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아줌마와 함께 하는 이북이야기
1 자기 소개
저는 2011년 6월 북에서 정식 여권을 발부받아 중국에 있는 사촌언니집에 여행을 갔다가 탈북브로커에게 속아 여권을 빼앗기고 본이아니게 그 해 9월 16일 인천공항을 통해 여기 남녘에 입국하게 됩니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국정원 버스에 실려 국정원 합심조사센터에 갇히게 되며 첫날부터 끊임없이 속아서 본이아니게 잘못오게 되었다며 애원도 하고 단식도 하면서 줄곧 가족이 있는 북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소연하지만 국정원은 독방에 가두어 놓고 저의 의사를 철저히 무시해 버립니다.
마지막에는 저에게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한 장만 써라, 그것을 쓰지 않으면 너는 죽을 때 까지 여기서 나갈수 없다. 네가 설사 여기서 죽는다 해도 네가 국정원에서 죽었다는 것을 알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명도 없을 것이다”라며 저를 강압했습니다.
저는 정말 이러다가 죽을수도 있겠구나. 내가 여기서 죽으면 우리 가족은 행방불명 된 나를 애타게 찾으며 얼마나 가슴찢는 고통속에 살아갈가 하는 생각으로 두려움과 공포심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평범한 한 아줌마입니다. 국가, 조국보다는 부모와 자식이 더 간절한 딸지식을 둔 엄마입니다. 그 서약서 수백장을 써주고라도 살아서 가족곁으로 가고 싶었습니다.그리하여 국정원에 갇힌지 3달만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겠다는 서약서를 써주고야 다음 날 하나원으로 나갈수 있었습니다.
그때 당시 또 하나의 희망은 사회에 나가 6개월만 있으면 여권이 나오게 된다는 사실이였습니다. 저는 여권이 나오면 중국을 거쳐 다시 북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하루하루 간절히 6개월간을 기다리다 드디여 시청에 여권을 신청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여권을 받을수 없다는 통보였습니다.
저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국정원에 다시 알아보니 제가 처음부터 북으로 보내달라고 했기때문에 여권을 해주면 나중에 라도 북으로 도망갈수 있어 절대로 여권을 해 줄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어 한가닥의 희망이 산산 깨지고 가족에게 돌어갈수 있는 길은 캄캄히 막혀 버렸습니다.
그리하여 합법적으로 갈수 없다면 불법으로라도 기어이 가족에게 돌아갈 일념으로 밀항을 시도 하고 위조여권도 만들어 보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끝내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살시도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차례진 것은 경찰과 검찰의 조사와 국가보안법위반 잠입 탈출죄. 간첩죄로 감옥행이였습니다.
저는 오직 혼자 암흑속에 헤메던 그 전 과정들을 되돌아보며 이 사회를 이겨나가기에는 내가 너무 부족하고 혼자 생각하고 결심하기에는 이 나라 법을 너무도 모른다는 판단을 하게 되며 그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여 민변과 한겨례. 뉴스타파의 도움으로 2015년 7월 드디여 세상에 저의 목소리를 알리게 됩니다.
국내는 물론 뉴욕타임스., UPI, 유럽 민영방송, 독일뉴스전문채널 ‘N-TV', 독일주간잡지 ’DerSpigel', 독일언론 ‘20minten' 베트남언론 ’Dantri', 싱가포르뉴스(Singapore News), 뉴스킬러(NEWSkiller), 디지털뉴스(News world), BBC. CNN. 일본교도통신. 중국신화통신. 알자지라, 등에 의해 저의 사연이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였으며 남녘의 많은 인권운동가들과 종교인들이 서울과 대구에 “김련희 송환준비모임”을 꾸리고 저의 송환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 주셨습니다.
여러차례의 기자회견과 통일부앞에서의 1인시위. 전국 각지역단체들과의 송환을 위한 간담회와 베트남대사관 진입등 온갖 방법으로 송환운동을 벌려왔습니다.
현재 청와대와 대한적십자사. 국가인권위. 통일부에 송환촉구 서한을 전달하였으며 각 지역 단체들에서 저와 12명의 송환을 촉구하는 기자회견과 간담회들을 조직하고 있습니다.
또한 저의 생활을 그린 다큐멘터리 “그림자 꽃”이 만들어지고 있으며 7월중에 저의 책 “대구에 사는 평양시민입니다”가 발표되면 출판기념회와 함께 전국을 거쳐 북콘서트를 진행할 예정이며 끊임없이 송환운동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할것입니다.
북에서는 여러차례 각 언론을 통해 김련희와 12명의 공화국처녀들을 돌려 보내지 않으면 그 어떤 남북교류도 있을수 없다며 강력하게 저희들의 송환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저와 12명의 처녀들을 남녘에 강제로 억류하고 있는 것은 철저한 국제법위반이며 반인권적이고 반인륜적 범죄행위입니다.
세계인권선언 13조 2항에 보면 ‘모든 사람들은 나라를 떠날 수 있고 고국으로 돌아갈 권리를 갖고 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가 어떤 사상과 체제를 가지고 있든 절대로 체제선전과 권력유지를 위한 정치적 이용으로 부모자식간의 철륜을 끊는 천추에도 하지 못할 이런 잔인한 짓은 결코 용납되여서는 안됩니다
이번 새정부에서는 이러한 범죄행위의 진상을 철저히 조사하고 저와 12명의 처녀들을 인도주의적 원칙에서 하루빨리 가족이 애타게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을 계기로 남북의 화해와 단합을 위한 길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오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주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2 함께 나누는 이북이야기,
우리는 한 민족, 한 형제이지만 70여 년간 오랜 세월 서로 헤여져 살아오면서 모든 분야에서 너무나 많은 차이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이질감. 거부감. 다름들이 서로 불편하지 않을 때 비로서 우리는 진정한 하나이라고 말할수 있을것이다.
흔히 사람들은 통일에 대해 너무나 쉽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북의 현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우리는 절대로 통일을 이루어낼수 없다. 남쪽사랍들이 북을 모르듯이 북쪽사람들도 남쪽을 너무나 모른다. 서로 상대를 인정하고 그를 조금씩 알아가고 이해해 가는 것이 바로 통일로 가는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는 북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가? 먼저 식의주문제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 먹는 문제.
북의 모든 시스템은 공급담당체계이다.
세대별로 공급카드가 있으며 식료품, 공업품을 비롯한 일상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공급받는다.
직장다니는 사람들은 하루 700그램. 집에서 노는 사람은 하루 300그램의 식량을 공급받게 되며 고기, 물고기, 기름, 간장. 된장. 과일, 야채등 필요한 모든 부식물들을 식구수에 따라 국가로부터 공급 받게 된다. 구역마다 시장이 있어 국가로 받는 공급외에 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시장에서 해걸하게 된다.
매 동마다 밥공장이 있어 직장에 다니는 여성들이 가정의 부엌일에서 부담을 덜수 있도록 되어 있다.
2) 입는 문제.
매 세대에 차례진 공급카드로 치약, 칫솔, 세수비누, 속옷에 이르기까지 국가로부터 철따라 옷과 옷감들을 공급받게 된다.
공급받은 옷감으로 유행이나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양복점에서 옷을 맞추어 입는다.
3) 주택 문제.
처녀, 총각들이 시집, 장가를 가게 되면 제일 먼저 자기 구역 주택배정과에 신고를 하여 국가로 부터 살림집을 배정받게 된다. 식구수에 따라 집의 크기는 달라질수 있으며 부모를 모시는 경우는 보다 크고 좋은 집을 배정받게 된다.
직장을 다니다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경우는 옮겨간 직강인근으로 다시 집을 교환해 준다.
새집으로 이사가는 겅우는 집안에 이불장, 양복장 식탁, 책상, 의자등 필요한 가구들이 갖추어져 있다.
4) 교육문제.
ㅡ소학교
북은 1972년부터 유치원 2년, 인민학교 4년, 고등중학교 6년, 대학교 5~7년의 학제를 도입하였다. 이 가운데 유치원 높은반 1년부터 고등중학교까지 11년이 의무교육이었다. 이후 2002년 인민학교를 소학교로, 고등중학교를 중학교로 개칭했다. 유치원 전에는 탁아소가 있는데 48개월까지 다니며 젖먹이반(1~6개월), 젖떼기반(7~18개월), 교양반(19~36개월), 유치원 준비반(37~48개월)이 있다. 유치원은 낮은반(1년), 높은반(1년)이 있다.
만 7살이면 소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는데 전기간 4년동안 단임선생님이 단 한번도 바뀌지 않는다 소학교 4년동안 단임선생님은 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의 싹을 찾아 발전가능한 분야의 과외소조애 망라하여 과학적으로 이끌어야 한다.
소학교에는 음악, 체육, 문학. 외국어. 서예. 미술소조들이 꾸려져 있어 학교안의 모든 학생들은 오전에는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학교내의 과외소조실에서 각자의 재능을 캐워나가게 된다.단임선생님은 소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보낼때에는 매 학생들의 재능 부분에 대한 평정서를 정확히 써서 학생들이 중학교에 가서도 계속 재능을 키워나갈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소학교부터 대학에 이르기 까지 2년에 한번씩 교복과 신발, 교과서와 학용품들이 무상으로 공급된다.
ㅡ고등중학교
소학교를 졸업하면 6년제 고등중학교에 올라갸게 되며 예전과 같은 소조에 망라되여 예체능 교육을 계속해서 배울수 있으며 전 지역의 모든 학교들에는 수영장이 갖추어져 있어 모든 학생들이 학교 수엉장에서 수영수업을 받게 된다.
고등중학교를 졸업할때면 국가 시험을 거쳐 점수가 높은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하게 되고 나머지 학생들 중에 군대입대를 희망하는 학생들은 군에 입대해 군사복무를 하게 되며 대학과 군대를 가지 못한 학생들은 자신들의 희망사항을 제시하여 국가로부터 직업을 배치빋게 된다.
ㅡ대학
2년제 기능공 학교와 4년제 전문학교, 6~7년제 대학 교육제로 되어 있다.
평양의 중앙대학의 70%는 지방학생들로 구성되여 있으며 모든 대학들에는 모든 지방생들을 수용할수 있는 기숙사와 식당, 양복점. 구두수리소. 시계수리소. 상점. 사진관. 세탁소, 등이 갖추어져 있어 대학생들이 사사로운 일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학업에 열중할수 있도록 모든 편의시설들이 꾸려져 있다.
북에서는 과학중시. 청년중시를 가장 높이 내세우고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 3년간의 자기분야에 따른 현장실습을 꼭 거쳐야 하며 그 기간에 책에서 배운 지식을 현실에서 더 깊고 생동하게 체험하게 된다.
현실체험기간이 끝나면 다시 대학에 와서 각 분야에 배치를 받게 된다.
5) 여성 문재.
모든 여성들은 산전 3개월, 산후 5개월로 총 240일의 출산휴가를 받을수 있으며 본인 거주지의 산부인과 병원에서 출산하게 된다.
출산 휴가가 끝나면 직장에 출근하여 탁아소에 아기를 맡기고 맡은 직장일을 하게 된다.
모든 공장, 기업소에는 탁아소, 유치원이 필수적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전문 보육원들이 아기들을 돌본다. 다른 사람들은 하루 8시간 로동제이지만 아기 엄마들은 하루 6시간 로돌제가 실시 되고 있으며 일하는 과정에 2시간에 한번씩, 직장 탁아소애 가서 아기와 30분동안 함께 있도록 로동법으로 규정되여 있다.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에 관계없이 자신의 본 직장에서 그대로 일하도록 되어 있으며 사회적으로 남자들과 꼭 같은 대우를 받으며 사회생활을 하게 된다.
6) 의료문제.
북에는 예방의학 구역담당의사제로 되어 있다.
매 의사들은 자신이 담당한 지역에서 환자가 많이 생기면 처벌을 받아야 하며 항시적으로 병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 담당한 주민들의 건강상태를 관찰해야 한다.
병이 생기면 담당 진료소에서 치료를 받으며 이상이 있으면 구역병원, 중앙병원으로 파송햐여 치료를 받을수 있다.
7) 고난의 행군
1990년대 중반기부터 우리 북녘에서는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시절이 시작되었다. 우선 극심한 자연재해, 홍수와 가뭄으로 식량생산이 크게 줄어들었고 계속되는 경제난으로 커다란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또한 소련 및 동유럽의 사회주의 나라들이 좌절되고 자본주의가 복귀되면서 사회주의시장이 무너졌다. 다음으로 미국과 제국주의 연합세력이 세계 가장 최악의 대북경제봉쇄정책으로 에너지와 식량을 수입할 수 없도록 악랄하게 책동하였다. 미국은 호시탐탐 우리를 붕괴시키려고 남쪽에 많은 무기를 끌어들였고, 해마다 한미군사훈련을 진행했다. 미제에 의해 한반도에 항시적인 전쟁위협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는 우리는 다시는 외세에 나라를 빼앗길 수 없다는 각오로 핵 억제력을 키워나가야 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선군정치였다.
식량이 부족하여 인민들에게 식량배급을 할 수 없었으며 전기가 없어 저녁이면 캄캄한 방안에서 등잔불과 함께 하는 어려운 일상생활이 이어졌다. 흉년세월엔 뱀이 조 이삭을 먹는다는 말이 있다. 사람도 먹을 게 없는데 하물며 집에서 기르는 개들이라고 먹을 게 있겠는가. 강에는 물고기가 자취를 감추고 산에는 산짐승이 말라버렸다.
사람들은 산에 올라가 어린 소나무의 껍질을 벗겨 송기떡을 해먹기도 하였다. 소나무의 하얀 속껍질을 삶고 삶아 부드럽게 한 후 거기에 강냉이 가루를 뿌려 범벅을 하면 송기떡이 된다.
인민들은 “고난의 행군”시절 정말 어려워 나물죽을 먹고 식사를 거르는 일도 있었지만 누구도 국가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모든 인민들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어렵고 힘들더라도 우리 후대들에게는 외세의 침략이 없고 자주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조국을 물려주기 위해 나라의 주인으로써의 책임을 다하였으며 그 길에서 자신의 청춘과 생명까지도 서슴없이 바쳤다. 우리는 ‘지금의 고난은 일시적이고 당과 수령만 믿으면 앞으로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고한 신심으로 미래에 대한 혁명적 락관으로 하루하루를 내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