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 디 를: 충청도계 6구간 (335 지방도~부론면~남한강~귀래면~갈미봉~옥녀봉~배재)
::: 언 제: 2013. 6. 9.(일)
::: 누 구 랑: 산에님, 거산매
::: 이동시간: 5:30~20:35 (15시간 5분, 휴식 및 점심식사, 자전거/차량 회수 시간 포함)
::: 날 씨: 무더위
::: 이동경로: 원주시 부론면(5:30)~남한강대교(5:44)~삼합지(6:09)~창남나루(6:33)
~삼합도(6:53)~삼합리~삼합지(7:54)~남한강대교(9:08)~솔미(9:48)
~덕은교(10:23)~하남마을(11:05)~북원로(11:37)~귀래(11:51)
~외촌마을(15:40)~갈미봉(17:45)~녹재고개(18:16)~옥녀봉(19:06)
~배재(20:35)
::: 접경 시군: 충주시 소태면/백운면 (충청북도)
여주시 점동면 (경기도), 원주시 부론면/귀래면 (강원도)
::: 이동 거리: 약 31.17km (충청도계 도상거리), 자전거 이동거리: 41.93km(도상거리)
도보이동거리: 약 10.00km 이상(알바 포함),
총이동거리(자전거+도보): 51.93km
::: 누적 거리: 133.84km
::: 진 척 도: 133.84km/1,308km [10.23%]
::: 지리적 특성: 충청도계 6구간은 여주군 점동면 삼합리, 충주시 양성면 단암리,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 등의 경기도, 강원도, 충청북도 3도가 만나고,
섬강과 청미천이 남한강에 합류하는 지역이다.
해발 778m의 옥녀봉은 천등산을 거쳐 충주호에서 맥을 다하는 천등지맥
이며, 백운지맥과 연결된다.
[백두대간 두로봉 -> 한강기맥 -> 영월지맥 -> 백운지맥
-> 천등지맥 -> 충주호]
안성교~안성천 -미양산-입장교차로 - 안성 남사당 바우덕이묘~청룡호수~엽돈재- 395.4-서운산 - 배티고개~장고개 ~422.3-470.8-409.9 -옥정현(587 지방도)- 무이산-470.8-덕성산(506)-17번 국도 -백운산(345.4) -356-도고리봉(351.8) - 중부고속도로(583 지방도)-마이산(452)-472.5-325.7-용대리- 팔성산(377.4)-임오산(341)-응천-청미천-장호원-청미천-오갑산(609.4)-해남고개-마골산-335 지방도- 남한강-335 지방도-남한강-옥천암-남한강 -덕은교-황산천-19 국도-외촌이고개-갈미봉(598)-옥녀봉-배재-십자봉(984.8)-오두치-백운산(1087.1)-벼락바위-402 지방도- 구학산-담바위-5 국도-중앙고속도로-선터골- 백련사 감악봉(885.9) - 석기암(905.7)-오미저수지- 미고개(597지방도)-청룡산(574.6) - 송악산(819.1) -사슬치 -솔미산(389.2)-관란정-평창강-시곡천-삽둔- 가래골굴-입석-느릅재(38국도) [한반도면])-이현-무등산(619.5)-왕박산(508.6) -가창산(819.5)-519 지방도(용암사) - 초로봉 - 593 지방도- 별방리- 사지원천-태화산(1027.4) - 남한강- 삼봉(668) -마대산(1052.2) - 김삿갓 묘 - 어래산(1063.6)- 935 지방도(남대천) -섶밭 - 임도(마락리)-의풍리- 형제봉(1177.5) - 마당치-병풍바위-상월봉-국망봉(1420.8) - 소백산 비로봉(1439.5)-제1 연화봉(1394.4)-제2 연화봉 - 죽령 [소백산 종주] - 도솔봉(1314.2)~묘적봉(1148)-묘적령-뱀재-백암봉-싸리재-배재-저수령 - 진터-59 국도 -궁텃골-새점- 모녀재-문수봉(1161.5) - 대미산(1115) - 꼭두바위봉(838) - 관음리- 포암산(961.7) - 탄항산(857)- 부봉(913) - 마역봉- 3관문-문경새재 - 1~3관문-신선암봉(937)-조령산(1025) - 이화령 - 황학산(912) - 백화산(1063.5) - 평전치-이만봉-시루봉 -희양산(998)-구왕봉-주치봉-은티재- 악휘봉(845) - 922 지방도- 선유동계곡(상관평-중관평-홍수막-제비소-선유동문) - 대야산(930.7) 서북릉- 늘재 - 고모치-조항산(951.2)- 청화산(984) - 입석리 -32번 지방도- 수안재-백악산(858) - 37 국도 -37 국도(운흥리)- 미남봉(610)-상학봉(834)- 묘봉(874)-관음봉(985)-문장대(1054) -문수봉-경업대-법주사 - 신선대-입석대-비로봉-속리산 천왕봉(1057)- 형제봉 - 구병산 신선대-시루봉-청원 상주 고속도로- 한중-이만각 - 팔음산(762.3)-벌재-천금산(464.9)- 901 지방도 (금계리)- 주행봉 (874)- 백화산(933)- 반야사-오도치(977 지방도)- 지장산(772.4) - 반수(도로)- 국수봉(683.5)-용문산-난함산- 경부고속도로- 눌의산(743)-가성산 - 개방령(906 지방도)- 황악산 - 형제봉-여정봉-우두령(901 지방도)- 삼도봉(1172)- 석기봉(1200) - 민주지산(1241.7) - 설천고- 무주반디랜드 - 남대천- 여의리 - 백하산(633.9) - 19 국도- 칠봉산(520.9) - 삼도봉- 양각산(479.9) - 금강(농원) - 금강 (방우리 갈림길) - 방우리- 베틀봉-지삼치( 대전통영고속국도)- 수로봉(505.7)-덕기봉 (558) - 목사리치( 635 지방도) - 조봉-성덕봉(474.7) - 솔재( 13 국도)- 성봉 - 성치산 (670.4)- 대촌마을(55 국도) - 560 봉 - 더기산 - 오두재-무릉리 - 오두재-선야봉(758.7) - 세티재-일양리 - 국기봉 - 배티재(17 국도)- 대둔산(878)-서각봉 - 완창리 - 697 지방도(아리랑고개)- 장재봉(487.3) -빼재--남당산 -작봉산(418.2) 까치봉(456)- 643 지방도(말목재)- 옥녀봉(410.4) -성태봉(403)- 호남고속국도 - 신량교-1 국도-봉동리-강경천-채운리 - 황산대교 - 금강 - 용포대교-공주산- 금강시민공원(금강 하구둑)- 장항-전망산 등대-송림교-송석리- 비인해수욕장 - 옥녀봉(78.7) - 마량포구 - 홍원항 - 춘장대 - 부사방조제 - 무창포 - 남포방조제 - 대천여객선터미널 - 대천방조제 - 이지함묘 - 오천성 - 보령방조제- 홍성방조제 - 남당항- 서산A지구방조제 - 서산B지구방조제- 안면대교 - 황도- 구매항 - 영목항 - 꽃지해수욕장 - 드르니항- 드르니항 - 곰섬 - 마검포 - 청포대 - 몽산포 - 조흥면 - 채석포 - 안흥성 - 안흥외항 - 조흥면사무소- 통개항- 파도리 - 모항 - 만리포- 천리포 - 신두리- 태안항 - 이원방조제 - 민대항- 팔해태건조장-밤섬선착장-청산리나루 -이화산(170.2) -도내나루-현제봉(120)-금굴산(148.8) - 팔봉초- 저섬 - 진충사-대산-웅도-자용산(149.4)- 황금산 - 대호방조제 - 교로리 - 석문방조제-송산방조제 - 행담도 - 삽교방조제 - 아산만 방조제-쌀조개섬-둔포교 -안성천 안성교
충청도계 6구간은
여주군, 원주시와, 충주시, 제천시의 접경을 지나는 길이다.
원주시에 대한 이해를 위해 원주시청 홈페이지에서 원주시관련
정보를 확인하고 게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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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시는 한반도의 중심부이자, 강원도의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반도의 백두대간에 남북으로 길게 뻗은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원주시를 둘러싼 지역으로는 동쪽의 영월·평창군, 서쪽의 경기도 여주·양평군, 북쪽의 횡성군, 남쪽의 충청북도 충주·제천시 등이 있다. 특히, 원주시는 남한강과 섬강을 경계로 경기도 여주군, 남한강과 운계천을 경계로 충청북도 충주시 등 2개의 다른 도와 접하고 있는 위치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연혁
삼국시대
녹색의 산 형태는 원주를 대표하는 치악산을 상징하며 3개의 봉우리는 각각 비로봉, 향로봉, 남대봉을 상징하며, 하단의 점층적으로 커지는 청색의 3개 타원은 통합된 원주시민의 화합과 단결, 전진을 의미합니다.
『Healthy Wonju』에서 Healthy의 의미는 단순히 신체의 건강만이 아닌 건전한 정신(Healthy Mind), 건강한 육체(Healthy Body), 건강한 사회(Healthy Society)를 의미합니다. 자유분방한 서체와 어우러진 초록색의 대지(Well-being, 행복한 삶)위에 이니셜 “H"를 의인화한 역동적인 사람(Energetic, 활기찬 모습)과 따뜻한 햇살이 비추는 형상(Hope,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조합하였으며, 슬로건 전체를 비추는 햇살은 원주시의 행정구역인 1읍 8면 16개동 전체의 화합(Harmony)을 나타냅니다. Healthy Wonju는 정형성을 탈피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표현함으로써 시에대한 친근감과 시민단합을 유도합니다.또한 건강도시로써 역동적이고 활기차며 진취적인 원주시의 새로운 상징이며 도시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됩니다.
I Love Dynamic Wonju 디자인 의미
Dynamic Wonju는 진취적이고 새로운 원주로, 다이내믹의 대담함, 강렬함, 역동성, 강한 에너지를 새 희망 원주, 역동하는 원주, 푸른 원주로 성장해 가는 원주의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으며
다이내믹을 강한 글씨로 표현함으로써 역동적이고 활기차며 진취적인 원주를 의미한다.
파란색과 연두색의 조화로 맑고 깨끗하며 친환경 푸른 도시, 미래의 교육과 복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원주시 건강도시 마크는 WHO가 인증한 세계 건강도시 마크의 컨셉을 연계하여 개발되었다.
건강도시라 함은 모든 구성원들이 활기차고, 화합된 도시를 의미하기 때문에 초록색상의 나뭇잎(자연, 대지) 위에 건축물(도시의 대표적 상징)과 역동적인 사람(원주시민의 활기찬 모습)을 조합하여 화합된 도시로서의 원주시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도시의 모든 건강한 구성 요소들을 따듯한 햇살이 비추는 현상을 시각화하였다.
안전도시의 영문 공식명칭인‘Safe Community’의 첫철자‘S’와‘C’를 형상화
‘S’와‘C’를 형상화 하면서도 안전의 의미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인‘크로스 마크(안전제일 마크)’를 표현하여 안전에 대한 이미지를 강조함
‘S’의 녹색은 안전한 도시 원주를 수호하는 치악산의 정기를 상징하며
‘C’의 청색은 첨단의료기기 산업단지로서의 건강하고 깨끗한 원주시를 상징
수명이 길어 수목 숭배 풍속이 전해 내려 오며, 짙은 푸르름과 물든 단풍은 화합과 단결을, 웅장한 수세와 긴 수명은 영원한 전진을 의미합니다.
- '95. 3. 2. 지정 -
사철피어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것은 시민들의 끈기있는 인내심을 상징하고, 색깔과 종류의 다양함은 시민들의 무궁무진한 지혜를, 그윽한 향기는 시민들의 우아하고 고귀한 기품을 나타내며 줄기의 가시는 불의에 항거 하는 시민들의 용기를 보여줍니다
- '95. 3. 2. 지정 -
고귀한 기품과 무궁무진한 지혜를 나타내며, 아무곳이나 서식하는 강인한 인내력을 상징하고, 꼬리는 무궁한 발전을 뜻합니다.
- '95. 3. 2. 지정 -
원주 치악산에 한 절이 있어 하루는 불존(佛尊) 수좌(首座)가 법당(法堂) 뒤를 배회하고 있었는데, 큰 구렁이 한 마리가 꿩을 감싸고
있었고, 구렁이와 꿩이 서로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아, 이렇듯 서로 물고 버티며 놓지 않는 다툼이 있었는데, 둘이 서로 싸움하는
사이에 어부지리(漁父之利)가 가까이에 있음을 알지 못하였다.
불존 수좌가 지팡이로 구렁이를 풀어 꿩을 구하니, 이날 이경(二更 밤10시경)에 하얀 형상을 한 노인이 와서 전등(剪燈)의 왼쪽에 앉아 쇠붙이가 부딪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말하기를, "나는 이내 이 절의 종을 주조하는 화주승(化主僧)이다. 사방에서 시주를 모아 자선(慈善)을 베풀고자 이 큰 종을 주조하였으나 종소리가 맑지 못하여 도리어 죄업(罪業)에 대한 응보(應報)를 받았다.
살리고 죽이는 것은 구렁이의 뜻이었고, 지금에는 재앙과 액운이 헤아릴 수 없다. 오늘 다행히 꿩 한 마리를 얻어 점심으로 먹으려
하였다. 그대의 자비로 이와 같이 한번 굶주렸으니 반드시 그대를 대신으로 먹어야겠다.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만약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나를 위해 종을 쳐서 소리를 내면 이러한 추한 응보를 면할 것이니, 이것 또한 자비이다." 하고 말이 끝나자 홀연히 떠나갔다.
의심스러워 괴상하게 여기는 사이에 앞에 있는 울리지 않던 종이 천천히 하늘 밖으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두운 속에서 한 쌍의 꿩을 보니 부리를 사용하여 종을 울렸다. 한 번은 소리가 크고 한 번은 소리가 작아 큰 소리와 작은 소리가 마디가 있었고 한 번은 암컷의 소리였고 한 번은 수컷의 소리여서 암컷과 수컷의 차례가 있었다. 일종(一宗)이 죽고 일종(一宗)이 살았으니 죽고 사는 것에는 표지(標識)가 있으며 이것이 불문(佛門)에서 예악(禮樂)을 짓는 법이다. 동틀 무렵에 노인이 다시 와서 말하기를, "나는 종이 울리는 힘을 입어 얽어맸던 몸에서 벗어나 승천한다."고 하였다. 해가 솟아 밝아올 무렵에 가서 보니 금구렁이 한 마리가 남쪽 처마 아래에 죽어 있으므로 승(僧)이 죽었을 때의 예와 같이 장사지냈다.
아, 꿩은 자기의 몸을 희생하여 목숨을 구해준 승(僧)의 은혜를 보답했고 승(僧)은 꿩의 목숨을 구해 준 것으로 인하여 목숨을 구하는 보답을 받았다. 구렁이는 승(僧)으로 인하여 생명을 아껴 꿩을 살려 주었고, 꿩으로 인하여 쌓였던 억겁(億劫)의 고통을 벗었으니
이것이 일거삼득(一擧三得)이다. 사물은 비록 같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뛰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치악(雉樂)으로써 그 산의 이름으로
하고 종을 쳤던 소리로써 온 나라의 사찰에 퍼졌다고 한다. (자웅종기에는 雉岳이 雉樂으로 되어 있음.)
- 해남 대흥사에서 1921년 발간한 「범해선사 문집」중의 '자웅종기(雌雄鐘記)'
- 『원주얼 9호』에서 발췌
문막읍에 비두리라는 마을이 있다. 속칭 비두네미라 부르는 이곳에는 예날부터 질이 좋은 화강암이 많이 나와 그것이 비석재료로 많이 사용되었다. 오늘의 거돈사(居頓寺)터에 세워진 승묘탑비를 세울 때의 이야기이다. 비과 좌대는 완성됐으나 비갓을 만들만한 석재가 마련되지 않아 거돈사 주지는 사방으로 찾아다니다가 이 마을 근처에서 화강암이 나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석공을 데리고 가서 알맞은 바위를 떠 용이 구름에 쌓여 있는 양각 무늬까지 쪼았다. 그러나 막상 이 비갓을 옮기려 하니
어떻게나 무거운지 끄덕도 하지 않았다. "이건 무슨 곡절이 있는게 아닐까." 힘께나 쓴다는 사람들이 모였다가 이 갓이 꼼짝도 하지
않자 모두 슬며시 꽁무니를 빼고 없어졌다. 절쪽에서는 심히 난처해졌다.
그러던 어느날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스님 한 분이 이 마을에 들렸다. 그는 어느 농가에 들려, "이 댁에서 먹이는 소 좀 빌립시다." 하고 부탁해 왔다. "무엇을 하시렵니까?" 주인이 물었다. "비갓을 실어 옮겨야겠는데 댁의 황소면 거뜬히 할 수 있을것 같소." 주인은 선뜻 승낙해 주었으나 내심으로는 수십 명의 장정들이 모여 옮기려다가 옮기지 못한 것을 스님 혼자서 어찌 황소 한마리의 힘을 빌려
그 일을 할 수 있 을 것인가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은 소에게 쇠죽을 잔뜩 먹여 외양간에서 끌어내 앞마당에 매어놓았다.
그런데 금방이라도 소를 끌로 갈 듯한 스님이 해가 지도록 나타나지를 않았다. "실없는 중이로군. 익힌 밥 먹고 선소리치는 사람이로군." 주인은 일부러 쇠죽까지 잔뜩 먹여 놓은 일에 울화가 치밀었다.
이때 스님이 나타났다. "주인어른 고맙소이다. 긴히 부리고 소는 잘 모셔왔습니다." 주인은 놀랐다. 종일 마당에 매어 있었는데 언제
소 를 끌고 갔다 돌아왔다는 말인지 하도 어이가 없어서, " 스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요." 하고 물었다. 주인의 생각을 눈치챈 스님은 "네, 몸 뚱아리는 그래로 두고 소의 혼만 데리고 가서 일을 마치고 무사히 왔소. 소가 몹시 힘겨운지 땀을 흠뻑 흘리고 있소."하는 것이었다. 주인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소를 자세히 살펴보니 정말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아무래도 괴이한 일이라 주인은 비갓을 옮겨갔다는 비두네마을로 가보았다. 이미 비갓은 분명히 옮겨졌고 그것을 끌고 간 자국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로부터 이곳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비두네미로 불러왔다고 하는데 나중에 행정구역명으로 "비두리"로 고쳐졌다 한다 이 전설은
좀 독특한 지명을 가진 비두네미골의 유래를 비갓과 관련지어 설명한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비갓과 비두리를 관련짓는
과정에서 도승이 등장하여 황소의 혼을 이용하여 비갓을 옮긴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도사의 능력을 신비화함으로써 그 비갓에
신비 함을 부여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옛날 소초면 흥양리에는 인색하고 욕심 많은 큰 부자가 살았는데, 어느날 그가 외양간을 손질하고 있을 때 한 중이 찾아와 시주를
청했다 . 목탁소리를 들으면서도 모르는 체하던 부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부삽에다 쇠똥을 푹 떠서 "아까운 거름이지만 주는 것이니 받아가라."면서 스님의 바랑에다 넣어 주는 것이었다. 이 광경을 목격한 그 집의 며느리는 밥을 지으려던 쌀을 들고 뒷문으로 스님을 쫓아 나가서는 시아버지의 실수를 용서해 달라며 쌀을 시주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지 사흘 후 부터 맑은 하늘에 천둥이 치고 먹구름이 끼더니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때 며칠 전의 스님이 찾아와며느리에게 이제 이 집의 운명이 다하였으니 살고 싶으면 따라오라고 황급히 재촉하였다. 며느리는 경황이 없이 스님을 따라나섰는데, 비가 억수같이 퍼부어 금방 개천이 넘치기 시작하였다. 산중턱에 이르렀을 때 스님은 며느리에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절대 뒤를 돌아봐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만일 돌아다보면 돌이 되어 죽는다는 것이다. 그 말을 명심하고 산등성이에 올랐을 때 갑자기 뒤에서 벼락이 치고 아우성소리가 들려서 자신도 모르게 뒤쪽을 돌아본 며느리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자기 집은 벼락이 내리쳐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리고 그곳에서 용이땅을 터치고 등천하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목격한 며느리는 그 순간 돌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녀가 올랐던 봉우리를 며느리봉이라 하고, 집터는 용이 터져나간 골짜기라 하여 용터지기로 불려온다.
명산인 치악산에 큰절을 세우고자 한 스님이 찾아들었다. 지금의 구룡골에 접어들었는데 동편에는 시루봉을 쳐다보며 아늑한 협곡으로 되어있는 이곳 풍치의 아름다움은 가히 절경이었다. 그러나 명당을 골라 절을 세우려고 주변을 살펴본즉 대웅전을 앉혀야 할 자리가 꼭 연못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스님은 그 연못을 메우려고 했다. 이때 이 연못속에서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는데 용들로서는 큰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의 살곳을 메우다니 그런 무자비한 일을 스님이 어떻게 할수 있소?" 하고 항의 했다. 그러나 스님은 "존엄하신
부처님을 모시려면 너희들이 사는 연못이어야 하는데 어떻하겠나?" 하고 양보하려 들지 않았다. 스님과 용들은 메우겠다 못 메운다
한참 실갱이를 벌이다 용쪽에서의 제의로 내기를 하여 이긴쪽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용들은 먹구름을 불러 일으키며 하늘로 치솟으니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장대같은 소나기가 억수로 쏟아지는데 삽시간에 계곡이
넘쳐 스님이 서 있는데까지 잠겨버렸다. 이와 같은 용의 재주를 미리 짐작하고 시루봉과 천지봉 사이에 배를 건너 매어 놓고 태연히
기다리고 있던 스님은 배위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용쪽에서 볼때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럼 이번에는 내가 한수 부려볼까?"
스님은 부적을 한장 그려서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는 연못속에 집어 넣었다. 그러자 연못에서 김이 무럭 무럭 오르더니 연못물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용들은 견딜수 없어 하늘로 달아났는데 그중 눈먼 용한마리가 달아나지 못하고 근처 연못으로 옮겨 앉았다. 스님은 예정대로 그 연못을 메우고 대웅전을 지음으로써 오늘의 구룡사가 들어 앉게 되었다.
구룡사에서 보면 동해를 향한 여덟 개의 골이된 산봉우리를 볼수 있는데 이것은 그때 여덟마리의 용이 급히 도망치느라 골이 생긴것이라 한다. 그래서 이 절을 아홉 마리의 용이 살던곳이라 하여 "구룡사"라 했다 한다. 지금은 아홉구(九)대신 거북구(龜) 자를 쓰는데
이자를 바꾸게 된 연유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본래 구룡사는 스님들의 수양도장으로 세워졌으나 오랜 세월을 두고 흥망성쇠에 따른 곡절이 많았다. 이조에 들어서면서 치악산에서 나는 산나물은 대부분 궁중에서 쓰게 되어 구룡사 주지스님이 공납의 책임자 역할까지 하게 되었다. 좋거나 나쁘거나 구룡사 스님의
검사 하나로 통과되는지라 인근 사람들은 나물값을 제대로 받기 위해 별도로 뇌물을 받치기도 했다. 견물생심이라 아무리 부처님 같은 스님이라 할지라도 여기엔 욕심이 나지 않을수 없었다.
이리하여 구룡사는 물질적으로 풍성하기는 하였으나 정신도장으로서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럴즈음 한 스님 이 찾아와 몰락한 이절을 보고 개탄하면서 이 절이 흥하지 못하는 것은 절에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니 그 거북바위를 쪼개 없애면 좋을것이라고 했다. 절에서는 그 스님의 말을 믿어 거북바위를 쪼개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후부터 찾아오는 신도도 더욱 적어지고 거찰로서의 명성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는 절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이르렀다. 이럴때 어느 날 도승 한분이 찾아왔다.
"이 절이 왜 이렇게 몰락하는가 하면 그 이름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고 말했다. 주지스님은 "그건 무슨 말씀이신지요?" 하고 물었다. "본시 이 절은 절 입구를 지키고 있던 거북바위가 절운을 지켜왔는데 누가 그 바위를 두동강으로 잘라 혈맥을 끊어버렸으니 운이 막힌 것이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지 스님은 재차 물었다. 그랬더니 그 도승은 거북을 다시 살린다는 뜻에서 절의 이름을 아홉구(九)에서 거북구(龜)자를 쓴 구룡사로 쓰기로 했다 한다.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에 있는 구룡사는 지금부터 약 1300여년전에 의상대사에 의해 창건됐다.
"법천사에서 세조 때 권람·한명회, 그 때 그 냥반이 다 공부해가지구 간 분들이여, 이 법천사에서. 그래서 인제 여그가 원래 서원이
아녀. 글을 배우는 절이면서두 유방선이라구 하는 스승한테 다 배워가지구 유방성이라구 하는 스승의 제자들이 가서 이조를 주물렀다 폈다 핸거지. 권람·한명회·서거정. 다 세 분들이 여기서 다 영의정 했다구. 그 세분이 그 냥반한테 공부해가지구 법법자 샘천자 고려 때 절이야."[제보자:김택수(남,69),부론면 손곡1리]
이것은 법천사에 관한 전설이라기보다는 법천사에서 공부한 세 사람의 인물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이 유방선
이라는 인물의 제자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이 이야기에서는 법천사가 유명한 절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이 절에서 공부한
세 사람이 모두 영의정이 되었음을 강조하는 우회적 방법을 택하고 있다.
치악산 상원사에서 동남간으로 제천땅 백련사라는 절이 있는데 이 절의 주지스님은 여자를 좋아했다. 그는 스님이면서도 아내를 두고 세속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스님은 치악산 남대봉 기슭에 있는 상원사의 주지도 겸했다. 이 스님은 백련사와 상원사를 왕래하며 두절의 주지 스님으로 있었는데 불제자로써 마땅히 불도에만 정신을 쏟아야 할 터인데도 여자를 너무 좋아하여 백련사에는 본처를
두고 상원사에도 소실을 얻어 재미를 보고 있었다. 주지 스님이 상원사에 가는 날이 잦아지자 백련사에 있는 본처는 몰래 남편의
뒷조사를 해봤다. 그랬더니 상원사에 젊은 소실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스님과 몰래 살고 있는 처지이기는 하나 본부인은
참고 살아가기가 어려웠다. 이 스님은 백련사에서 상원사를 용마(龍馬)로 왕래했다. 용마는 번개처럼 잘 달리는 말이었다.
슬며시 화가 난 본처는 내놓고 싸울수 도 없어 속으로만 앓고 있다가 스님이 타고 다니는 용마를 굶겨 죽이기로 했다.
"저 놈의 말만 없으면 스님은 첩이 있는 상원사를 자주 가지 못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떠오르자 되도록 말에게 풀을 적게
먹이기로 했다. 한번 뛰었다 하면 천리도 마다 않는 용마였지만 본처의 계획적인 음모로 어느 날 스님을 태우고 상원사로 달리는데
도무지 기운이 나자 않았다. 속 모르는 스님은 용마에게 채찍만 호되게 내리쳤고 주인의 채찍을 맞은 용마는 용을 써 겨우 상원사까지 이르러 그만 마지막 바위에 턱을 대고 털썩 거꾸러지고 말았다. 이 바람에 등에 올라탔던 스님은 말잔등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바위에 손을 짚었고 말은 앞발을 디딘 채 그 바위에 발자국을 남기고 벼랑으로 떨어졌다. 그 후 가까스로 올라온 스님은 이것이
큰부인의 소행이었음을 알고 소실과 상원사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그 때 스님의 손자국과 용마의 발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고 말이 떨어지며 흘렸다는 핏자국이 또한 남아있어 후세 사람들은
이 바위를 "용마바위"라고 부른다.
치악산 남대봉 기슭에 있는 상원사(上院寺)는 우리 남한에서는 제일 놓은 곳에 자리잡은 절인데, 이 절 바로 앞에는 40m나 되는
벼랑이 있다. 그 벼랑 위 바위 끝에는 말발자국 형태와 사람의 손가락 자국같이 파인 곳이 선명하게 남아 있으며, 그 밑으로는 갈색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러한 말발자국과 손자리, 그리고 갈색의 흔적에 관한 전설이 위에 소개한 이야기이다.
일반적으로 용마전설은 전국적 분포를 보이는 장수전설과 관련된 것이 흔하다.
그러나 원주의 용마전설은 승려의 비행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것이 특징이다. 또 말발자국 뿐만 아니라 손자국과 핏물
흔적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복합적 전설의 성격을 보인다. 그러나 말발자국이 현재 남아있다는 점에서는 다른 지역의 용마전설과
공통점을 보인다. 용마와 관련된 암석 전설은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며, 그 종류도 여러가지인데, 원주도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 마을에는 서당 훈장을 지낸 황보라는 괴짜 선비가 있었는데, 성질이 괄괄한 데다가 참을성이 없었다. 가슴에 치미는 울분은 한바탕 욕 으로 퍼부어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지 않으면 풀지 못한 심화 때문에 때로는 몸져 누워야 하는 때도 있었다. 그가 하는 욕도 가지가지여서 어 떤 욕은 입에 차마 담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그는 상스러운 욕을 마구 내뱉으므로 주위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런데 이 황보씨는 원주목사로 부임해 온 원님에 대하여 심히 못마땅한 감정을 갖게 되었다. "제깐놈이 뭐라고 날 업신여겨 오라가라하누 △△같은 자식." 물론 마음 속으로 하는 욕이었다. 만약 욕이 원님의 귀에 들어가는 날에는 곤란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 같으면 벌써 정 면을 향해 그의 특유한 욕설을 퍼부었을 만도 하지만 어느 존전이라고 당돌하게 나설수도 없었다.
그래서 며칠째 끙끙 앓고 있었다. 의원을 데려와 진맥을 했으나 한결같이 심화로 인한 병이라 했다. "약이 소용없어요. 가슴에 품은
일이 있으면 모두 큰소리로 외쳐버려요. 그래야만 병이 나을수있어요." 다른 의원도 같은진단을 내렸다. 그러나 원주목사에 대한 욕을 참다가 이렇게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이렇게 수개월을 앓고 있는데, 그 목사가 다시 한양으로 영전이 되어 떠나간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욕선비 황보씨는 큰일이 났다. "떠나기 전에 목사를 보고 실컷 욕을 퍼부어야겠는데, 어떻게 한담." 욕선비는 쇠약해진 몸을 일으켜 집의 하인을 시 켜 되도록 긴 사다리를 만들게 하였다. "무엇에 쓰려 하십니까?" "잔말 말고 긴 사다리를 만들어라" 하인은
산에서 긴 나무를 베어다 사다리 를 만들어 두었다.
그날 아침 원주목사의 행차가 덕가산 기슭 산길을 지나갈 것을 미리 알아둔 욕선비는 사다리를 메고 그 원님이 기나가는 길옆 바위에 걸쳐 놓고 올라가서 사다리는 바위 위로 끌어 올렸다. 그리곤 원님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있자니 구종별배를 거느린 원님
일행이 나타나 높이 솟은 바위 아래 가까이 이르고 있었다. 욕선비는 때가 지금이라는 듯, " 네이놈 듣거라 △△같은 목사놈아."
목사일행중 제일 먼저 들은 것은 한 아전이었다. 어느 정신병자이거니 생각했으나 목사를 향해서 주먹질 발짓으로 욕을 하는데,
민망스럽고 망칙스러워 들을 수가 없었다. 하도 욕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원님 행차가 발길을 멈추었다.
"저놈이 웬놈인고?" "이 고장에서 욕 잘하는 선비라 하오." "그런데 어찌 저토록 떠들고 있는가?" "황송하옵게도 원님께 욕을 퍼붓는가 하오." "내게 욕을 퍼붓고 있다고? 당장 잡아오너라." 몇 사람이 바위 곁으로 달려갔으나 까마득한 바위 위만 쳐다볼 뿐 별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가던 길을 늦추고 사다리를 만들어 올라가 붙잡아 내릴 수도 없었다. "안되겠습니다. 워낙 높은 바위인 데다가 제가 올라간 사다리는 바위 위로 거둬버렸습니다."
원님은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고 있는 사이에도 욕선비는 갖은 욕을 퍼부었다. "△△같은 목사놈아, 너의 어미 △△은 여우 △△인데 그것은 나밖에 아는 사람이 없느니라. 이놈아 그것은 이세상에 네 애비하고 나밖에 없느니라." 원님은 기가 찼다. 저런 능지처참을
할 놈 봐라 하지만 할 수가 없었다. " 그냥 놔두고 어서 길을 재촉하렸다." 원의 행차가 멀리 사라질 때까지 욕선비는 욕을 그치지
않았고, 목사는 별 수 없이 생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고 그냥 지나갔다는데, 그 후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이를 욕바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욕바위는 지정면 안창리 덕가산 골짜기에 있는데, 전설의 유형 가운데 전형적인 암석 전설을 가진 바위 이릉이다. 또한 바위의 명명이 고 을 원에 대한 욕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서민들의 관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겨 있는 전설로 볼 수 있다.
임경업장군의 부친은 원주감영의 옥사장이었다. 그는 비록 말단직에 있었으나 그의성품은 의협심이 강하고 인정이 두터웠다. 어느날 살인혐의로 한 청년이 붙잡혀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살인할 것 같지 않은 지극히 선량한 사람이었다. 애끓게 무죄를 주장하는 그의 말을 들어보니 참으로 딱한 사정이었다. 그대로 두면 살인자로 사형을 받을 사 람이므로 한 계책을 일러주어 그를 도망가게 했다. 그후 임장군의 아버지는 옥사장을 그만두고 고향인 손우 리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어느날 중이 찾아와서 시주를 청하였다. 얼마만큼의 곡식을 주니 그 스님은 "이 집이 임옥사장 집이 아니오?" 하고 물었다. 임장군의 아버지가 "그렇소 그런데 왜 그러시오?" 하고 물었다 그러자 그 스님은 "나를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하며 고깔을 벗는 것이었다. 아무리 살펴 보아도 기억에 떠오르지 않는 사람이었다. 삭발에 법의를 걸친 스님의 모습에서는 아는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데....." "그럴만도 하시리이다 소승은 십년전 원주 감영에 살인혐의로 붙들려 갔던 사람이올시다.
그때 옥사장님께서 살려주시지 않았다면 영낙없이 죽음을 면치 못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깊으신 인정으로 무리해서 제가 살아날 기회를 마련해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나 다시 찾아온 것입니다. 소승은 그간 뜻한바 있어 삭발을 하고 입산하여 수도에 힘썼으며
이미 부처님의 덕을 입어 명산 대찰의 자리를 잡아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승이 옛날 저를 살려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묘자리나 하나 잡아드려 훌륭한 자손이나 보시게 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고 말했다. 이리하여 그 스님은 지금 평촌마을 건너편 산기슭에 그의 조부의 묘자리를 잡아 주었다. 그후 태어난 아이가 임경업이다. 그가 비명에 죽어가게 된것도 묘자리를 잡아준 스님의 주의사항을 어겼기 때문이다. 그 스님은 묘자리를 정하고 나서 "만약 상을 당하면 삼일장으로 하여 장사날에 청광하여 광을 짓고 거적을 씌울것이며 그때는 반드시 상주 혼자서 광을 지키다 광속에서 혹시 어떤 소리가 들리거나 괴이한 일이 일어나도 들여다보거나 그 자리를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일러주었던 것이다. 그 뒤 부친상을 당한 임장군의 아버지는 부친이 돌아가시자 스님의 말대로 광을 짓고 그 위에 거적을 씌우고 밤샘을 시작했다.
자정이 되었을 무렵 적막하기만 하던 광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고 나중에는 쨍그렁거리는 쇠소리마저 들렸다. 임장군의 부친은
무의식중에 거적 한귀퉁이를 쳐들고 광속을 들여다보다가 스님의 말이 생각나서 거적을 덮었다. 임장군의 아버지자 목격한 광속의
광경은 괴이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었다. 두 사나이가 칼을 휘두르며 겨루는 순간이었다. 임장군의 아버지가 거적을 들추는 순간 한 사나이와는 눈이 마주쳤다. 임장군의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사나이가 곁눈을 파는 순간 다른 사나이의 칼에 맞아 아깝게도 무참이 쓰러져 죽는 것이었다. 임장군의 아버지는 이와 같은 두 사나이의 싸움이 무엇을 뜻하는것일까 하는 수수께끼를 풀지 못한채 스님이 정해준 묘자리에 묘를 썼다. 그리고 삼우제를 올리려고 묘에 이른즉 누구의 짓 인지 관이 묘밖으로 튕겨져 나와있었다. 그는 다시 관을 묻고 그날밤은 누구의 짓인지 알아보기 위해 무덤곁에서 지키기로 했다.
한밤중이 되어서였다. 세사람의 무사가 나타나더니 임장군의 아버지를 보고 꾸짖었다. "당신같은 사람은 이 명당에는 묘를 모실수 없오. 이 자리는 따로 임자가 있는데 왜 여기다 묘를 썻소" 하고 나무라는 것이었다. 임장군의 아버지는 그들앞에 비는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여기에 부친을 모시게 되기까지는 제나름대로 까닭이 있어서 그렇소. 너무 나무라지 마시오" 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들중의 한사람이 "이왕 이리 되었으니 할수 없소"하고는 "그럼 김공의 자리는 저편으로 정합시다" 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김공이라 이르는 사람이 김자림의 손에 의해 참살당한 것은 이미 이때에 맺어진 인연 때문이었다 한다.
새로 태어난 임씨집안의 경업은 어려서부터 하는짓이 달랐다. 언제나 전쟁놀이가 아니면 힘겨루기를 했고 힘을 겨루면 항상 이겨서
두각을 나타냈다. 전쟁놀이를 할 때 군율을 어기었다고 해서 낫으로 어린 부하를 찍어 그것이 문제가 되어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충주의 달천으로 이사를 하게 된것도 소년 임경업의 심한 장난때문이라고 한다. 전쟁놀이를 하는 소년 임경업이 진지라 해서 원님의
행차를 못지나가게 했을때도 있었다. "여기는 전쟁터요, 이 새 끼 줄 친곳은 우리의 성이니 누구도 못지나가오. 만약 지금 지나가면 목을 베겠소" 이 깜찍한 소년의 눈은 유독 반짝이었다. 원은 후일 그가 크게 될 인물임을 알고 도리어 너그럽게 "대단한 소년이군 그래"하고 할수 없이 밭둑길로 행차를 하게 했다 한다.
1616년 광해 10년에 무과에 급제한 임경업은 문헌에 의하면 충주 달천태생으로 되어 있으나 그것은 6세때에 이사를 갔기 때문이다.
그의 출생은 원성군(원주시) 부론면 손곡리이다.
인조때 원주에는 일찌기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슬하에서 성장하는 황무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너무나 집안이 가난했기 때문에 태어난 마을에서 살지 못하고 이사를 갔는데 그곳이 지금의 원주시 문막읍 반계리 골무내기라는 마을이었다. 그는 비록 가난해도
천성이 순하고 효성이 지극한데다가 학문에 열중하였다. 특히 그의 준수한 용모는 이채를 띄었는데 그의 등잔만한 두 눈의 빛남은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가 처음 출사한 곳이 강원 감영. 골무내 마을에서 강원 감영까지는 50리 길이나 됐다. 새벽 밥을 지어 먹고 일찍 집을 나서서 감영에 도착하면 그때야 치악산의 아침해가 뜨곤 했다. 점심과 저녁 밥을 대개 감영에서 먹게 되는데 워낙 가난한지라 항상 집에 혼자 계신 어머니의 끼니 걱정에 가슴을 죄었다. 때로는 자기가 먹을 저녁밥을 먹지 않고 가슴에 품고 빨리 달려가 어머니를 대접하는 날도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이었다. 한그릇의 밥을 식을새라 품에 안고 바쁜걸음으로 감영밖을 벗어나는데 호랑이 한 마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담력이 있다고 한 그도 머리끝이 쭈삣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찌 나를 이처럼 놀라게 하는고. 썩물러 가지 못할까?" 하고 호령을 했다. 그러나 호랑으는 끄떡도 하지 않고 있다가 슬며시 자기의 등을 그의 앞으로 돌려대는 것이었다. "그럼 네 등에 나를 타라는 말이냐?"
담력이 있는 그는 황소만한 호랑이의 등에 털썩앉았다. 그러자 호랑이는 다소곳이 골무내로 향하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아침저녁으로 호랑이 등에 업혀 왕복 일백리길을 출퇴근하게 되었다. 호랑이도 그의 효성을 알아주는 듯 관가에서
어머니 저녁밥을 가지고 가는 날이면 날쌔게 그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특히 좀늦게 퇴근하게 되어 어두운 밤길을 달리면 호랑이 눈빛과 그의 눈빛이 네 개의 등불같이 밝아 사람들은 사등선생 행차라고 일컬었다.
그러던중 며칠동안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궁금히 생각하고 있는데 어느날밤 꿈에 자기가 타고 다니는 그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
슬피울고 있었다. 깜짝놀라 잠을 깬 그는 꿈에 본 곳을 찾아 나섰다.
몇십리 산길을 달려 찾아가는데 날이 밝고 어느덧 점심때가 되었다. 충주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 다다랐는데 사냥군 몇이 모여 "이것을 어떻게 잡아야 하지?" 하며 의논을 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자기가 찾는 호랑이가 덫에 걸려 있었다. 그는 사냥군들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그 호랑이를 덫에서 구해주었다. 그를 본 호랑이는 마치 길들인 강아지 같았다. 이것을 본 사냥군들은 호랑이를 다루는
용의 아들이라 하여 자룡이라 일컬었다.
그는 두 번이나 아내와 헤어졌는데 이유인즉 아내가 어머니를 잘 모시지 않는다해서 였다. 기름 항아리를 오줌 통이라고 해서 번번히 쏟아버리는 어머니의 망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데서였다. 이리하여 세 번째 맞이한 아내가 윤씨였다. 윤씨는 전의 두 아내보다 슬기로운 여인이었다. 그네는 설령 시어머니가 기름항아리를 오줌통 이라고 우겨도 "네 그렇습니다. 어머니 제가 비워놓지요"하고서는 정작 오줌통과 바꿔들고 나가고는 했다는 것이다.
황효자의 어머니는 오랜병으로 고생이 끊일 날이 없었다. 특히 겨울철로 접어들면 기침병으로 곁에서 보기조차 민망할 정도였다.
그는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용하다는 의원은 모두 찾아다녔다. 엄동설한인데 어느 의원이 말하기를 잉어를 구해서 먹으면 효험이 있다는것이었다. 살을 에일듯한 찬바람 속에서 두꺼운 얼음장을 깨자 그 속에서 비늘도 찬란한 잉어 한 마리가 얼음밖으로 튀어나와 버둥대고 있지 않은가? 그는 천지신명께 감사하고 그것을 집에 가져다 어머니의 약으로 해드렸다.
한준겸의 행장기에 의하면 그가 85세로 운명했는데 그때가 효종 3년 4월 22일(1652년).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져 충효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사당을 세워 충효사라 하였다. 사당은 일제말엽까지 명륜동에 있는 향교자리에 있었으나 퇴락하여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골무내기로 옮겨갔다. 마을 뒷산에는 황효자의 묘와 사당이 있으며 그 옆에 호비가 세워져 있다.
김 탄행이라는 감사가 원주 감영으로 부임할 때였다. 말잔등에서 사방으로 살펴보는중 동화역 부근에서 바로 보이는 산기슭에 커다란 무덤이 보였다. 비석이나 큰 석상으로 보아서 벼슬한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몇년동안을 벌초 한번한 흔적이 없었다. 그는 일행을 멈추게 하고 무덤 있는데로 말을 몰았다. 비석을 보니 그것은 여흥도호부사 노 희신의 묘였다. rm는 마치 자신의 일이나 되는듯 깊은 깊은 감회에 젖었다. "후사가 없으면 모두 이렇게 되는 것일까?" 김 감사는 일행중 하인을 시켜서 낫을 얻어오게 하여 손수 풀을 깎아주었다. 그는 말끔히 벌초를 하고 다시 말을 타고 원주에 도착했다.
그날 밤 깊은 잠에 들었는데 꿈속에 관복차림의 한 노인이 나타나 "그대가 오늘 내 무덤까지 찾아와 벌초까지 해주었으니 그 고마움을 무어라 말할 수 없오. 그대가 이 세상을 다 살고 떠나는 날 깨끗하고 조용한 유택하나를 가르쳐 줄테니 나를 따라 오시오."하고는 성큼성큼 앞장서 가는 것이었다. 한참 숲이 우거진 오솔길을 지나 펑퍼짐한 곳에 이르러 여기가 이른바 기린산 줄기인데 이곳에 그대의
묘를 쓰면 후손이 잘 될것이오"하고는 합죽선 하나를 떨어뜨리고 사라져 버렸다.
그는 이튼날 아침 아전 한사람을 불러 "이 고장에 기린산이라고 있는가?"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아전은 "기린산이란 문밖에 있는
산인데 건등산을 그렇게 부르옵니다."하고 대답했다. 그는 꿈이 하도 이상해서 그산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그럼 오늘 나를 그 산에 인도하라." 김감사는 아전과 함께 간밤에 꿈에서 본 길을 따라 한참갔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꿈에 보았던 합죽선이 놓여있지 않은가?
김감사는 여기가 꿈에 관복을 입은 노인이 말한 묘자리임을 알고 그곳에 표를 해두고 돌아왔다. 그는 며칠후 인부들을 데리고 가서
그곳에 무덤을 만들어 놓고 가족들에게 만약 자기가 죽으면 그 자리에 묻도록 일러주었다. 그후 그는 조정의 신임을 받는 관리로 있다가 천수를 누리고 죽었다. 가족들은 생전의 뜻을 따라 정승을 지냈다는 노희신이 꿈에 가르쳐준 자리에 묘를 쓰게 되었다 한다.
원주시 일산동 54-2번지에는 옛 감영때 건물인 선화당이 있는데 그 뒤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한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 없어졌지만
그 자취만은 남아있다. 지금부터 구백여년전부터 그때의 명장인 강감찬이 이곳에 들렸다 한다. 강장군이 왔다 해서 이 고을 수령은 극진한 대접으로 그를 환영했다. 때는 후덥지근한 여름이었다. 강장군을 조용한 가운데 편안히 주무시게 해야겠는데 객사바로 연못에서 개구리 소리가 요란해 잠을 이룰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수령은 하인을 시켜서 개구리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입초를 세웠다. 연거푸 연못에 돌을 던지면 개구리들이 놀라 울음을 그치리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인은 열심히 초저녁부터 주워온 돌을 던졌다. 이에 놀란 개구리들은 처음 얼마동안은 잠잠했으나 나중에는 계속해서 악마구리 끓듯 울어대는데 속수무책이었다. 수령의 명을 받은 하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큰 장대를 가져와 두들겨
보았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강감찬은 방안에서 대발 밖으로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하인이 애쓰고 있는 모습이 안스러웠다. 그는 그 하인을 불러 지묵을 가져오라 했다. 그 하인은 개구리를 못 쫓아 장군을 잠못들게 한 것이 죄스러워 몸둘바를 몰랐다. 그는 지묵을 장군에게 갖다 바쳤다. 그랬더니 강감찬은 부적 한 장을 써주면서 그것을 연못에 던지라고 하인에게 명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그렇게 법석을 떨던 개구리들이 울음을 뚝그치는 것이었다. 강감찬 은 이튿날 아침 늦게까지 편안히 잤다. 이튿날 아침 수령은 강장군 방에 문안을 드리러 와서 "대감 간밤은 편안히 주무셨습니까? 워낙 연못 가까운데 있는 침실이라서 혹시 개구리 울음소리에 단잠을 설치지는 않으셨는지요."
"잘잤소. 한 밤중이 되니 그 후부터는 개구리가 울지 않더군요" "실은 하인을 세워 개구리를 쫓았습니다" 수령은 자기 성심을 생색내려 했다. 그러나 강감찬이 부적을 던진 후부터 그 연못부터에서는 다시 개구리 울음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한다.
지금은 사람이 달나라에 다녀오는 때이기는 하나, 세상에는 아직도 모를 일이 너무도 많다. 30여 년전에는 미국 공군기지에서 연습차 날아올랐던 10여대의 전투기들이 행방을 감춘 지 사흘만에 사람은 없이 비행기들만 고스란히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이 모두가 아직도 불가사의의 수수께끼로 남아있거니와 '배람밭'의 바위에 박혀있는 사람 발자국이나 또 그 옆벼랑에 있는 사람의 주먹자리도 수백 년 동안 풀지 못하는 우리 고장의 수수께끼리라.
호저면(好楮面) 대덕리(大德里)에 '배람밭'이란 곳이 있고 그곳에 선녀바위라는 납작한 바위 복판에 움푹하니 사람 발자국 한 개가
있다. 발자국은 움푹하고 또렷해서 누가 보든 간에 첫눈에 사람 발자국임을 알 수 있는데, 길이는 다섯 길 가량 되어 어린아이의 발자국 같다. 꼭 두치 가량 쌓인 눈 위에 어린애가 맨발로 디뎠던 발자국 같기도 하다. 단지 네 개의 발가락만은 한 곳에 붙은 것인지 따로따로 떨어져 있지는 않으나 사람이 쪼아서 만든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만큼 그 모양은 진흙 위에 박힌 발자국같이 자연스럽다.
그리고 선녀바위 바로 옆에 있는 다섯 길 가량의 바위에는 사람이 주먹으로 내지른 듯한 주먹자국이 뚜렷하게 나있다. 이것 역시 어느 명공의 솜씨로 새긴 것이라고 보기에는 선녀의 발자국처럼 너무도 자연스럽게 패어있는 것이다. 이래서 구경은 사람들은 옛날도 또 먼 옛날 이 바위나 선녀바위가 굳지 않고 물렁물렁 하였을 때 생긴 발자국이 아니겠느냐고들 생각해 보는 것이나 그것도 아니어서 마을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구수한 전설을 듣는 것으로 끌이곤 했다. 옛날 선녀들이 선녀바위 및 옥수에서 목욕을
하다가 올라가곤 하였는데, 그 선녀들 가운데 어느 선녀가 무슨 표적이라도 하나 남겨놓고 싶어서 왼발을 디뎌 자국을 남겼다고 한다.
이 전설은 흔적에 대한 설명이 장황하나 그것에 얽힌 이야기는 매우 간략화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곧 목욕하던 선녀 하나가 왼발을 디뎌 자국을 남겼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 점에서 흔적 전설 가운데는 줄거리가 빈약한 편이다.
원주시 무실동 점가리라는 곳에 가면 원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비바람에 닳아서 알아 볼 수 없는 비석이 있는데 이 비석이 충견비라
한다.
옛날 술을 끔찍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개한 마리를 기르고 있었는데 그 개를 지극히 사랑했다. 어느 날 원주장에 왔다가 술에 취하여 돌아오던 중 지금 비석이 있는 자리까지 와서는 잔디밭에 앉아 쉬며 담배를 피우다가 술기운에 그만 잠이 들고 말았다. 이때 손에 들고 있던 담배불이 잔디에 붙어 솔솔 부는 바람에 불은 점차 부근 잔디에 타들어 갔다. 주인이 어디가면 항상 마중을 나오곤 하던 개는 이날도 주인의 마중을 나왔다. 나와보니 주인은 잠에 취해 있고 잔디에 불은 점점 주인에게로 다가오는 지라 주인의 위급함을 직감한 개는 옆에 있는 논물속으로 뛰어들어가 자기 몸을 적셔가지고 불위로 뒹굴고 또 뒹굴고하여 불을 껐다. 불은 다꺼서 주인을 구하기는 했지만 기운이 빠지고 지친 개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술에서 깨어난 주인이 일어나 본즉 온 몸이 불에 끄슬린 개는 죽고 잔디의 불은 자기가 누워있던 자리만을 못태우고 꺼졌는지라 모든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자기를 위해 충성을 다하다가 죽은 충견의 비석을 이 자리에 세우고 술과 담배도 끊고 죽은 개를 애석해 했다 한다.
원주에 처음 향교를 지으려고 할 때의 일이다. 처음 향교 건물의 터를 남산 기슭으로 잡고 터를 닦았다. 치악산에서 아름드리 나무를
베어오고 많은 목수들을 고용해 왔다. 며칠째 일을 계속하고 있는데 하루는 까치 한 마리가 목수의 자를 물고 날아가는 지라 목수가
허겁지겁 쫓아 갔다. 까치는 한참 날아가다가 지금의 명륜동 향교 자리에 가서 멈추고 입에 물었던 자도 놓아 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장난치고는 괴이한 일이로군. 까치가 자를 물고 달아나다니."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다시 일을 계속했다. 이튼날 목수들은 나무를 자르고 대패질을 하고 있는데 어제 왔던 까치가 또 다른 사람의 자를 물고 날아가는 것이었다. 자 임자인 목수는 까치의 뒤를 쫓았다. 어제와 똑같이 그 자리에 자를 놓아두고서는 이번에는
바로 곁에 있는 늙은 소나무가지 위에 올라앉아 짖어댔다. 한번도 아니요 두번이나 똑 같은짓을 되풀이 하는데에는 무슨 곡절이 있지 않을까 해서 이 일을 목사에게 전했다.
목사는 " 참 괴이한 일이로군. 본시 까치란 까마귀와는 달리 길조라 하니 필연 좋은 징조를 알려주기 위한 짓인지 모르니 지관을
불러오너라."하고 분부했다. 목사에게 불려간 지관은 남산밑터와 까치가 자를 물어다 놓은 자리를 비교하고 "까치터가 더 좋은 자리입니다."라고 말했다.
목사는 무릎을 탁 쳤다. "그러면 그렇지 까닭이 없을 수 있나. 당장 자리를 옮기고 터를 새로 닦아라." 벌써 남산 밑에는 일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들여 놓았으나 목사의 명령은 어길 수가 없었다. 다시 부역을 놓아 터를 닦고 재목을 옮겼다. 그후 까치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향교터를 까치가 잡아 주었다 해서 그 자리를 "까치터"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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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계 6구간 산행을 위해
숙소는 6구간 들머리에서 가까운 강원도 부론면에서 1박을 하고,
새벽 5시경 알람에 맞추어 눈을 뜨고 산행 준비를 한다.
이제 충청도 접경인 경기도를 지나 강원도 땅에 발길을 들이니 감개가 무량하다~
강원도는 '하늘이 내린 살아 숨쉬는 땅'이라는
구호가 눈에 들어온다~
부론에 하나 밖에 없는 장여관인 부론장여관에서,
1박을 하는데 주인 아주머니 인심이 후~하다. 다음날 산행시 사용할 물을 받아서
미리 얼리려고 하니, 약수물을 떠온 것이라고 마음껏 떠가라고 하시며,
냉장고에 얼려주시고, 막걸리 한사발을 권하신다.
더불어 내일 다리 아래에서 개를 잡으니,
시간이 맞으면 영양탕 한그릇 하라는 말씀까지...
<충청도계 6구간 지도>
<충청도계 6구간 들머리, 남한강대교>
<남한강대교>
<새벽 남한강 자전거 꽃길이 환상적이다>
<끈끈이대나물(석죽과)>
<마거리트, 금계국, 끈끈이대나물 등 남한강 자전거 도로는 온통 꽃세상이다~>
<마거리트(국화과)>
<금계국(국화과)>
<이른 새벽의 남한강은 운무와 더불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지명이 오리골이라서인지 닭과 함께 오리를 키우고 있다~ ^^>
<감자밭>
<삼합지옆의 매점 이름도 삼합매점이다~ ^^>
<자전거로 힘들게 넘은 봉우재>
<솜방망이(국화과)>
<창남나루... 이 부근이 3도가 만나는 곳이다>
<청미천 거리 표시가 잘못된 것 같다. 삼합리섬을 지나 청미천인데...>
<남한강변의 멋진 자전거 도로... '금계국'이 노란 물결을 이루고 있다>
<섬강과 남한강이 만나며 안개, 꽃, 산, 강이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비산, 섬강 그리고 남한강>
<전동싸리(콩과)>
음성/이천/여주에서 흘러온 청미천,
원주에서 흘러온 섬강이 남한강과 합수되는 곳에 위치하며
충북, 강원, 경기도가 만나는 곳이라
이름도 삼합도이다.
<삼합도>
<초롱꽃(도라지과)>
<벌완두(콩과)>
<패랭이꽃(석죽과)>
<벌노랑이(콩과)>
<청미천과 남한강이 만나는 삼합도>
<힘들게 봉우재를 넘다보니 다래나무(다래과)에 꽃이 많이 피어있다~>
<금은화(인동초, 인동과)>
전통악기연구원 간판이 붙어있어서
대금 등을 볼까하고 가보니 문이 닫혀있다. 주로 오동나무로
가야금 틀을 만드는 곳인 것 같다.
<삼도가 만난다고 하여 마을 이름도 삼합리이다~ ^^>
<충청북도, 경기도와 강원도가 만나는 곳이라 하여 저수지 이름도 '삼합지'이다>
<목 좋은 곳에 자리한 주택>
<무슨 알 같이 생겨서 처음에 무엇인가 궁금하였는데 식당 관계자에게 물어보니 가물치 애기주머니라고 한다>
<삼합지에서 낚은 고기 크기별로 별도로 '명예의 전당'을 만들어 놓았다>
<식당 처마 아래의 제비집...그러고 보니 언제부터인가 제비 보기가 쉽지 않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가시던 분이
자기가 잡은 물고기가 제일 이쁘다고 자랑이 대단하시다.
그래서 한마디 농담을 해본다.
고기가 잡혀주어서 제일 이쁜 것 아니냐고... ^^*
삼합지 식당에서 김치찌게로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며,
주인 아주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충청도 경계를 걷고있다고
하니 "왜래?"라고 하신다.
무슨 말인가 어리벙벙 하여 있으니,
아주머니는 삼척이 고향이신데 삼척에서는 "왜"를 '
왜래?"라고 하신다고 한다.
좁은 나라에서 언어도 제각각 이지만
그래도 이리 돌아다니면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다.
식당에 걸려있는 액자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세상번뇌 시름 잊고 청산에 살리라..." ^^*
<충주시 양성면과 여주시 점동면이 만나는 고개>
<단암삼거리>
<석잠풀(꿀풀과)>
<다시 돌아온 남한강 대교>
<고향산에 바위가 옷을 입고 있는 형상에서 유래하였다는 의암마을 유래비>
<남한강>
<자주달개비(달개비과)>
<자전거로 이동 도중 중간중간 만나는 오디가 반갑다>
집의 본채 위에는 폭포 등 무릉도원(?)을 조성하였고,
정원은 잔디로 덮여있지만 종탑과 불탑, 석불, 석상 등 다
양한 장식이 있어서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531지방도를 따라 부론에서 귀래로 향하던 중간에 만나 특이한 집>
<자주달개비(달개비과)>
<덕은교>
<남한강으로 합수되는 북동방향 원주시 귀래에서 흘러온 운계천>
<담배>
<도깨비싸리(족제비싸리, 콩과)>
<담배꽃>
<멀리 보이는 미륵산>
<하남마을 유래비>
<광나무(물푸레나무과)>
<우엉(우방자, 국화과)>
<19번국도>
<들머리, 외촌이 마을을 지나는 19번 국도. 멀리 좌측으로 오늘 오를 갈미봉, 중앙 외촌이 고개가 보인다.>
<청풍명월의 고장, 충청북도 경계석>
강원도 원주시 귀래면,
이곳에서 콩국수로 점심을 먹고 차량을 회수하여
날머리에 두고 자전거를 들머리에 둔다.
차량회수를 위해 산에님이 부론으로
갔다오시고, 차량을 날머리에 두고 자전거로 들머리까지
이동하는 수고를 하시었다. 감사합니다~ ^^*
<귀래 파출소 옆의 너더리 쉼터에서 차량을 회수하기 위해 부론으로 갈 버스를 기다리며 오수를 즐긴다>
<차부집 처마 위의 제비가 한가롭다~>
<들머리, 외촌이 마을>
<들머리, 외촌이 마을>
<지느러미엉겅퀴(국화과)>
산에님이 날머리에 차량을 미리 가져다 놓으시고,
자전거로 이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미리 외촌이고개를 통해
갈미산을 오를 등로를 확인한다.
고추밭 위로 가니,
임도가 나오고 임도가 끝나면 잡목이 우거진
희미한 등로가 나타난다.
<붓꽃(붓꽃과)>
인적이 없는 곳이라 들머리부터 잡목이 힘들게 하지만
그나마 오름길 곳곳에 숨어있는 산딸기가 많은 위로가 된다~
<다래(다래나무, 다래과)>
<길도 없는 잡목구간을 겨우 헤치고 올라와 잠시 땀을 식힌디~ 왜 이고생(?)을 사서 하는지...>
<등로를 지나치는데, 산에님이 천마(난초과)가 있다고 부르신다.>
외촌마을에서 2시간 넘게 잡목과 싸우며
해발 603m의 갈미봉에 오후 5시 43분경 도착한다.
<해발 603m(595m로 표기된 것도 있음)의 갈미봉)>
<해발 603m(Daum 지도:595m)의 갈미봉)>
<희미한 등로마저 없어져서 힘들게 내려온 잡목구간>
잡목구간을 힘겹게 치고 나와
목적지인 녹재고개에서 음성군 엄정면 방향으로
약 100여미터 아래, 531지방도를 만난다.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비를
하고 오늘의 마지막 봉우리, 옥녀봉을 향한다.
<피로가 몰려올 때 새콤한 산딸기(장미과)는 아주 좋은 피로회복제이다~>
<산수국(범의귀과)>
오늘 산행의 마지막 봉우리 옥녀봉을 오르기 위해
마지막 힘을 다 써서 앞으로 치고 나간다. 녹재에서 배재로 오르는 길은
인적이 거의 없어서 등로도 보이지 않고, 무수한 산딸기 가시만이
산객을 맞이한다.
해가 저물고 있어 쉬지 않고 40여분을 힘겹게,
이곳이 옥녀봉인가 생각하면, 다시 길이 이어지기를 몇번 반복하고나서야
오후 7시 6분경 오늘의 마지막봉, 해발 778m의 옥녀봉에 도착한다~
옥녀봉은 백운산 방향, 백운지맥에서 이어져 온 산줄기가
옥녀봉을 지나 충주호 방향으로 이어지는 천등지맥 산줄기로
그래도 지맥길이라 날머리까지 어느 정도는 안심이 된다~
어제에 오갑산 옥녀봉에 이어 두번째 오른 옥녀봉이다~ ^^
<옥녀봉에 표지기 하나를 보탠다~>
<원주시계종주 표지기>
<고광나무(범의귀과)>
옥녀봉에서 배재로 내려서면서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노래를 들으며 내려오다가
목적지 1km를 채 못남기고 운남리 방향으로 잘못 내려섰다가
30~40여분 알바를 하였는데 다시 되돌아 오는 발걸음이 무척 무겁다~
아!! 알바없는 도계는 앙코없는 찐빵인가?
날이 어두워져서 마지막에 등로를 버리고
임도로 내려서서 저녁 8시 30분이 넘어서야 목적지 배재에 도착한다~
날이 어둡지만 임도의 하얀 자갈을 별빛에 비추며,
목적지 배재에 도착한다~
2틀간 무더위 속에 잠도 못자고 진행해서인지
밥맛도 없고 머리는 아프고 물만 먹히고... 나중에 알고보니 더위를 먹은
증상이었다. 원주시 귀래에 들러 동태탕으로 9시가 넘어 늦은
저녁을 먹고 귀로에 든다~ ^^
2013. 6. 9.
거기 산이 있으매
첫댓글 춘천 산오름 산악회는 강원도계를 하고 있습니다(저도 산오름 산악회 회원임).
뫼꿈이님의 작품인 시그널이 반갑네요.
끝나는 그날까지 화이팅 하시고...
더운데 고생이 많으십니다.
충청도계를 진행하다보니, 이천시계, 원주시계, 충북도계 표지기를 보았고,
강원도계 이야기도 들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곳곳의 산꾼들이 자기 고향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감사합니다~ ^^*
즐감 합니다.
도깨비싸리 찾아 보세요.
가이아님,
감사합니다~ 도깨비싸리가 맞네요~
예전에 중국 만주갔을때 찾아서 이름표를 달아준 것 같은데 그새 잊어버렸네요~
ㅎㅎ 수정하였습니다~ ^^*
찌는듯한 더위에 수고많으셨습니다. 누가 시키면 절대 못하는 일 ㅎㅎ
ㅎㅎ 마음에 없으면 돈을 줘도 하지 않겠지요~~~
아마 무병(?)에 걸려야 가능할 듯 합니다~ ^^*
지금 걷는 이길..
쓰고있는 산행기는 소중한 자료가 될듯...
멋지네
친구. ..^^*
친구, 고맙네...
길이 명확하지 않아서 산길이 힘들기는 하여도,
충청도계 갔다가 오고 나면 또 다시 그 다음 구간 산길이
눈에 아른아른 하니, 이거 병에 걸려도 단단히 걸린 것 같네~~~ ^^*
무더위에 수고하셨습니다.
천마는 캐왔나요? 요즘 자연산은 제법 귀한약재인데...
고문님, 감사합니다`
그렇게 귀한 것인줄 모르고 그냥 눈으로만 보고 왔는데...
다음에 보면 욕심을 부려봐야겠습니다~ ^^*
덕분에 좋은 구경 잘하고갑니다.
무더운 날씨에 쉽지 않은길..
대충의 자부심이 생기네요 수고많으셨습니다.
총무님, 감사합니다~
충청도계 핑계(?)로 대충 정기산행에 많이 참석하지 못하여
가끔 미안스런 생각이 듭니다~ ^^*
힘들게 걸은 길은 소중한 자산이 되겠죠 ..
어렵지만 그래도 끝까지 완주 안전하게 무병하세요...!
탬크님, 감사합니다~
힘들지만 대충이 있어서 많은 위안이 됩니다~ ^^*
재미있겠어요.
도로는 자전거로
산은 두발로
배고플땐 산딸기로
곷구경도 하면서.
구경 잘했습다.
고문님, 긴~ 도로구간을 걸었으면,
땡볕에 쉽지 않았을텐데...
자전거로 이동하여 약간은 수월하였습니다.
산딸기가 힘들때 입안을 상큼하게 하여,
산행에 많은 도움도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아직 청춘이십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 한다는 말이 생각나는 걸 보니... ^^~
그러게 말입니다~
사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 ^^*
여름엔 더위먹지 않도록 조심하시길.
잘못하면 건강을 헤칩니다.
지둘하실때도 더울때는 쉬엄쉬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산은 그래도 그늘이 있는데... 도로는 거의 땡볕이라...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