에게 동조한 여호사밧의 의도는 무엇이었을지 생각해 보며, 내가 세상에서 동조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묵상해 봅시다.
2. 기도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들었던 때가 있었습니까? 그 때 어떻게 다시 일어날 수 있었는지 돌아봅시다.
3. 악한 자가 득세하는 것을 볼 때 어떤 생각이 들고 어떤 마음으로 기도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4. 내 계획으로 가득 찬 오늘 하루 중에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작은 여백을 생각해 봅시다.
(작성자: 윤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