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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전서 1장, 2장, 3장
거짓 교사에 대한 대처, 공동체 기도, 여성 목회자, 감독, 목사, 장로, 집사 직분 자격
저자와 제목, 저작 연대
디모데전서의 첫 구절은 바울이 저자임을 분명히 진술하며 이는 19세기까지 보편적으로 인정되었다. 그런데 지난 200년 동안 성경 연구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해서 오늘날 많은 이들은 바울이 실제로 디모데전서, 디모데후서, 또는 디도서를 썼다는 점을 부정한다. 비평학자들은 이 세 편지(목회 서신)가 문체, 어휘, 신학, 교회 체제, 바울을 묘사하는 방식등에 있어서 바울의 다른 편지들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예컨대 신학이나 교회 체제에 있어서의 차이점들은 바울의 이전 편지들에 대한 독특한 해석과 이 세 편지를(바울의 나머지 편지들을 해석하는 것처럼) 개별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의 단위로 해석한 결과에 근거하여 과장되게 진술된 것이다. 예컨대 어떤 이들은 목회 서신이 바울의 다른 편지들에 나타나는 역동적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의 직분자들(특히 장로와 집사)이 강조되는 훨씬 더 구조화된 교회를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두 부류의 편지들에 나타난 증거를 정반대 방향으로 과장되게 진술한 것이다. 장로들은 이미 바울의 1차선교 여행 때부터 언급되고 있고(행 1:21~23) 빌립보서는 빌립보 교회의 "감독들과 집사들"(빌 1:1)에게 보내졌다. 더 나아가 문체와 어휘상의 차이는 바울과 같은 독창적인 사고의 소유자에게는 특히 이 편지들이 목적, 주제, 독자 면에서 다른 편지들과 다르며 동료 사역자들에게 쓴 유일한 편지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특이한 것이 아니다.
더구나 초대 교회는 가명으로 기록되었다고 여겨지는 저작은 무엇이든지 사도적 정경에서 명백히 제외시켰으므로 이 편지들은 가명으로 기록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다. 비평학자들은 고대 세계에서 가명으로 글을 썼던 일반적인 관행을 지적하지만 이런 관행이 당시 문화에서는 흔했어도 개인적인 편지에서는 흔치 않았으며 초대 교회에서는 절대적으로 거부한 관행이라는 점을 보통 지적하지 않는다(참조, 살후 2:2, 3:17, 무라토리 정경 64~67, 유세비우스, <교회사> 6.12.3).
테르툴리아누스(주후 160~225년경)는 한 교회 장로가 (바울의 편지라고 일컬어진 고린도3서를 포함한) 바울 행전을 썼다는 사실이 발견되자 그 범죄한 장로가 "면직"되었다고 기록했다(<세례에 대하여> 17). 그 기원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편지를 성경으로 받아들이는 것 또한 윤리적으로 중대한 문제다.
따라서 이 편지들은 진실로 바울이 기록한 것이라는 솔직한 주장을 긍정하는 데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 편지 제목은 이 편지가 디모데에게 보내졌음을 알려주며(1:2) 편지 내용은 이 편지가 연대적으로 디모데후서보다 앞섰다는 점을 확증한다.
저작 연대
어떤 비평학자들은 디모데전서가 사도행전의 이야기와 잘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해 왔다. 또 어떤 이들은 이 편지가 행 20장의 사건과 잘 들어맞을 수도 있다고 답변해왔다. 그러나 전통적인 입장은 바울이 1차 로마 투옥(사도행전 끝 부분에 언급된 사건, 행 28:16, 30~31)에서 풀려나 추가로 선교 사역을 더한 뒤 두 번째로 투옥되어 결국 처형(순교)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재구성은 클레멘스 1서 5.7과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2.22.2~8의 진술로 뒷받침된다. 그렇다면 디모데전서는 이 두 번의 투옥 사건 사이의 바울의 사역 기간과 잘 맞아 떨어질 것이다. 만일 바울이 로마에 도착한 사건이 사도행전에 진술된 대로 주후 59~61년경의 일이라고 했을 때 투옥된 기간을 한 2년 정도 잡으면 바울은 62년경에 석방되었을 것이다. 만일 바울이 네로 치하에서 처형(순교) 되었다면 (주후 68년 사망) 디모데전서는 60년대 중반 어느 시기에 기록되었을 것이다(참조, 행 28:30~31).
목적, 계기, 배경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서 발생하고 있었던 문제들에 대해 젊은 동역자 디모데에게 조언하기 위해 디모데전서를 썼다. 바울은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 두었을 때 교회 안에 있는 몇몇 거짓 교사들에 잘 대처하라고 특별히 당부한 적이 있다(1:3). 바울은 그 후 디모데와 에베소 교회와 떨어져 있었으므로 추가적인 지시 사항을 가지고 디모데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바울은 다시 방문하기를 소망했지만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다루기 위해 이 편지를 썼다(3:14~15). 편지 내내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행동의 근거를 복음에 둔다. 거짓 교사들은 바울이 이 편지를 쓰게 된 일차적인 원인이다. 이 편지는 전반적으로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논의로 둘러싸여 있고 적극적인 가르침은 거짓 교사들과 직접적인 대조를 이르며 제시된다.
거짓 가르침의 정확한 성격은 불분명하다. 거짓 가르침은 율법에 대한 억측(1:7~11) 및 금욕주의(4:1~5)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의 실제적인 관심사는 거짓 가르침의 결과, 예컨대 헛된 사색(1:4, 6:4), 교만(6:4), 탐욕(6:5~10)을 조정하는 측면에 있다.
바울은 거짓 가르침의 내용을 단지 스쳐 가듯이 다룰 뿐이지만 참된 기독교는 복음을 통해 형성된 생활 방식을 통해 입증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복음을 통해 형성된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 믿음에서 돌아섰음을 보여주는 셈이다(1:6, 19~20, 4:1, 5:6, 8, 11~12, 15, 6:9~10). 디모데전서는 교회가 복음의 윤리적 함의를 구체적인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분명한 요청이다.
핵심 주제
1. 복음은 신자들의 삶 속에서 거룩함을 낳으며 믿음과 행동 사이의 합당한 괴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믿음을 고백하되 경건에 있어서 어떤 진전도 보여주지 않는 이들은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의심해봐야 한다(1:5, 2:8~15, 3:1~16, 4:6~16, 5:4~6, 8, 11~14, 18~19) .
2. 전 세계적인 복음화는 필수적이며 하나님 자신의 복음 전파에 대한 소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1:15, 2:1~7, 3:16, 4:10).
3. 복음을 받아들인 한 가지 핵심적 증거는 공적인 예배에서의 적절한행동 (복음적인 기도, 연합, 겸손, 복종)이다.
4. 교회 지도자들은 복음으로 형성된 삶을 사는 사람들이어야 한다(3:1~13, 4:6~16).
5. 적절한 경의는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서로와 관계 맺는 방식에 있어서 하나의 핵심적인 요소다(5:1~6:2).
6. 창조 질서(예컨대 부)는 선하며 숭배해선 안 되지만 인정해야 한다(4:4~5, 6:17~19).
7. 복음의 순수성과 보존을 위해 수고하는 것은 중요하다(1:3~7, 18~20, 4:6~16, 6:2~3, 12, 20~21).
하나님의 계획은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을 부분적으로 교회와 교회의 사역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거짓 가르침에 대한 반박>
바울은 디모데에게 거짓 교사들에게 잘 대처라고 명하고 율법에 대한 그들의 이해를 간략하게 조정하며 자신의 복음의 의도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한 예로 제시하고 거짓 교사들의 구체적인 몇 가지 예를 가지고 디모데의 기본적인 책임을 다시 진술합니다.
1~11절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8 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9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10 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1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거짓 교사들에 대처하는 당부, 에베소에서 디모데의 최소한 가지 목표는 교회를 어지럽히던 거짓 가르침에 대처하는 것이었습니다. 거짓 가르침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판단하기 위해 주어진 정보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역사의 관심사는 거짓 선생들의 정체라기보다는 그 가르침의 효과였고 그 효과는 사도의 가르침의 목표와 직접적으로 대조되었습니다. 거짓 가르침의 결과는 "변론"과 "헛된 말"인 반면 참된 가르침의 결과는 "정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람"입니다. 거짓 가르침의 초점은 탈선과 방황을 초래한 반면 참된 가르침의 초점은 변함없는 "목적"이었습니다 또한 율법과 관련해서 거짓 가르침의 옹호자들은 "깨닫지 못하는" 반면 참된 가르침의 옹호자들은 정확한 지식이 있었습니다.
'이 교훈의 목적', 사도의 가르침의 목표는 사랑입니다. 이는 디모데전서에서 바울의 가르침이 의도한 결과에 대한 분명한 지적입니다. 거짓 가르침은 무의미한 변론을 가져오는 반면 올바른 사도의 가르침은 사랑의 뿌리를 둔 실제적인 선한 행실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악한 욕심으로 가득한 마음이 아닌) '정결한 마음'과(죄책감 가득한 양심이 아닌) '선한 양심'과(겉치레의 위선이 아닌) 거짓이 없는 믿음을 낳는 내적이고 성령이 역사하는 변화에서 나와야 합니다. 이 구절은 편지 전체의 핵심입니다(3~7절).
'율법은....선한 것임을',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모세 율법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바울은 분명히 율법은 선하다고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분명 율법을 오용했지만(이 편지에 나오는 거짓 교사들) 율법 그 자체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주신 은혜로운 선물이었습니다(8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옳은"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억제할 율법이 필요하지 않지만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그런 억제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율법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면에서 쓸모가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말했고 9~10절에서는 실제로 십계명 중에 몇 가지를 구약에 순서에 따라 상기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신약시대의 신자에게 정확히 어떻게 적용되는 지는 약간의 논쟁거립니다. 어떤 이들은 모세 율법이 전적으로 대체되었으며 남은 것은 그리스도의 법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이들은 모세 율법에 특정한 측면들은 지속적인 권위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고 단언하며 이는 그가 여기서 쓴 내용과 잘 들어 맞습니다.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는 출 20:12를 위반하는 자이며 살인하는 자는 출 20:13을 위반하는 자, 음행하는 자는 출 20:14를 위반한 것이지만 이 단어는 단순한 간음 이상의 의미를 내포합니다. 헬라어 '포르노스'는 하나님의 도덕법에 어긋나는 일체의 성적 행동을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남색하는 자', 헬라어 명사 '아르세노코이테스'는 동성애 행위를 하는 남자를 가리키며 레 18:22, 20:13에 대한 70인역의 표현을 상기시킵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선천적으로 동성애적인 욕구가 없는 사람들에 의한 동성 간의 매춘이나 소아 성애나 부정한 관계 내지 행위 등과 같은 특정한 종류의 동성애 행위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주장해왔지만 이 본문이나 전후 문맥이나 고대 세계에 어떤 증거에도 바울이 모든 종류의 동성애 행위가 아닌 다른 어떤 것에 지칭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증거는 없습니다. '인신매매를 하는 자', 헬라어 '안드라포디스테스'는 바울이 모든 종류의 강제적인 인식 매매를 악한 행위이자 출 20:15에 대한 위반으로 간주 됐음을 보여줍니다.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하는 자'는 출 20:16을 어긴 것입니다. '바른 교훈', 여기에서 "바른"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희기아이노'의 분사는 (건전한 또는 건강을 주는 교리란 의미에서) 건강의 개념을 내포하며 디모데후서에서는 거짓된 교리는 ("악성종양"처럼 딤후 2:17) 몸을 통해 은밀하게 독을 퍼뜨리는 반면 참된 교리는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는 확대된 비유에 기여합니다(9~10절).
<참된 복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것>
12~20절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7 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특정한 말에 '미쁘다'는 표현으로 주위를 환기시키는 것은 목회 서신의 특별한 특징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이 자신은 현재 세상의 다른 누구보다도 더 많이 죄를 짓고 있다는 뜻으로 이 말을 했을리는 없습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깨끗한 양심을 가지고 살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다른 신자들에게 자신의 본을 따를 것을 요청합니다.
바울의 말은 자신이 이전에 교회를 박해한 일로 인해 죄인 중에 괴수가 되었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 말은 다른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는 데 가장 큰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해석은, 바울이 성령께서 자신의 마음속에 강력한 깨달음을 주신 일과 자신이 하나님과 가까워진 사실에 비춰볼 때 자신보다 더 악한 죄인은 상상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지식이 있는 경건한 사람들은 자신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15절).
바울은 참된 기독교적 가르침의 효과를 보여주는 하나의 본입니다 바울은 율법에 의도된 그런 종류의 사람이었고 복음이 그의 삶에 미친 결과는 단지 한가한 변론이 아니라 변화였습니다(16절).
바울은 영원하시고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인격적으로 개입하시는 초월적인 왕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17절).
'예언', 하나님은 다른 이들을 통해 디모데를 사역을 위해 따로 세우도록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특정한 신적 소명에 대한 이러한 확언은 사역을 위해 디모데를 강건하게 하려는 것입니다(18절).
거짓 교사들은 양심을 버렸고 계속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산하였느니라', 이는 십중팔고 처음에 고백했던 믿음에서 떠남으로써 스스로 진실로 회심한 적이 없음을 보여준 거짓 교사들을 가리킵니다(19절).
'후메내오, 사탄에게 내준 것은', 이는 교회 밖으로 쫓겨난 것(출교)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교회 회원권의 중요성과 교회의 보호를 강조합니다. 교회 밖으로 쫓겨남은 사탄에게 더 많이 노출되기 때문입니다.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거짓 교사들도 회개하면 여전히 구원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징계는 사랑이 동기가 되며 징계받는 사람이 주님께 돌아오기를 소망합니다. 거짓 교사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악한 말을 내뱉었다는("신성을 모독하지") 명시적인 표시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를 잘못 전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나쁘게 말하는 것입니다(20절).
<공동체 예배와 기도, 여성 목회의 자격 제한>
바울은 복음에서 고유하게 나타나는 삶을 묘사하면서 먼저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기도를 언급합니다. 이는 또한 경건한 생활과 공적인 예배에서의 적절한 행동 특히 하나됨, 겸손, 올바른 복종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1~15절
2: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1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2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4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 바울의 요점은 기도의 모든 방식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누적적인 효과를 위해 기도와 관련된 다양한 말들을 열거하는 것입니다. 이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을 의한 모든 종류의 기도에 대한 요청입니다(1절).
'임금들과' 그 밖의 권력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 기도의 할 "모든 사람"의 예로 언급됩니다. 여기서 권장하는 생활방식(경견과 단정함....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은 1:5에 나오는 사도의 가르침의 목표에 상응하며 거짓 교사들의 행동과 대조됩니다(2절).
모든 사람들을 위한 복음 전도적인 기도는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배타주의적인 경향이나 최소한 이방인을 복음화하는 일의 중요성에 대한 그들의 무시를 논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진술은 속제의 범위에 대한 신학적 의견 불일치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이 일을 모두가 구원받을 것임을 (보편 구원론) 암시하는 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 편지의 나머지 내용은 어떤 이들은 구원받지 못할 것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자신이 성취하실 수 있는 어떤 것(모든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신다는 뜻인가? 아르미니의 아르미니우스주의 및 칼빈주의 신학자들은 모두 하나님은 보편적 구원 이상의 어떤 것을 "원하신다"고 대답합니다. 아르마니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더 큰 소망은 (진정한 사랑을 위해 필요한) 진정한 인간의 자유를 보전하는 것이며 따라서 하나님은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구원 초대를 거부하는 쪽을 선택하도록 허락하셔야 한다고 믿습니다.
칼빈주의자들은 하나님의 더 큰 소망은 자신의 영광을 온전히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인간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의 긍휼의 자유에 의존하는 선택으로 귀결된다고 믿습니다. 속죄의 범위를 어떻게 이해하든 이 구절은 분명 모든 인간에게 자유롭고 보편적인 복음으로써의 초대가 이뤄졌음을 가르킵니다. "원하시느니라"라는 말은 이 초대가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진실한 표현임을 보여줍니다. '진리를 아는데에 이르기를', 이는 구원의 인지적 측면, 즉 회심하기 위해서는 각 사람이 핵심적인 진리를 이해하는데 이르러야함을 강조합니다. "진리"는 목회 서신에서 복음과 동의어로 자주 등장합니다(4절).
5~6절은 사람들이 구원받기를 하나님이 원하신다는 앞의 진술에 대한 신학적 기초를 제공합니다.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찾으십니다. 다양한 민족 집단은 자신들만의 신이 있다고 상상할지라도 각기 자신들만의 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은 구원을 위해 참되신 한 하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성육신하신 아들 이스라엘의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중보자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뜻합니다. 더 나아가 이 구절은 사람들과 예수님 사이에 성인들이 인간제사장 같은 중재자들이 존재할 여지를 허락하지 않습니다(5절).
'대속물'(헬, '안티퀴트론')은 누군가를 돈을 주고 풀어주는 것을 가리키며 그리스도의 사역을 구속적인 것으로 보는 일반적인 바울의 서신서가 이와 관련된 신약의 "구속" 및 "대속물", 이 표현은 또한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반영합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이 "대속물"로 주셨으므로 대속(죄인 대신 죽음)의 개념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6절).
'남자들이....이와 같이 여자들도', 바을은 성별에 따른 구체적인 관심사를 다룹니다. 남자들과 관련된 주제는 분노이며 여자들과 관련된 주제는 소박함과 올바른 복종입니다.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바울은 귀금속 착용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리는 여자들은 과시적으로나 유혹하려는 듯이 옷 입지 말고 단정하게 옷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된 교리는 선행을 낳습니다(8~10절).
'그러므로', 이 말을 통해 바울은 1절의 기도 요청을 재개합니다. '손을 들어', 이는 성경에서 전형적인 기도 자세입니다. '선행으로', 이 말은 참된 교리의 타당한 결과에 대한 강조를 이어나갑니다. 여자들은 교회에서 남자들을 가르쳐선 안되며 남자의 리더십에 복종하고 따라야 합니다(8~11절)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단지 어떤 의견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글을 씁니다. 이 진술은 바울이 교회가 함께 모일 때에 관례 때에 교회에 제시한 사도적 지침이라는 문맥 속에서 주어집니다. 그 문맥에서 다음 두 가지는 금지됩니다. (1) 여자가 교회에서 남자에게 성경이나 기독교 교리를 공개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2) 여자가 교회 안에서 남자를 주관하는 것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여기서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에 대한 언급은 모인 교회라는 문맥 속에 있습니다.
여자가 다른 여자를 가르치는 것과 여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여기서의 관심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는 둘 다 권장됩니다. 여자가 여자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는(딛 2:4 참조) 여자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딤후 1:5 참조) 또한 이 구절은 교회 밖의 리더십의 상황에서(예컨대 기업이나 정부) 여자의 역할을 염두에 두지도 않습니다.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 사이에 있는 접속사(헬 '우데')의 존재는 바울이 '권위 있는 가르침'이라는 한 가지 활동이 아닌 서로 다른 두 가지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가리킵니다.
"주관하는" 이란 말은 신약에서는 오직 여기서만 발견되는 헬라어 '아우텐테오'를 표현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 밖에 존재하는 이 단어의 80회가 넘는 예들은 그 의미가 (때때로 주장되는 것처럼 '권위를 빼앗다나' '권위를 남용하다'는 등이 아니라) '권위를 행사하다' 임을 분명히 밝혀줍니다. 목사/장로/감독의 역할은 가르치고 교회에 권위를 행사하는 일에 뿌리를 두고 있으므로 이 구절에 따르면 여자들은 이런 직분으로 섬기는 일에서도 제외될 것입니다(참조, 딤전 3:2).
따라서 바울이 여자들에게 조용할 것을 요구할 때 그 말은 여자에게는 모인 교회에서 가르치는 책임이 제한되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다른 곳에서 여자들은 교회 모임에서 다른 방식으로 실제로 말을 한다는 점을 암시합니다(참조, 고전 11:5, 고전 14:34~35). (12절).
'이는', 바울은 12절의 금지에 대한 성경적 근거를 소개합니다. 바울은 이 금지가 두 가지 근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첫 번째 근거는 창조 질서('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이고 두 번째 근거는 하와가 속임을 당한 사실임을 암시합니다. "지음을 받고" (헬, '플라소')라는 말은 70인역에서 여기에서 사용되는 것과 같은 말로 명백히 창조를 가르킵니다. 바울의 논증은 교회 안에서의 성 역할이 단지 타락의 결과만이 아니라 창조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시대에 모든 문화에 적용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의미는 오늘날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어떤 해석자들은 딤전 2:12의 금지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오늘날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1) 바울이 이 명령을 하는 이유는 예배소에서 거짓 교리를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2) 바울이 이 말을 한 이유는 그 문화에 속한 여자들이 가르칠만큼 충분히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3)이는 그 문화권에만 해당되는 일시적인 명령이었다. 그러나 바울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한 근거로 삼는 점은 이런 설명들과 반대됩니다.
더구나 에베소에서와 관련되어 거명되는 거짓 교사들은 남자들뿐이며 1세기의 에베소에는 여자들이 거짓 교리를 가르쳤다는 어떠한 역사적 증거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고대의 비문 및 문헌은 그 당시에 소아시아 지역에 있었던 잘 교육받은 여성들을 많이 언급합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이 '아내'가 '남편'을 가르치거나 남편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만을 금지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딤전 2:12에서 "여자"와 "남자"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 '귀내'와 '아네르'는 어떤 문맥에서는 '아내'와 '남편'을 뜻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8~9절의 인접 문맥을 감안하면 여기 11~14절에서 헬라어 단어 '귀네'와 '아네르'의 의미는 '아내'와 '남편'이 아니라 십중팔구 '여자'와 '남자'인 것으로 보입니다(13절).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바울의 두 번째 이유, 하와가 속임을 당한 결과 먼저 죄를 지었지만 아담의 죄는 의식적이고 고의적이었으며 온 인류에게 참담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14절).
이 구절은 이해하기 어렵기로 악명 높은 구절입니다. 바울은 분명 사람들이 '해산함'이나 기타 다른 수단을 통해 칭의를 얻는다는 의미에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구원받는다'(헬, '소조')는 말을 구원의 모든 측면을 점진적으로 경험하게 된다는 의미로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지속적입니다. 이와 비슷한 한 가지 견해는 '구원받는다'는 말을 특별히 영원한 구원에 필요한 믿음 안에서의 오래 참음과 인내를 가리키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실천하기 위해 믿음 안에서 인내할 때('거하면') 구원을 받으며 그 한 가지 예는 해산에 있어서의 여자의 독특한 역할입니다(15절).
<목사, 감독, 장로 직분>
바울은 여자가 모인 회중을 가르치고 회중에게 건의를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문제를 포함한 공동체 예배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룬 뒤에 이제 누가 이런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논의합니다. 바울은 목사의 직무를 설명하는 대신 이 직분으로 봉사할 사람의 성품을 묘사합니다. 이러한 성품들의 목록은 모든 것을 망라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서 보여지는 사람 그 믿음이 자신의 행동에 구체적으로 영향을 끼친 사람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1~7절
3:1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감독', 장로, 목사 또는 목자라는 말은 신약에서 모두 같은 직분을 가리키는 데 사용됩니다. "장로"와 "감독"은 서로 바꾸었어도 무방하게 사용됩니다. 베드로는 벧전 5:1~2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중 장로들(헬, '프레스뮈테로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바울은 이런 식으로 교회를 섬기는 역할을 선한 일로 추천합니다. 감독이란 말은 회중을 감독하는 역할을 강조합니다(1절).
'책망할 것이 없으며', 이 조건은 감독에 대한 핵심적인 자격 조건 목록의 첫머리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조건은 이 두 구절에서 이어지는 단어들과 표현들을 통해 설명됩니다. 한 아내의 남편의 뜻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 헬라어 표현은 흔하지 않으며 비교할 만한 다른 예들이 별로 없습니다. 이 표현을 지적하면 한 여자(아내)의 남자(남편)라는 말입니다. (1) 많은 주석가들은 이 표현을 한 여자의 남자라는 특성을 가진, 즉 자기 아내에게 신실함이라는 뜻으로 이해합니다.
이런 견해를 뒷받침하는 것이 딤전 5:9에서 이와 비슷한 문구가 과부의 자격 조건의 하나로 사용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한 남편의 아내 또한 그 구절에서 이 표현은 신실함이란 특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입니다. 배우자가 죽은 뒤에 재혼을 금지하는 것은 5:14에 나오는 젊은 과부에 대한 바울의 조언과 모순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첫 번째 견해를 신봉하는 해석자들은 3:2의 표현은 단순히 결혼의 조건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구체적이며 단순히 미혼이나 이혼 뒤에 재혼에 대한 언급이라고 보기에는 충분히 구체적이지 않다고 결론짓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의 문맥에서 이 표현은 배우자의 일체의 외도 행위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2) 또 다른 견해는 한 아내의 남편이란 말은 아내가 여럿인 사람은 장로가 될 수 없음을 뜻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견해를 신봉하는 해석자들은 그 당시에 일부 유대인 사회에서 일부다처제가 행해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 표현은 현재적 특성을 가리키는 다른 조건들과 일치하게 현재 한 아내의 남편을 뜻합니다. 이 두 견해 중에 어느 쪽에 따르든 바울은 모든 재혼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바울은 아내가 죽어서 재혼한 남자나 이혼하고 재혼한 남자가 장로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3) 세 번째 견해는 바울이 절대적으로 장로는 결코 한 아내 이상의 아내를 둔 적이 없는 사람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현재적 특성에 강조점을 두고 있는 문맥과도 잘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중에 어느 견해에 따르던 바울은 일상적인 경우에 대해 말하고 있고 결혼이나 자녀를 절대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공인된 감독을 신실한 남편이자 아버지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르치기를 잘하며', 이는 이 목록에서 모든 신자에게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아닌 한 가지 조건입니다. 이는 또한 집사에게도 요구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는 목사/장로에게 요구되는 특징적인 능력입니다. 그것은 이 목록에서 감독과 감독의 실제적 의미에 대한 유일한 언급입니다(2~3절).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일은 이 일에 주어진 더 많은 분량의 논의를 통해 장로의 자격 조건으로 강조됩니다. 가정은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입증하는 근거이며 따라서 사역을 위한 준비의 집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집으로서의 교회에 대한 묘사에 비추어볼 때 더 이해가 잘됩니다(4~5절).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재능이 아무리 많더라도 성숙함과 성품을 입증하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6절).
<집사의 자격 조건>
집사는 장로와 더불어 신약 교회의 직분자입니다. "이와 같이" 라는 말은 자격 조건의 항목들 사이에 관련성이 있음을 암시하며 실제로 눈에 띄는 유사성이 있습니다. 집사는 감독과 마찬가지로 복음으로 형성된 삶을 보여줘야 합니다. 한 가지 핵심적인 차이점은 집사는 잘 가르치는 재능을 요구받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이 목록은 감독에 대한 목록과 마찬가지로 직무보다는 성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신약에는 집사 역할에 대한 명시적인게 거의 없지만 헬라어 단어 '디아코노스'는 종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직분은 아마도 교회 안에서 다양한 영역의 섬김을 책임지는 일을 수반했을 것입니다.
8~13절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맡게 할 것이요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정숙하고 모함하지 아니하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비밀', 헬, '뮈스테리온'은 바울 서신에 흔히 나타나는 단어이며 여기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가져올 하나님의 계획에 게시된 내용 전체를 가리킵니다. '깨끗한 양심에', 집사들은 잘 가르칠 것을 요구받지는 않지만 복음을 잘 이해할 것을 요구받으며 그들의 행동은 복음에 부합되어야 합니다. 집사는 아마도 감독의 인도 아래 시험 보아야 합니다(9~10절).
헬라어 단어 '귀내'(여기서는 복수형)는 여자 또는 아내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호성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해석으로 귀결됩니다. 본문은 (1) 집사의 아내들 여자들 (2) 여자 집사들, 또는 (3) (어떤 교파에서는 여집사라고 불리는) 집사를 돕되 집사와는 구별되는 여자들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본문의 흐름 속에서 갑자기 등장합니다. 이것이 집사의 아내들에 대한 언급이라면 이는 12절에서 집사의 가족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면서 의미가 잘 통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경우에서 "이와 같이" 라는 말은 종종 새로운 집단을 소개합니다. 또한 감독들에 대한 논의에서는 그들의 아내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이는 이 여자들을 집사나 조력자로 보는 견해를 뒷받침할 것입니다(11절).
바울은 집사의 역할에 있어서 선한 섬김에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과를 진술함으로써 집사의 가치와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1) '아름다운 지위'란 이런 식으로 섬기는 자에 대한 교회의 존경과 인정을 가리킵니다. (2) '큰 담력'이란 아마도 복음의 능력이 사역 속에서 자주 입증되는 모습을 보는 데서 나오는 커져가는 확신을 가리킬 것입니다(13절).
바울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잠시 멈추고 편지의 목적을 진술하며 그 과정에서 편지의 핵심적인 초점을 드러냅니다.
<교회의 사명과 정체성>
14~16절
14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5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이 매우 중요한 구절에서 바울은 디모데전서를 쓰는 이유를 진술하면서 교회의 정체성과 사명에 대한 신약의 핵심적인 묘사 가운데 하나를 제시합니다. 교회와 교회의 사역을 묘사하는 데 '집'(헬, 오이코스)과 그와 관련된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은 바을 서신에서 흔한 일입니다. 이 단어는 특별히 교회와 가정 안에서의 권위와 책임과 관련해서 교회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묘사합니다. 강조점은 교회와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에 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하나님 자신의 임재를 가장 분명히 나타내시는 모임으로서의 교회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은 보통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실재와 임재를 가리킵니다. 교회를 '진리의 기둥과 터'로 인식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이 교회에 복음을 촉진하고 보호하는 임무를 맡기셨다는 사실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건축적 이미지는 아마도 거짓 가르침의 공격을 물리치 목적으로 지켜보는 세상 앞에서 복음을 '떠받쳐야' 할 교회의 책임을 표현하는 것일 것입니다. 교희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인상적입니다. 복음을 증진시키는 역할은 다른 어떤 단체도 아닌 교회에 주신 역할입니다. 선교 단체도 가치가 있지만 선교 단체는 교회를 대처하는 것이 아니라 뒷받침 해야합니다(15절).
'경건의 비밀'이란 하나님의 계시된 구원 계획의 내용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 다음에는 이 위대한 복음의 메시지에 대한 시적인 설명이 나옵니다.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이 도입부는 에베소 교회에 이 고백과 이 편지 전체에 걸쳐 도출되는 윤리적 신학적 함의를 긍정할 것을 암묵적으로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 "송가"의 정확한 구조는 논란거리지만 그 기본적인 사고는 분명합니다. 성자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나타나셨지만(그 결과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1행) 부활을 통해 '의롭다하심을 받으시고' (2행) 그 후에 천상의 존재들 앞에서 승리한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3행).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의 의미는 옳음을 입증받았다는 것이며 이는 헬라어 동사 '디카이오오'의 일반적인 용법입니다. 4행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의 결과를 계속해서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만국(헬, '에트노스')에서 전파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전파되고 있습니다. 즉 특별히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선포는 효력이 있었습니다('맡은 바 되시고' 5행). 다음으로 6행의 '올려지셨느니라'(헬, '아나람비노')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승천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1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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