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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金日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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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제(金日磾, 기원전 134년 ~ 기원전 86년 음력 8월)는 전한 중기의 관료로, 자는 옹숙(翁叔)이다. 본래 흉노 출신으로 흉노의 번왕인 휴저왕(休屠王)[도(屠) 자의 발음은 저(儲)로 읽는다"(屠音儲), 한서(漢書) 안사고주(顏師古註)]]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열네 살 때 부왕이 무제와의 전투에서 패하면서 전한에 포로로 끌려왔다. 이후 무제의 신임을 받아 전한의 관료로 일하면서 김씨(金氏) 성을 받았으며, 곽광·상관걸과 함께 소제의 후견인이 되었으나 병들어 투후(秺侯)에 봉해지고 곧 죽었다. 7세기 신라의 왕족은 그 가계를 신성시하고자 김일제의 후손을 자처하였다. 다만 실제로 그 후손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1984년 12월 11일, 흥평현 인민정부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의 하나로 선정된 무릉배장묘인 김일제묘 앞에 묘비를 세웠다.]ㆍ
생애
초기 삶
김일제는 휴저왕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기원전 150년경, 이치사 선우의 번왕이었던 휴저왕과 혼야왕(昆邪王)이 계속하여 전한에게 패배하자, 그들을 송환하여 사형으로 그 죄를 물으려고 하였다. 혼야왕은 이치사 선우에게 끌려가면 목숨에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휴저왕을 설득하여 전한에 투항하려고 하였다. 혼야왕은 휴저왕이 반대하자 그를 죽이고 투항하였으며, 휴저왕의 부인과 두 아들을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주었다.
중국 포로 생활
곽거병은 휴저왕의 부인 연지(閼氏)와 장남 일제 및 어린 동생 윤(胤)을 사로잡아 장안으로 돌아왔다. 말 기르는 노예가 된 일제는 우연히 무제의 눈에 띄어 노예에서 해방되고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시중(侍中), 부마도위, 광록대부에 올랐다.
김씨성 사성
일제는 망하라(莽何羅) 등의 무제 암살 시도를 막은 공로로 거기장군이 되었고, 김씨 성을 하사받았다. 김(金)이란 황금을 뜻하는데, 휴저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천주(天主)에 제사 지냈던 일에서 비롯하여 성씨로 삼았다.
김일제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둘 다 무제의 총애를 받아서 무제의 농아(弄兒)가 됐다. 그러나 무제의 목을 뒤에서 껴안고, 궁녀를 희롱하자, 그 행동이 매우 불순하다고 생각하여 장남을 죽이고 무제에게 보고하였다. 무제는 화를 냈지만 김일제가 자초지종을 고하자, 슬퍼하면서도 김일제의 충성심에 더욱 감명되었다. 후원 2년(기원전 87년), 무제가 죽으면서 김일제는 곽광, 상관걸과 함께 소제를 보필하였다. 당초 무제가 곽광에게 보필하게 하자 곽광이 김일제에게 사양했는데, 김일제 역시 사양해 김일제가 부섭정이 되었다. 그리고 김일제의 아들 김상과 곽광의 딸이 혼인했다. 무제는 죽으면서 옥새로 봉한 조서를 내려 마하라 일당의 반란을 평정한 공으로 김일제를 투후에 봉하고 곽광과 상관걸도 열후에 봉했는데, 무제 사후 조서의 봉인을 풀어 시행하려 하자 당시 황제 소제가 어리다며 사양했다.
최후
김일제가 몸져 누우니 소제는 곽광과 의논하여 작위를 다시 내렸고, 김일제는 인수를 받은 지 하루 만에 죽었다. 작위는 아들 김상이 이었으나 김상이 죽은 후 아들이 없어 봉국이 폐지되었고, 이후 김일제의 증손 김당(金當)이 다시 투후에 봉해졌다.
김일제의 무덤은 무릉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로서 곽거병의 묘 오른쪽에 있는데, 오늘날 감숙성 흥평현(兴平县) 남귀향 도상촌에 있다.[ 1984년 12월 11일, 흥평현 인민정부는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의 하나로 선정된 무릉배장묘인 김일제묘 앞에 묘비를 세웠다.] 감숙성 무위시에 김일제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온다.
사후
김일제의 자손들은 신나라 때 왕망의 외가로서 주요 관직에 올랐는데, 후한 광무제가 왕망을 토벌할 때 역사에서 사라지고, 봉국도 몰수되었다.
중국 산둥성 하택시 성무현 옥화묘촌은 김일제가 봉지로 받은 투현으로 현재 입구에 이 사실을 알리는 표지석이 남아 있다. 투후 유적지에는 김일제를 기리던 사당(祠堂)인 투후사(秺侯祠)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김일제는 중국 김씨의 시조이다. 김일제의 자손들은 작은 벼슬을 습직하면서 한나라에서 살았고, 삼국지에도 김일제의 후손인 김선과 김의가 등장한다.
김일제와 신라 김씨의 관계
신라 문무왕릉비(文武王陵碑)에는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秺侯祭天之胤傳七葉]'(5행), '15대조 성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신라로 내려왔고'(6행)라는 구절이 있다. 또한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부인의 업적을 기리는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도 신라 김씨의 뿌리가 투후 김일제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을 볼 때 신라 김씨 왕족은 자신의 조상을 중국 한나라 때 투후를 지낸 김일제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록에 대해서 역사학자들은 7세기 후반 들어 형성된 신라 김씨의 관념적인 시조의식의 소산이지 실제로 김일제가 김씨의 시조인 것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이 견해는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을 발견한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의 견해이다.
김창호, 〈문무왕릉비에 보이는 신라인의 조상인식 - 태조성한의 첨보 -〉, 《한국사연구》, 한국사연구회, 1986년] 전근대에는 가계를 신성시하기 위해 고대의 전설적인 제왕 또는 유명한 위인들을 시조로 간주하는 일이 많았으므로 김일제 후손설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문경현, 〈신라건국설화의 연구〉, 《대구사학》, 대구사학회, 1972년.]
대한민국의 일부 역사 다큐멘터리나 재야사학자들은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선조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문헌 기록 외에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및 부장품이 일부 북방민족 계통과 유사하다는 사실도 증거로 거론된다.[2부작 <문무왕릉비의 비밀> - 제1편: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匈奴)의 후손인가?, 《KBS 역사추적》, 2008년 11월 22일 방송.
2부작 <문무왕비문의 비밀> - 제2편: 왜 흉노(匈奴)의 후예라고 밝혔나?, 《KBS 역사추적》, 2008년 11월 29일 방송] 하지만 2000년대 이후 고고학 발굴 성과의 누적을 통해 돌무지덧널무덤과 부장품의 발전 단계가 모두 밝혀지면서 4세기 신라 묘제의 북방민족 유래설도 역사학계 및 고고학계에서 인정되지 않고 있다.[이성주, 〈적석목곽분으로 들여다본 신라〉,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 1 전근대》, 역사비평사, 2009]
휴저왕(休屠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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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저왕(休屠王)[도(屠) 자의 발음은 저(儲)로 읽는다"(屠音儲), 한서(漢書) 안사고주(顏師古註)]은 흉노 이치사 선우 때의 번왕이다.
반고(班固)가 쓴 《한서(漢書)》 권68의 곽광김일제전(霍光金日磾傳)에 따르면, 휴저왕은 번왕, 즉 제후 겸 장군이었다. 이치사 선우는 휴저왕과 혼야왕이 한나라와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자 이들을 소환하여 사형으로 그 죄를 물으려 하였다. 이에 혼야왕은 휴저왕을 설득하여 한나라에 투항하려 하였으나, 휴저왕이 결정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휴저왕을 살해하고 곽거병에게 투항하였다. 이 때 휴저왕의 부인인 알지(閼氏)와 장남 일제, 차남 윤이 한나라에 포로로 잡혀갔다.
휴저왕은 금인(金人)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 일에서 비롯하여 자신의 장남인 김일제가 한나라 무제로부터 김(金)씨의 성을 하사받았다.
가족관계
장남 : 김일제(金日磾)
차남 : 김윤(金胤)
왕망(王莽)
왕망(王莽 《한서》에는 '莽'자가 초두 밑의 글자가 大가 아닌 犬으로 되어 있다., 기원전 45년 ~ 기원후 23년)은
중국 전한 말기의 관료이자 신나라의 황제로,
자는 거군(巨君)이며 위군(魏郡) 원성현(元城縣) 사람이다
원적(原籍)은 청주(靑州) 제남군(濟南郡) 동평릉현(東平陵縣)이지만 고조부인 왕수(王遂) 대에 기주(冀州) 위군 원성현으로 이거(移居)했다.
동평릉현은 사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서진 효회제(孝懷帝, 사마치(司馬熾).) 영가 원년(永嘉元年, AD 313)을 전후하여, 역성현(歷城縣)으로 군치(郡治)를 옮기면서 동평릉현(東平陵縣)을 평릉현(平陵縣)으로 고쳤다. 이후 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 문제(文帝) 정관 17년(貞觀十七年, AD 643)에는 평릉현을 전절현(全節縣, 당(唐) 하남도(河南道) 제주(齊州)에 속했다.)으로 고쳤다.
본관은 원성 왕씨(元城王氏)로서,
그 출신은 제북왕 전안(田安)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왕만(王曼)이며,
어머니는 거씨(渠氏)며,
형은 왕영(王永)이다.왕영에게는 왕광(王光)이라는 아들이 있다.
황제 즉위 전의 작위는 안한공(安漢公)이며, 즉위전의 전체 칭호는 안한공·재형·섭황제(安漢公·宰衡·攝皇帝)다. 원제의 황후 효원황후(孝元皇后)의 조카로 성제(成帝)의 어머니쪽 사촌형제에 해당한다. 왕만(王曼)의 차남으로 왕우(王宇)·왕획(王獲)·왕안(王安)·왕림(王臨)·왕흥(王興)·왕광(王匡) 등의 아들을 두었다. 손자는 왕천(王千, 공륭공(功隆公).)·왕수(王壽, 공명공(功明公).)·왕길(王吉, 공성공(功成公).)·왕종(王宗, 공숭공(功崇公).)·왕세(王世, 공소공(功昭公).)·왕리(王利, 공저공(功著公).) 등이 있으며, 딸은 평제(平帝)의 황후가 된 왕씨와 함께 왕엽(王曄, 목수임(睦脩任).), 왕첩(王捷, 목체임(睦逮任).) 등이 있었다. 본부인은 한의 승상을 지낸 왕흔(王訢)의 손자인 의춘후(宜春侯) 왕함(王咸)의 딸인 효목황후(孝睦皇后) 왕씨다.
영시 4년(永始四年, BC 13)에 의춘효후(宜春孝侯) 왕함(王咸)이 죽고, 그 아들 왕장(王章)이 의춘후(宜春侯)가 되었는데, 왕장은 자신의 여동생을 왕망에게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왕망이 같은 성씨 간에 결혼하는 것을 꺼리자, 자신의 성씨를 의춘씨(宜春氏)로 바꾸었다. 의춘씨는 신나라가 망하자, 대가 끊어졌다.
왕망은 아내가 죽자, 시호를 효목황후(孝睦皇后)로 하고, 전한 원제와 효원황후 왕씨가 묻힌 위릉(渭陵) 장수원(長壽園) 서쪽에 장사지내고 문모(文母, 신실문모태황태후(新室文母太皇太后)를 줄인 말로, 전한의 효원황후(孝元皇后)를 말한다.)를 영원히 모시라고 명령하고 능의 이름을 억년(億年)이라 하였다.
생애
초기 생애
황후의 자리에 오른 고모 왕정군(王政君)에 의해 백부들이 제후에 봉해지고, 고위 관리로서 유복한 생활을 보내는 가운데, 아버지 왕만(王曼)과 형 왕영(王永)이 일찍 사망하여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다. 왕망은 공손하고 검소함을 가지고, 패군(沛郡)의 진참(陳參)의 문하로 가서, 예경(禮經)예경(禮經)은 의례(儀禮) 17편을 말한다을 사사받고, 몸을 가지런히 하고 배움을 넓혔으며, 유생의 복장을 입고, 어머니와 형수를 시중들었다. 또 조카 왕광(王光)을 양자를 삼아 친자식 이상으로 양육하여, 왕망의 아내가 불평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권력을 장악하다
백부 대장군 왕봉(王鳳)이 병이 들자, 간병을 하였고, 왕봉의 인정을 받았다. 왕봉이 죽은 이후, 왕상(王商)과 왕근(王根)의 추천과 백모인 황태후의 후원으로 왕망은 순조롭게 출세한다. 친척 순우장(淳于長)을 실각시켜, 대사마가 되면서, 왕망의 기세는 하늘을 나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로 되었다. 애제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하여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정계 복귀의 탄원이 계속 올라오자 그는 정계 복귀를 한다.
영시 원년(기원전 16년),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신도후의 봉국은 남양군에 있었다.
애제가 붕어하자 애제로부터 황제의 옥새를 맡고 있던 대사마 동현으로부터 옥새를 강탈하여,
중산왕 유기자(劉箕子)즉위 후, 휘(諱)를 기자(箕子)에서 간(衎)으로 고쳤는데, 그 시기는 원시 2년(元始二年, AD 2) 봄으로서 당시 내용은 이러하다. <원시 2년 봄, 조서를 내렸다. "황제의 2글자로 된 이름(기자(箕子)를 말한다.)이 세간의 물건과 명칭이 통하니(通于器物), 이제 이름을 고쳐(更名), 옛 제도(古制)에 부합하게 하고 태사 공광(孔光)으로 하여금 태뢰(太牢, 소·양·돼지 세가지 동물을 함께 제물로 올리는 것 또는 이를 요리하여 올린 제물.)를 받들어 고묘(高廟)에 이를 고하고 봄제사(祠)를 지내도록 하노라."(元始二年春, 詔曰:"皇帝二名, 通于器物, 今更名, 合於古制.使太師(孔)光奉太牢告祠高廟.)">를 옹립하고
(평제) 대사마가 되었다. 이어 고문경학의 대가였던 유흠(劉歆)을 비롯한 유학자들을 많이 끌어들여 유학과 서상(瑞祥), 부명(符命, 일종의 예언서)에 근거한 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민중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차남 왕획을 잡아 노복(奴僕)을 죽인 죄를 묻는가 하면 장남 우(宇)의 모략죄를 물어 감옥에 가두었다가 모두 자결하게 했다. 딸을 평제의 황후로 책봉하고, 재형(宰衡)·안한공(安漢公)이 된 후, 5년에 14살이 된 평제가 사망하고 《한서》 평제기(平帝紀)의 주(注)에서는 왕망에 의한 독살을 주장하는데, 동군태수이던 적의(翟義)가 봉기한 뒤, 써낸 격문에서도 왕망이 독살했다고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광척후(廣戚侯) 유현 (劉顯)의 아들 유영(劉嬰)을 후계자로 추대하여 스스로는 가황제(假皇帝) · 섭황제(攝皇帝)로서 섭정하며 조정의 만기를 집전하였다.
황제가 되다
천하를 노리고 있던 왕망은 고문을 전거로 자신의 제위 계승을 정당화하려 했다. 마침 애장(哀章)이라는 인물이 고조의 예언이라며 「금궤도(金匱圖)」와 「금책서(金策書)」를 위조해 바쳤는데여기에는 천하를 맡은 왕망을 보좌한 인물로서 왕망의 심복과 함께 왕흥(王興)과 왕성(王盛)이라는 이름도 있었지만, 유력 관료에 해당하는 자가 아니라 문지기였던 왕흥과 떡장수였던 왕성을 공(公)으로 임명했다는 이야기도 있다.(《한서》 왕망전), 이를 전거로 거섭 3년(8년), 왕망은 고조의 영혼에게 선양을 받았다고 하여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여, 신 왕조를 열었다. 이후 유영을 정안공(定安公)에, 딸인 효평황후 왕씨를 정안공태후(定安公太后)에 봉하고 청주(靑州) 평원군(平原郡)의 군치(郡治) 평원현(平原縣)과 속현인 안덕현(安惪縣)《한서/권99中》열전제69 왕망전 중편에서는 안덕현을 安惪이 아닌, 安德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전한의 지역명칭 중에 安德으로 기록된 곳이 없다. 왕망의 신나라에서 전한의 병주(并州) 대군(代郡)을 고쳐 염적군(厭狄郡)이라 하고 속현인 상건현(桑乾縣)을 안덕현(安德縣)이라 하였다. 그러나 거리가 먼 바, 청주 평원군 안덕현(安惪縣)이 옳을 것이다., 탑음현(漯陰縣), 격현(鬲縣), 중구현(重丘縣)을 묶어서 정안공국(定安公國), 즉 정안국(定安國)으로 삼았으나, 그들을 장안의 명광궁(明光宮)을 정안관(定安館)이라 고쳐서 그곳에 살게 하였다. 이는 사실상 유폐였다. 왕망의 선양은 신화의 선양이 아닌, 역사상 최초의 선양이었지만 실상은 찬탈과 다름이 없었다. 태황태후로서 전국새(全國璽)를 맡고 있던 효원황태후 왕정군은 사자로서 옥새를 받으러 온 왕망의 사촌형제 왕순(王舜)에게 왕망에 대한 욕설을 퍼부었으나, 왕순이 옥새를 내어줄 것을 재촉하자 옥새를 내던지며 "나는 늙어 이제는 죽으나, 너희를 보니, 이제 집안이 주멸되겠구나!"(我老已死, 如而兄弟, 今族滅也!)라 한탄했다고 사서는 전한다.
주 시대의 치세를 이상으로 삼은 왕망은 《주관(周官)》이 책 자체에 대해서도 왕망이 유흠을 시켜 창작한 것이 아니냐는 설이 남송 시대부터 제기되어 청(淸) 말기까지 이어졌다. 홍매(洪邁)의 『용재속필(容齋續筆)』권16 「주례는 주공의 글이 아니다(周禮非周公書)」, 캉유웨이(康有爲) 『신학위경고(新學僞經考)』의 「한서유흠왕망전변위권륙(漢書劉歆王莽傳弁僞第六)」 등이 대표적이다.이라는 책을 바탕으로 국가 정책을 실시했지만, 현실성이 결여된 각종 정책은 단기간에 파탄나고, 화폐 유통과 경제 활동도 정지되어 민중의 생활은 한조 말기 이상으로 곤궁해졌다. 또한 흉노나 선비 등 주변 민족과 고구려 등의 국가의 지도자의 칭호를 제멋대로 고치고, 특히 고구려왕의 칭호를 중화사상에 근거하는 모멸적인 명칭인 하구려후(下句麗侯)로 부르게 해 고구려와 충돌하였으며, 이는 이민족들의 반발과 관계 악화로 이어져 이를 토벌하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또한 전매제 강화도 실패하여 신의 재정은 빈곤해졌다.
반란과 최후
생계를 유지하지 못하게 된 농민들은 마침내 신 왕조에 맞서 잇따라 반란을 일으켰다. 18년에 적미의 난이 일어났고, 남양에서 옹립된 유현을 토벌하러 보낸 신의 100만 군대도 곤양(昆陽) 전투에서 경시제 휘하의 유수에게 패배하여, 이것으로 각지에 군웅이 할거하여 대혼란에 빠진다. 그의 신하도 배신하고, 장안에는 경시제의 군대가 입성, 왕망은 그 혼란 중에서 두오(杜吳)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수급은 경시제가 있던 성으로 보내졌으며, 몸은 공을 세우려는 사람들이 달려들어 마구 찢어지고 흩어졌다고 한다.
왕망의 죽음으로 신은 멸망하였다.
평가
중국 역사상 최초의 '찬탈'을 저지른 인물이라는 이유로, 왕망에 대해서는 정치면에서뿐 아니라 인간성까지 포함한 비판적인 평가가 내려진다. 《한서》의 저자 반고는 「왕망전(王莽傳)」에서 다음과 같이 왕망을 평하였다.
왕망은 입이 큰데 턱이 짧고, 퉁방울눈에 눈이 빨갛고 크고 걸걸한 목소리였다.
키는 7척 5촌(약 173cm)으로 바닥이 두꺼운 신발과 높은 관을 좋아했고
북실북실하고 생기있는 털을 옷에 넣어 가슴을 젖혀 높은 곳을 보고,
먼 곳을 바라보듯 좌우의 눈을 보았다.
(莽為人侈口蹶顄, 露眼赤精, 大聲而嘶. 長七尺五寸, 好厚履高冠, 以氂裝衣, 反膺高視, 瞰臨左右.)
왕망은 외모나 대인관계에 특히 집착을 보여, 의식 때에는 수염이나 머리를 검게 물들여 좀 더 젊게 보이려 한 반면, 부명이나 서상 같은 신비주의적인 도참설을 이용해 자신의 등용과 즉위를 정당화시키려 했고, 그때에도 자신이 주위의 추천에 못 이겨 마지못해 받는 시늉을 하는 등 간계와 지모에도 능했다고 한다. 덧붙여 왕망 때에는 너무도 이상한 정책이 실행되었다고 《한서》는 전하고 있는데,
-왕망을 거스른 적의와 공모한 왕손경(王孫慶)을 잡아 태의(太醫)를 시켜 해부하게 하여 오장과 혈관에 대해 기록하고는 「이것으로 병의 치료법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하늘의 도움을 구하고자 우는 소리가 슬프고 애처로운 자를 뽑아 낭(郞)으로 채용했다. 이러한 낭의 숫자만 5천 명에 달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이 하루에 천 리를 날아가 흉노를 정찰할 수 있다고 하여 왕망이 그것을 시도하게 했는데, 그는 큰 새의 날개를 뭍이고 온몸에 깃털을 입고 끈으로 고정시킨 차림으로 수백 발이 넘는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이러한 실정뿐 아니라 인간성의 문제를 들어 왕망은 간신의 대표격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다. 명대의 오승은은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날뛰던 시기(오행산에 갇힐 때까지)를 왕망 시대로 정했는데, 이것은 「폭군 · 왕위 찬탈자 · 거짓 천자가 황위에 있으면 천재지변이 일어난다」는 전승을 왕망의 찬탈과 겹쳐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고려의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에게 보낸 답서에서 「기회를 엿보아 한(漢)을 도모하였으니 왕망·동탁의 간계(姦計)만 보일 뿐이었다」고 하여, 견훤이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 쳐들어가 약탈을 저지르고 경애왕을 죽게 한 행동을 한 조정을 어지럽히고 애제를 독살한 왕망의 전적에 빗대어 비난하고 있으며, 《중종실록》에도 조광조의 정책에 반대하는 훈구파들이 「주초(走肖)의 무리가주초(走肖)는 한자 파자로서 붙이면 조(趙)가 되어 조광조를 가리킨다. 훈구파들은 당시 벌레가 갉아먹어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 적힌 나뭇잎들을 잔뜩 만들어서 퍼뜨린 뒤, 조광조 일파가 왕망이 자신의 세력 팽창에 도참설을 이용했듯이 장차 도참설을 가지고 조선 왕조를 찬탈하려는 역심을 품고 일으킨 사건이라며 몰아세웠으며, 결국 이로 인해 조광조는 역적으로 몰려 처형당한다. 저지른 간사함이 왕망이나 동탁 같아 온 나라의 인심을 얻고 백료들이 우러러보는 바가 되었다.」며 조광조를 왕망에 빗대고 있다. 일본에서도 《도지가전(藤氏家傳)》 대직관전(大織冠傳)에서 소가노 이루카의 정치를 「안한의 궤휼(安漢の詭譎)」이라 비판하였으며, 《헤이케 이야기》도 조고 · 안록산 등과 함께 조정을 어지럽힌 조적(朝敵)으로서 왕망의 이름을 거론하였으며, 기소 요시나카의 난폭한 행동을 왕망에 비유하기도 하는 등 간신의 대표격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왕망에 의해 정해진 것도 있다. 한의 조신으로 있던 시대에 왕망 자신이 정한 황제의 즉위 의식은 광무제 이후의 역대 황제들에게 그대로 계승되어 황제의 즉위식에 즈음해서는 왕망이 정한 의식에 기초한 모든 의례들을 행했다. 학(學) · 교(校)라는 유학 교육기관을 전국에 설치하고 유학 공부를 장려한 것도 왕망의 치세하에 이루어진 일이며, 결과적으로 후한 시기에는 유학을 배우는 사람이 많아졌다고도 한다. 20세기 한국의 사학자 신채호는 왕조 교체가 빈번했던 중국의 역사에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왕조가 이전 왕조를 대신할 때마다 일시적으로 요역을 면제하고 부세를 감해주는 고식적인 시혜를 베푸는 척하다가 다시 옛 왕조의 규정을 되살려서 폭(暴)으로 폭을 대신하는 무의식한 내란만 되풀이되었을 뿐 진정한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는데, 왕망만은 고대 사회주의적인 정전법(井田法)을 실행하고 한문화(漢文化)로 세계를 통일한다는 일종의 공산주의적 국가의 건설을 시도하여 토지를 평균하게 나누어 빈부의 계급을 없애자는 생각을 대담하게 실행하려고 했다며 왕망의 찬탈을 「동양 고대의 유일한 혁명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칭찬하였다.
가계
네이버지식백과의 김일제에 관한 내용
신라 김씨의 조상 김일제는 흉노족인가?
2008년 하반기에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에서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던 김일제(金日磾, B.C134~B.C86년)가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고 소개된 적이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하는 유물로는 1796년 경주에서 발견된 ‘문무대왕릉비’와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출토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의 명문이 소개되었다.
문무왕비문에 따르면 “(문무왕의 조상은) 투후로 하늘에 제사지냄이 7대를 이어졌고 15대조인 성한왕이다.(秺侯祭天之胤傳七葉...15代祖星漢王)”라고 밝히고 있으며, 또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이를 상세히 설명하고 있어 한나라에서 투후(秺侯)라는 벼슬을 받았던 김일제가 신라 김씨의 조상임이 널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 역사스페셜이 방영되자 많은 사람들은 흉노의 후손이 어떻게 한반도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었고, 그나마 이를 긍정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이 멀리 한반도 경주까지 왔다고 억지춘향 식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의구심과 해석은 신라를 한반도 경주에 놓고 보는 식민사학의 이론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점이 많으나, 원래 초기 신라가 있던 산서성 남부에 놓고 해석하면 그 의문이 깨끗하게 풀린다.
흉노는 조선대연방의 일부
대부분 사람들은 흉노와 조선을 별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에 따르면 “3대 가륵 단군 B.C 2177년 열양의 욕살 색정에게 명하여 약수(弱水)로 옮기게 하고 종신토록 갇혀 있도록 했다. 뒤에 이를 용서하시고 그 땅에 봉하니 그가 흉노의 조상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어 흉노는 조선의 제후로서 서로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21세 소태단군 B.C 1289년 개사원의 욕살 고등이 많은 군대를 손에 넣고 서북(흉노)의 땅을 차지하고는 우현왕(右賢王)으로 임명해 줄 것을 청했다”라는 기록이 있고, 고등의 손자인 우현왕 색불루는 정변을 일으켜 조선의 22대 단군으로 등극하게 된다. 이와 같이 흉노는 곧 조선의 일부이며 한 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흉노는 중국사서에 조선이라는 나라를 대신해 기록되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진시황이 흉노를 침입을 막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는 것인데, 그 위치로 보아 감숙성에 있는 흉노라기보다는 당시 북부여의 남침을 견제하기 위한 장성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한 고조 유방을 평성의 백등산에서 포위한 주체도 흉노이고, 천하의 미인 왕소군이 흉노에게 바쳐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중국은 단군이 다스리던 조선과 북부여라는 나라이름 대신에 흉노, 동호, 예, 맥 등 종족명을 사서에 기록해 마치 이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와는 전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이 외 또 하나의 예가 바로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는 김일제의 이야기이다.
김일제가 한나라로 가게 된 사연
한나라 무제의 처조카인 장수 곽거병은 18살 때 위청의 부장으로 흉노와의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우고 21살 때인 B.C 121년 표기장군에 임명되어 다시 흉노와의 전쟁에 참전해 롱서(隴西)에서 흉노를 대파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참고로 롱서는 진시황이 쌓은 진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산서성 서남단 황하가 꺾이는 지점이다. 즉, 북부여의 남쪽 강역이었다.
이때 흉노 선우의 번왕(제후)였던 휴도왕(休屠王)과 혼사왕(渾邪王)이 계속 한나라에게 패배하자, 선우가 그들을 송환해 죄를 물으려 했다. 혼사왕은 목숨이 위험하다고 판단해 휴도왕에게 같이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의했다. 휴도왕이 이에 반대하자 혼사왕은 그를 살해하고는 혼자 투항하면서, 휴도왕의 부인과 두 아들을 한나라 장수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주었다.
이렇게 피살된 휴도왕의 장남이 바로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되는 김일제로 그때 나이 14살이었다. 포로로 잡혀온 김일제는 처음에는 장안에 있는 마구간에서 말 키우는 노비로 있다가 일처리를 워낙 잘하다보니 한 무제의 눈에 띄어 마구간을 감독하는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시중, 부마도위, 광록대부라는 벼슬에까지 오르게 된다.
김일제는 망하라가 한 무제를 암살하려는 것을 목전에서 격투 끝에 막아낸 공으로 거기장군이 되고, 무제는 일제에게 김(金)씨 성을 하사받았다. 김이란 금을 뜻하는데 김일제의 아버지 휴도왕이 금인(金人)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지냈기에 성을 김이라 했다고 한다. 이로써 김일제는 역사상 최초로 김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 참고로 <삼국사기 김유신열전>에는 “신라인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이기 때문에 성을 김씨로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일제의 두 아들 중 한 명이 공주를 유혹하려하자, 김일제는 그 행동이 매우 불경하다고 생각해 자식을 죽이고는 한 무제에게 보고했다. 한 무제는 상심했지만 김일제의 충성심에 더욱 감동했고, 나중에 한 무제는 죽으면서 김일제 등 3명의 고명대신에게 어린 소제(昭帝)를 잘 보필해달라는 유지를 남긴다. 즉, 김일제가 한나라 조정의 핵심권력에 들어간 것이었다.
한나라 소제는 김일제가 병들어 죽기 직전 그를 투후(秺侯)에 임명했으며 자손들로 하여금 그 관작을 세습토록 했다. 김일제의 무덤은 한 무제의 배장묘 가운데 하나인 곽거병의 묘 오른쪽에 있는데, 섬서성 흥평현(興平县)에 있다. 감숙성 무위시에는 김일제의 석상이 세워져 있으며 마신(馬神)이라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김씨 집안의 내력이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상세히 기록되어있다. 김씨 부인은 이구라는 당나라 사람의 후처로 들어가 장안에서 살다가 864년에 3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는데, 자신이 살던 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그녀의 묘비명에는 신라 김씨의 먼 조상이 소호금천의 후손으로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라고 밝히고 있다.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라 하는데, 이 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김씨)의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의 이름은 김일제로 흉노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에서 벼슬하시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무제가)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 되니 이는 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중략)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한나라를 무너뜨린 왕망은 원래 김씨인가?
신나라를 세운 왕망은 흉노 휴도왕의 고손자인가?
1954년 섬서성 서안에서 발굴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는 아래 문구가 기록되어 있다.
“태상천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여셨으니 소호씨금천이라 한다.
이 분이 곧 우리가 받은 성씨(金氏)의 세조(世祖)이시다. (중략)
먼 조상의 이름은 김일제로 흉노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에서 벼슬하시었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무제가) 그를 발탁해 시중과 상시에 임명하고 투정후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하였고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서안)에 정착하게 되니 이는 사책에 기록되어 있다. (중략)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
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
위 비문에서는 신라 김씨의 조상이 흉노 휴도왕의 태자인 김일제라고 밝히면서, 신라 김씨의 조상이 한나라에서 신라 땅으로 피난가게 된 사연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한나라의 난리를 피해 요동에 숨어 살게 되었다.”고 했는데, 그 난리란 바로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 新)이 패망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것이다.
전한 말기의 최고권력자 왕망은 누구인가?
왕망은 B.C 45년 한나라에서 태어나 높은 관직에 있다가
64세 때인 A.D 9년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신나라(9~25)를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시호는 가짜 황제라는 뜻인 가황제(假皇帝) 또는 황제를 섭정했다는 뜻인 섭황제(攝皇帝)라고도 하며,
중국의 역사기록에서는 '찬탈자'로 기록하고 있다.
왕망의 가문은 무척 지체가 높은 가문이었다. 왕망의 아버지의 이복여동생이 한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였다가 원제가 죽고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태후가 되어 왕씨 일가는 정치적 실권을 쥐게 된다. 그러나 왕망은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후원자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관운(官運)은 불투명했다.
B.C 22년 그는 궁중에서 비교적 낮은 직책에 임명되었다가, B.C 16년 신도공(新都公)이라는 귀족작위를 받게 된다. B.C 8년에는 황제를 대신하는 섭정에 임명되어 정치적으로 좋은 기회를 잡았으나, B.C 6년 성제가 죽고 조카인 애제(哀帝)가 등극하자 왕망은 파면을 당하게 된다. 그러다가 B.C 1년 애제가 갑자기 죽자 이복고모인 왕태후가 왕망을 불러 섭정에 임명했다.
섭정이 된 왕망은 재빨리 조정의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딸을 새 황제인 평제(平帝)의 황후로 책봉해 정권을 잡았다. 평제가 A.D 6년 14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왕망의 정치적 지위도 불안정해지자, 정적들은 정치공세를 펴 그가 평제를 독살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우려 했다. 왕망은 50명에 달하는 후계자 가운데 2살짜리 영(嬰)을 황제로 선임함으로써 후계문제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해결했다.
그는 6년에 가황제의 직위를 수여받았다. 이때 왕망은 황족과 그 지지자들로부터 산발적인 반대에 부딪쳤으나 손쉽게 진압했다. 그는 조직적인 대규모 선전공세를 펴 한나라의 국운이 다했으므로 새로운 국가를 열라는 하늘의 명이 자신에게 내렸음을 알렸다. A.D 9년 드디어 왕망은 한나라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의 첫 황제로 등극하며 국호를 신(新)이라 했다.
신나라 황제로 등극한 왕망
왕망이 황제로 재위하고 있었을 때의 사료가 매우 빈약한 이유는 신나라가 붕괴되고 유씨의 한나라가 다시 복원된 후 당시의 역사가들이 왕망의 치적은 모두 없애고 그를 사악한 찬탈자로 매도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왕망은 이상주의적 개혁가며 유능한 정치가이자 독실한 유생(儒生)인 동시에 미신을 믿는 현학자(衒學者)였다.
그의 재정·농업 정책은 한대의 관습과 유교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법을 어겼다는 이유로 아들 3명, 손자 1명, 조카 1명을 처형할 정도로 가족에게도 예외 없는 철저한 법치주의자였다. 그는 면학과 폭넓은 지식의 수용을 권장해 대외정책은 성공을 거두었으나, 재위기간 중 3차례 이상 황하가 범람하는 재해를 당하게 된다.
여러 차례 일어난 수해로 인구가 감소하고 기근과 전염병 등이 생기면서 사회불안이 증가하다보니 마침내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만다. 그 규모가 점차 커져갔으며, 이 같은 농민군의 하나인 적미(赤眉)는 18년부터 규모가 커져 왕망의 신나라 관군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도성을 포함하여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으며, 23년 10월 4일 반란군은 도성의 동쪽 성벽을 뚫고 저녁 무렵 황궁에 도착했다.
그 다음날 아침 도성의 백성들까지 반란에 가세해 황궁에 불을 질렀다. 불은 점점 더 번져나갔고 싸움은 그날 내내 계속되었다. 왕망은 자줏빛 의복을 입고 옥쇄를 흔들며 마법의 힘을 빌려서라도 끝까지 황궁을 지키려 했다. 음식도 전혀 먹지 않아 몸이 점점 더 쇠약해져갔고, 10월 6일 새벽에 미앙궁으로 옮겨가 천명 이상이나 되는 측근들과 함께 마지막 저항을 벌였다. 그들은 화살이 떨어질 때까지 수비를 했고, 그 후에는 단검을 뽑아들고 육탄전을 벌였다. 오후 늦게 반란군이 미앙궁으로 몰려 들어왔고, 왕망은 측근들과 함께 피살되고 만다.
왕망과 신라 김씨와의 관계
왕망이 김일제 이후 한나라 왕실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김씨 집안의 힘을 업고 있었다는 것은 <한서 왕망전>에 상세히 나와 있다. 왕망이 섭정으로 전권을 휘두를 때나 황제가 되었을 때, 김일제의 투후를 세습받은 김씨 집안은 당연히 한나라에서 정치실세가 되었음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더 나아가 재야사학자 문정창 선생은 신나라를 세운 왕망의 성이 왕씨가 아니라 김씨라고 하면서, 반고(班固)가 <한서>를 편찬하면서 왕망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예라는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 출자(出自)와 계보를 달리 적었다고 주장했다. 왕망은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의 남편으로 당에게는 이모부로 기록된 사서도 있다.
<한서 김일제전>에는 “김당의 어머니는 남씨인데, 곧 망의 어머니이다(當母南卽莽母)”라는 기록이 있어 당시 투후 벼슬을 가지고 있던 김당과 왕망은 동복형제임을 알 수 있다. 어느 기록이 맞는지 알 수는 없으나, 이처럼 왕망은 투후 김씨와 아주 가깝고도 깊은 관계였던 것이다.
왕망은 제도개혁의 실패와 전국에서 일어난 호족들의 봉기와 한나라 왕족인 유씨(劉氏)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 만에 망하게 된다. 신나라 황제였던 왕망이 봉기군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자, 신나라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필사의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나라에서 요동으로 피난 가는 김씨 집안
한(漢)나라를 무너뜨리고 신(新)나라를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인 왕망(王莽)이
원래 김씨였다는 사실은 <한서 권68 곽광·김일제전>에서
김일제의 가계도에 대해 설명한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김당의 증조부 김일제는 아들 절후 김상으로 전해지고,
김흠의 조부 김안상은 아들 이후 김상으로 전해지고,
모두 아들이 죽어 나라가 끊기자 왕망이 김흠을 봉하고 김당이 그 임금을 받들었다.
김당의 모친 남씨는 곧 왕망의 어머니로 임금과 같은 배에서 생산된 동생이라는 공이 드러난다.
김당이 남대행을 태부인으로 올렸다.
(当曾祖父日磾传子节侯赏,而钦祖父安上传子夷侯常,皆亡子,国绝,故莽封钦、当奉其后。
当母南即莽母功显君同产弟也。当上南大行为太夫人。)”
중국의 사가들은 왕망이 흉노족 출신인 김일제의 후예라는 역사적 사실을 감추기 위해 김씨가 아닌 왕씨로 적었던 것이다. 이렇듯 왕망이 원래 김씨였기 때문에 당연히 친족인 김씨들이 신나라 조정에서 요직을 맡았음은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나라는 제도개혁의 실패와 황하가 3차례나 범람하는 등 자연재해로 인해 전국에서 일어난 민중봉기와 한나라 왕족인 유씨와 호족들의 저항에 부딪혀 꿈을 펼치지 못하고 15년 만에 망하게 된다.
1954년 서안에서 발견된 ‘대당고김씨부인묘명’에 언급된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아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 피난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라는 그 난리란 바로 왕망이 봉기군에게 죽임을 당해 신나라가 망하고 후한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난리였다.
신나라 조정에서 요직을 맡고 있던 김씨들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요동(遼東)으로 필사의 탈출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당시 요동 땅은 한나라의 통치력이 미치지 못하는 외국, 즉 당시 서라벌 땅으로 바로 김씨들의 조상인 휴도왕의 고향이기도 한 곳이다. 아무리 위급하기로서니 자신들과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으로 무작정 피난갈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게 김씨 집안이 피신한 요동은 과연 어디였을까?
여기서 다시 김일제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간다. 한나라 무제 때 곽거병이란 장수가 흉노를 롱서(隴西)에서 대파하자 화가 난 흉노의 선우가 휴도왕과 혼사왕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으려 했다. 혼사왕은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끼고는 휴도왕에게 같이 한나라에 투항하자고 제의했으나 휴도왕이 이에 반대하자, 휴도왕을 죽이고는 혼자 투항하면서 휴도왕의 부인과 두 아들인 김일제와 동생 김윤을 곽거병에게 포로로 넘겨줘 김일제가 서안으로 오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흉노는 조선대연방을 구성하는 주 종족으로, 중국은 나라이름 대신에 종족 이름을 기술해 마치 당시 북방에는 나라가 없고 여러 종족들이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따라서 흉노의 휴도왕이라기보다는 북부여의 제후 휴도왕이 옳을 것이며, 지역적으로 보았을 때 흉노족이라기보다는 삼한 중 마한(마조선)에 속한 제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휴도왕이 곽거병에게 참패한 롱서는 진시황이 쌓은 장성의 서쪽 기점으로 백이·숙제가 굶어죽은 수양산이 있는 곳이다. 백이·숙제에 관한 기록을 보기로 한다.
1) <정의 조대가주 유통부>에 전하길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은 롱서의 머리에 있다(正義曹大家注幽通賦云:夷齊餓於首陽山,在隴西首)”, 같은 기록에 전하길 “롱서 수양현으로 지금의 롱서에 수양산이 있다(隴西首陽縣是也。今隴西亦有首陽山)”는 기록이 있으며,
2) <집해>에서 마융이 말하기를 “수양산은 하동 포판의 화산 북쪽에 있고, 황하가 꺾이는 곳에 있다. (集解馬融曰:首陽山在河東蒲阪華山之北,河曲之中)”
위 기록에서 보듯이 백이·숙제가 굶어 죽은 수양산이 있는 곳이 바로 롱서인 것이다. 황하가 남쪽으로 흐르다 동쪽으로 꺾이는 산서성 서남단에서 백이·숙제의 실제무덤이 발견됨으로써 롱서의 위치가 명확하게 밝혀졌다. 흉노의 휴도왕이 이곳에서 곽거병에게 여러 차례 패했다는 것은 바로 여기서 멀지않은 곳에 당시 휴도왕의 본거지가 있었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또한 김씨 집안이 피난간 요동이 어디인지는
<한서지리지>에서 유주(幽州)를 설명한 기록에서 알 수 있다.
유주에는 요동군과 요서군 외에
낙랑군과 현토군, 상곡군, 우북평군, 어양군, 발해군, 탁군, 대군의 10개 군이 속해 있는데,
요서군은 백이·숙제의 나라인 고죽국성이 있는 산서성 남부 운성시의 서부에 있는 영제시 일대이다.
따라서 요서군의 동쪽에 있는 요동군은 산서성 남부 운성시와 임분시 일대일 수밖에 없다.
(辽西郡 요서군)
秦置。有小水四十八,并行三千四十六里。属幽州(유주에 속한다)。
户七万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万二千三百二十五。
县十四:且虑,有高庙。莽曰鉏虑。海阳,龙鲜水东入封大水。
封大水,缓虚水皆南入海。有盐官。新安平。夷水东入塞外。
柳城,马首山在西南。参柳水北入海。西部都尉治。
令支,有孤竹城(고죽성이 있는 영지현)。
莽曰令氏亭。肥如,玄水东入濡水。濡水南入海阳。
又有卢水,南入玄。莽曰肥而。宾从,莽曰勉武。
交黎,渝水首受塞外,南入海。东部都尉治。莽曰禽虏。
阳乐,狐苏,唐就水至徒河入海。徒河,莽曰河福。文成,莽曰言虏。
临渝,渝水首受白狼,东入塞外,又有侯水,北入渝。
莽曰冯德。絫。下官水南入海。又有揭石水、宾水,皆南入官。莽曰选武。
당시 김씨들은 자신들의 조상인 휴도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요동(遼東)에 있던 서라벌로 피난했던 것이다.
식민사학자들은 김씨들이 섬서성 서안에서
신라의 천년 고도인 한반도 경주까지 피난 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의 교통사정으로 볼 때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어불성설의 이론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조상이 흉노 출신 김일제라는 사실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의 진실대로 최초 신라를 산서성 임분에다 놓고 보면
김일제에 관한 스토리가 기가 막히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명이 된다 하겠다.
신나라가 망하고 후한이 성립되는 때가 A.D 23년으로 서나벌(신라)의 2대 남해차차웅 20년이다. <삼국사기>에 “20년 가을 태백성(太白星)이 태미성(太微星)의 위치로 들어갔다. 21년 9월 왕이 죽으니 사능원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뭔가 심상찮은 일이 발생했음을 암시해주고 있다.
신라 문무왕비와 서안 김씨부인의 비문에서 공히 자신들의 조상은 김일제라고 밝혔다. 따라서 중국 김씨와 신라 김씨는 같은 조상의 후손인 것이다. 1998년 중국 언론은 산서성 임분시에 살고 있는 중국 김씨들이 흉노족 김일제의 후손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왜 중국 김씨들이 산서성에 많이 살고 있고, 종가가 임분시에 있는지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초기 신라가 있던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왕망의 신(新)나라와 관련 있는 국호 ‘신라’
김일제의 증손자인 왕망이 세운 신(新)나라에서 핵심 정치실세였던 김씨들은 서기 23년 유씨의 나라인 후한(後漢)이 세워지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대탈출을 감행해 흉노 휴도왕의 활동무대였던 요동 땅으로 숨어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그 김씨들은 DNA가 좋아서 그런지 몰라도 당시 요동에 있던 서나벌(徐那伐)에 들어가서도 얼마 지나지 않아 정치실세로 등장하게 된다.
신라에서도 정치실세가 되는 김씨 집안
서나벌의 탈해 이사금 9년(65년) 신라 김씨의 조상이라는 김알지가 태어난다. 도읍인 금성의 서쪽에 있는 시림(始林)의 숲속에서 새벽녘에 큰 닭울음소리가 나자 왕이 이상히 여겨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하니, 금색으로 된 작은 함 하나가 나뭇가지에 걸린 채 흰 닭이 그 아래에서 울고 있기에 그 함을 가져다 열어보니 얼굴이 잘 생긴 작은 사내아이가 들어 있었다.
임금이 무척 기뻐하며 “이 아이야말로 하늘이 내게 보내준 선물 아니겠는가?”하고는 거두어 길렀는데, 장성하자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으므로 알지(閼智)라 이름 짓고 금색 함(金櫝)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했다고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는 왕이 시림을 계림(鷄林)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는 국호로 삼게 된다.
5대 파사이사금(80~112)의 왕비는 김씨로 갈문왕 허루의 딸이며, 6대 지마이사금(112~134)의 왕비 역시 김씨로 갈문왕 마제의 딸이었다. 석탈해의 손자인 9대 벌휴이사금(184~196)의 어머니가 김씨이며, 11대 조분이사금(230~247)의 어머니 역시 김씨로 갈문왕 구도의 딸이다. 이렇듯 김씨는 신라로 들어오자마자 갈문왕이 되고 왕비를 배출하는 등 신라에서 정치권력의 실세로 등장한다.
대부분 사람들이 말하길 “신라 김씨들은 김일제의 후손이 아니라 모두 김알지의 후손”으로 알고 있으나, 위 기록에서 보다시피 파사이사금이 즉위할 때인 80년은 김알지가 15살 때이기 때문에 김알지 이전에 이미 다른 김씨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다른 김씨들이 바로 신나라에서 난을 피해 건너온 김일제의 후손들이 아니겠는가?
김알지의 계통은 세한→ 아도→ 수류→ 욱보→ 구도→ 미추이사금(13대 임금)으로 이어져 김알지 탄생 약 200년 후인 262년에 김씨가 처음으로 신라의 왕이 된다. 이후 14/15/16대는 석(昔)씨가 왕을 하다가, 아버지는 물론 어머니와 부인이 모두 김씨인 17대 내물이사금 이후는 김씨가 계속 신라의 왕이 된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를 찬한 사신(史臣)은 “신라의 경우는 같은 성씨를 취할 뿐 아니라 친사촌이나 고종사촌·이종사촌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으니, 비록 외국의 풍속이 각각 다르다 할지라도 중국의 예법으로 따지면 크게 어긋난 것이다. 저 흉노의 풍속에 어미도 간음하고 자식도 간음하는 행동은 또 이보다 더 심한 것이다”라고 혹평하였다.
이는 기마민족의 풍습인 형사취수(兄死娶嫂)제를 모르고 한 말일 것이다. 형사취수제란 아버지/형이 죽은 뒤에 아들/동생이 계모/형수를 취해 함께 사는 제도로 흉노와 고구리 등 북방유목민족에게 있는 풍습이다. 이 제도는 아버지/형이 죽으면 재산을 물려받은 계모/형수가 만일의 경우 다른 혈족의 남자와 혼인하게 되면 혈족의 재산이 바깥으로 유출됨을 방지하며, 또한 계모/형수에게 재산이 없을 경우 생활능력이 없으므로 혈족이 부양해 준다는 의미가 있는 제도이다.
이를 두고 풍습이 중국과 다르다는 이유로 혹평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는 후대의 유학자들에 의해 기록된 사서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중국의 경우에도 수나라 양제가 부왕인 문제의 후궁인 한국부인을 취한 것이나, 당태종 이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이고 그 부인들을 취했으며, 당 고종이 부왕인 당태종의 후궁인 무씨(측천무후)를 취한 적이 있다. 이는 그들이 북방기마민족인 선비(鮮卑)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신나라와 관계있는 신라라는 국호
<삼국사기>에 초기 신라의 국호는 서나벌 -> 계림 -> 신라로 바뀐다는 기록이 있고,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국호를 사로(斯盧) 또는 진한(辰韓)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참고로 <삼국사기>에 “307년 신라라는 국호로 복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어, 신라라는 국호는 이미 사용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라라는 국호는 분명 왕망의 신(新)나라와 뭔가 깊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삼국사기> 지증왕 4년(503)의 기록에 신하들이 아뢰기를 “시조께서 창업한 이래 국호를 정하지 못하고 사라 혹은 사로 혹은 신라라 하였는데, ‘신은 덕업을 일신(德業日新)한다는 뜻이고, 라는 사방을 망라(四方網羅)한다는 뜻’이 있으니 신라를 국호를 정하는 것이 마땅한 줄로 생각되옵니다”라고 고한다.
또한 “예로부터 국가를 지닌 분은 다 제왕이라 칭했는데, 우리 시조께서 나라를 세워 22대에 이르도록 다만 방언(方言)만을 칭하고 존호를 바로잡지 못하였으니, 지금 여러 신하의 모든 의견에 의하여 삼가 ‘신라국왕’이란 존호를 올리시옵소서”라는 기록에서 초기 신라는 왕이 다스리던 나라 즉 왕국(王國)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이래 그때까지 신라의 통치자를 왕이라 칭하지 못하고 방언인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으로 칭한 것으로 보아 전기 신라는 고구리의 영향력 아래 있던 속국이거나 조공을 바치던 작은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근거는 호태왕비의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는 문구로 보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광개토태왕 비문에 따르면 399년 왜가 신라에 쳐들어오자 신라에서 광개토태왕에게 사신을 보내 "노객(奴客=신라왕)이 백성을 위해 태왕께 와서 명을 청합니다"라고 하자 태왕이 은혜를 베풀어 그 충성을 칭찬하고 특별히 사신을 함께 보내 (출병을) 알렸고 원병을 보내 왜구를 격파했다는 후속문구가 있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도 초기 신라는 고구리와 전쟁을 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하겠다.
남계고채 南溪古寨-일명 김가촌金家村
안휘성 지주池州시
흉노의 후예가 살고 있는 안위성의 김가장 촌, 金家長村
흉노 출신 김일제의 후손들이 사는 마을
무위 지역 휴도왕(休屠王)은 연제씨(攣鞮氏)?
김일제(金日磾)의 아버지 휴도왕(休屠王)의 성(姓)은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선우(單于)와 같은 연제씨(攣鞮氏)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즉 투후 김일제(秺侯 金日磾)'가 한(漢)나라 7대 황제 무제(武帝)에게 성과 이름을 하사 받기 전에 이름은 "연제옹숙(攣鞮翁叔)"일 것이라는 겁니다.
그 이유는 흉노의 정치 경제 지배 체제 때문입니다.
우리 고유의 "3" 숫자는 세상을 다스리는 제도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좌현왕(左賢王) 우현왕(右賢王) 제도를 두어 권력을 한곳에 집중하지 않고 분산시키는 정치제도이기 때문에 기마민족은 기본적으로 독재체제가 불가능합니다. 유목민족과 농경민족의 차이점이라고 할까요?
왕이 독재를 한다면 농경민족은 땅을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독재를 받아들여야 하지만 유목민족은 왕이 독재를 하면 양떼 몰고 떠나면(?) 됩니다^^
그래서 유목민족은 거래(?)가 정확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되어야 연합국가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싸움의 방식도 유목민족은 농경민족과 다르기 때문에 오판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 결과는 대패로 끝나고 말입니다.
화랑의 세속오계에 임전무퇴(臨戰無退)가 있습니다. 전쟁에 나가면 절대 뒤로 물러서지 말라는 정신인데 이 전법이 흉노에겐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즉 흉노는 싸움에 있어서 후퇴를 불명예로 생각하지 않았기에 싸움이 유리하면 무작정 전진하고 불리하다 싶으면 사정없이 도망쳤다고 합니다.
노획품이나 포로는 그대로 당사자의 소유가 되었으며 전사자의 시신을 거두어 돌아온 자는 그의 재산을 모두 얻을 수 있었다고 하니 우리들의 상식과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마도 전사자의 재산과 함께 그에 딸린 식구들도 모두 책임지어야 하는 유목민족의 생존 전략이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 앞의 이익을 위해 죽기 살기로 맹렬히 싸웠고 불리하다 싶으면 도망치는 전법(?)을 구사했습니다
흉노제국(匈奴帝國)에서 선우(單于)는 황제의 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탱리고도선우(撑犁孤塗單于)'의 약칭인데, '탱리(撑犁)'는 하늘, '고도(孤塗)'는 아들, '선우(單于)'는 대군장의 뜻이니 하늘의 아들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황제라고 해석을 해 볼 수 있습니다.
흉노의 지배 구조는 크게 세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첫째는, 핵심 지배 집단으로 선우를 배출하는 왕족인 허련제가(虛攣鞮家)와 왕비를 배출하는 외척들인 호연(呼衍), 난(蘭), 수복(須卜), 구림(丘林)가(家) 등이 이에 속하였다.
둘째는, 주도 집단으로, 흉노 사회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투르크 및 비투르크계 초기 부족들로 구성되었다.
셋째는, 복속민과 전쟁 포로들로 구성된 종속 집단이 그것이다.
흉노 사회의 본체를 구성하는 지배 집단의 다섯 부족과 후일 흉노 국가에 흡수된 여타 부족들 사이에는 정치 참여폭과 특권 부여에서 상당한 차이가 존재했다. 또, 전쟁을 통한 복속 부족과 비투르크계 종족들 중 일부는 노예와 같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 노예라기보다는 부족 단위의 집단 노예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흉노 사회는 부족 연합체적인 유목 국가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고 각 부족 공동체 단위를 결집시키는 요소는 말과 무기에 의해 부족을 방어하고 적을 공격하여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는 강력한 공동 운명체 의식이었다. 이런 면에서 국가는 하나의 커다란 군산(軍産) 복합체였고, 선우는 중앙 집권적인 통치자인 동시에 총사령관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물론, 중간 관료나 정책 자문 그룹은 일부 한인들로 충당되었으나, 고급 관료나 군사 조직의 단위 부대장에는 흉노인이 임명되었다.
흉노의 신앙 체계에는 농경 사회의 지신이나 몽골-통구스 계통의 토템 사상보다는 천신 사상이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선우는 최고 통치권자일 뿐만 아니라, 천신의 아들(天子)로서 그의 뜻을 지상에 펴는 사제장이었다.
그러나 선우는 반드시 천신의 은총(Qut)을 받아야만 왕권의 정통성을 가질 수 있었던, 지상에서의 천신의 대리자에 불과했다.
흉노인은 매년 세 차례의 모임을 가졌다.
정월에는 모든 부족장들이 선우 궁정에 모여 춘제(春祭)를 거행했으며, 5월에는 조상, 천지, 신령에게 제를 올렸으며, 가을 집회는 호구 조사를 실시하고, 가축 현황을 파악하는 목적을 띠었다.
흉노인은 죽은 사람에 대한 안장과 조상의 묘를 중시한 점으로 보아 조상 숭배에 대한 관념이 강했다. 또, 사람이 죽었을 때는 관을 사용하고, 금, 은, 의복뿐만 아니라, 왕족의 장례에는 노예를 순장하는 풍습이 있었던 것 같다.
이와 함께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무당의 역할이 여러 기록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흉노 사회에서 샤머니즘도 상당히 번성했던 것 같다.
흉노의 무당은 신과 인간 사이의 영매(靈媒) 역할뿐만 아니라, 주술과 의술도 행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서(漢書)에 흉노의 무당 의사가 기절한 사람을 외과적 치료로 소생시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지배 구조는 크게 세 집단으로 형성되었다. 첫째는, 핵심 지배 집단으로 선우를 배출하는 왕족인 허련제가(虛攣鞮家)와 왕비를 배출하는 외척들인 호연(呼衍), 난(蘭), 수복(須卜), 구림(丘林)가(家) 등이 이에 속하였다. 둘째는, 주도 집단으로, 흉노 사회 건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투르크 및 비투르크계 초기 부족들로 구성되었다. 셋째는, 복속민과 전쟁 포로들로 구성된 종속 집단이 그것이다.
흉노 사회의 본체를 구성하는 지배 집단의 다섯 부족과 후일 흉노 국가에 흡수된 여타 부족들 사이에는 정치 참여폭과 특권 부여에서 상당한 차이가 존재했다. 또, 전쟁을 통한 복속 부족과 비투르크계 종족들 중 일부는 노예와 같은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개인 노예라기보다는 부족 단위의 집단 노예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정치 및 사회 조직은 좌우, 동서, 흑백 등으로 나누어 상호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이원화 제도를 채택하였다. 특히, 군대 조직은 십진법에 근거하여 십, 백, 천, 만 단위로 형성되었다. 이원화 제도나 십진 구성은 흉노뿐만 아니라 후일 돌궐, 위구르를 비롯한 투르크계 국가에도 계승되어 투르크 문화의 한 특성으로 정착되었다. 더욱이 몽골이나 동아시아 제국의 정치, 군사 체계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흉노의 정치 조직은 묵특 선우(單于)시대에 이미 그 골격이 형성되었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흉노의 정치 계급은 모두 24 등급으로 나뉘어 있었다. 또, 모든 등급은 투르크 사회의 전형적인 이원화 구조에 따라 좌우로 구분되었다. 즉, 최고 통치권자인 선우 밑에 지위가 가장 높은 좌현왕(左賢王) 우현왕(右賢王)이 있고, 그 아래 좌우욕려(左右谷蠡), 좌우대장(左右大將), 좌우대도위(左右大都尉), 좌우대당호(左右大當戶), 좌우골도후(左右骨都侯) 등이 있어, 각각 수천(千長) 수만(萬騎) 군대를 지휘하였다.
관직의 좌우(左右) 구성에 있어서도 좌(左)가 우(右)보다 우선이었다.
그래서 선우(單于) 다음의 직위인 좌현왕(左賢王)은 항상 선우의 태자(單于)가 임명되었다. 각 등급의 왕장(王將)은 자기 휘하의 유목 집단에 대해 정치적 복속의 표현이나 제국 운영에 필요한 공납과 병력의 의무를 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관할지에 대한 독점적 지배와 소유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지위의 세습도 일반화된 관행은 아니었다.
흉노 전 기간을 통해 선우 자리는 장자 계승과 형제 계승이라는 기본적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유목 국가에서 통치자의 자질은 개인의 군사적 역량과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선우직의 계승 문제는 현실과 원칙 사이에서 항상 갈등과 분란의 불씨를 안고 있었다. 장자인 묵특이 부친 선우로부터 계승권을 보장받지 못하자, 부친을 살해하고 선우직을 찬탈한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또, 후계자의 선발에서는 재임 선우의 절대적 영향력이 행사되었고, 비록 형식적이기는 하지만 부족 연합적 국가의 성격에 비추어 다른 부족의 승인을 필요로 하였다. 그럼에도 선우직의 계승 제도는 호한야 선우(B.C. 58∼31)에서 2세기 중엽까지는 형제 계승이라는 원칙이 일반화되기에 이르렀다. 원칙에 입각한 선우직의 계승 문제는 부족 간의 알력 해소와 내부 안정에 기여하는 측면도 있었으나, 선우 개인의 자질과 능력이 비중 있게 고려되지 않아 유목 국가의 근간인 전쟁력의 급격한 약화를 초래하였다. 이것이 기원 전후 1세기를 기점으로 흉노가 양분되는 한 원인을 제공하기도 했다.
묵특 시대의 흉노의 영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졌다.
중부는 현재 중국의 산서, 하북, 차하르(察哈爾)의 경계 지역과 쑤이위안 성(綏遠省) 동남부 일대로서 선우가 직접 통치하였다.
흉노의 수도도 중부 지역에 두었다.
흉노의 정치 중심지는 외몽골의 오르혼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곳에서 연례 회의를 소집했다. 용정(龍庭)은 흉노의 수도로서 주요한 종교적 의례뿐만 아니라, 각 부족의 정치적 의사가 수렴되고 결정되는 곳이었다.
매년 가을의 대규모 집회에서는 일반 호구 조사 및 가축들의 현황도 파악되었다.
좌현왕(左賢王)의 동부는 하북성 서북부, 차하르 남부 일대와 그 동쪽으로 고조선과 접해 있었다. 동부 지역은 좌현왕을 필두로 하여 24 등 직제상 '좌(左)'에 해당하는 관리에 의해 통치되었다.
우현왕(右賢王)의 서부는 산서(陝西)성 북부 및 그 서쪽의 변방과 청해성(靑海省) 일대에 접해 있었는데, 우현왕과 '우(右)'에 해당하는 관리들의 소관이었다. 이 밖에도 흉노의 정복 전쟁으로 이민족의 복속이 늘어나자 왕의 명칭도 늘어났다.
예를 들면, 휴도왕(休屠王), 혼야왕(毘邪王), 일축왕(日逐王) 등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정복한 이민족 지역을 통치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혼야왕(毘邪王)은 월지 지역을, 일축왕(日逐王)은 서역 지역을 다스렸다.
한편 선우 직할지, 즉 중앙에는 골도후(骨都侯)란 대신(大臣)이 있다.
골도후는 선우에 직속하는 비서장관이었다.
골도후도 좌우(左·右)를 두었는데 선우의 인족(姻族)인 다른 성씨족의 장(長)을 임명했다. 그 직무는 선우를 보좌해서 행정을 담당한다.
그들의 임무는 재판·감찰·경찰·외교 등이며, 선우(單于) 계승문제에도 관여했다.
또 다른 중요한 임무는 여러 왕장의 동정을 선우(單于)를 위해 감찰하는 것이고, 그 충성심이 의심될 때 선우(單于)는 골도후를 파견하여 그 왕장의 부대를 감시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중앙의 직책에는 선우(單于)의 인족(姻族)인 다른 성씨 족장을 임명하고, 병권(兵權)을 가진 지방의 왕장(王將)에는 오로지 선우(單于)의 가까운 친척만을 배치했다.
흉노 사회의 혼인 관계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씨족 간의 문제였다.
따라서, 보편적으로 씨족 외혼(氏族外婚)이 성행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씨족 관계를 고려하지 아니한 여인의 재혼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씨족 관계 틀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계모를 아내로 삼는 수계혼(收繼婚)이나, 형수나 제수를 아내로 삼는 수혼(嫂婚, Levirate) 제도가 관습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한편, 지배 계층에서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주변 국가와의 종실 결혼이 성행하였다.
한서 김일제전
김일제의 자는 옹숙(翁叔)으로 본래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다. 무제 원수(元狩) 중( BC 122-117)에 표기장군(票騎將軍) 곽거병( 去病)이 병사를 이끌고 흉노의 우지(右地)를 공격하여 머리를 벤 것이 많았고 휴도왕의 제천금인(祭天金人)을 얻었다. 그 해 여름에 표기는 다시 서쪽으로 거연(居延)를 지나 기련산(祁連山)를 공격하여 크게 이기고 획득했다. 이에 선우는 곤야(昆邪)와 휴도가 서방에 많이 있으면서 한에게 깨뜨림을 당한 것을 원망하여 그 왕들을 불러서 주살하고자 했다. 곤야와 휴도는 두려워 모의하여 한에 항복했다. 휴도왕이 후회하자 곤야왕이 그를 죽이고 아울러 그 무리들을 이끌고 한에 항복하니 곤야왕을 열후에 봉했다. 일제는 아버지가 항복하지 않고 살해되었기 때문에 어머니 알씨(閼氏), 동생 윤(倫)과 더불어 관에 몰입되어 황문(黃門)으로 옮겨져 말을 길렀는데 이때 나이는 14세였다.
오래 되어 무제는 말을 보면서 즐겁게 잔치를 열었는데 곁에는 후궁들이 가득찼다. 일제 등 10인이 말을 끌고 전하(殿下) 곁을 지나다가 몰래 훔쳐보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일제에 이르러서는 혼자 감히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일제는 키가 8척 2촌이었고 용모는 중후하고 엄했다. 말 또한 살찌고 아름다웠다. 상(上)은 기이하게 여기고 그에게 물으니 예를 갖추어 본래의 모습대로 대답했다. 상은 뛰어나다고 여기고 즉일로 탕목 의관(湯沐衣冠)를 하사하고 마감(馬監)으로 제수했다. 시중, 부마도위(駙馬都尉),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승진했다. 일제는 그러는 동안 친하고 가까이에 있었는데 일찍이 과실이 있지 않았다. 상은 그를 매우 믿고 사랑해서 상으로 수천 금을 내렸다. 나가면 동승하였고 들어오면 좌우에서 모셨다. 많은 귀척들이 몰래 원망했다. "폐하께서는 망령되게도 일개 호아(胡兒)에 불과한데도 도리어 귀하게 중하게 여기신다."라고 말하니 상은 듣고서 더욱 더 후하게 대했다.
일제의 어머니는 두 아들을 가르쳤는데 심히 법도가 있었다. 상은 듣고서 가상하게 여겼는데 병으로 죽자 조서로써 감천궁(甘泉宮)에 그림을 그리고 휴도왕 알씨라고 서명하였다. 일제는 매양 그림을 보고 항상 절하고 눈물을 흘린 연후에 자리를 떴다. 일제의 아들 두 사람을 모두 사랑하여 황제의 농아(弄兒)가 되어 항상 곁에 두었다. 농아는 간혹 뒤로부터 상의 목을 끌어안았는데 일제는 앞에 있어서 그 모습을 눈여겨 보았다. 농아는 달리다가 또 울며 "늙은이가 노했다."라고 말하니 상은 일제에게 일러 " 누가 우리 아이를 노하게 만들었는가?"라고 말했다. 그 후 농아는 장성했는데도 삼가지 않았다. 전하로부터 궁인과 더불어 희롱하였다. 일제는 그 모습을 보고는 그의 음란함을 싫어하여 드디어 농아를 죽였는데 농아는 곧 일제의 장자였다. 상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자 일제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며 농아를 죽인 상황을 모두 말했다. 상은 심히 애석하게 여기고 그를 위하여 울었는데 이미 마음 속으로 일제를 공경했다.
처음에 망하라(莽何羅)는 강충(江充)과 더불어 서로 친교가 있었다. 충이 위태자(衛太子)를 해치는데 이르러 하라의 동생 통(通)은 태자를 주살할 때 힘껏 싸워 봉함을 받았다. 후에 상이 태자의 억울함을 알고 이에 충의 종족과 당여를 멸하였다. 하라 형제는 화가 미칠까 두려워 드디어 역모를 꾀하였는데 일제는 그 의중을 알아내는데 비상한 재주가 있어 마음 속으로 그들을 의심하여 몰래 혼자 그 동정을 살폈다. 하라는 또한 일제의 의중을 깨닫은 고로 오랫동안 군사를 일으킬 수 없었다. 이때 상은 임광궁(林光宮)에 행차하였고 일제는 작은 질병이 있어 집에 누워 있었다. 하라는 통과 소제(小弟)인 안성(安成)과 더불어 칙서를 바로잡으러 밖으로 나와서 함께 사자를 죽이고 군사를 일으켰다. 다음날 아침에 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밖으로부터 어떤 곳으로 몰래 들어왔는데 일제는 뒷간에서 숨어서 심장이 뛰었다. 앉은 채로 안으로 기어들어가 문 아래에 서는 순간 하라는 동쪽 곁채 위에서 흰 칼날을 내리쳤는데 일제를 보자 낯빛이 변했다. 달리고 넘어지고 안쪽으로 들어가서 큰 거문고를 타려고 하다가 쓰러졌다. 일제는 하라를 잡을 수 있었다. 인하여 전하여 "망하라가 모반했다."라고 소리치니 상은 놀라 일어났고 좌우는 칼을 뽑아들고 그들과 대적하려고 했다. 상은 일제가 그들 속에 있는 것을 두려워 하여 대적하지 못하게 했다. 일제는 멱살을 잡고 하라를 전하(殿下)로 던져서 그를 사로잡아 결박할 수 있었다. 끝까지 치죄해서 모두 책형을 가했다. 이는 역사에 충효와 절개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일제는 자연히 좌우로 있으면서 눈에 거스르지 않는 지가 수십년이었다. 궁녀를 내려 주어 밖으로 데려갔지만 감히 가까이 하지 않았다. 상은 그 딸을 들여와 후궁으로 앉히려고 했으나 옳게 여기지 않았다. 그의 신실함과 삼감이 이와 같았다. 상은 더욱 그를 기특하게 여겼다. 상이 병에 걸리자 곽광( 光)으로 하여금 어린 임금을 보필하게 했는데 광은 일제에게 양보했다. 일제는 " 신은 외국인인데 또 흉노로 하여금 한을 가볍게 볼 수 있다."라고 말하고 이에 드디어 광을 도왔다. 광은 딸을 일제의 사자(嗣子)인 상(賞)의 처가 되게 하였다. 처음 무제는 유조로써 망하라를 토벌한 공으로 일제를 투후( 侯)로 봉했다. 일제는 황제가 어려서 봉함을 받지 못하고 보필한지 수년 후 병으로 괴로움을 당하자 대장군 광은 일제를 봉하고 누운 채로 인수를 주었다. 하루가 지나 훙하자 장례 도구와 장지를 하사하고 병사가 딸린 가벼운 수레를 보내어 군진(軍陳)으로 무릉(茂陵)에 이르렀으며 시호를 경후(敬侯)라 하였다.
신라 금성 = 부여(조선)의 도읍 = 진한
신라 김씨의 조상이 되는 김일제의 후손들이 옮겨간 곳은 신라의 초기도읍지 금성으로 산서성 임분시 일대이다. 이곳이 요동군의 땅이었기 때문에 김씨 부인의 묘비명에 “우리 집안은 요동(遼東)에 숨어살게 되었다.”라는 문구가 기록된 것이다.
또한 이 일대는 번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이 위만에게 패해 도망가 한(韓)을 세우고 성을 기씨(箕氏)에서 한씨(韓氏)로 바꾸고 한왕(韓王)이 된 곳이다. 기준은 청주 한씨의 시조이며, 기준의 41대 조상은 바로 기자(箕子)이다.
청주 한씨 문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은 세조 때 문신이었던 한명회(韓明澮)로 그가 받은 군호는 상당군(上黨君)이다. 상당이라는 지명은 한씨를 상징하는 단어인데 한씨가 시작된 곳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청주시에 상당구가 있는데, 그곳은 원래 기준이 살던 땅이 아니다.
기준이 살던 상당은 중국 산서성 장치시 장자현 일대로 임분시 동쪽에 있다.
上党,《释名》曰:
“党,所也,在山上其所最高,故曰上党也。”
上党地区位于今天山西省的东南部,主要为长治、晋城两市.它是由群山包围起来的一块高地。
상당 : 상당지구는 산서성의 동남부로 장치시와 진성시 일대이다.
韓地는 옛 조선 땅으로 신라의 발생지
연나라에서 망명한 위만에게 패한 번조선왕 기준이 도망간 한의 땅(韓地)은 전국시대 한나라(하남성) 땅이 아니라, 바로 단군조선 즉 삼한(三韓)의 땅인 것이다. 삼한 중 진한(辰韓)의 땅은 신라로 발전하고, 마한(馬韓)은 백제로 발전하고, 변한(弁韓)은 가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참고로 단군조선의 정통성을 계승한 북부여는 삼한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나중에 고구려로 국호가 바뀌게 된다.
<한단고기 삼성기전 상>에 “B.C 108년 한무제는 군대를 움직여 우거를 멸망시켰다. 서압록 사람인 고두막한이 의병을 일으켜 단군이라 했다. B.C 86년 한나라 소제 때 부여의 옛 도읍을 차지하여 동명(東明)이라고 나라 이름을 붙이니 이것이 곧 신라의 옛 땅이다.”라는 기록이 있어 ‘부여의 옛 도읍 = 진한(辰韓) = 신라의 옛 땅’이란 말이다.
여기서의 부여는 북부여가 아니라 조선의 44세 구물단군 때 대부여로 국호를 바꾼 단군조선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부여의 도읍은 장당경(藏唐京)으로 글자 그대로 요임금의 당나라 도읍인 평양(平陽)으로 역시 산서성 임분시 일대로 그곳에 요임금의 무덤이 있다.
<후한서 동이전>의 기록에 따르면, “한은 세 종족이 있다. 첫째 마한이요, 둘째 진한이요, 셋째 변한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어 54국이고...진한은 동쪽에 있어 모두 12국인데... 진(秦)나라 사람들이 괴로운 역사를 피해서 韓으로 도망가자 마한에서 동쪽 국경 땅을 쪼개어 이들에게 주었다. 이곳을 진한(辰韓)이라고 한다.”여기서 韓이란 옛 단군조선(삼한) 땅을 의미한다.
위 기록에서 나중에 신라로 발전하는 진한은 과연 어디일까? 진한은 조선의 삼한 중 천왕(단제)께서 직접 다스리던 땅으로 대부여의 도읍이 있던 곳으로 바로 산서성 임분시 일대이다. 그 결정적인 유적의 증거가 바로 신라의 초도였던 금성(金城) 유적지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신라의 기록과 <환단고기>와 여러 사서에 기록된 진한(辰韓)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게 일치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신라 김알지의 조상으로 언급되는 흉노출신 김일제의 스토리까지 완벽하게 성립이 되는 것이다.
필자가 신라의 초기도읍지 금성이 산서성 임분에 있었다고 주장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현재의 식민사학의 이론이 한반도 경주를 금성이라 하고 있으며, 삼국의 위치를 대륙에 놓고 보는 재야의 학자들조차 명확한 위치를 비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일제 후손들의 기록이 말해주고 있으며, 더 나아가 금성 유적의 발견으로 이제는 더 이상 다른 이론이 있을 수 없다.
김일제 후손들이 한(漢)나라의 난을 피해 옮겨간 요동(遼東) = 신라의 옛 땅 금성(金城) = 부여(조선)의 옛 도읍인 장당경(藏唐京) = 진한(辰韓) = 기준이 도망간 한(韓)의 땅
이것이 역사의 진실이며, 이를 유적으로 입증한 것이 산서성 임분에서 발견된 금성유적인 것이다.
신라 김씨와 가락 김씨의 시조는 김일제?
신라 문무왕 비문에 신라 김씨의 시조로 언급된 투후(秺候) 김일제(金日磾, BC 134 - BC 86)는 흉노 우현왕 휴저왕(休屠王)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BC 127년 흉노를 정벌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한무제가 위청, 곽거병을 시켜 흉노를 공격하자 흉노의 좌현왕 훈야왕과 우현왕, 휴저왕이 맞서 싸웠지만 흉노의 세가 궁하게 되었다. 결국은 좌현왕이 한나라에 항복하면서 일제의 아버지 휴저왕을 살해했으니 일제가 14살이 되던 해였다.
김일제는 어머니 (1)알지(閼氏)와 동생 윤(倫)과 함께 한나라 군의 포로가 되었고 김일제는 노예의 신분으로 한나라 궁성에서 말을 키우는 천역을 맞게 되었다. 흉노의 왕자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했지만 김일제의 의연한 모습이 한무제의 시선을 끌게 되어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게 되었다. 김일제는 한무제로부터 김씨(金氏)성을 사성받게 되었는데 이는 흉노인들이 금으로 사람 형상을 만들어놓고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김씨 성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이로써 김일제는 세계 최초의 김씨가 된 것이다.
한무제가 김일제를 신임한 것은 아주 각별한 것이었다. 한번은 한무제가 자객에게 암살당하려는 순간에 김일제가 몸을 날려 한무제의 목숨을 구한 뒤로는 김일제가 무제의 최측근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한무제가 죽을 때 김일제, 곽광, 상관걸, 상홍양 네 사람에게 후사를 부탁한 것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일제가 죽기 직전에는 한무제의 유언에 따라 투정후(秺亭候) 즉 투후라는 제후에 봉해졌는데 이 벼슬은 본인이 사망하면 자손에게 계속 전해질 수 있는 특별한 제후 벼슬로 일제가 죽은 후 5대까지 계승되었다. 특별하게 투후라는 별칭을 붙인 이유는 김일제의 부왕 휴저왕의 영지가 황하 상류에 있는 하투(河套)지역이었기 때문이었다.
한선제 때 세도가 곽광의 자손들이 반역죄로 몰락한 다음에는 김일제 일가는 한나라 제일의 세도가문이 되었다. 김일제의 증손 김당(金當)때는 그의 이모부 왕망(王莽)의 고모 왕정군(王政君)이 한원제(BC 48 – BC 33) 황후, 효원황후(孝元皇后)가 되고 왕망이 전권을 잡으면서 김씨들의 세력도 끝없이 부상하게 되었다. 김일제 일가로 제후가 된 사람만 80명이 넘었다고 한다.
김씨가의 번성은 왕망이 한나라를 뒤엎고 신(新, AD 8 – AD 23) 나라를 세우면서 절정에 달하지만 신나라가 20년도 지탱 못 하고 후한(後漢) 광무제에게 멸망당하자 김씨가의 영화도 종언을 고하게 되었다. 광무제는 한나라를 멸망시킨 왕망의 배후세력인 김씨들에게 보복의 칼날을 들이댔다.
김씨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광무제의 칼끝을 피해 도피하는 것이었다. 당시 김씨들의 행적을 밝혀주는 기록이 발견됐다. 서기 864년 향년 32세로 당나라에서 사망한 신라 김씨 부인의 묘명에 그 내용이 적혀있었다. 김씨 부인은 재당 신라인 김충의의 손녀이자 김공량의 딸이었다. 그녀의 묘명에 김씨들이 요동으로 피신해서 살게 되었고 그들 김씨가 자신의 조상이라는 글을 올려놓았다. 즉 김일제의 후손이 요동으로 피신했고 그 후에 신라 김씨인 자신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가 발견한 “대당 김씨 부인 묘명(大唐 金氏 夫人 墓銘)”은 중국 산시성 시안시(西安市) 비림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왕망이 사망하고 딱 19년 후에 한반도 최초의 김씨 김수로왕이 김해 구지봉에서 가야의 왕으로 태어났고(AD 42), 그로부터 23년 후에는 신라 김씨의 시조 김알지가 신라의 서울 금성(金城)에서 태어났다. 중국 김씨들이 몰락하자마자 절묘하게 타이밍을 맞춰 한반도에 새로운 김씨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결코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오늘날 만주의 요서, 요동, 한반도 서북지방, 전라남도 해안 및 김해, 제주도, 그리고 바다 건너 규슈, 오키나와에 이르기까지 왕망 때 딱 10년만 통용되었던 화천(貨泉)과 한무제 이후로 중국의 공식화폐였던 오수전(五銖錢)이 한반도 서쪽 해안을 따라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김일제 후손들이 목숨을 건지기 위해 탈출하면서 도피경로에 남긴 흔적이 아니겠는가? 왕망은 황제로 즉위하자 종래부터 오수전이 통용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화천이라는 새 동전을 만들어 유통시켰다. 예전에도 새로 나라를 세우면 구세력을 제거하기 위하여 화폐 개혁을 하는 것이 기본 순서였다. 왕망의 경우는 새로 나온 화천에 대한 백성들의 거부감이 너무 거세어서 민란이 줄을 이었다. 결국 10년만에 화천 주조를 중지시키게 되었다.
왕망을 무찌르고 후한(後漢)을 건국한 광무제는 응당 왕망이 만든 화천이 유통되는 것을 중지시킬 줄 알았는데 오히려 화천을 좋아해서 계속 사용하도록 하였다.
그 이유는 화천(貨泉)의 천(泉)자를 풀이하면 백수(白水)가 되는데 백수는 바로 광무제 출신지명이었기 때문이었다. 김일제 후손들이 중국을 탈출하는데 화천(왕망전)을 사용할 수 있도록 광무제가 도와준 셈이다.
김해 회현리 패총은 삼한시대부터 금관가야 멸망까지 오랜 기간 동안에 형성된 조개무덤이다. 동쪽 구름에는 예전 가야의 궁성터로 짐작되는 봉황대 유적이 있는데 이곳에서 많은 집터가 확인되었다.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이 조개껍질을 비롯한 생활 쓰레기를 버린 것이 회현리 패총이 됐을 것이다. 이곳에서 화천(왕망전)이 출토되었다. 왕망전을 사용했던 사람이 김해에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가야 건국 신화가 시작된 구지봉과 봉황대 유적지 사이에는 대성동 고분군이 있다. 왕의 위세품이 많이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가야 왕과 왕족들의 무덤군으로 추정된다. 대성동 29호, 47호분에서 흉노 리더의 상징물인 동복이 출토됐다. 김해 양동리 235 호분에서도 또 다른 동복이 출토됐다.
동복은 흉노인들이 말등에 싣고 다니는 취사도구이며 제사 지낼 때는 제물을 담는 제사 도구로도 쓰인다. 흉노뿐 아니라 스키타이인들이 수장의 상징물로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다. 이들이 지도자의 권력을 다음 세대에 물려줄 때는 동복을 물려준다고 한다.
김해에서 동북이 세 개나 출토된 것은 흉노의 수장에 필적하는 사람이 김해에 있었다는 의미가 되고, 대성동 왕족묘지에서 발굴된 것은 가야 왕족이 흉노의 수장이거나 수장들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1) 알지(閼氏): 흉노말로 ‘알’은 금(金)이나 왕(王)을 의미한다.
그들은 왕의 부인을 알씨(閼氏)라고 불렀다. 흉노족은 말은 있었지만 문자가 없어서 표기는 한자로 했었다. 알씨의 ‘씨’를 한자로 표기하고 발음하면 ‘씨’가 아니고 ‘지’로 발음하기 때문에 알지가 된 것이다. 알지는 왕비를 뜻하는 보통명사지 고유명사가 아니다. 알씨가 한반도에 들어와서는 ‘아씨’가 되었고 경상도에서는 ‘아지’로 되었다가 ‘아지매’가 되었다. 일본 천황가에서 일년에 한번 지내는 시상제 때 한반도로부터 한신(韓神)을 초혼하는데 한신의 이름을 ‘아지매’라고 부른다. 축문의 맨끝부분은 일본 사람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한국 사람은 금방 이해할 수 있는 말이다. ‘아지매 오소 오소 어서 어서 ∙∙∙’.
역사추적 – 문무왕 비문의 비밀 1부, 신라 김씨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역사추적 – 문무왕 비문의 비밀 2부_왜 흉노의 후예라고 밝혔나?
家族 歌词 일제 후손 가족, 종가 가사
역사스페셜 – 최초 발굴, 신라 대왕암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위키백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은
중국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 부인의 묘지명이다.
신라 김씨의 조상이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에서 시작하여
투후 김일제(金日磾)를 거쳐 신라 김씨로 이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묘지명은 1954년 중국 산시성(섬서성, 陝西省) 시안시(西安市) 교외에서 출토되어
현재 시안시 비림(碑林)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전서체로 3행에 걸쳐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이라고 새긴 덮개돌(43.5×44cm)과
23행에 최대 27자씩, 총 593자의 예서체 명문이 기록된 지석(46.5×45.5cm)이 함께 발견되었다.
묘지명의 내용
묘지명에는 함통 5년(서기 864년) 5월 29일 향년 32세로 사망한 김씨 부인에 관한 자세한 사항,
즉 김씨의 유래와 김씨 부인의 선조, 부인의 품행과 생활상, 죽음과 후사 등이 기록되어 있이 새겨져 있다.
김씨 부인은 재당 신라인 김충의(金忠義)의 손녀이자 김공량(金公亮)의 딸이다.
특히 묘지명에서 주목을 끄는 부분은 김씨의 시조에 대한 서술로서,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평가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은 신라 김씨의 뿌리를 중국 전설에 나오는 소호금천씨에서 시작하여 흉노족 출신의 한나라 투후 김일제에서 찾고 있는 대표적 금석문이다. 김씨의 뿌리를 중국 삼황오제의 하나인 소호금천씨라고 한 것은 김유신 비문의 내용과 일치하며, 또한 김씨의 조상을 투후 김일제라고 한 것은 신라 문무왕 비문의 내용과 일치한다. 하지만 이 비문의 내용이 실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비판이 존재한다.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는 이 묘비명에 대해서 "당으로 이주한 후에도 오래도록 자신의 시조의식을 그대로 유지하던 재당 신라인의 사고체계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권덕영 교수는 이런 신라 김씨의 뿌리 의식은 관념상일 뿐 실제 김일제에게서 비롯됐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평가했다.
김성회는 김씨의 뿌리에는 네 가지 설이 있는데, 이 중 중국 삼황오제의 하나인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는 설과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기록에 나오는대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설은 과학적으로 볼 때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평가했다. 나머지 두 설 가운데 대당고김씨부인묘명과 신라 문무왕 비문에 기록된 바와 같이 흉노족 출신의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라는 설은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시 역사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고 평가했다. 김성회는 신라 초기 왕들이 성을 사용하지 않다가 신라 중기 이후에 김씨 성을 사용한 것으로 볼 때, 왕권이 확립된 신라 진흥왕 이후에 비로소 김씨 성을 사용한 것으로 보는 설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대당고김씨부인묘명의 기록은 당시 신라인들의 조상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될 수는 있으나, 그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고 평가하고 있다.
金日磾(김일제)의 秺國(투국) 그리고 金城이 보인다.
김씨(金氏)는 연제씨(攣鞮氏)에서 나왔다.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와 한무제이야기
문무왕 비문의 투후 의미와 신라와 가야 김씨의 근원
문화재청 자유게시판
지난 2008년 11월 방영된 KBS 1TV ‘역사 추적’에서 신라 문무왕릉비 비편에 새겨진 9자(字)를 근거로 신라 김씨 왕의 조상이 흉노족인 김일제(金日磾)이며, 더 나아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 역시 망명한 김일제의 후손이 세운 것이라는 취지의 내용이 방송되면서 학계의 쟁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였고, 아버지는 무열왕인 김춘추이며,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다. 그러므로 문무왕은 순수한 신라 김씨가 아니라 수로왕의 혈통이 섞인 왕이다.
문무왕(文武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법민(法敏)으로, 태종 무열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로, 소판 서현(舒玄)의 막내딸이며 유신(庾信)의 여동생이다. 언니가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가 앉고는 오줌을 누어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진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을 말하니, 동생은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고서 꿈 값을 치렀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春秋公)과 축구를 하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은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꿰맵시다.”라 청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보희(寶姬)를 불러서 바늘과 실을 가지고 꿰매게 하였다. 언니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그 앞에서 꿰매어 주었다. 옅은 화장과 가벼운 옷차림을 하였는데, 빛이 곱게 사람을 비추는 모습이었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이에 혼인하자고 요청하고는 예식을 치렀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법민(法敏)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문무왕은 즉위한 원년에 수로왕의 제사를 신라 종묘에 합하여 제사가 끊이지 않도록 하였다.
신라 제30대 문무왕은 용삭(龍朔) 원년 신유(辛酉 661)년 3월에 다음과 같이 제정하였다.
“짐은 가야국 시조의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신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 세종(世宗)의 아들인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현(舒玄) 잡간(迊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수로왕은 짐에게 15대 시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멸망했으나 무덤과 사당은 지금도 남아 있으니 종묘에 합하여 제사를 계속하게 하겠다.”
新羅第三十王法敏 龍朔元年 辛酉三月日 有制曰 朕是伽耶國元君 九代孫仇衝王 降于當國也 所率來子世宗之子 率友公之子 庻云匝干之女 文明皇后寔生我者 兹故元君於幼冲人 乃爲十五代始祖也 所御國者已曽敗 所葬廟者今尚存 合于宗祧續乃祀事.
『삼국유사』가락국기
국사(國史)에는 신라 김씨 왕의 근원과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근원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신라의 박씨, 석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금궤(金樻)에 들어가 하늘에서 내려왔다거나 혹은 금수레를 탔다고도 한다. 이는 너무 괴이해서 믿을 수 없으나, 세속에서는 서로 전하며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新羅朴氏·昔氏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樻而降 或云乗金車 此尤詭怪 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삼국사기』신라본기 경순왕
신라인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少昊金天氏)의 후예이므로 성을 김(金)으로 한다.’고 하였고 김유신의 비문에 또한 ‘헌원(軒轅)의 후예요, 소호(少昊)의 자손이다.’라고 하였으니, 곧 남가야(南加耶)의 시조 김수로왕은 신라와 더불어 같은 성씨이다.
羅人自謂少昊金天氏之後 故姓金 庾信碑亦云 “軒轅之裔 少昊之胤.” 則南加耶始祖首露 與新羅同姓也.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
신라 고사(古事)에는 “하늘에서 황금궤짝이 내려왔으므로 성을 김씨(金氏)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 지 오래되니 부득이하게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 〔신라 국자박사(國子博士) 설인선(薛因宣)이 지은 김유신의 비문과 박거물(朴居勿)이 지었고 요극일(姚克一)이 쓴 삼랑사비문(三郞寺碑文)에 보인다.〕 고구려는 또한 고양씨(高陽氏)의 먼 후손이라 하여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진서(晉書)』의 기록에 보인다.〕
옛 역사서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扶餘)에서 나왔다’고 한다.
新羅古事云 天降金樻 故姓金氏 其言可恠 而不可信 臣修史以其傳之舊 不得刪落其辭 然而又聞 新羅人 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見新羅國子愽士 薛因宣撰 金庾信碑 及朴居勿撰 姚克一書 三郎寺碑文〕髙句麗亦 以髙辛(陽)氏之後 姓髙氏〔見晉書載記〕古史曰 百濟與髙句麗, 同出扶餘.
『삼국사기』백제본기 의자왕
광개토왕 17년(407) 봄 3월에 사신을 북연(北燕)에 보내 종족(宗族)으로서 예를 베푸니, 북연왕 운(雲)이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하였다. 운의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간 무리로, 스스로 “고양씨(高陽氏)의 먼 후손이기 때문에 고(高)로써 성씨를 삼았다.”고 하였다.
모용보(慕容寶)가 태자가 되자 운(雲)이 무예로써 동궁을 시위하였는데, 모용보가 그를 아들로 삼고 모용(慕容)씨의 성을 내렸다.
十七年 春三月 遣使北燕 且叙宗族 北燕王雲 遣侍御史李拔 報之 雲祖父髙和 句麗之支 自云 髙陽氏之苖裔 故以髙爲氏焉 慕容寳之爲太子 雲以武藝侍東宮 寳子之 賜姓慕容氏
『삼국사기』고구려본기 광개토왕
중국 정사인 『진서』 지리지(地理志)에 소호와 전욱의 도읍지는 궁상(窮桑)이라고 하였으며, 『제왕세기』에서는 황제(黃帝) 소호 전욱의 도읍지는 궁상(窮桑)이라고 하였다.
소호(少昊)는 처음 궁상(窮桑)에 도읍했다가 곡부(曲阜)로 천도했다.
전욱(顓頊)도 처음 궁상(窮桑)에 도읍했다가 상구(商丘)로 옮겼다.
少昊始自窮桑 而遷都曲阜 顓頊始自窮桑 而徙邑商丘
『진서(晉書)』 지리지(地理志) 제4
황제(黃帝)는 궁상(窮桑)에서 제위에 등극하여 [천자로 추대된] 후에 곡부(曲阜)로 옮겼다. 소호는 궁상(窮桑)에 도읍하고 제위에 등극하여 후에 곡부(曲阜)로 옮겼다.
전욱(顓頊)은 처음 궁상(窮桑)에 도읍하고 후에 상구(商丘)로 옮겼다.
黃帝自窮桑登帝位 後徙曲阜 少昊氏自窮桑登位 後徙曲阜 顓頊始都窮桑 徙商邱
『제왕세기(帝王世紀)』
이와 같이 황제 소호 전욱으로 이어지는 세 제왕의 도읍지가 모두 궁상이라고 하였다.
궁상(窮桑)이란, 해 뜨는 곳에 열 개의 태양이 대기하는 신목(神木)이다.
이 뽕나무를 부상(扶桑) 공상(空桑) 부상(榑桑)이라고도 하며 해 뜨는 구역의 지명으로 사용된다. 이곳을『상서(尙書)』요전(堯典)에서는 우이(嵎夷) 또는 양곡(暘谷)이라고 하였으며, 바로 이곳이 단군조선의 도읍지 아사달이며 신라도읍지와 같은 곳이다.
요순시대에 간행된『산해경』에는 소호의 도읍지인 해 뜨는 양곡(暘谷, 동방)에 관해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동해의 밖에 대학(大壑, 삼신산)이 있는데 [『시함신무(詩含神霧)』에, ‘동방의 바닥이 없는 구렁에 흘러든다.’는 것은 이 대학이다. 『초사(楚辭)』원유(遠遊)에, ‘아래로 대학(大壑)을 내려다본다.’ 하였다.] 소호(少昊)의 도읍지이다. [소호 금천씨는 제왕 지(摯)의 호이다.] 소호가 전욱(顓頊)을 이곳에서 양육하고 그때의 거문고와 비파(琵琶)를 남겨두었다. [그 대학(大壑)에 거문고와 비파가 있다는 말이다.]
감산(甘山)이라는 곳이 있어 감수(甘水)가 여기에서 나와 감연(甘淵)을 이룬다. [물이 모여 감연을 이룬다.]
東海之外大壑[詩含神霧曰 東注無底之谷 謂此壑也 離騷(楚辭遠遊)曰 降望大壑] 少昊之國[少昊金天氏 帝摯之號也] 少昊孺帝顓頊于此 棄其琴瑟[言其壑中有琴瑟也] 有甘山者 甘水出焉 生甘淵[水積則成淵也] - 『산해경(山海經)』제14 대황동경(大荒東經)
동남해의 밖 감수(甘水) 사이에 희화국(羲和國)이 있다.
희화(羲和)라는 여자가 있어 이제 막 감연(甘淵)에서 해를 목욕시키려 하고 있다. [희화(羲和)는 대체로 천지가 처음 생겼을 때에 일월을 주관하는 여신이다. 그러므로 『귀장계서(歸藏啓筮)』에 ‘공상(空桑)이 푸르고 팔방이 이미 열려 이에 희화가 있어 일월의 출입을 주관하는 일을 직책으로 하여 이로써 밤과 낮이 되었다.’ 또 ‘저 위로 하늘을 보면 한 번 밝아지면 한 번 어두워지는데, 희화의 아들인 태양이 있어 양곡(暘谷)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요(堯)는 이로 인하여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의 관직을 설립하고 사계절을 관장시켰다. 그 후 세대(後世, 단군)에 마침내 이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일월의 모형을 만들어 관장하며, 감수(甘水)에서 목욕도 시키고 운전하며 해가 양곡(暘谷)에서 떠서 우연(虞淵)으로 지는 것을 본떴으니, 이른바 세상에서 잃지 않는 관직이 되었다.]
희화(羲和)는 제준(帝俊)의 아내로 열 개의 해를 낳았다. [열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각각 해에 이름이 있어 열 개의 해를 낳았다고 하는 것이다.]
東南海之外 甘水之閒 有羲和國 有女子 名曰羲和 方日欲于甘淵 [羲和蓋天地始生 主日月者也 故啓筮曰 空桑之蒼蒼 八極之旣張 乃有夫羲和 是主日月 職出入爲晦明 又曰 瞻彼上天 一明一晦 有夫羲和之子 出于暘谷 故堯因此而羲和之官 以主四時 其後世遂爲此國 作日月之象而掌之 沐浴運轉之於甘水中 以效其出入暘谷虞淵也 所謂世不失職耳]羲和者帝俊之妻 生十日.[言生十子 各以日名名之 言生十日] -『산해경』제15 대황남경(大荒南經)
* 괄호 안은 곽박(郭璞)의 주(注)
대황동경은 소호와 전욱의 도읍지가 우주에서 해가 처음 떠오르는 양곡(暘谷)이라는 내용이고, 대황남경의 곽박(郭璞)의 주(注)는 단군이 양곡(暘谷)에 도읍하고 건국하였던 사실을 밝힌 것이다. 단군의 도읍지인 해 뜨는 양곡(暘谷)의 지명을 조선(朝鮮) 우이(嵎夷) 아사달 동이(東夷) 동방 등으로 부른다.
따라서 헌원 소호 전욱 제곡 단군 기자 신라로 이어지는 역대 왕조의 도읍지는 모두 같은 곳이며 단군이 평양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하여 조선의 국조라고 하는 설은 이조시대 사대주의 정책으로 날조된 것이다.
신라 김씨의 시조는 계림(鷄林)에서 출현하였던 김알지가 되고, 가락국의 시조는 김수로왕이다. 그런데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다’ 고 하였다.
중국의 대표적인 정사인 『사기』삼황본기에 한자와 주역을 창제한 태호 복희씨는 동방에서 출생하고 즉위하여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가 되었다고 하였다.
동방이란 우주에서 해가 처음 떠오르는 구역의 지명으로 궁상(窮桑)과 같은 곳이다.
소호 금천씨는 황제(黃帝) 헌원의 아들로 제위에 올라 천하를 다스렸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인 고주몽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역시 ‘고구려는 또한 전욱(顓頊) 고양씨의 먼 후손이라 하여 고씨(高氏)로 성을 삼았다’고 하였다.
전욱 고양씨는 황제 헌원의 손자로 소호의 뒤를 이어 천하를 다스린 제왕이다.
원문에 고신씨(高辛氏)로 되어 있으나 같은 내용이 고구려본기에 ‘스스로 말하기를 고양씨(高陽氏)의 먼 후손이기 때문에 고(高)로써 성씨를 삼았다.’ 고 하였으므로 高辛은 高陽의 오기(誤記)임이 분명하다.
제곡(帝嚳) 고신씨 역시 황제 헌원씨의 증손자로 처음 신(辛) 땅에 봉함을 받았기 때문에 고신씨(高辛氏)라고 하며 전욱에 이어 제위에 올랐다.
복희 신농 황제를 삼황(三皇)이라 하고, 소호 전욱 제곡 요(堯) 순(舜)을 오제(五帝)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김알지와 수로왕이 소호의 후손이고 고주몽이 전욱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니 삼국의 시조가 모두 상고시대 천하를 다스린 삼황오제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이제 문무왕 비편에 쟁점이 되고 있는 구절을 보기로 하자.
우리 신라 임금의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 염제 신농씨의 창성한 터전을 계승하여 궁전을 높이 세워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 말미암아 [백제와 고구려를] 이기고 [계림의] 나뭇가지의 [금 궤짝에] 실려 영이(英異)하게 탄생하시었다. 투후(秺侯) [김일제]는 제천(祭天)의 후손으로 7대를 전하여 [한나라 조정에서 보좌하였다.]
15대 선조 성한왕(星漢王, 수로왕)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김알지는] 신령한 삼신산(仙岳)에서 탄생하여 비로소 조정에 임하여, 옥난간(玉欄)을 대하니, 처음 계림에서 상서를 드리움이 마치 [우왕(禹王)이] 석뉴산(石紐山)에서 금 가마에 앉은 모습을 보는 것과 같았다.
我新羅〇君靈源 自夐繼昌基 於火官之后 峻構方隆 由是克〇〇 枝載生英異 秺侯祭天之胤 傳七葉 以〇〇焉. 十五代祖星漢王 降質圓穹 誕靈仙岳 肇臨〇〇, 以對玉欄 始蔭祥林 如觀石紐 坐金輿而.
「신라 문무왕릉비」
* 화관지후火官之后: 삼황 중에 염제 신농씨를 말한다. “화덕(火德)의 왕이다. 그러므로 염제(炎帝)는 화(火)로써 관직 이름을 삼았다고 한다. [火德王 故曰炎帝 以火名官]” 『사기(史記)』삼황본기. 신라도읍지는 삼황 중에 염제 신농의 도읍지와 같은 곳이라는 말이다.
*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를 말한다. 한 무제의 유명에 따라 소제(昭帝)는 김일제를 투후로 봉하였다.
* 제천지윤(祭天之胤): 한서 김일제 전기에 “본래 휴도왕(休屠王)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한 까닭으로 김씨(金氏)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本以休屠作金人 為祭天主 故因賜姓金氏云)” 라고 하였는데, 김일제는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기 때문에 무제가 김씨 성을 하사했다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흑치준 묘지명(黑齒俊 墓誌銘)’에도 나오는데, “투후에 봉해진 흉노의 외로운〔김일제처럼〕동이(東夷)의 자손으로서, 같은 영광을 구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秺侯入仕 西戎孤〇 東夷之子 求如不及)” 고 하였다. 백제의 유민으로 당나라에 귀화한 흑치상지의 아들 흑치 준이 동이의 자손으로 김일제를 본받고자 하였으나 미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제천의 후손은 동이의 자손이라는 구절과 같은 뜻으로 쓰인 것이다.
제천(祭天)의 본래 의미는 소도(蘇塗) 제천의 제사장인 단군(壇君)을 뜻하는 것으로 휴도왕이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후손이라는 말이다.
* 전칠엽傳七葉: 한서 김일제 전기에 “충효로 세상에 명성을 떨치고 7대에 걸쳐 궁중에서 보필하였으니, 어찌 그렇게 번성하였는가.(世名忠孝 七世內侍 何其盛也)” 하였다. 이 말은 김일제의 자손이 7대에 걸쳐 투후를 계승했다는 것이 아니라, 무제가 죽음에 이르러 유명(遺命)으로 일제를 투후로 봉하라는 명에 따라 무제 이후로 한 왕실의 7대 제왕을 일제의 자손들이 계승하여 보필하였다는 뜻이다.
* 15대조 성한왕十五代祖 星漢王: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비편에도 太祖漢王이라는 구절이 있고, 흥덕왕 비편에도 太祖星漢이라는 구절이 있다. 太祖는 나라를 건국 시조를 뜻하는 것으로, 문무왕의 15대 선조 성한왕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수로왕은 짐에게 15대 시조가 된다.”고 하였듯이 성한왕은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을 가리킨다.
* 선악仙岳: 선인(仙人)들이 산다는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키는 것으로 김알지가 출현한 계림이 삼신산에 있다는 말이다. 수로왕의 탄생은 삼신산과 관련이 없기 때문에 비문에 ‘十五代祖星漢王 降質圓穹 誕靈仙岳 肇臨’ 이라는 구절은 수로왕과 김알지의 탄생을 함께 밝히고 있는 것이다.
쟁점이 되고 있는 “투후(秺侯)는 제천(祭天)의 후손으로 7대를 전하여(秺侯祭天之胤 傳七葉)”라는 구절에, 투후는 김일제를 가리키는 것이지만, 이어서 수로왕과 김알지 탄생에 관하여 밝히고 있기 때문에 김일제가 수로왕과 김알지의 조상이라는 내용이 아니라, 오히려 휴도왕이나 김일제가 소도제천의 제사장인 단군의 후손이라는 말이다.
김일제(金日磾)는 본래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이다.
한 무제 원수(元狩) 2년(B.C. 121)에 곽거병(霍去病)을 보내 흉노를 정벌할 때에 흉노의 곤야왕(昆邪王)은 휴도왕을 죽이고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여 김일제 역시 이때 포로로 잡혀와 한(漢)의 궁중에 매인 말을 돌보는 노예였다. 그러나 일제는 임금을 독실하게 공경하고 깨닫게 하여, 충성스러움과 믿음이 저절로 드러나 공적에 의해 상장(上將)이 되어 측근에서 보필하다가 때마침 무제를 시해하려는 사건이 있었는데, 일제는 이를 눈치 채고 격투 끝에 범인 망하라(莽何羅)를 붙잡아 그 공로로 무제는 투후(秺侯)에 봉하라는 유조(遺詔)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이듬해 일제 역시 병을 얻어 유조에 따라 병상에 누운 채로 소제(昭帝)로부터 투후의 인수(印綬)를 받고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
이리하여 자손은 대대로 충효로 이름나고 한나라 조정에서 7대 왕에 걸쳐 보필하다가 마침내는 후손이 왕망(王莽)의 반란에 가담하였다가 가문이 몰락하였다. 무제는 일제가 금인(金人)을 만들어 제천(祭天)을 주재한 휴도왕의 태자이므로 김씨(金氏)의 성을 주었다고 한다. 곽거병이 흉노를 정벌하고 돌아올 때, 전리품으로 휴도왕이 제천(祭天)할 때 예배하던 금인(金人, 청동불상)을 가져왔는데 모두 12구였다. 무제는 大神이라고 하여 감천(甘泉)의 건장궁(建章宮)에 열 지어 모시고 향을 사르며 예배하였으니 이것이 중국에 불교가 유통된 시초이다.
또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 비문에, “옛날 동방에 삼국이 대치하던 말기에 백제에 소도(蘇塗) 의식이 있었으니 한 무제가 감천(甘泉)의 궁전에서 금인(金人)을 제사하던 것과 같은 것이다.(昔當東表鼎峙之秋 有百濟蘇塗之儀 若甘泉金人祀)” 라고 하였다.
한 무제가 감천에 지은 건장궁은 남원 광한루와 같이 멀리서 물을 끌어들여 연못을 만들고 물 가운데 삼신산을 상징하는 봉래 방장 영주의 세 섬을 축조하였는데, 금인은 바로 이곳에 모셔진 것이다. 백제 무왕 역시 궁궐 남쪽에 연못을 만들고 삼신산을 조영하였다. 이것이 상고시대부터 내려오던 원시불교인 소도의 사원이요, 우주관이라는 말이다.
다시 김씨부인 묘지명을 보기로 하자.
‘대당 고 김씨부인 묘지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은 김일제의 후손인 김씨부인 묘비로 서기 780년에 세워진 것을 1954년 중국 산시성(陝西省) 시안시(西安市) 동쪽 교외 곽가탄(郭家灘)에서 출토되었다.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종족(宗族)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호를 소호씨 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은 세조(世祖)이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 천하에 만연하니 또한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磾)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秺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역사책에 기록되었다. 이보다 훌륭한 사람이 없었으니 반드시 후 세대에는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나라가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이역(異域)의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太上天子 有國泰宗陽 號少昊氏金天 卽吾宗受氏世祖 厥後 派疏枝分 有昌有徽 蔓衍四天下 亦已多已衆遠祖諱日磾 自龍庭 歸命西漢 仕武帝 愼名節陟 拜侍中常侍 封秺亭侯 自秺亭已降七葉 軒紱燉煌繇是望係京兆郡 史籍敍載 莫之與京 必世後仁 徵驗斯在 及漢不見德 亂離瘼矣 握粟去國 避時屆遠 故吾宗 違異於遼東 「대당 고 김씨부인 묘지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
김씨부인은 김일제의 후손이고, 김일제는 휴도왕의 태자이며, 휴도왕은 본래 소호 금천씨의 먼 후손이었다.
이것은 마치 고구려 광개토왕 때에 북연(北燕)을 건국한 모용운(慕容雲)의 본래 이름이 고운(高雲)이고 전욱 고양씨의 먼 후손이므로 고구려 왕족과 같은 성씨라는 말과 같이, 김일제 역시 그의 선조가 동이족에서 갈라져 나간 신라 김씨와 같은 혈통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일제의 후손이 신라나 가락국의 왕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투후 김일제를 제천의 후예(祭天之胤)라고 한 것은, 단군(壇君, 제사장)이 본래 요임금이 제정한 희중(羲仲)의 관직에 해당하며, 해 뜨는 우이(嵎夷, 아사달)에서 건국하여 동방을 다스리며, 소도(蘇塗) 제천을 주재하기 때문에 휴도왕은 소호의 후손이고, 고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동이족 혈통으로 모국이 고조선이라는 말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흑치준 묘지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야흐로 기주(冀州)의 북쪽〔휴도왕의 태자가〕7대에 걸쳐 경사를 끼친 서한(西漢)의 〔김일제와 같은〕영광을 누리고자 하였으나, 어찌 병마(病魔)에 걸려 …
투후(秺侯)에 봉해진 서융(西戎, 흉노)의 고아(孤兒)〔김일제처럼〕 동이(東夷)의 자손으로서, 같은 영광을 구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方冀七葉貽慶 以享西漢之榮 豈啚二豎 ……秺侯入仕 西戎孤〇 東夷之子求如不及
「흑치준 묘지명(黑齒俊 墓誌銘)」
흑치 준(黑齒俊)은 백제가 멸망하자 부흥운동을 펼치다 당나라에 귀화한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아들로 당나라에서 부친의 뒤를 이어 무공(武功)으로 빛나는 명성을 떨치다 뜻하지 않은 질병에 걸려 서기 706년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비석은 이 해에 세워진 것이다.
투후 김일제가 동이족의 자손으로서 한나라 조정에서 7대에 걸쳐 보좌하였듯이, 흑치 준도 역시 백제의 유민이기 때문에 김일제를 본받아 당나라 조정에서 같은 영광을 누리고자 하였으나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흑치준의 묘지명에서 김일제가 동이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기 때문에, 신라 김씨가 김일제의 후손이며 그의 몰락한 후손이 한반도에 들어와 신라왕이 되고 가락국을 건국했다는 등의 주장은 실로 엉터리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주역(周易)』에 이런 말이 있다.
제왕은 진(震)에서 나오고 만물이 震에서 나오니, 震은 東方이다.
〔帝出乎震 萬物出乎震 震東方也〕
『주역(周易)』 설괘전(設卦傳) 제5장
하늘로부터 오행(五行)의 덕을 부여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성스런 제왕은 모두 동방에서 나오는데, 상고시대 천하를 다스리던 삼황오제인 복희 신농 황제 소호 전욱 등이 모두 동방에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자와 주역을 창제한 태호 복희씨는 동방에서 탄생하였고, 고주몽은 전욱 고양씨의 후손이며, 수로왕과 김알지가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학계에서 문무왕 비편에 새겨진 몇 글자도 제대로 해독을 못하면서 오히려 신라와 가야 김씨의 시조가 김일제의 후손 운운하며 기존의 역사서와 금석문을 모조리 부인하려는 행태는 이들이 식민사관의 잔재라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소호 금천씨(少昊金天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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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호 금천씨(少昊金天氏)는 중국 고대의 신화상에 등장하는 전설적 군주인
삼황오제 중 오제(五帝)의 한 명이다.
●[산해경]의 기록
*《산해경山海经》은 중국의 가장 오래된 기록서이다
《山海经》:少昊属金,在西方。他的母亲是天山的仙女皇娥。
<산해경>: "소호의 금(쇠)무리는, 서쪽 방면에 있다...
●[춘추]의 기록
*《춘추春秋》는 공자가 노나라 사관이 저작한 역사서에 자신의 글을 적어서 다시 편찬한 노나라의 역사서이다
《春秋》 少昊,己姓,一说嬴姓,名挚,号金天氏,又称“朱帝”、“白帝”、“西皇”、“穷桑氏”、“空桑氏”,在位84年,寿百岁崩,其后代郯子国尊为高祖...
"소호는 성이 '기', 일설에는 '영'이고, 이름은 '지'이며, 호는 '금천씨'이다. 또한 '주제' '백제' '서황' '궁상씨' '공상씨'로도 칭해진다. 84년 재위, 100세 나이에 죽다.
그 후를 이은 담의 남자가 나라의 높은 국조로 공경하며 다스리다..."
*[춘추]에는 郯國담국에 대한 기록이 있다
'少昊之国' 소호의 나라에 대한 [산해경] 기록
《山海经·大荒东经》:“东海之外大壑,少昊之国"
<산해경: 대황동경> "동쪽(오른쪽)바다 밖의 큰 산골짜기에 소호의 나라가 있다"
소호는 청양씨(青陽氏), 금천씨(金天氏), 궁상씨(窮桑氏), 운양씨(雲陽氏), 주선(朱宣)으로도 불린다. 전설에서 성은 기(己), 이름은 철(摰) 또는 질(質)이었으며 황제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궁상에서 태어나 동이의 수령이었다고도 전해진다. 본래 민간 설화에는 황제의 사위이거나, 황제가 복속한 부족의 수장으로 구전되었다. 소호(少昊)는 오제에 관한 전설과 기록에 따라 오제에 포함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한다. 전설에서는 소호가 즉위했을때 봉황이 날아왔다고 전해진다.
● 소호금천씨의 김씨조상설
소호금천씨는 중국과 한국의 김씨들의 조상으로 많이 언급된다. 특히 한국의 성씨인 경주 김씨와 김해 김씨는 소호금천씨를 시조로 언급한 기록이 전하기도 한다. 당나라에 살았던 신라인 김씨 부인의 행적을 기록한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는 신라 김씨의 조상이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고 새겨져 있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에는 가야 출신인 김유신 장군의 묘비명에 가야 김씨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고 새겨져 있다는 기록이 있다. 소호금천을 국조로 삼는 나라가 담국이였으며 새들로 관직명을 정했다.<춘추좌씨전>
.중국의 신화 - 소호 금천(少昊 金天, Shaohao-Jintian)
다시 서쪽으로 이백 팔십리를 가면
장류산(長留山)으로
백제(白帝) 소호(少昊)가 사는 곳이다.
소호는 고대 동이족(東夷族)의 수장으로
호가 금천씨(金天氏)다.
소호가 다스리는 부족은 그의 명령에 따라
새의 이름으로 관직명을 지으면서
공정(工正)과 농정(農正)의 관을 설치했다.
후대 담국(郯國)이 바로 소호의 후손이다.
...
산 위에 원신외씨(員神外氏)의 궁전이 있다.
외씨는 태양이 서산으로 진 뒤에
동쪽을 향해 비치는 노을을 관장하다.
- 산해경 서차삼경 -
- 소호 금천(少昊 金天, Shaohao-Jintian) -
소호(少昊)는
청양씨(青陽氏), 금천씨(金天氏),
궁상씨(窮桑氏), 운양씨(雲陽氏),
주선(朱宣)으로도 불린다.
전설에서 성은 기(己),
이름은 철(摰) 또는 질(質)이었으며
황제의 맏아들로 현효(玄囂, Xuanxiao),
설(挈)이라고도 한다.
그의 어머니 황아(皇娥)는
천상의 궁전에서 옷감 짜는 일을 하였다.
때로는 늦은 밥까지 옷감을 짜다가
뗏목을 타고 은하수로 나와
서쪽 바닷가 궁상(窮桑)나무 아래까지
내려가기도 하였다.
궁상나무는 키가 만 길이나 되는 뽕나무인데
일만 년에 한번씩 열매를 맺었다고 한다.
황아는 이 뽕나무 밑에서 노는 걸 좋아하였다.
어느날 스스로 백제(白帝)의 아들이라
칭하는 한 소년이 나타났다.
사실 그는 새벽 하늘에 빛나는
계명성(啓明星) 즉 금성(金星)이었다.
금성은
해가 뜨기 전 동쪽에 있을 때 계명(啓明)이고
해가 지고 난 후 서쪽에 있을 때는
장경(長庚)이라 부른답니다.
그들은 집에 돌아가는 것도 잊고
뽕나무 아래 번갈아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후 황아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궁상씨(窮桑氏)이며
금천씨(金天氏)라고도 한다.
금천(金天)이란 금성을 뜻하는 것 같습니다.
소호(少昊)의 출생에 관한 전설인데
황제의 아들이라는 설이 유력하답니다.
궁상씨는 장성하여
동쪽 바다 밖에 한 나라를 세웠는데
소호지국(少昊之國)이라 불렀다.
소호의 나라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새들의 나라였다.
동해 밖에 큰 협곡이 있는데
소호국(少昊國)이 이곳에 있다.
소호가 일찌기 여기서 전욱을 길렀는데
전욱이 어렸을 때 가지고 놀던
거문고를 이곳에 버렸다.
이곳에는 산이 하나 있는데
감산(甘山)이라고 한다.
감수(甘水)의 발원지이며,
감연(甘淵)이라는 큰 연못이 하나 있다.
- 산해경 대황동경 -
제비(燕子), 때까치(伯勞), 종달새(鷃雀),
금계(錦鷄)가 사계절을 관리하였고
집비둘기(鵓鴣), 수리(鷲鳥), 뻐꾸기(布穀),
매(鷹鳥), 산비둘기(鶻鳩) 등이
국정을 담당하는 대신들이었다고 한다.
백성들 또한 새들이었겠지요.
그곳에 소호의 이름은 지(鷙)라고 하였답니다.
지(鷙)는 맹금(猛禽)을 뜻합니다.
소호국은 새 이름을 관직으로 명명했고
그에 상응하는 깃털로 표시를 했다고 합니다.
한때 어린 조카 전욱(顓頊)이
소호국을 찾아와 지낸 적이 있었는데
소호는 거문고(琴)와 큰 거문고(瑟)를 만들어
그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전욱이 어른이 되어 돌아가자
쓸모없게 된 거문고들을 바다에 버렸는데
그 이후 달 밝은 밤, 바다에 파도가 없는 날이면
그윽한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소호는
그의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새의 몸에 사람의 얼굴을 한
중(重)이라는 아들을
동방천제 복희의 신하로 남겨두게 되었는데
그가 바로 목신(木神) 구망(句芒)이었다고 한다.
- 목신(木神) 구망(句芒) -
또 해(該)라는 아들을
그의 신하로 삼았는데 그가 바로
금신(金神) 욕수(蓐收)라고 합니다.
- 금신(金神) 욕수(蓐收) -
서방에 두 마리 용을 타고 다니는
욕수라는 신이 있다.
그의 왼쪽 귀에는 작은 뱀이 있다.
욕수는 금신(金神)으로 사람 얼굴에
호랑이 발톱을 하고 온 몸에 흰털이 나 있으며
손으로 대성(大鋮)을 잡고 하늘에서
형벌을 주관한다.
- 산해경 해외서경 -
서방 천제로서
소호(少昊)는 장류산(長留山)에서 살았고
금신(金神) 욕수(蓐收)는
장류산 근처 유산(游山)에 살았는데
하루의 낙일(落日)을 살피는 것이었답니다.
고대 중국의 서쪽 하늘은
참 평화로웠나 봅니다.
북방 바다 밖에 일목국(一目國)이란
나라가 있는데 한 개의 눈이
얼굴 가운데 붙어 있었다고 하는데
소호의 후손들이랍니다.
일목국은 종산(鍾山)의 동쪽에 있다.
성씨가 척(戚)이고
소호의 자손으로 서(黍)를 먹고 산다.
- 산해경 해외북경 -
키클롭스(Cyclops)가 생각나는 대목입니다.
활과 화살을 발명한 반(般),
요임금 시절 국정을 담당했던 고요(皐陶),
우임금의 치수(治水)를 도왔던 백익(伯益),
분수(汾水)의 신인 대태(臺駘),
궁기(窮奇)도
그의 후예들이라는군요.
궁기(窮奇)는 호랑이처럼 생겼지만
날개가 둘 달렸고
사람을 잡아 먹을 때 머리부터 먹으며
잡아먹힌 사람은 머리칼이 헝클어져 있다.
궁기는 도견(蜪犬)의 북쪽에 있다.
- 산해경 해내북경 -
궁기(窮奇)는 고(蠱)라는 벌레를
잡아먹는 일을 하였다고 합니다.
고(蠱)는 강한 독성을 지닌 벌레인데
도마뱀(蜥踢), 거머리(馬蝗),
쇠똥구리(蜣螂), 금잠(金蠶) 등을
함께 상자 안에 넣어두고 서로 잡아먹게 하여
마지막 남은 한 마리를 고(蠱)라 한답니다.
옛날에
납일(蠟日, 음력 십이월 팔일)이 되면
대나(大儺)라는 역귀를 쫓는 행사를 하였는데
그도 한 몫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반면 사람의 말을 알아들었으며
지나가다 사람들이 싸우면
그 말을 듣고 정직한 사람이면 잡아먹거나
코를 베어 먹고 못된 사람에게는
짐승을 잡아 선물했다는군요.
- 서차사경의 궁기(窮奇) -
다시 서쪽으로 가면 규산(邽山)이 있다.
이 산에는 궁기(窮奇)라는 짐승이 산다.
궁기는 소호의 아들로 모습은 소와 같으나
온몸에 고슴도치 털이 나 있으며
개 짖는 소리를 낸다.
또한 날개가 있어 날아다닐 수 있고
사람의 말을 알아 듣는다.
하지만 사람이 싸우는 소리를 듣기만 하면
달려가 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을
잡아먹어버린다.
또 누가 충신이란 소리를 들으면
그 사람의 코를 날름 먹어버리고
누가 악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고기를 들고 달려가 상을 주는
일종의 사악한 짐승이다.
- 산해경 서차사경 -
*
산해경에는 기이한 짐승들과 인물들이
엄청 많이 나옵니다.
틈틈이 중간 중간에 끼워 넣어 볼까 합니다.
部落群起,少昊金天氏政权危机起源
山东泰安大汶口和江苏邳县少昊族
昊金天氏政权的创立者是伏羲女娲氏政权的
第七任帝少昊传百余世的苗裔、
拥有二十五个分支的少昊集团大酋长
삼황오제중특히 황제헌원과 염제는 치켜세우고
치우천황은 묘족의 조상정도로 깎아 내리고
소호금천은 중국김씨의 조상으로 각인시키고
蚩尤政权失败,蚩尤一族消失
蚩尤政权称帝
2019년
山海经人神收录—鸟国国王天帝少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