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이래서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가 참 어렵습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겠다는 것을, 일단 내가 죄인이 돼 놓으면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누가 찾아 줍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돌아다니시면서 조사해서 찾아내어 구원하신다 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사울이 죽은건 우리가 공부를 했죠? 블레셋 사람과 전쟁을 치루다가 패전해서 자기가 자살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언제든지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다윗에게는 원수입니다.
그럼 여러분, 그 원수가 죽고 쫓겨다니던 다윗이 왕이 됐을 때 제일 먼저 할 일은 뭡니까? 삼족을 멸하는 것입니다. 자기 위치가 앞으로 불안할 수도 있다 이겁니다. 성경에 보면 그런 이야기가 꽤 나옵니다. 어떤 왕이, 왕이 되면 자기와 별로 좋지 않았던 그 전왕의 가족을 다 죽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사울의 손자가 됐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자기 할아버지가 매일 죽이려고 하던 다윗이 왕이 됐다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이제는 죽었구나!’ 그건 당연한 겁니다. 거의 뭐 틀림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울의 손자였다면 지금 숨어 있겠죠? 다들 다윗이 왕이 됐다고 야단인데, 사울의 자식들은 숨어 있는 거예요. 즉 자기 스스로가 죄인이란 것을 아니까, 스스로가 스스로를 심판 했습니다. ‘내 입장은 지금 왕이 된 다윗과 원수의 입장에 있으므로 나는 죽었다’ 하는 것을, 스스로 심판 한 겁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하는지 우리가 한번 봅시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성경을 배우면서 다윗은 누구의 표상이라고 합니까?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예수님의 표상! 물론 다윗이 잘못한 것 참 많지마는․․․. 다윗이 잘한 일은 예수님이 지상에 계셨으면 아마 그렇게 하셨을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다윗만큼, 실수는 많이 했지만, 예수님을 잘 따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예수님의 표상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우주의 왕이 되시면 어떻게 하시겠느냐 하는 것하고 다윗이 왕이 됐을 때 그 원수들에게, 사울의 자손들에게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공통점이 있어야 되겠지요?
다윗은 항상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원칙대로, 땅의 원칙보다는, 하늘의 원칙대로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땅의 원칙대로 하면 사울의 손자들은 어떻게 돼야 합니까? 다 잡아서 사형을 시킬만 합니다. 그래도 아무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지금 바야흐로 다윗이 왕이 됐습니다.
사무엘하 9장 1절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요나단은 누굽니까? 사울의 아들, 다윗의 친구였습니다. 이 요나단은 이미 전쟁터에 나가서 전사하고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요나단하고 참 친했어요. 요나단이 한 번 생명을 구해준 적이 있습니다.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죽이는게 아니라 뭘 하겠다는 겁니까? 은총을 베풀리라.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여러분이 사울의 손자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곧이 들리겠습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왕을 죽이려고 평생을 따라 다녔는데
“사울의 자손들이 어디에 있느냐? 나오면 내가 은총을 베풀리라”
하는 말이 곧이 들립니까? 절대로 곧이 안 들립니다. 이 것 때문에 우리가 문제입니다. 사울이ㅡ 손자들에게 다윗이 은총을 베풀리라 했는데, 누구 때문에? 요나단 때문에.
「은총을 베풀리라」
하고 순수하게 확실하게 이야기를 할지라도 사울의 손자들은 믿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의 상태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하도 어릴 때부터 하나님과 원수되는 일을 많이 해서 ‘나는 참 나쁜 사람이다.’하는 것이 잠재의식 속에 깔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잠재의식 속에 깔려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잠재의식 속에 깔린 것이 괴로워서 자선사업을 하고 그래서 자기가 나쁜 사람인 것을 부인합니다. 애쓴다고 됩니까? 원래 본 바탕이, 그렇게 태어나서 나쁜데 어떻게 합니까? ‘누가 죽어버렸으면․․․, 다 밉다’ 하는 마음이 자꾸 나오는 것을 보면 내 본 바탕이 죄인이란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상황에서 내 본 바탕이, 내 조상이 누구라는 것이 분명해요!
내 할아버지가 사울이란 것이 분명하다 이겁니다. 벌써 그 혈통을 타고났습니다. 이건 어떻게 고칠 수가 없습니다. 혈통을 어떻게 고칩니까? 사울의 손자가 아 ‘나는 사울의 손자가 아니다’, 암만 해봐야 사울의 손자입니다. 그러면
「요나단을 인하여」
하는 말은 뭡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라는 말입니다. 죄인이지만 은총을 베풀리라 하는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우리를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것으로 알지, 용서하려고 그런 줄 도저히 믿지 못한다 이겁니다.
인간의 마음으로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그런 입장에서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바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직 누구의 능력만으로 내가 그걸 믿을 수 있어요? 성령의 능력으로만 그런 얼토당토않은 것을 믿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즉 요나단으로 인하여, 내가 사울의 손자인데도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이 나에게 은총을 베풀겠다는 말이 믿어진다는 그 자체는 누가 믿게 해준 겁니까? 성령이 믿게 해준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가 있을 때는 그것이 믿어집니다.
그런 것을 믿는 많은 기독교인 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한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믿습니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은 성령의 능력없이 ‘아, 그게 그렇대. 그냥믿자.’ 이렇게 돼서 믿는 겁니다. 지식적으로 좀 이상하지만 그렇다니까 믿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종류는 겉으로 보면 아무도 구별해 내지 못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밖에 모르십니다. 성령밖에. 성령을 받아서 그것이 믿어지는 사람, 또 그냥 지식적으로 신학을 한번 공부해 보고 믿는 사람,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볼 때는 구별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항상 그렇다는 이야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뭘 보고 안다고 했습니까? 열매를 보고 안다고 했죠. 그 열매는 뭡니까? 희락과 평강과 양심과 절제와 온유와… 그것이 다 뭐할 때 나오는 겁니까? 뉴스타트할 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뉴스타트도 성령으로 하는 사람이 있고 자기 힘으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이 용서받았다고 느낄 때 나타나는 현상이 무엇이겠습니까? 제일 처음엔 기쁩니다. 그 다음에는 평안이 옵니다. 죄짐을 벗어버린 평안이 옵니다. ‘내가 지고 가야만 될 이 죄짐. 반드시 내게 이 죄 값을 치르라고 하는 통지서가 날아 올 것이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불안감을 갖고 살다가 죄짐이 없어졌어요. 이때까지 죄짐 맡은 우리 구주라고 아무리 해봐도 예수님이 죄짐 맡았습니까? 찬성하는 사람 손들어 보십시오. 손들고 해봐도 죄짐은 자기가 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지식으로 믿는다는 겁니다. 어느 순간에, 아! 이제는 죄짐을 예수 그리스도가 맡으셨다는 것이 피부로 닿아지고, 느껴지고 할 때 기쁘겠어요? 안 기쁘겠어요? 그 사람은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면서도 같이 지내면서 인상을 보면 도저히 기쁨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얘길 하면 또 그 사람은 내일부터 기쁠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이 이제 그 사람들에겐 고민이예요. 그러니까 안 기쁘거든요. ‘아, 내가 성령을 안 받았구나. 그게 그렇게 기쁜 것이라면 내가 아직도 성령을 받지 못했구나’하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뭘 구하라고 했습니까? 성령을 구하라. 두드리라, 열릴 것이요. 구하라, 주실 것이요. 뭘 주신다고요? 성령을 주신대요. 성령! 그런데 성경 좀 공부해 가지고 몇 줄 된다고, 성령 받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교리 얘기만 하면 눈이 뻔들뻔들 해집니다. “캬! 얼마나 기쁘냐. 얼마나 감사하냐”하며
그런데 이런 이야길 하면 하품하고, 교리 이야기해도 신 안 나고, 감사함, 기쁜 이야기를 해도 신 안 나는 그런 분들이 다 나쁘다는게 아닙니다. 차이가 없어요. 내가 안 받고 싶어했다는 거죠. 성령을! 이제까지.
하나님이 차별 대우 하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교리 공부한다고 해서 성령받는 것 절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뭐가 옳으냐 그르냐 그것만 가지고 따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 따지는 사람은 기쁨이 전혀 없습니다. 본인이 성령을 받으려고 두드리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알려고 공부는 하지요. 그러나 신앙이 공부가지고는 안 되거든요. 영감으로 되는거죠. 성경의 공부는 외우고 쓰고 하는 걸로 안 되고 성령으로 된다 이 말입니다. 성령으로 하는 성경공부를 해야지, 글자 몇 자 보고 성경공부 했다고 하는 사람 많습니다. 하나도 느낌은 없으면서…. 그러나 그 느낌이 오고 성령의 감동이 올 때는 모든 성경의 글자보다는 그 글자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집니다. 뜻이 내 가슴이 박히죠.
그렇기 때문에 다윗이 왕이 되더니 ‘내가 요나단으로 인하여 사울의 자손들에게 은총을 베풀리라’하는 내용이 나오죠? 하나도 재미없습니다. 성령으로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기뻐하고 있는 사람이 이걸 읽으면, ‘아! 다윗이 예수님처럼 하는구나’. 이래서 한 번 더 내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재확인됩니다. 내 마음 속에서 재확인됩니다. 그래서 또 기뻐지고, 또 엔돌핀이 나와요. 그것이 신앙생활의 실제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기쁨이 오면서 안식이 온다 이 말이죠. 이러한 안식을 아는 그리스도인만이 안식을 논할 수 있고 평화를 논할 수 있습니다. 이론은 모르면서 교리적으로 이 날이다, 저 날이다 해봐야 그것은 그 날 자체가 아주 모독적인 날이 됩니다. 하여튼 여기 오시면 그걸 먼저 배워야 됩니다. 안식을 배우기 전에 안식일 왈가왈부하지 마십시오. 우리 안식일 교인 모든 분들에게 제가 특별히 당부하는 것입니다.
제가 교리를 전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고 그 분명한 예수님이 어떤 사람일까? 지금 다윗이 나타내는 예수님이 어떤 분일까? 이 이야길 읽으면서 그 분을 만나고 만지고 해야 됩니다. 그걸 모르고 그냥 지나가면 이 이야기의 생명을 빼놓고, 이야기만 들은 겁니다.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물어보면, “용서했지요.” 이렇게 말로만 이해할 것이 아니라 그 뜻을 가슴에 와 닿게끔 느껴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할 때 그런 사람이 바로 나다 라고 깨닫는 것 같이 축복이 없습니다. 이런 얘길하면 아주 심각한 오해를 받는 수가 있습니다. 얘기 다 끝나면 어떤 사람이 저한테 심각하게 찾아옵니다. “박사님, 저하고 무슨 유감 있습니다?” 저는 누군지도 모르는데 “누가 저에 관한 일을 고자질합디까?” 합니다. 그러니까 설교하는 것을 꼭 어떤 사람을 묵사발 만들기 위해서 한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목사님들의 고충이기도 합니다. 그걸 소위 피해 망상증이라 합니다. 죄인들은 그 망상 속에서 삽니다. 그 피해의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리 설교를 잘해놔도 나쁜 일만 생깁니다. ‘아니 박사님이 나한테 무슨 유감이 있어서 저럴까? 하필 나만 딱 골라서 얘기하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이 자리에 앉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아! 저 얘기는 바로 내 얘기라고 개닫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했는지 한 번 봅시다.
「은총을 베풀리라」
참 못 믿을 말을 했지요? 도저히 사울의 손자들로서는 믿을 수 없는 선언을 했습니다.
「사울의 종 하나가 있으니 그 이름은 시바라 저를 다윗의 앞으로 부르매 왕이 저에게 묻되」
사울의 뭡니까? 직속 혈통이 아니고 종입니다. 사실은 이런 경우에는 종들도 처단되죠. 하지만 종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나는 혹시 괜찮을 수도 있다’고 믿고 ‘나는 그래도 좀 덜한 죄인이다.’ 이 말이예요. ‘덜한 죄인!’ 이런 사람이 먼저 당합니다. 다윗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이 시바는 자기가 사울의 혈통이 아니니까 그것을 믿고 나갔는지 여기선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후자를 택합니다. 시바가 나갔을 때는 다윗에 대한 자비를 믿어서 나간게 아니라 ‘직계도 아니고 종인데’ 하고 나갔을 것 같습니다. ‘내가 직계는 아니니까 살 것이다.’ 이런 믿음 같아요. 왜냐하면 나중에 시바가 다윗을 배반합니다. 제가 아마 틀렸을지도 모르겠는데, 다윗이 누구에게 쫓겨납니까? 자기 아들 압살롬한테 쫓겨갑니다. 쫓겨갈 때, 시바가 골 좋다고 그럽니다.
「네가 시바냐 가로되 종이 그로소이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한 번 더, 재확인을 시켰습니다.
「시바가 왕께 고하되 요나단의 아들 하나가 있는데 절뚝발이니이다. 와이 저에게 묻되 그가 어디 있느냐 시바가 왕에게 고하되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 있나이다 다윗왕이 사람을 보내어 로드발 암미엘의 아들 마길의 집에서 저를 데려오니 사울의 손자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나아와서 엎드려 절하매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이여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그래서 므비보셋, 즉 사울의 손자가 왔습니다. 사람을 보내서 데리고 왔습니다. 여러분이 그 손자라면, 사람이 자기를 찾아왔을 때는 어떤 기분이었겠습니까? ‘이제 나는 끝장이구나’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다윗이 므비보셋이 앞에 왔을 때 뭐라고 그랬습니까?
「다윗이 가로되 므비보셋아」
하고 이름을 불렀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안심시키시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다윗은 이미 사울의 손자가 ‘이젠 죽었구나’하고 벌벌 떨고 있을 것을 압니다. 이것을 알고 부드럽게
「므비보셋아」
한단말이예요. 영어성경에도 그렇게 나와요. 므비보셋이 뭐라 그럽니까?
「하니 대답하되 주의 종이 여기 있나이다.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단 말이 없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먼저 불러주고 그 다음에 하는 말이 ‘무서워 말라.’ 이것은 다윗이 이 므비보셋이란 사람이 무서워서 떨고있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그런겁니다. ‘무서워 말라.’
여러분, 예수님이 성만찬―마지막 최후의 만찬―을 하시면서 가룟 유다가 같이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포도주를 다르시더니 이것은 너의 죄를 사하는 나의 언약의 피이니라. 가룟 유다에게까지도 죄의 사함을 주는 내 언약의 피니라, 하면서 어떻게 했습니까? 너희가 이것을 다 마시라 했습니다. 그 가룟 유다에게 까지도. 만일 예수님이 “가룟 유다야, 너도 마셔라.”하면 가룟 유다가 섬찟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가룟 유다의 심정을 아시는 예수님이 틀림없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마시라 하면, 가룟 유다는 자기 혼자 생각해서 ‘아마 난 빼놓고 일거야’ 그렇게 생각할까봐 예수님이 다 마시라고 말씀을 하신, 그런 마음을 가지신 예수님과 같이, 다윗도 이 므비보셋 보고 ‘므비보셋, 무서워말라’고 했습니다.
무서워서, 믿지 못해서 떨고 있는 이 므비보셋은 어떤 사람입니까? 절름발이에요. 그러니까 므비보셋 생각에는 자기는 가치가 없는 사람이에요. 사울의 손자에다가 절름발이니 뭐 어디다 써먹을 데가 있어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자기가 은총을 받아야 될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없죠. 그 모든 상황을 따져서 바들바들 떨고있는 이 므비보셋에게
「므비보셋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한겁니다.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
이젠 재산도 안 빼앗겠다 이거죠. 할아버지, 가족들 이게 다 무슨 말인지 아십니까? 이 땅을 기업으로 주실 것이다 하는 말입니다.
팔복에 이런 것이 있죠. 마음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위로함을 받을 것이요. 이것이 바로 그 이야깁니다. 자기가 차지해야 되는 땅이지만 그 땅을 사울의 아들에게 준다 이겁니다. 죄인이지만 우리가 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역사적인 순간이에요.
여기서 확실히 나타납니다. 예수님이 어떻게 자기의 원수들을 다루시는지. 그래서 구약성경에 이미 예수님께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구약성경에는 예수님이 없고 진노의 하나님, 화내는 하나님만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말씀 많이 하십니다. 어떤 교회들은 공식적으로 자기 교파를 표방합니다. 유리 교회는 신약교회입니다, 구약교회가 아니라는 거죠. 그 뜻은 좋습니다만, 그건 결국 무엇을 오해한 이야깁니까?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을 오해한 얘깁니다. 자 이제 다시 보십시오.
「항상 내 상에서 먹을 지니라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이것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서 땅을 기업으로 받으며 그리고 왕의 밥상에 앉아서 같이 먹을 자격이 있습니까? 이건 엄청난 겁니다. 므비보셋이 구원을 받고 나니까 감사와 기쁨이 생기고 안식이 생깁니다. 그래서 이렇게 므비보셋처럼 구원을 받아본 경험이 없는 사람이 아무리 교리 이야기를 하여도 마음에 절대로 와 닿지 않고 우리를 화나게 합니다. 기분 나쁘게 합니다. 그런 것을 저도 옛날에 당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사실 어느 쪽이 더 자세한 성령의 교리인지는 몰라도 예수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알 때 그 사람은 어디에 속해있거나 형제 자매일 것입니다. 그것을 꼭 기억하십이요.
그러면 이제 우리가 정말 다윗을 통해서 예수를 만났습니까? 그렇죠. 다윗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래서 죄인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오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께서 은총을 주신다는 것을 일단 내가 죄인이 되면 믿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누가 찾아줍니까? 하나님이 죄인을 돌아다니면서 조사해서 찾아내어 구원하신다 이 말입니다. 그 얘기가 창세기부터 나옵니다. 창세기 때 아담과 하와가 죄인이 되어 숨어 있는데 누가 찾으러 옵니까? 하나님이 찾으러 옵니다. 하나님이 일단 죄인이 된 아담과 하와를 아무 말 안 하면서 버젓이 앉아서 기다려봐야 안 됩니다. 인간이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들, 즉, 천사나, 선지자나 그런 사람들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뭘 잘못했어? 이 정도 잘하면 됐지. 자선사업도 하고…,’ 이러고 숨어 있는데 찾아오십니다.
창세기 한번 보십시다. 제가 찬 제일 하기 좋아하는 얘기 중의 하나입니다. 창세기 3장 8절 한번 봅시다.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누가 피했습니까? 죄인이죠. 죄인의 특성은 하나님은 찾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잧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선 하나님한테 ‘하나님이 나를 멀리 하신다.’고 합니다. 그것이 죄인의 특징입니다.
다음에 가인이 죄를 짓고 한 얘기를 봅시다. 다음 페이지 한번 보세요. 4장 13절,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주께서 오늘 이 지면세어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결국 뭡니까? 자기가 하나님을 피하면서 하나님 보고 당신이 쫓아냈다는 겁니다. 창세기의 아담도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 낯을 피했다고 그랬습니다. 즉, 가인도 사실은 자기가 하나님을 피하면서 누가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그럽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나…」
당신이 나를 쫓아내는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보겠냐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누구한테 핑계를 대는 겁니까? 하나님한테 핑계를 대는 겁니다.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자기가 피해망상증에 걸려놓고 딴 사람이 나를 죽이려 한다 이 말이죠. 죄인의 특징입니다. 하나님게 죄를 지어놓고 자기가 피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쫓아내지 않았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뭐라 그래요?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이 ‘그렇지 않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기억하십시오. 즉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생각처럼 직접 벌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인 자신의 상상 속에 사단이 준 피해망상증이다 이 말이에요. 죄를 지으면 피해망상증에 걸립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죄를 짓지 말라는 거예요. 자, 3장으로 다시 돌아갑시다. 3장 8절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아주 중요한 순간입니다.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어디 있는 줄 아세요? 모르세요? 알지요. 하나님은 어디 있는 줄 아십니다. 아는데 왜 어디 있느냐고 물었겠습니까? 믿게 하기 위해서…. 참 좋은 대답입니다..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면 믿게 됩니까? 마음이 편해지니까. 죄인이 죄를 짓고 나면 자꾸 하나님의 능력을 축소합니다. ‘숨으면 모르겠지.’ 이런 생각이 나도록 하는 게 누구임니까? 사단이 그렇게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걸 알 리가 있냐.’ 그리고 은근히 죄인도 동의합니다. 그게 죄인의 특징이죠.
나와 하나님과의 사이가 어떠냐에 따라서 성경을 읽으면서 느끼는 느낌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으로 읽어야 된다는 겁니다. 내가 피해망상증을 갖고 있으면 성경 읽는 것이 해롭습니다. 몸에 해로워요. 사단이 그 사이에 들어와 나와 성경 사이에서 ‘봐라 하나님이 이렇다. 너 말이야 괜히 성경 읽어 가지고 꿈자리만 사나워졌지?’ 이렇게 속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성경 읽는다는 것, 구약을 읽는다는 것이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겁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여러분이 두 가지 다른 방향으로 성경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죠? 옛날식으로 읽었다면 큰 소리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제는 믿게 하려고, 속삭이듯 부드럽게 ‘네가 어디 있느냐’하고 그랬을 것 같아요. 즉, 다윗이 므비보셋한테 무서운 말로 ‘뭐가 무서워?’ 이랬을 리가 없어요. 그러니까 성경, 그 글자에 생명을 불어 놓고 예수님의 피를 칠해서 그 속에서 자비를 읽어야 됩니다. 글이 살아서 움직여야 됩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잘 읽으면 성경이 이렇게 자비롭게 이야기했다는 증거가 꼭 나옵니다. 큰 소리로 ‘어디 잇느냐?’ 이러지 않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제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나와요. ‘어디 잇느냐?’ 이것이 믿으라고 하는 얘기이지만 결국은 그 죄인에게 무엇을 줍니까? 사랑을 주고 그 사랑이 선택의 자유를 줍니다. 하나님이 가서 ‘이 놈아, 왜 숨었어?’ 이러면 죄인이 회개 안 할 자유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어디에 숨었는지 다 아시면서 어디 잇느냐 할 때는 ‘너의 자유를 내가 보장하겠다.’ 하는 그 말입니다.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을 때 그대로 따먹게 놔둔 것도 자유를 보장한 건데 죄를 지었는데도 또 자유를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사상이 멋지지 않습니까? 그래서 ‘네가 어디 있느냐’하는 이 말, 참 좋은 이야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제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위마 올라오기 전에, 우리 집에서 구역 예배를 보러 몇 가정이 놀러왔어요. 그 때 쵸코렛이 몸에 나쁘다는 것을 제가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집에서는 절대로 쵸코렛을 못 먹게 금지를 시켰습니다. 고기는 많이 먹고 있었지만 쵸코렛은 안 된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구역 예배를 보러온 가정 중에 꼬마 사내애가 있었습니다. 그 때 이 조그만 사내 얘가 쵸코렛을 가져 왔어요. 그러니 우리 얘들이 얼마나 먹고 싶었겠어요? 그 때 우리 딸들이 8살, 7살이었으니까 참 먹고 싶었겠죠. 그래서 이제 셋이 그 사내아이한테 붙었어요. 쵸코렛 좀 달라구요. 이 사내 얘가 다 나눠주기는 좀 부족하고 그래서 같은 남자끼리 나눠먹자 해서 우리 꼬마녀석한테만 쵸코렛을 줬죠. 그러니까 딸 둘이 금방 저한테 쫓아왔어요. 쫓아와서는 “아빠, 데이빗이 쵸코렛 먹었어요.” 그래 놓고서 우리는 안 먹었다 하는거죠.
요새 이런 경향이 많아 큰일이예요. 자기 마음 자체는 고치려고 하지 않고 남 잘못한 것은 금방 이르는 사람들이 있죠. 사실 자기도 그 사람과 똑같다는 생각은 전혀 안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다 같은 죄인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한번 가보세요. 1절,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과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고하니」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면 그 때 두어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데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 유대인들을 잡아 가지고 아마 사형을 시키면서 그 피를 자기들 제사 지내는데 제물에 쓰는 피하고 유대인사람 피하고 섞었다 이거죠. 그러니까 죽어도 참 더럽게 죽었어요. 유대인 치고…. 우리가 흔히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방인 빌라도가 이렇게 유대인을 죽일 수 있습니까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은근히 무슨 이야기예요? 하나님이라는 것이 잇느냐 이 말입니다. 있다면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할 수 잇느냐? 이런 얘깁니다. 여기에 대답하시는 예수님을 여러분 이해하기가 좀 힘드실 겁니다. 2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 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이것은 민족적인 모욕입니다. 이렇게 죽은 이 두 갈릴리 사람이 다른 모든, 지금 현재 살아있는 갈릴리 사람들보다 죄가 더 잇는 줄 아느냐 그 말입니다.
그것이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죠. 아마 하나님이, 죄가 더 많아서 그 사람들을 그렇게 죽여 버렸을 것이다. 그래 놓고서 자기들의 하나님은 어떻게 취급하는 겁니까? 죽일 수 있는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고, 그 다음엔 하나님 어떻게 그럴 수가 잇느냐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그 이야기는 하나님을 안 믿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묻는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이야기했으면 속이 시원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두 사람에게 말씀하신게 뭡니까? 결국은 너희들과 모든 갈릴리 사람들과 그렇게 모욕적으로 죽은 사람들의 죄가 어떤 사람은 더 많고 덜 한줄 아느냐, 그렇지 않다 이거죠.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이 뭡니까?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아니라.’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이 교회에서도 어떤 사고가 일어나서 교인이 자동차 사고로 다쳤거나 흑인이 들어와서 총으로 쏴서 죽였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 잘 믿는 것 같았는데 그거 그렇지 않았구만.’ 이렇게 자동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즉, 나보다는 못했으니까 죽었다. 이렇게 자동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는데 예수님의 말은 뭡니까?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이게 좀 무시무시한 얘긴데 해석을 잘 해야 됩니다. 그 다음에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13:4
이건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마 그 당시에 실로암 이라는 곳에서 망대가 무너지면서 그 아래에 있던 사람들 18명이 다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보통사람들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 18명이 다 죄가 많아서 벌받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뭐예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 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의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눅13:4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외와 같이 망하리라」5
좀 섬찟하죠? 너희도 회개치 않으면 아마 다음 달 쯤 어디 치어서 죽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성경이 엉망진창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렇게 죽거나, 이렇게 살아 있거나 하나님을 알지 못한 사람은 그렇게 죽는 것이나 지금 현재 살아있다고 숨쉬고 왔다 갔다 하는 것이나 다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됩니까? 그래서 이미 멸망했거나. 너희들이 좀 있다가 멸망하거나 뭐가 다르냐 이거죠. 죄가 더 있고 덜 있고를 너희들이 왜 이렇게 따지냐 이겁니다. 네가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 만났느냐, 하나님을 정말 만났느냐는 데에 그 초점을 두어야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자꾸 아니라고 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도 죄를 좀 더 지으면 내일 모레쯤 그 죽은 18명의 사람들처럼 어디 지나다가 재수 없이 축대가 무너져서 가는 수가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하면 성경이 엉망이 된다 이겁니다. 그것에 대해 이미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 죽은 사람이나 우리나 똑같다는 거죠. 그렇게 해서 죽은 거나, 지금 살아있는 건, 생명없는 인생으로 살고 있을 때는 다 똑같다 이거죠. 멸망이라 이거죠. 먼저 가나 늦게 가나 그 차이밖에 없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발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이 말입니다. 안 돌아오면 쳐죽인다는 얘긴 아닙니다. 그걸 여러분이 확실하게 해야됩니다.
우리 딸들이 와서 자기들은 쵸코렛 생각 전혀 없는 사람이나 된 것처럼
“아빠, 데이빗이 쵸코렛을 먹었어, 그런데 우리는 안 먹었어.”
그래놓고는
“아빠, 데이빗이 내 방 침실 목욕탕에 숨었다.”
그러면서
“잡아서 혼좀 내줘.”
자! 자기들은 혼날 이유가 없고 그것을 먹은 데이빗이 혼나야 된다는 겁니다. 망대가 무너져 치어서 죽어야 된다는 얘기죠.
성경 재미있죠! 성경이란 것은 우리의 윤리 도덕 사회에서는 아무 죄가 아닌 것처럼,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그것을 파 해칩니다. 분명하게 죄가 뭔지를 나타내시면서 용서하십니다. 우리가 성경을 모를 때는 ‘내가 뭐 죄를 졌어? 아! 내가 죄진 것이 있긴 있어. 그래 세금보고 할 때 내가 떼먹은 거 있어’. 그런 차원에서의 죄 말고 정말 아무도 찾아낼 수 없는 죄, 사단과 하나님만 찾아낼 수 있는 죄를 우리는 짓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무서워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오셔서 그걸 찾아내 주십니다. 왜? 요한복음 6장 40절.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이런 것은 아멘 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아멘이, 나 잘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성령께서 감동하셨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제 마음 속에는 ‘이녀석들, 그냥 다․․․․․․ .’ 그런데 우리 아들은 목욕탕에 숨어서 아드레날린이 나오고, 엔돌핀은 뚝뚝 떨어지고 있는 거죠. 내 사랑하는 아들의 뭐가 약해지고 있어요? T임파구가 약해지고 있는 거예요. 이제 안타까운 건 아버지입니다. 초코렛을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를 따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드레날린이 나와 가지고 T임파구가 약해져 있는 상태에서 일단 구원을 해놓자 하는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라 이겁니다. 심판하고자 함이 아니요. 구원하려함이라는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이제 아시겠죠? 아버지의 뜻을, 하나님의 뜻을 아시겠죠. 그런데 제가 목욕탕에 쓱 나타나면 그 아이가 뭘 하겠어요? 목욕하는 척 할거라 이겁니다. 물 칠해가며….
“목욕할거야?”
그러면
“응.”
그럴 겁니다. 그러면 죄가 더 복잡해집니다. 죄인들을 그렇거든요. 그렇게 복잡해질 것을 아니까 하나님 아버지도 모르는 척하고 ‘어디 있느냐’하셨던 것처럼, 저도 ‘데이빗 어딨어?’ 하고 아주 목소리를 부드럽게 해볼 때, 이 성경을 통해 그 당시 하나님의 심정을 성령으로 이해하게 됩니다.
“데이빗아!”
대답이 없어요. 그래서 제가 화장실 있는 곳을 들여다보니까 목욕탕 안의 샤워장에 요렇게 꼬부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 보여요. ‘참! 저 녀석이 불쌍하다. 지금 엔돌핀이 다 떨어져서 조마조마 해 가지고 T-임파구가 다 약해져 있는데 아버지한테 탁 나오면 T-임파구가 다시 강해질 것 아니야.’ 빨리 이 사랑하는 아들을 구원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가서
“여기 있구나.”
하면 이 녀석이 놀랠까봐 목욕탕에 대고 다 보이는데도 안 보이는 척 하면서
“데이빗 어디 있냐?”
하는, 그 목소리가 자상하고 부드러워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한다는 생각이 얼핏 든 모양이예요. 그 아버지의 사랑의 음성을 듣고서 유리문이 조금 열려요. 너 여기서 뭐하니? 그랬더니, 가끔 자기는 여기 이렇게 들어온대요.
”에구, 이녀석아! 쯔쯧…“
모든 것을 감싸주고 사랑하고 또 오래 참아야 돼요. 그래서 그 목욕탕에서 야구하자 했더니 안 한 대요. 그러니까 아직도 아버지와 불편한 거예요. 뭘 안 했으니까? 회개를 안 했으니까요. 아버지는 이미 용서를 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창세기부터 용서했어요.
한데 회개라는 것은 믿어야만 나오게 돼 있습니다. 회개하고 믿고 구원받고 이 순서가 아니라 이미 구원받고 용서받고 그것을 깨닫고 믿으면 회개가 나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걸 반대로 알고 있습니다. 반대로 이해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는 논리적이죠. 그런데 성경의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늘의 원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용서를 깨닫고 그것을 믿고 그 다음에 회개한다 이 말입니다. 제가 야구를 하자고 그랬더니 이 녀석이 그대서야 하는 말이
“아빠, 나 쵸코렛 먹었어.”
그래요. 그래서 아버지의 선하심이 우리를 회개에 이르게 한다 이 말입니다.
로마서 2장 한번 보실까요. 4절,
「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즉 무서워서 겁이 나서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자하심이 너희를 회개에 이르게 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벌서 용서라는 인자하심이 나를 회개로 인도한다 이겁니다. 그렇죠? 창세기 3장으로 다시 갑시다. ‘어디 잇느냐?’ 라고 물으시는 하나님. ‘어디 잇느냐?’ 하는 질문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하신 말씀 중에 제일 처음 나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네가 하나님 안에 잇느냐, 숨어 잇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 숨을 쉬는 동안에 일평생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어보실 중요한 질문입니다.
저는 부부싸움 할 때 이 질문을 듣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뭐라고 그러면, 예수님이 저보고 ‘네가 어디 잇느냐?’ 그래서 제가 “주여! 내가 하나님 편에 있게 하소서.” 합니다. 그래서 부부싸움을 할 때도 먼저 기도를 하고 해야 돼요. 항상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우리가 숨을 쉴 때마다 들리는 질문이 돼야 합니다. ‘주여 내가 주의 품에 있나이다.’ 요한복음 맨 끝에 나오는 질문하고 비슷한 질문이예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가 사랑한다고 그러지 않아요. 뭐가 한다고 그래요? 성령이.
그래서 ‘이 부부싸움이 끝날 때까지 내가 주님 편에 있기를 원합니다.’하면서 부부싸움이 끝나면, 멋있습니다. 정말 멋있어요.
이렇게 안되고 서로서로 하나님 밖으로 나가면, 끝에는 수라장이 되는 거지요.
“뭐, 내가 그 말 한 마디 했기로서니 말이야… 여편네가 …”
“뭐, 당신이 여편네라고 했어…?”
엉망진창이 되는 거죠. 한 사람이 그렇게 흥분하더라도 한 쪽에선 ‘네가 어디 잇느냐?’하는 하나님의 질문을 꼭 듣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렇게 그 질문을 의식하면 그것으로써 부부싸움을 사실상 끝난 겁니다. 그리고 승리는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걸로 끝납니다.
그런데 나이 많으신 부부들은 그렇지 않지만, 우리 젊은 부부, 특히 신혼부부들 있잖아요. 새로 결혼해 놓으니까 서로 서로 잘 몰라요. 우리 성경 공부의 목적이 사실 그런 것 아닙니까? 부부싸움 안 하는 방법…등, 제가 교회에 가서 소위, 과정 공부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한심해요. 말만 합니다, 말만. 그래선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사랑을 이야기하고, ‘어디 잇느냐?’하는 질문은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잇느냐?”하는 질문을 항상 하십니다. 제가 강의하는 도중에도, 성경 공부하는 도중에도,
“성경을 잘 푼다고 자랑을 하고 싶어서 하느냐? 정말 네 쪽에서 하느냐? 누구 쪽이냐?”
하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경공부에 있어서, 인간이 잘못하게 된 책임이 사탄에게 있습니까, 인간에게 있습니까? 하는 질문을 하셨느데, 그 책임이란 단어가 문제가 있습니다. 책임이란 단어를 성서적인 입장에서 쓰셔야 합니다. 책임이란 단어를 쓰실 때 지금 우리가 세상적으로 알고 있는 차원에서 책임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책임이란 말이 소위 ‘블레임(blame)'이란 말입니다. 누가 벌을 받아야 되느냐 하는 그 차원에서 우리가 책임이란 말을 쓰고 있어요. 그런데 사실상 책임이란 말을 잘 분석해 보면 참 은혜로운 말입니다. 결국은 책임이란 말부터 우리가 교정을 해놓아야 됩니다.
책임이란 말이 무슨 말입니까? ‘리스판스빌리티(Responsibility)'입니다. ’Respose'(??)라는 말은 ‘반응한다’는 이야기예요. ‘어비러티(ability)' 이것은 ’할 수 있는 능력‘이란 말입니다. ’Response'와 ‘ability' 이 두 개를 붙였거든요. ’반응할 수 있는 능력‘이란 말이 지금 현재 우리에게는 책임이란 말로 변질 돼 있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성경 공부를 통해서 이 말을 여러분들이 깨닫기 쉽게 하기 위하여 공부를 하고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사단이 ‘Responsibility(책임)’이란 말을 가지고 인간에게 짐을 지워 놓고 있어요. 네가 지은 죄를 네가 책임지라는 겁니다. 죄짐을 지라는 이야기예요. 십자가라는 것이 없을 때는 지금 현재 우리가 쓰는 책임이란 말이 옳은 말이 됩니다. 책임을 져야된다. 누구 책임이냐 그런 걸 가지고 고민을 하기가 굉장히 쉬워요. 벌써 책임이란 말만 나오면 자동적으로 십자가가 없어집니다. 벌써 나의 책임이냐, 사단의 책임이냐 따질 때는 예수님께서 책임진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하는 얘기예요. 그러면 사실은 그것이 내 책임이고 또 나를 꼬여서 그런 죄를 짓게 한 것은 사실 사단의 책임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없을 때 책임은 내게로 돌아오고 결국 사단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렇게 책임을 지워 놓으면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잃어버리니까 결국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십자가며, 그렇기 때문에 죄인이 자기 죄로 병이 나도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책임을 지기 위하여 내가 병을 주었다고 하십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책임이란 것은 가만히 따져보니까 반응을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누가 벌을 받느냐 하는 게 아니고 누가 반응을 할 수 잇느냐 이겁니다. 제가 예전에 하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을 알기 전에 예수님께서 포도주를 들고 ‘이것은 너희 죄를 사하는 내 언약의 피이니라.’ 그러시고는 ‘너희들이 다 마시라.’ 할 때 그것에 제가 반응할 수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반응 못했습니다. 무슨 소린지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제는 제가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지고 그 생명을 내게 주신 것을 감사하게 되고 십자가를 깨고 보니 ‘다 마시라’ ‘네가 어디에 잇느냐.’ ‘그렇지 않다’이런 말들이 나를 반응하게 한다 이 말이에요. 나를 기쁘게 한다 이거죠.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옛날에는 없었는데 이제는 있다 이거죠. 그것이 누구의 능력입니까? 사실은 성령의 능력이거든요. 그래서 이 책임이란 말은 내가 하나님의 그 사랑에 대해서 반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말은 줄여서 현재 우리가 쓰는 책임이라는 단어를 거기에 대입하면, 이상구는 드디어 임질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이거죠.(??) 그래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란 말은 벌을 내가 받아서 내가 죽어야 되는 것인데 십자가를 보니까 그 책임이 하나님한테 돌아갔어요. 하나님께 돌아갔으니까 내가 기쁠 수밖에 없고 감사할 수밖에 없는 그것이 내 책임이 됐다 이거죠.
‘Responsibility'란 말속에는 벌을 받아야 된다는 말은 하나도 없습니다. 짐을 져야 된다는 뜻도 없습니다. 그저 반응하라. 무엇에? 하나님이 내 짐을 진 그것에 대하여 반응하라. 즉 책임이 옮겨진 것에 대한 반응이 내 책임이지 내가 죄짐을 지고 벌을 받는 것이 아니다 이거죠. 십자가 이전에는 그랬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고자 하는 그 선한 행실은 내가 하려해도 안 되는데 내가 하기 싫어하는 악한 행실을 내가 하고야 마는구나. 즉, 내가 책임이 있으면 그 말을 하는게 무서워서 못 하는 거예요. 못하는데, 그 말하는 이유를 보니까 로마서 7장에서 사도바울이 뭐라 그럽니까?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라」
이게 내 책임이라면 누가 나를 구원할 수 있겠느냐 이거죠. 그런데 알고보면 책임이 어디로 갔어요? 예수께로 갔으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함이 없나니. 8장 1절부터 새 생명이 나옵니다. 아멘입니다. 내 탓이었는데 이제 이것이 십자가가 있으므로 해서 내 탓이 아니란 얘깁니다.
십자가 없이 내 탓이요 할 때 그 것이 스트레스가 됩니다. 지금 내 탓이요 라고 하는 말이 한국 천주교측에서 사회운동으로 일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 탓이요. 라는 말은 십자가가 있고 ‘내 탓이요’가 되어야 합니다. 사실 내 탓이요 라는 말이 옳습니까, 틀립니까? 옳습니다. 옳은데 사람이 내 탓이요 라고 하며 살 수 없게 돼 있다 이거죠. 그래서 내 탓이요를 깨닫고 그 다음엔 십자가를 보는 단계가 돼야한다 이 말입니다. 결국은 내 탓이지만 그 탓을 누가 책임졌어요? 십자가에서 책임져 주신다는 그 선까지 발전해야만 됩니다.
내 탓이요 운동은 하나의 사회적인 운동은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정화운동은 될 수 있지만 인류에게 하나의 구원의 소망을 주는 운동으로의 차원까지는 못 가고 잇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회운동화 할 때 그 차원에서만 우리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순수한 성서적인 입장에서는, ‘내 탓이요’에서 끝나면 사람들이 다 죄책감에 빠져 버립니다. 왜냐하면 구세주가 없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없이 전부 내 탓이요 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각 교회마다 문제점이 다 있는데 이것은 제 개인적으로는 천주교의 문제점이라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고, 텅 비어있는 십자가보다는 항상 예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있는 장면을 보는 것이 천주교입니다. 그래서 ‘내 탓이요’운동이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머물러 있게되는 문제성이 있어요. 이제 그것이 발전하면 고난받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어집니다. 왜? 모든 책임을 지고 땅에 묻혀서 돌아가시고 그 다음에 부활하여 올라 가셨다하면 우리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차원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항상 내 마음속에 양심의 가책을 받게하는 그 선이 아니라 용서받고 나를 구원하시고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나도 부활할 것이다 하는 그 차원까지 올라가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렇지만 현재 천주교에서도 그 차원까지만 믿고 있는 사람들만으로 교회가 차있는 건 아니죠. 우리가 믿는 것과 똑같이 믿고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개신교 내에서도 내 탓이요만 알고 있는 신자들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할 때 드디어 그 사랑의 음성을 듣고 뭐가 나옵니까? 아담이 나옵니다. 10절,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대답이 옳은 대답입니까? 틀렸습니다. 뭐가 틀렸습니까? 여러분이 아담 같으면 이 순간에 어떤 대답을 하겠습니까? 따먹지 말라는 것 제가 따먹었습니다. 그러면 간단해요. 간단한데 이 죄인들이 그 죄의 본질을 숨긴다 이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이유가지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그 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시는 그 부드러운 음성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멘.
첫댓글 순간마다 당신의 찾으시는 음성에 반응하기를.. 숨쉴때마다 십자가에 짐을 내려놓기를.. 작은 것도 당신과 함께 행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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