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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호이안 지역 작전및 철군 1) 황룡9-2호 작전시 여단 수색중대의 상황 2) 특공중대를 수색중대로 개편하게된 과정 * 여단 수색중대장 신웅묵 대위 * 우리 위원회까지 찾아와 주시어 대단히 감사합니다. 해병대 초대사령관을 지내신 부친(신현준 장군) 께서도 안녕하신지요? (위 는 1982년 7월 26일 국방부 전사편찬 위원회의 김종구 박사의 질문) 저를 찾으시느라고 고생하셨을 것으로 믿습니다. 저희가족은 미국으로 이민갑니다. 부친께서는 이미 미국 캘리포니아에 지난 4월 이민가셨고, 저도 9월에 미국으로 떠날 예정이라 저의 주변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이민을 가게된 동기는 파월당시 제가 미군(해병) 5명의 생명을 구해준 일이있어 그들의 초청으로 이민하게 된것이지요. 저는 파월당시 두번에 걸쳐 파월 했는데, 첫번째는 1968~1969 년이고, 두번째는 1970년 4월~1971년 6월까지 입니다. 오늘 증언할 내용은 1970년 11월에 실시된 수색중대의 Que Son (322고지)산악전과 그후 1971년 4월 수색중대가 제2대대에 배속되어 또한번 퀘산산악에 투입되어 작전을한 황룡14호 작전에 대한 전투경과 입니다. ![]() 그것은 1970년 6월말에서 7월중순 사이 우리수색중대의 1개팀이 미 해병 제1사단의 수색대대의 수색팀과합동으로 적진깊숙히 침투하여 수색활동을 전개한 것입니다. 이러한 한, 미 합동수색은 1개 팀을 미군2명, 한국군 7명으로 구성할때도 있고, 미군여러개 팀에 우리해병 1개팀이 참가할때도 있었습니다. 작전지역은 너무나 깊숙한 오지라 그당시에도 지도상에 위치를 찾기 힘들었음으로 지금지도상에 확실한 지점을 도식할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1970년 5월 22일에 수색중대의 기간요원이 될 1개소대를 창설할때 소대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이때 미 해병대에서 파견나온 교관으로 부터 본격적인 수색교육을 받게 되었지요. 그리고 교육을 마치자 이번교육을 실전에 응용하는 뜻에서 전술한바와 같이 케산 산악 등지에서 한, 미 합동수색정찰을 실시하였습니다. 그후 6월말 경에 수색중대가 정식으로 발족되었고 나는 중대장으로 임명되었지요. 그러니까 오늘 증언하게될 중점사항인 황룡9-2호 작전이 실시된것은 중대 창설후에 가진 첫 중대단위 수색 정찰인 것입니다. 출동전에 작전회의를 열었는데, 기억이 안나고 제가 기억하는 바로는 "Baldy 기지에 있다가 미군과 합동으로 케산 산에서 수색작전을 실시하라" 는 명령을 여단으로부터 수령하였습니다. ![]() 미 제1해병사단의 Marble Mt, 비행장으로 부터 중대기지로 날아온 CH-53과 CH-46 헬기로 우리 중대는 Camp Baldy (미 해병제 5연대 본부) 로 이동한 것이 11월 16일 이었습니다. 도착당일 오후부터 18일까지 3일간 미해병 교관으로부터 적정, 현지지형 등에 관한 설명을 포함한 현지적응 훈련을 받았습니다. 11월 19일 아침 일찍이 CH-46 (제5연대 헬기) 편으로 여러번 왕복해서 322 고지로 이동하였는데 적과의 접촉은 없었습니다. 첫날은 진지공사에 주력하였고 일몰전에 공사를 끝내고 청음초를 내보내고 야간방어에 임하였습니다. 그다음날부터 소대당 1개팀씩 산록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탐색을 실시하였는데, 현제는 사용하고 있지않는 몇개의 동굴을 발견하였을뿐 적을 발견치 못하였습니다. 소대의 3개팀중 1개팀은 예비이고, 다른 1개 팀은 3박 4일의 불특정지역 (탐색코스를 정하지않는) 에 장기탐색 및 매복대로 운영하였고, 마지막 1개팀은 24시간 매복팀으로 파송하였습니다. 이 3개팀은 4일만에 한번 순환 근무를 시켰습니다. 322고지에는 합동작전차 미해병 수색 1개팀이 나와 중대본부와 함께 기거하면서 우리를 도왔는데, 이들은각 소대팀마다 미 해병2명이 배속되어 일일탐색 에 함께 출동하였습니다. (우리팀7명+미군2면 계9명팀) ![]() 2주간의 계속적인 반복탐색에도 적과의 조우전은 없었고, 다만 322고지와 그서쪽에 있는 484고지와 565고지 사이 계곡으로 매일 저녁 27~30명의 베트공들이 남하하는 것을 관측하고 이곳에 1개소대 규모의 매복대를 매복시켜, 적 3명을 사살한것 이외에 는 특기할 만한것이 없었습니다. 미해병에 요청하여 베트공7명에게 105mm 제압사격을 가한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매복대(3박4일) 가 적의이동을 발견하자, 방독면을 쓰고 최류탄을 투척하였지만 적이 도주하므로 생포하기를 포기하고 지언사격을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사격결과는 적이 도주하여 분산해 버린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대원들에게 휴대시킨 장비는 철모대신 정글모, 물수통4개, M-16 실탄 21탄창, 수류탄 4발, 크레모아 팀당 4개, 방독면, 3박 4일의 C-Ration과 양말이든 배낭, 팀에하나씩 갈구리, 탐침, 그리고 개인마다 로프,스네프링(헬기에서 로프로 활강시 사용하는 로프걸이) 등이었습니다. 물수통을 4개씩이나 휴대하였지만 모자라는것 같았습니다. 적의 부비트랩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정도로 애를먹었는데, 그예방책은 여러가지 방책이 있지만 간단히 생각하면됩니다. 그것은 길이나있는곳은 가지말고 길이없는 험한곳으로 이동하는것이 제일좋은 방책입니다. ![]() 11월 30일 10:00 에 철수하기 시작하여 산록에 일단 집결하였다가, LZ으로 지정된 동쪽철로 너머로 이동하여 헬기편으로 중대기지로 복귀(해질무렵) 하였는데, 그당시 484고지에 재배치하라는 명령을 받지않았는가 라는 질문에는 , 받은바없으며, 당시 우리중대는 단독작전으로 322고지에서 실시한것 으로 기억됩니다. 중대기지에 계속남아있다가 1971년 4월 24일부터 5월 3일까지 제2대대에 배속되어 또한번 Que Son 산악에서 작전하였는데, 그때에는 제2대대의 서진 공격로의 끝에서 저지 진지를 점령하고, 적의 퇴로 차단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그때에는 별로 접적이 없었고, 제2소대장 백중기 소위가 지휘하는 소대가 베트공이 금방 본 용변 흔적을 발견하고 추적하여 동굴을 발견, 그속에 산더미처럼 쌓인 쌀 (백미 100가마, 벼30가마) 을 노획하여 헬기에 의해 후송하였습니다. 이쌀을 발견하기 전에 상세한 상황은 기억이 안나지만 동소대가 베트공 2명을 발견하고 사살하였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주변을 철저히 탐색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따라 쌀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유우방군의 지원을 무시할 정도로 너무나 주체성이 강하여 자기자신밖에 모르는 민족인것 같았습니다. 월남 제1군단장 Lam 장군을 비롯한 모든 월남장교는 "팔아먹는 것이 일이었습니다" 부정부패가 팽배하였으며 한 예로 월남인 에게 준 쌀은 베트공에게 로 팔려갔고 월남정부는 다시 사들이는 일이라든가, ![]() 월남군이 죽지않는 것으로 보아 베트공과 내통하는것 같았으며, 하급자들은 상급자 (특히 군단장 Lam 장군) 를 "저렇게 해먹으니 되겠는가?" 라고 불평하는 것 등을 들수 있었습니다. 증언을 시작할때 "미군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다"라는 말을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1970년 6월 말경 한국일보에도 난 미담입니다. 6월 10일 미 해병 5명을 구출하게 되었지요. 이때에 상황은 미군 5명과 우리소대 2명으로된 7명 1개 팀이 Que Son 산에 투입되어 적정을 탐색하는 수색정찰을 끝내고, 귀대키 위해 한곳에 집결해 있었습니다. 나는 헬기에 타고 이들을 실으러 현지상공에 도착했습니다. 그때 아래를 살펴보니 우리팀을 적이 완전 포위한채 사격자세를 취하고 있는것이 아닌가, 나는 미군조종사에게 적의 두상으로 비행토록 지시하여 나를 포함 한 헬기 기총사수 (ANGLICO 요원1명:쿠치맨) 가 기에서 적에게 집중사격을 가하고 또 옆에 따라오는 엄호용 무장헬기가 이에 가세하여 로케트탄과 기총소사를 퍼부었습니다. 이사이에 내가탄 CH-46기는 재빨리 포위된 우리팀을 구출하여 귀대길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구조된 미해병들은 헬기내에서 즉각 20$를 거출하여 나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전했고, 그후에 나에게 냉장고, 혼다90cc 오토바이, RCA TV 19인치, 전축등을 "생명을 구해준 보답" 의 뜻으로 전달하였습니다. 그밖에도 현금도 200$ 를 전해와 그중 100$는 MAF군종에게 한국의 수재민 에게 전해달라고 기탁하고 나머지 100$로는 중대를 위해 파티및 운동기구 구입비로 사용하였고, 깡통커피와 파인애플 깡통을 수십 BOX 보내와 중대원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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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승해병!! 도라지 선배님의 이글을 기다렸는데 이제서야 들어와 보게됩니다. 황룡작전에 많은 관심이 있었는데 오늘부터라도 보아야 할것같습니다. |
2008-10-21 14:48:5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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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의 아버지~ 고 신현준 초대사령관님의 자제분또한 월남전선에 투입되었엇슴을 이곳의 자료를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조국과 민족앞에 자신을 내어던진 젊은 청춘도 부족하여 代를이어 해병대에 충성을 다하는모습은~~ 역시 귀감입니다 신현준사령관님의 명복을 빕니다 <<해.병>> |
2008-10-21 19:03:48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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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구출 상황이 좀더 상세하였으면 좋을텐데 신용묵중대장 설명이 아쉽습니다. 어쨌던지 미군을 구촐한거 참 장한 일입니다. |
2008-10-22 07:17:3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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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년 사단본부 참모실? 에서 신용목대위님과 근무했고 사병들에게 인자 하신분입니다. |
2008-10-22 21:59:3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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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탄생의 아버지 해병대 용맹성을 미해병에 보여준 아들 부전자전은 이럴때가 적절한것 같습니다 새로운 사실들 후배들은 기다려 집니다 |
2008-10-22 22:27:47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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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말씀하시는 청룡 수색대장은 초대사령관님의 장남이시고 정확한 이름은 신 옹 목 님이십니다 공군에서 복무하시다가 해간 37 기로 입교하시고 청룡5대대 81mm 소대장 을 지내시다 대위 진급과 함께 수색 중대장을 보직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황룡작전의 케산이라는 지명은 잘못 되었습니다 |
2008-10-24 23:41: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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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감동깊게 잘 보았습니다.신웅목 대위! 진해에서 하사관학교 동기 이기도 한데.....그때가 그립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