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의 감격은 뒤로 미룰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인류문명의 박물관, 지식고고학의 보고, 동서문명의 교차로, 아시아대륙의 끝, 실크로드의 종착역, 어려서부터 귀에 익었던 터키민요 “위스퀴다라 기데리켄 알드다비르야물”(위스퀴다르에 갈 때에 비가 내리네)이 귀에 쟁쟁거리는 보스포러스해협을 바라보면서 느낀 고도 콘스탄티노플의 감격은 인류역사에 대한 경외감을 가지고 살아온 나의 판타지를 자극시키고도 남음이 있었다.
다윗과 솔로몬이 예루살렘을 지배하고 있을 즈음부터 이미 상당한 규모의 도시로서 출발한 이스탄불은 희랍도시국가 메가라(Megara)의 식민지개척자 비자스(Byzas)가 정착하면서 비잔티움(Byzantium)으로 불리었고(BC 657), 그후 페르시아제국과 알렉산더대제의 지배를 거치다가, 기울어져가는 로마제국의 새로운 번영을 꾀하려는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이곳을 새로운 로마제국의 수도(New Rome)로 만들고 새롭게 공인한 기독교문명의 중심지로 삼으면서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명명하였던 것이다(AD 330). 그러다가 이 동로마제국의 수도는 셀주크제국의 한 토후국이었던 오스만의 통치자 메흐메드 2세(Mehmed Ⅱ)에 의하여 정복되었고 이슬람문명의 새로운 중심지로 변모하면서 이스탄불이라는 속칭을 얻게 되었다(AD 1453). 그러다가 터키공화국의 수립자며 터키인의 근대적 삶의 새로운 양식과 가치를 부여한 위대한 지도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Mustafa Kemal Atat뫷rk, 1881∼1938)가 오스만 터키제국의 환영과 결별하기 위하여 수도를 앙카라에 정하면서 제도(帝都)의 운명을 마감하였고(1923), 1930년에는 이스탄불(Istanbul)이라는 공식명칭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희랍문명, 로마문명, 기독교문명, 이슬람문명의 누적된 지층이 아야 소피아(Aya Sofya)라고 불리는, 우리의 외경의 눈길을 자극하는 위대한 성당 한 건물의 기구한 운명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로마제국의 영화를 복원하기 위하여 유스티니아누스황제(Emperor Justinian, 527∼565)가 이 기둥없는 돔연계형식의 건물을 불과 5년 10개월 4일만에 완공했을 때 이와 같이 외쳤던 것이다: “나의 작품을 심판하실 신에게 영광을 오∼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보다 더 아름다운 성전을 지었도다!” 그런데 그 성당의 검푸른 녹색조의 측면 갤러리 대리석 기둥 36개는 고대 7대 불가사의로 알려진 에페수스(에베소)의 아르테미스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리고 메흐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후, 이 위대한 기독교신전을 이슬람사원으로 전환시켰던 것이다. 성화 위에 석회벽을 개칠하고 그 위에 이슬람문양을 그려넣었다. 그리고 성당내부에 미흐랍(이슬람 지성소)을 만들고 외부에는 미나레트 첨탑을 축조하였다.
6세기 동안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어온 이 성당은 케말 파샤의 정·교분리의 철학에 따라 1935년에 박물관으로 전환되었고 유네스코 비잔틴문화재보호위원회의 요청으로 아래층의 회칠만 벗겨내어 옛 비잔틴성화의 모습을 지금 볼 수 있게 되었다. 금박을 속에 넣고 구워낸 모자이크 유리조각의 정치(精緻)하고도 고졸한 품격은 따사로운 황금빛을 반사시킨다.
나는 5월 31일 해가 질 무렵, 나의 학문적 로맨스의 한 크로스로드인 이 찬란한 이스탄불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까뮈의 ‘이방인’의 주인공 뫼르소는 알제리청년을 이유없이 사살한다. 그리고 말한다: “나는 지중해의 태양이 너무 이글거려서 그를 죽였다.” 죽음의 충동을 느낄 정도로 따가웁지만 덥지는 않은 지중해의 태양속에서 내가 이스탄불에 체류한 것은 불과 사흘, 나는 촉박하게 걸음을 앙카라로 옮겨야 했다.
6월 3일 밤 나는 한국대사관 관저만찬에 초대되었다. 중후(重厚)하고 문아(文雅)한 풍도를 지닌 김영기(金永基)대사는 다음과 같이 나에게 한마디 건넨다:
“터키와 우리나라는 우선 문화적 가치관의 기저가 너무 비슷합니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이나 표현방식에 있어서 어떤 이중적인 가면성을 가지고 있다면 터키사람들은 한국사람처럼 매우 직설적이고 솔직합니다. 국회의원들이 멱살잡고 싸우는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하고 터키밖에는 없을 거예요. 남에게 가식없이 호의를 베푸는 것도 같고, 부모를 지극히 공경하며, 1년 선후배도 지독하게 따지는 것도 비슷합니다. 아버지 앞에서 담배 안피고 엄마 앞에서는 응석부리고, 어른을 찾아갈 때는 빚을 내서라도 뭔가 사들고 가고, 먹는 것도 한 그릇에 둘러앉아 숟갈로 같이 떠먹고…. 하여튼 여기서 살다보면 딴 나라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없습니다. 시골마찻길 광경은 우리 옛정서 그대로 입니다. 저는 평소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라는 것이 황하 제후국 문명이전의 어떤 중앙아시아·북방민족의 공통적인 에토스를 집대성하여 표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KBS에서 ‘논어’강의하시는 것도 재미있게 들었습니다만 공자가 구이(九夷)에 대한 동경을 표현하는 것도(「자한」편) 이런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터키인과 한국인의 내면적 감정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하나된 흐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유추한다면 춘추전국시대의 중원문화 이전의 어떤 프로토문화가 터키로, 중국으로, 한국으로 흘러내려갔을 것이라는 논리전개는, 고문명의 실체가 드러나면 드러날수록 설득력을 얻는다.
나는 4일 아침 9시 터키대통령 외잘의 대변인이었으며 1994년부터 96년까지 주한터키대사를 지낸 바 있는 유능한 정치인이며 실업가인 카야 토페리(Kaya Toperi)를 만났다. 그는 매우 활달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한국인과 터키인은 우선 우랄 알타이어라는 동일 어족에 속해 있습니다. 중앙아시아 어느 곳에서 같은 종족이 서쪽으로 서쪽으로 가면서 인종적으로도 점점 서양화되어 오늘의 터키인이 되었고, 동쪽으로 동쪽으로 가면서 동양화되어 오늘의 한국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기본 문법구조가 같고 공통되는 어휘도 100개 이상이 있다면 그것은 충분한 학설적 근거가 되는 것이죠. 할머니·할아버지를 한 울타리에 모시고 사는 대가족제도도 같고 남편이 가장이지만 진짜 보스는 부인인 것도 같습니다. 우리 터키인들은 한국인들을 피를 나눈 형제라고 충심으로 생각합니다. 아∼ 지난번 월드컵때 한국선수들과 한국관객들이 보여준 우의는 잊을 수가 없어요. 한국선수들은 졌으면서도 우리 터키선수들을 포옹하고 스크럼짜고 한몸되어 뒹굴었잖아요? 한국의 청소년들의 열광적인 터키응원… 터키인 모두가 그런 광경을 쳐다보면서 눈물을 안흘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오랜만의 거족적 체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호의적인 두 나라가 서로를 이해하면서 얼마든지 상호이익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길이 많은데 그러한 응분의 협력이 잘 이루어지고 있지않다는데 우리 외교관들의 답답한 느낌이 상존합니다.”
―일례를 들면?
“우선 정치적으로 보자면, 케난 에브렌(Kenan Evren) 대통령이 한국에 대령으로서 주둔한 추억도 있고 해서 순수한 호의로써 82년 12월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뿐만아니라 86년 11월에는 외잘총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의 경제상황을 시찰하고 부산 유엔묘지에 잠들고 있는 터키 전몰장병 462명의 혼령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한국측에서는 대통령답방문제에 관하여 성의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 같질 않습니다. 우선 한국대통령의 터키답방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한국과 터키의 미래, 아니 아시아와 유럽의 구원한 미래를 생각할 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여기 앙카라에 계시는 김영기대사님께서 매우 액티브하고 슬기롭게 모든 문제를 추진하고 계심으로 대통령답방도 조만간에 성사가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저도 앙카라주재의 제2의 한국대사노릇을 하고 있지요.”
―여기 와보니 한국인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들이 너무도 많더군요. 우리 한국인들은 너무 목전의 경제발전에 급급하다 보니깐 원시안적인 다변화의 가능성에 관해 소홀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터키문제는 어떤 고의성이 있다기 보다는 단순히 시야밖의 어떤 이방인문명으로 소외되어 있었다는 표현이 솔직한 고백이 될 것 같습니다. 분명히 시정되어야 할 문제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경제적 협력입니다. 현대가 이곳 이스탄불 동쪽 120㎞ 떨어진 이즈미트시에 연간 6만대 규모의 자동차 현지생산라인을 만들어 1200명의 고용을 창출한 것은 대표적 예지요. 현재 한국과 터키간에는 무역역조현상이 심합니다만 이것을 시정해달라고 우리가 요청하는 것은 아닙니다. 터키는 생산적 투자를 원합니다. 현재 터키는 주된 경제원이 농업이 되고 있습니다만 산업국가로서의 도약이 요청되는 단계에 놓여 있습니다. 이것은 결코 일방적 요청이 아닙니다. 터키는 광활한 대지에 고문명의 심도와 윤리적 가치의 축적이 있으며, 인프라가 잘 조성되어 있고, 고질의 노동력과, 한국공장의 3분의 1밖에 안되는 싼 임금이 보장됩니다. 그리고 노동조합의 문제도 생산력에 지장을 초래하는 장애적 요소는 전혀 없습니다. 현재 현대자동차공장에서 생산되는 베르나·스타렉스는 터키에만 흡수되는 것이 아니라, 서유럽·동유럽·중동·북부아프리카로 수출되고 있습니다. 올해부터 이미 현대공장은 흑자로 전환되었습니다. 지난 5월 15일 스타렉스 유럽수출기념식에는 우리 부수상이 참석하여 애로사항이 있으면 모든 것을 적극 해결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와같은 경제협력은 매우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으로부터 도움을 얻어 산업국가로의 도약을 시도할 수 있으며, 한국은 터키를 세계문명진출의 스프링보드로 삼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터키는 서유럽·동유럽·중앙아시아·러시아와 주변국가·중동이슬람문화권·북부아프리카의 전략적 요충이며 문명의 중심입니다. 그리고 무한한 가능성의 나라이며 축적된 인류문명의 보고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터키는 의회민주주의 국가이며 한국과는 정신적 유대감이 깊은 혈맹입니다. 따라서 미래가 확보되는 안전하고도 지속적인 투자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저도 터키 현지에 처음 와서 보고 어디에서나 느낄 수 있는 터키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호감과 환대의 수준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 한국은 터키처럼 충심으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우방을 별로 갖고 있질 못합니다. 국가간도 개인관계처럼 프렌드십을 처음부터 생짜로 만들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훌륭한 프렌드십의 바탕이 축적되어 있는 관계라면 이 어마어마한 문화적 자산을 피차 활용치 못한다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디가나 혈맹, 혈맹, 이런 말을 자주 듣는데 이 말의 구체적 진의를 잘 파악하지 못하겠습니다.
“혈맹이라는 의미는 역사적으로 크게 두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처음에 말씀드린대로 우리는 언어와 문화와 인종의 뿌리를 공유하는 피를 나눈 한 자손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어느 사이엔가 우리 터키인에게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는 관념입니다. 오스만 투르크의 조상과 한민족의 단군과는 아마도 형제지간일 것입니다. 단군이 하강했다는 신단수도 중앙아시아 어느 곳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더 구체적인 두번째의 차원은 바로 6·25한국전쟁에 터키군이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피를 흘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상무정신을 생명으로 삼는 오스만 투르크의 자존심과 관련된 문제였으며 근대국가로서 새로 탄생된 터키공화국의 케말리즘(Kemalism:무스타파 케말장군의 철학)의 이상주의, ‘유르타술, 지한다술’(Yurtta Sulh, Cihanda Sulh:국내에 평화를, 세계에 평화를)의 시험대였습니다. 그것은 터키공화국 청년들이 아시아대륙에서 피를 흘린 최초의 국제원정전쟁이었습니다. 원동아시아대륙에서 들려오는 군우리전투의 비극적 소식은 우리 터키인들의 거족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일대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보다 심각한 설명과 시각교정을 요구케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6·25전쟁이란 그냥 비극일 뿐이며 잊고싶은 비통한 체험일 뿐이다. 과연 누가 어떻게 싸웠는지, 그 왜에 대한 명분조차 희미한 상황에서 피난살이에 바빴던 우리에겐 터키가 미국·영국에 뒤이어 1만5천명이라는 대규모의 병력을 투입한 3대참전국가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실감있게 기억할 길이 없다.
터키파병이 당시 나토가입과 관련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이들은 순수한 우방이라는 명분으로 원정의 길을 떠났으며, 1950년 10월 17일 5천90명의 제1여단이 부산항에 발을 딛게 된다. 이들은 미8군의 후방지역 경계작전을 수행케된다. 그러다가 전세가 급변하여 중공군의 참전결정이 내려지고 11월 25일에는 중공군의 1차공세가 시작되었다. 미8군의 주력부대가 철수하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중공군을 저지하는 전투에 터키군은 투입되었던 것이다. 평북과 평남의 경계지역에 있는 덕천군 군우리에서 중공군의 팔자(八字)진법에 휘말리어 고립무원의 상황속에서 전우의 시체를 참호로 삼아 알라를 외치면서 용감히 싸우고 또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터키군의 희생은 엄청난 것이었다. 터키군은 한국전 기간동안 무려 3천6백23명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 전사자가 7백21명이었으며 부상자는 2천4백93명, 실종자 1백75명, 포로가 2백34명이나 발생하였다. 한국전쟁에서 터키군처럼 용맹스러웠던 군대는 없었다. 터키는 세계제1차대전에서 독일과 손잡으면서 오스만제국이 물거품처럼 사라지는 비극적 체험을 하였다. 그러면서 그들의 전사적 기질을 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였던 것이다. 6·25한국전쟁은 그들에게 화려한 무사기질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거족적인 응집력의 구심점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목숨을 잃었지만 가지(Gazi:존경스러운 전사라는 의미며 영국의 써[sir]라는 작위에 해당)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다. 그러나 꽃다운 나이에 알지도 못했던 원동 아침의 나라에서 들려오는 자식의 저승길 소식은 터키여인들의 가슴을 찢는 비통의 부음이었다. 그렇게 50년부터 53년까지 터키전역이 울음바다속에서 ‘꼬레’라는 혈맹(칸카르데쉬:피의 형제)을 기억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터키인들의 거족적 체험에 관하여 일말의 정보조차 없는 채 오늘의 번영만을 구가하며 터키라는 우방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