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말라기라는 책은 하나님과의 천년 관계가 무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그런 참 가장 참담한, 신구약 66권 중에서 가장 참담한, 그래도 지난 번 바벨론 잡혀갈 때는 70년이 차면 돌아와서 어떤 교육받고 오면, 어떤 희망이나 가져볼 수 있는 여지나 있었지만, 지금은요 아무 희망이 없는, 하나님으로. 앞을 보세요. 하나님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 다 해봤어. 때려도 보고 달래도 보고 복을 줘보기도 하고, 바벨론 포로잡혀가서 그 특수교육도 해보고, 성경통독까지도 해봤어. 이렇게까지 했는 데도 결론은 이렇게 나오니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길은 아무 것도 없어요.
여러분, 우리가 그 동안에 서양신학자들로부터 전해 받은 것은 참 어이없는 걸 전해 받았습니다. 형편없는 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그걸 신학이라고 전해 받아가지고, 제가 제일 충격받은 것은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거에요. 우리가 여태까지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할 때, 아가페라고 배웠죠.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다. 그리고 남녀 사랑은 에로스고, 우정 같은 그런 것은 필레아고, 필레아, 펠레아고, 그 혈통의 사랑, 피의 사랑, 혈육의 사랑은 스톨게다. 네가지 사랑이다. 그거 다 엉터리입니다. 나도 다 그리 배웠죠. 전부 그런 줄 알았죠.
성경을 읽어보니까 아닌 거에요. 그렇게 말하면 안돼요. 그 하나님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아닙니다. 그런 사랑 없어요. 그리고 주기만 하고 바리지 않는 사랑, 무조건 사랑은 자기 정려적, 자기 희생적, Devine Love라고. 그건 아주 특별한 이나, 하나님이나 할 수 있지, 우리 인간은 감히 할 수도 없는 사랑이다 라고 이런 식으로 떠들어 올리는 그런 걸, 진리인줄 알고 그게 사실인줄 알고 배웠어. 우리 다 그렇게 배웠죠. 그런지 아닌지 확실하게 냉철하게 봅시다.
만약에. 학생들 수군수군하지 말고 이리 봐요. 그리 수군수군해서 답이 나오는 게 아니야. 만약에 하나님이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면 지옥 아무도 안가야 되죠. 그렇지 않아요?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면, 지옥을 아무도 안가야 될거 아니에요.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면 속을 썩일 때도, ‘나는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니까, 너희를 때리지도 않겠고, 죽이지도 않겠다.’ 안죽여야 하는데 얼마나 많이 죽였는데요. 칼과 기근으로 염병으로 죽이는데, 에스겔서 봤지 않습니까? 네 몸에 있는 터럭을 다 뽑아서 3분지 1은 칼 맞아 죽을 것이고, 3분지 1은 불에 타 죽을 것이고, 3분지 1은 온천하 만국에 흩어놓고 칼이 따라다니면서 죽이게 할 건데, 그 무조건적 사랑이에요? 구약 성경을 통 보도 안하고, 십자가에서 그저 들리는 예수님 말씀이라던지, 거기 한편 강도를 사하였다 던지 그런 것만 보고, 아주 성경을 부분적으로 보고는 제멋대로 하나님을 아가페라는 어떤 기계에 집어넣어 가지고 꼼작도 못하게 만들어가지고, 화도 못내게 만들고, 진노도 못하게 하고. 이런 식으로 만든게 서양 그 어설픈 신학자들이에요. 어림도 없는 소리야.
한번 더 여쭈어보죠. 우리가 이제 적어도 예언서, 구약시대 율법서, 역사서, 예언서 이렇게 봐왔으니까, 하나님이 질투를 하세요? 안하세요? 엥?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자기를 소개할 때, ‘나는 질투가 많다. 알아서 기라. 알아서 기어 그러니까. 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처음부터 그랬어요. ‘전혀 나는 질투 같은 거, 내가 아가페 사랑을 하지, 쩨쩨하게 하나님이 되어가지고 질투 그런 거 하겠나.’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나님은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이야. 질투의 화신이야 완전히. 여러분, 질투하는 사랑이 바로 에로스라는 사랑이야. 남녀간의 사랑, 이런 인간이 갖고 있는 이런 질투하는 사랑이 에로스라는 사랑인데, 하나님은요 심한 질투, 아니 어쩌면 구약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질투 이야기입니다. 또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질투이야기는 사랑이야기에요. 무슨 이야기냐면, 사랑하는 것만큼 질투하는 것이고, 질투하는 것만큼 사랑하는 거에요. 질투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사랑하지 않으면 질투하지 않습니다. 나는 돌멩이 같은 거 별로 질투 안해요. 돌멩이 뭐 내가 사랑하지 않으니까. 그래 사랑하면 질투하는 거죠.
그래서 제가 책을 써놓은 게 있습니다. 사무실에 가면 ‘신학은 사랑학이다’ 하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은 10년에 걸쳐서 자료를 정리한 거에요. 그것은 순전히 참고문헌도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사랑학이라는 책이 안나왔거든. 한번도. 기독교 역사상에 사랑학이란 단어가 없고, 웹스터 사전이나 옥스퍼스 사전이나 그 어떤 영어사전에도 사랑학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사랑학이란 단어는요, 제가 만든 신조어에요. 신조어. 신학 신조어야. 아가펠로지라는 그 용어를 제가 만들었어요. 그래서 신학은 사랑학이다 라는 책을 썼는데, 한 10년 자료를 모아서 정리를 한 건데.
무슨 이야기냐면, 지금은 컴퓨터 성경이 있으니까, 히브리어, 헬라어 원전 분해 성경이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그냥 뚝딱하면 다 나옵니다. 아가페라는 단어가. 신약에 아가페라는 단어가 주욱 금방 다 나오는데, 그 용례, 용법, 사례. 이 아가페라는 단어를 어떤 때 썼는가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사랑만 아가페로 표현한 게 아니고요, 대부분 아무데나 썼어요. 네 이웃을 아가페하라. 네 아내를 아가페하라. 네 원수를 아가페하라. 하나님을 아가페하라. 꼭 같습니다. 아무데나 써먹는 단어가 아가페야. 그리고 여러분들 집에가서, 신학을 하신 목사님들은 금방 찾아볼 수 있어요. 아가페 용례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할 때만 쓴 게 아니고, 아무 때나.
여러분 보세요. 우리 집 아이들이 ‘아빠, 사랑해요.’ ‘그래 나도 너희들 사랑한다.’ 다 쓸 수 있는 얘기죠. ‘여보, 사랑하오.’ 쓸 수 있는 거죠.‘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 쓸 수 있는 거에요. 그런 것처럼 이 사랑이란 아가페라는 것이 일반 용어야. 특수 용어가 아니고. 영어같으면 Love야. 우리 같으면 사랑한다 이렇게 하는 거에요. 그 사랑한다는 말안에 대상에 따라 그 사랑이 여러 모양으로 나타나는데, 그 대상에 따라서 어떤 대상에게는 에로스라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그 아가페가 어떤 대상에게는 필레아로 나타나고, 그 아가페가 어떤 때는 스톨게로 나타나는 거야. 연인에게는 에로스라는 모습으로 아가페하는 것이고, 친구에게는 필레아로 아가페하는 것이고, 그 혈육에게로는 스톨게로 아가페하는 거야. 이걸 다 아가페. 통틀어서 아가페. 다시 말하면 아가페 안에 에로스, 필레아, 스톨게가 함께 내포된 통전적 이야기지, 그것이 특수한 게 아닌데, 그걸 모르고 서양신학자들이 다 실수한 건데, 이건 근본을 실수한 거야.
영국에 대문학기독교 문인 중에 C.S.루이스라는 유명한 사람이 있죠. 그 C.S. 루이스도 순 책을 엉터리로 써놓았어. 그 책이 나한테 있거든요. 네가지 사랑이라고. 그래가지고 아주 아가페하고 에로스는 아주 매우 상충하는 것이고, 에로스는 아주 이기적이고 저질적인 사랑처럼 이렇게 묘사해 놨습니다. 그건 성경을 제대로 못본 거에요 전혀.
제가 발견한 것 중에 제가 참 충격적이었던 것은 하나님이 에로스의 원형이에요. 우리 인간에게 있는 에로스는 복사판입니다. 하이 실상이고, 우리는 형상이에요. 하나님이 진짜고, 우리는 사본이야 사본. 원본은 하나님이고, 하나님께 있는 에로스가 그게 원본이고, 우리 인간도 하나님 닮아가지고, 부전자전으로 똑같은, 질은 똑같아요. 거의. 본질은 똑 같은데, 우리 인 간이 죄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죄성이 에로스에게 잘못 작용해가지고 가끔 이상을 일으키는데, 한없이 아름다운 거야. 여러분, 이게 질투하기까지, 어느 정도 질투하느냐. 죽여버리죠 완전히. 질투가 심하면 죽입니다. 여러분, 사랑 때문에 죽이고 살리는 게 인간 세계에도 있잖아요. 하나님도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죽여버리죠 그냥 다. 그게 바로 하나님께 있는 그 에로스, 진한 에로스, 죽여버릴 만큼 질투하는 그 에로스가 원본이 원판이 하나님 것이고, 우리가 복사판이고, 하나님은 실상이고 우리는 형상이라는 거에요. 여호와의 질투의 불에 소멸하리라. 여러분, 지옥불도 하나님의 질투의 불이에요 그게. 끝까지 영원히 하나님을 대적하면 영원히 질투하고 영원히 진노하시는 거죠. 그래서 지옥이 만들어진 거 아니에요? 그래서 이 한가지만 해도 그야말로 지금까지 그 모든 신학의 근본을 뒤흔드는, 신학의 지축을 뒤흔들어놓는 그런 이야기가 될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어디 가서 뚝 따가지고,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읽어 이야기도 안하는데 꺼내면 안됩니다. 전혀 대화도 안되고, 이해도 못하고, 오해만 쌓으니까, 또 여기 가서 뾰족한 것 들었다고 어디 가서 또 엉뚱한 소리했다가, 이단 삼단 지리산파 해가지고 굉장히 어렵게 될 수 있으니까 조심해야 되요. 그런 건요. 충분히 창세기부터 여기까지 읽어왔다면 누구든지 납득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고 밑도 끝도 없는 소릴 해봐.
다음에 우정도 하나님이요, 우리를 친구처럼 사랑해요.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내 친구라고 그러죠? 내 벗 아브라함이라고. 내 친구. 그러니까 우정도 필레아도 하나님께 있는 게 원형이야. 원본이야. 예수님께서 제자들 보고 이제부터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않고 뭐라고? 친구라 하였노니, 이는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알게 하였음이라. 왜? 친구니까. 종은 주인이 뭐하는가를 알지 못한다. 친구이기 때문에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알게 했다는 거야. 요나단이 자기 아버지 사울에게 들은 일급 비밀을 다윗에게 다 털어놔요. 왜? 친구니까. 친구처럼 사랑하니까. 그래서 그 필레아라고 하는 이 우정, 영원한 친구같은 우정도 따로 명확하게 나눠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이걸 보세요. 앞을 봐요. 좋은 부모는요 부모도 친구 같애. 그렇죠. 아직도 안그렇구만 보니까. 좋은 부모님은 부모님도 친구 같죠. 딸들에게 엄마도 친구처럼 되면, 좋은 엄마야. 맞아요? 좋은 딸은요 엄마 친구가 되주면 좋은 딸이야. 좋은 아들은 아빠의 친구가 되주는 거에요. 좋은 아들은 아빠의 친구가 되주고, 좋은 아빠는 아들들하고 친구하 고 같이 대화가 되고 이래야 되요. 이래서 그 하나님하고 우리하고도 정말 친구처럼. 죄짐맡은 우리 구주 어찌 그리 좋은 친군지. 어찌 좋은 친군지. 그런 우정이라는 그런 사랑도 하나님께 있는 그런 우정이 그게 원형이고 원판이고 우리는 형상이고 복사판이야. 하나님이 본체고 우리가 첼렘과 데모트. 우리가 모양과, 모형과 모양이라. 모형과 형상이죠 우리에게 있는 게. 이런 이야기는 창세 이후로 아무도 입에 담아보지 못한 소리입니다. 제가 평생을 성경을 연구해가지고, 저는 신학을 이론으로 완성했어요. 끝냈습니다. 신학은 사랑학이다 라고 끝을 냈어요.
세 번째, 하나님은 우리를 자식같이 사랑해. 맞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아닙니까? 우리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 진짜 아버지고, 우리 육신의 아버지는 모형 아버지에요. 임시아버지, 일생동안의 아버지고, 영생 아버지는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죠. 그리고 예수님은 꼭 우리 형님 같죠? 사랑하는 형님같이 힘드는 거, 어려운 거 자기가 담당하고.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 어머니 같아요. 애타가지고 근심하시고, 대신 간구하시고 탄식하시고 배려하시고, 또 변호하시고 도와주시고, 세상 끝날까지 항상 그저 노심초사 애타하시고, 이 성령. 네 부모를 근심시키지 말라. 성령을 근심케 하지 말라. 똑같애요.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안에 있는 에로스, 필레야, 또 스톨게가 그게 다 하나님께 있는 그게 원형이고, 원판이고, 우리 인간들에게 있는 이게 다 모형이고, 복사판이야. 형상이야. 그래서 왜 우리가 그 하나님의 교제의 대상으로 창조되었으면서도, 천사가 되지 않고 인간이 되었느냐하면요, 인간이 되어야만, 인간으로서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으로 살아봐야만 이걸 배울 수 있어요. 스톨게를 배울 수 있고, 우정을 또 필레아를 배울 수 있고, 에로스를 배울 수 있는 거야.
천사? 글쎄 뭐 천사도 어느 정도 이론적으로 상식적으로 뭘 좀 아는지 몰라도요, 우리처럼 체험적으로 사랑을 경험하기는 어렵습니다. 천사가 뭐 연애할 텍도 없고, 천사가 무슨 결혼할 리도 없고, 천사가 질투하거나 무슨 애를 낳거나. 천사도 뭐 우정은 있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우정이 꼭 무슨 동갑내기 우정, 이런 것만 우정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저는 저를 친구처럼 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나이가 10살, 20살 아래도 있고,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있고 그래요. 아무 나이에 상관없이 친구야. 제가 여자하고는 친구가 되는가 안되는가 그리 해보니까, 여자도 친구가 되요. 그리스도 안에서 여자인데도 친구가 되더라고 보니까. 저 스위스에 가 있는 사람은 저보다 나이는 10살 아래고, 그런데 오랫동안 평생 저렇게 우정처럼, 딱 오면 여길 찾아와요. 일년에 한두번씩 꼭 찾아오고. 그리 같이 있으면 즐겁고, 그래서 진정으로 그 참 필레아가 제대로 개발되면요, 아버지하고도 친구가 되고, 딸하고도 친구가 되고, 어머니, 시어머니하고도 친구가 되고, 며느리하고도 친구가 되고 이게 이런 친구, 이런 필레아도 아주 중요한 감정이라. 이게 없으면요, 못 삽니다. 사람이. 여러분, 그 삭개오 보세요. 돈이 많은데 필레아가 충족이 안되는 거라. 친구들이 여러분을 인정 안해주고 따돌려봐요. 요즘 완전히 이 학교에서 일어나는 게 친구들이 한 사람을 고립시켜서, 그게 없어도 친구 따로 없어도 못사는가 싶어도, 그 어렵습니다. 친구들 전체가 하나를 고립시켜서, 한 영혼이 고립되면요, 굉장히 영적으로 위험한 상태야. 성도들이 그래서 교회에서도 누구를 따돌려버리고 좋아하는 사람만 좋아하고 그러면 안돼. 그 원만한 주안에서 필레아가 잘 이루어지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람, 천사가 되지 않고 사람이 된 것은 첫째, 어린 아이 때는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한량없이, 거의 참 뭐 그 조건없이 쏟아붓는, 그냥 자기 자식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게 여기는 그런 부모님의 사랑을 한없이 쏟아붓는 사랑, 그런 사랑 받으면서 역시 사랑 배우는 거야. 받으면서 사랑 배우는 거. 그게 인생이고 그게 바로 신학이라.
사랑 받으면서 사랑 배우고, 이제 이만큼 커서 이성에 눈을 뜨면서, 어느 날 여자를 봤는데, 어느날 그 남자를 봤는데, 막 가슴이 두근거리면서, 여러분, 그 처음 어떤 사랑을 느끼면서 첫사랑 한번 생각해 보세요.얼마나 사무치고 얼마나 가슴치는 이성의 사랑, 이걸 최고의, 최고 수준의 아름다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고,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천사가 감히 상상도 못할, 그런 아름다운 에로스라는 사랑이, 그렇게 아름다운, 제일 뜨겁고 제일 아름다운 제일 황홀한 그런 사랑이 바로 하나님 배우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아가서 같은 경우도 이거야 말로 신학 중에 신학이다. 가장 신령한 신학. 여러분, 인생을 살아갈 때 그래요. 믿음도 필요하고 소망도 필요한데 그 중에 제일은 뭐라고 그래요? 사랑이라는 거에요. 왜냐하면 사랑이 있어야 인생을 아름답게 살 수 있어요. 아름답게. 믿음이 있으면 소신껏. 소신이라는 것이 믿음을 두고 살아가는 게 소신이야 소신. 믿음이 있음으로 해서 소신껏, 그래야 힘차게 살아갈 수 있어요. 또 사람이 소망이 있어야 인생을 또 즐겁게, 소망이 있으니까 즐겁게 살 수 있는 거죠.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이 있어야 인생을 아름답게 살 수 있습니다. 사랑만이 아름답게 하는 것이고, 참 행복하게 하는 거야. 그 사랑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부모님의 사랑, 부모님께로 받는 사랑, 자녀에게 쏟아 붓는 사랑, 그 다음에 우정도 있어야돼 우정. 여러분, 친구가 없고 교회의 성도의 교제가 우정으로 되지 않고 그러면요, 교회 가서 상처만 주고 받고 그러면, 그렇게 괴로울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런 걸, 성도들 이런 게 진짜 영성 훈련이야. 참 사랑의 감정을 잘 가다듬어서 서로 사랑하는 게, 이게 영성훈련이지, 신비운동이나 귀신의 방언운동, 그건 정신나간 운동이에요. 그게 다.
정말 사랑하게 하고,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우정과 애정과 연정과 이런 걸 잘 개발해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배워가는 과정이 진정 신학인데요, 어떻든 이성을 느낄 때, 그리고 그 상대방이 남자고, 상대가 여자인데, 나중에 그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순간에는 부끄러움도 두려움도 없이 자기를 상대에게 내어주면서 결국 하나가 되는데,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그 신비한 순간에 그 사랑의 열매로서만 생명이 탄생하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해 놓은 거에요. 그래서 만약에 새생명이 태어나면, 그렇게 사랑의 열매로 태어난 생명에게 옛날에 내가 아버지, 어머니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한량없이 그대로 다 쏟아부으면서 사랑주면서 또 사랑 배우는 과정이 역시 하나님 배우는 거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그러니까 결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고, 아이를 길러보지 않고, 자녀를 사랑해보지 않고, 신학을 그게 아닙니다. 그건 철학이 되요. 철학. 그래서 말인데, 교황 총각 빨리 장가 가라고 그래. 김수환 총각도 빨리 장가 가보고, 총각이 무슨 신학이 되겠어요? 그게? 그건 기독교 철학이 되고 말아요. 신학이 아닙니다. 진정한 신학은 사랑학이 신학이야. 하나님은 사랑이니까. 그저 인류애, 무슨 동정, 이런 거, 그것만 갖고는 안되고, 그건 일부에 불과해 일부.
그리고 그러니까 에로스, 필레아, 스톨게, 이게 전부 다 원형은 다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그걸 우리가 경험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천사가 아니고 사람이라는 거야. 사람도 독신주의자가 아니고, 동생연애하는 사람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원리에 맞게, 한 남자가 한 여자를, 한 여자가 한 남자를 만나서 반듯이 자녀를 여럿이 낳아봐야 돼. 그리고 자녀를 길러서 그 자녀에게 사랑을 쏟으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을 배우는 거에요. 그게 진짜 신학이야. 여러분, 이런 신학을 하려면 어디로 가야 되겠어요? 에스라하우스가 아니고 집으로 가, 집으로. 빨리 집으로 가고,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야 돼. 이런 신학을 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제가 그 신학은 사랑학이다 하는 책을, 저는 신학에 저의 신학을 완성을 했어요. 이론으로는 끝을 냈습니다. 더 이상 어렵게 할 게 없고, 더 이상 높은 신학이 없어요. 그게 최고봉이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니까, 더 이상의 학문이 없어요. 여러분, 여러분 조금 듣다가도 참람하도다 할지 몰라도, 마르틴 루터의 신학이 믿음의 신학이야. 이신득의. 오직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받는 신학. 이게 이신득의의 신학이죠. 믿음의 신학.
그리고 지금 튀빙겐 대학의 쬐렌 몰트만 교수가 소망의 신학, 희망의 신학을 했다고 해서 세계 석학이 되어가지고, 온 세계 유명한 대학에서 막 초청을 하고 있는데, 여러분, 그보다 더 높은 차원의 신학이 지리산에서 완성되었다는 거 아닙니까? 신학은 사랑학이다. 사랑의 신학이 최고의 신학이에요. 여태까지 그 사랑학이라던지, 신학은 사랑학이다 하는 말을 입에 담아본 사람이 없잖아요 아무도. 그래서 이제는 제가 이런 사실을 처음에 발견했을 때는요, 얼마나 또 마치 하나님하고 첫사랑처럼 가슴 떨리게, 야 내가 성경, 이 하나님의 연애편지를 새로 읽어봐야 되겠다.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전부, 완전히 이 그 하나님의 사랑의 말씀으로 우리 눈빛을 좀 씻고, 창세기부터 근본부터 전체로 새로 봐야겠다. 그래 뭐, 그 설레임이란 건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죠. 다행이 그때 쯤해서 헬라어 원어성경이, 분해성경이 막 나오고 하니까, 그것 갖다가 컴퓨터로 검색이 되고 하니까, 금방 정리가 된거에요. 옛날 같으면 그걸 다 낱낱이 조사할려면요, 그 히브리어, 헬라어, 렉시콘 무슨 콘코다스 가지고 평생을 씨름해도 다 뽑아서 검증하기 어려울텐데, 지금은 아주 간단하게 정리가 되요. 금방 그저 아가페 용례가 나오고, 히브리어서로서는 보통 아하브라고 합니다. 아하브. 아하브라는 용어가 사랑의 용어고, 그 다음에 예디드 이런 말도 나오고, 제가 그 용어가 여러 가지 히브리어로서의 사랑의 용어도 뽑아보고, 헬라어로서의 사랑의 용어도 다 뽑아서 거의 다 정리를 했습니다.
그걸 보니 서양 사람들이 엉터리 신학을 한거야. 엉터리 신학. 겨우 구속사정도 그저 정리하는 그 정도 밖에 안되었어요. 믿음으로서 구원받는 어떤 길이 가느다랗게 뭐, 한가닥 구약서부터 흘러나오는 그 한가닥 주워가지고, 그게 이른바 복음주의 신학이라 복음주의. 그건 뭐 음식도 관심도 없고, 환경도 관심도 없고, 사랑도 관심도 없고, 오직 믿음으로서 구원받는다 그래가지고, 그거 밖에 그게 만족이 안되니까, 그게 무슨 신비주의나 체험주의나 은사주의로 흘러가지고 분별력도 없이 막 온갖 귀신들이 난장판 만들어놓고 교회를 말이야. 그런 걸 신학이라고 할 수 없어요. 그런 수준을 신학이라고 할 수 없다고요 제가 볼 때는요.
반듯이 창세기부터 계속해 전체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그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한 목적은 우리를 우리에게 사랑의 감각을 최대로 일깨워서 영원히 하나님하고 우리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 보고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믿기만 하라고 한 게 아닙니다. 믿음은 관계. 앞을 보세요. 믿음이란 것은 이 신뢰구축인데, 이것은 관계에,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 믿음이 관계를 다시 시작하는 출발점에 불과해요. 믿기만 하면 안되고, 믿음으로 만나가지고, 결국은 그 관계는 사랑으로 완성되는 거에요. 그리고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사랑은 끝이 없어요. 그래서 천국이 사실 영원한 거야. 여러분, 여러분 중에 혹시 아, 나는 사랑을 너무 많이 받았다. 이제 질린다. 더 이상은 못받는다 그런 사람 있습니까? 나는 사랑을 충분히 했다. 이제 더 이상은 못한다. 그런 사람 있습니까? 그건 다 잘못된 거야. 사랑은 아무리 받아도 더 받아야 되고, 아무리 해도 더 해야 되는 게 사랑이지. 그래서 천국은요, 아무리 사랑해도 끝이 없고, 아무리 해도 영원한 거에요. 영원해.
이런 사실들을요, 12제자들도 잘 몰랐어요. 구약시대 어떤 예언자도 이걸 잘 몰랐고, 12 사도도 잘 몰랐는데, 한 사람이 알았어. 12 사도 중에 요한 사도가 오래 살았어. 다른 사도들은 대개 AD. 70년경, 그 안에. 68년 그 네로황제 그 시대 거의 다 순교하고, 70년 안에 거의 대부분이 순교하고, 요한 사도만 거의 한 100년까지 살았는데, 요한이 예수님의 사랑을 또 많이 받기도 했고, 예수님의 사랑을 느끼고, 이러면서 이제 사랑의 사도로 변하는데, 이 사람도 성질이 급해가지고, 우뢰의 아들이라고 보아너게라고 이렇게 성깔 있던 사람인데, 오랫동안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고, 또 성도들을 사랑하는 중에, ‘아,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위대한 발견이죠. ‘호 데오스 아가페 에스틴.’ 하나님은 사랑이 많다가 아니고요,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야. 우리는 사랑의 지체고, 하나님은 사랑의 본체라는 거야. 하나님은 사랑의 원형이고, 사랑의 본체고, 하나님은 사랑의 실상이고, 우리는 형상이라는 거야.
그것이 우리에게 경험해서 배울 수 있는 게, 처음에는 아버지, 어머니에게로부터 사랑받으면서, 또 친구를 사귀면서, 이성을 사귀면서, 아이를 낳아서 길러보면서, 이게 전부 다 하나님 배우는 과정이야. 우리 부모님들은 부모님들이 의무가 뭐냐. 아이들 낳아가지고 그 사랑을 쏟아 부으면서 그 아이들이 영원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도록, ‘나는 너희의 임시 아버지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너희 임시 아버지고, 참 아버지 하나님의 모형에 불과하고, 진짜는 하나님이 너희의 영원한 아버지다.’ 하는 걸 만나게 해줘야 아버지로서의 임무를 다 하는 거에요.
여러분, 이 성경 전체에 이 사랑의 비밀이 이렇게 정리가 되자, 얼마나 제가 가슴이 두근거리고, 가슴이 뛰는지, 그래서 신학은 사랑학이다 하는, 저는 어마어마한. 지금까지 기독교 신학 역사, 2천년 역사에 저렇게 큰 제목을 내건 신학자가 아무도 없어요. ‘신학은 사랑학이다.’ 이런 선포를 했던 일이 없습니다. 아무도요. 제가 무식해서 담대한 줄 모르지만, 저런 선포라는 것은, 저는 신학이 딱 끝나는 소리가 났다. 이천년 들어서면서, 이천년 들어서면서 저런 걸 내놨을 텐데, ‘신학은 사랑학이다’ 하는 걸 선포하면서, 저는 기독교 사랑이, 기독교는 신학이 이제 완성됐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저는 철학도 끝냈습니다.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데, 역사의 정의를 제가 끝냈고, 철학도 저는, 저 철학은 끝이 났어요. 철학은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제일 큰 질문이거든요. 인간이란 무어냐. ‘인간은 사랑을 배워서 하나님 배워가는 과정이다.’ 저는 그렇게 끝을 냈어요. 그게 인생론이에요. 사랑을 배워서 하나님 배워가는 과정. 결국은 신학은 사랑하는 거야. 사랑학이야. 사랑 배우는 게 신학이야.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신학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믿음? 이것 보세요.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에요. 산을 뭐하러 옮기겠습니까? 환경만 파괴할 뿐이지. 온갖 만국 방언, 천사 방언 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꽹과리야 꽹과리. 소음이야 소음. 옆사람 기도만 방해하는 것이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런데 한국의 보통 방언 받은 사람은 대개 사랑이 없고 교만해. 제일 합바리 그런 그 방언의 은사를 받아놓고, 지가 뭐 성령이 된 것처럼 막 떠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요. 예언하는 지식이 있어 모든 지식과 비밀을 알았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지식은 교만의 재료 밖에 아무 것도 아니야.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내게 있는 것으로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게 있는 걸 모두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그럼 또 뭐하러 불사르겠어? 신나만 아깝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야 그게 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그 가장 중요한 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다.’ 예언도 그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는 거에요. 영원히 폐하지 않는 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거에요.
바울도 그 연세가 들어가면서 그런 쪽으로, 믿음으로 출발하지만 역시 사랑으로 완성된다 이렇게 하고, 그리고 바울이 할례도 무할례도 아니고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뿐이다. 진짜는. 진짜라는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 뿐이라는 거에요. 딴 건 중요한 게 없어요. 여러분, 성경 실컷 읽어도 이런 것이 안보였다는 거는 읽으나 마나에요. 거의 다 시간과 정력 낭비에 불과해.
그래서 요한 사도가 이런 사실을 발견하고 나니까, 요한 1서 같은데 보면요, 사랑 이야기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없습니다. 온통 요한 1서가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로 가득 차 있어요.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사 그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보내신 것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신다. 사랑은 언제까지 떨어지지 아니한다.’
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거다.’ 그 요한 사도가 이 말을 들은 것은 어느날 다 퇴근하고, 자기도 퇴근할까 하는데, 누가 똑똑하고 노크하는데, 어이구 나가 보니까 국회의원이 왔어요. 모처럼. 예수님께서 사역하는 기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사람 중에 그 인품이 훌륭한 고생한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 상대들이 상대인지라 수준 높은 이야기를 못하다가 니고데모 같은 사람이 오니까, 예수님 이야기가 그날 밤에 길어졌어요. 요한이 손님 갈때까지 퇴근 못하잖아요. 문 안에서 들었는지, 문 밖에서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다 들어보니까, 거기서 드디어 예수님게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것이다.’ 400년 전에 하나님 귀에 쟁쟁하던 소리,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께서 그 말듣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쇼크를 받아가지고 그 길로 천국으로 올라가셨는데, 천국 가서도요, 계속 하나님 귀에 400년간 계속 쟁쟁 거리는 소리는 ‘주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나이까? 주께서... 주께서... ’ 답이 없어요 답이.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내가 자기들을 사랑하는 걸 믿게 하겠는가?
앞을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이 계신 것 믿는 건 그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것 믿는 것은 하나님이 한분이신 것 믿는 것은 바리새인들도 다 믿어요. 사두개인들, 율법학자들, 독사의 새끼들 다 믿습니다. 십일조? 십일조하면 복받는다고? 십일조 땡전 한푼 안떼먹고 다 바치는 사람이 바리새인들이야. 안식일, 어디 감히 범해 안식일을. 그렇게 안식일 지키고, 그렇게 십일조 잘 바치면요, 우리 한국에서는 일등 신자라 할 거에요. 예수님은 일등이 아니라, 독사의 새끼야. 왜 그러느냐. 너희 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없는 줄을 내가 알았어. 끝장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십일조 아니라, 십의 십을 다 바쳐도 아무 것도 아니야. 자기에게 모든 것을 구제하고,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야.
여러분, 야고보가 하는 말이, ‘이 사람들아, 네가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로 믿느냐? 잘한다. 귀신들도 믿고 떤다.’ 귀신들도 그 정도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한 분이신 것. 아, 예수님이 그럼 그리스도인 것 믿으면 그게 바로 영생 아닙니까? 이거 보세요.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걸 제일 먼저 알아 본 게 귀신이야. 아주 귀신이 귀신같이 알죠. 거라사인 지방에 예수님이 갔을 때, 그 귀신, 무덤가에 귀신들린 사람이 딱 보자마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군지 아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이것 보세요. 귀신이 제일 먼저 알아보잖소. 그럼 그 알아보는 것 가지고, 그 믿음가지고 그 귀신이 구원받습니까?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없다면, 그의 믿음도 아무 것도 아니고, 지식도, 예언도 아무 것도 아니야. ‘주여, 주여,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귀신을 쫓아냈는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끝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세상에 있는 모든 지식을 다 알 수 없어요. 여러분, 신학대학 도서관 가보세요. 그걸 우리가 어떻게 다 알겠어요? 모든 지식을 다 알 수도 없고, 모든 비밀 다 알 수도 없고. 우리 믿음이라고 하지만, 그 믿음 뭐로 압니까? 믿음이 어디 저울이 있어서 믿음 달아 보겠습니까? 아무도 검증이 안되요. 구원의 확신? 그거 전부 주관적인, 개인적인 감정일 뿐이지, 그거 누가 아무도 보증이 안돼.
단,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도 그 안에 거한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할 때, 뭐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안에 거하느냐? 예배당에 가서 강대상 밑에 있으면 예수님 안에 거하는 거냐? 아니죠.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그리 되어 있어요.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 말을 즐거워하고 그걸 지키는 거에요. 하나님을 사랑하면요, 먹는 것 마시는 것 지극히 작은 것 하나까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하고 그걸 사랑하는 거에요.
그런데 서양 사람들이 와가지고, 어설피 와가지고,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은혜다. 그런 뚱딴지 같은 소리해가지고, 구약을 모르니까, 하나님의 심정도 알지 못하고, 말라기 해봤자, 돈 긁어 모으는 것, 십일조 밖에 보이지 않고, 이래 가지고 이걸 교회가 지탱하고 있는 게 기적이야. 이게 잘못된 겁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발을 씻기면서, ‘사람이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는 것이다.’ 그 이야기할 때, 예수님의 뜨거운 눈물이 제자들 발등에 떨어졌을 걸로 봅니다. 그리고 ‘내 계명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사랑하라는 것이야.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는요, 사랑하는 것 밖에 없어. 어떤 표시가 없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심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서, 그의 사랑안에 거하는 것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너희로 서로 사랑하게 하려 함이로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희에게 와서 저희와 거처를 함께 할 것이라.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게 아니야.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한은 그냥 사랑 이야기 외에는 거의 그저 안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 다음부터는. 그래서 지금 마귀는 어떤 사랑이든지 다 파괴하려고, 부자지간의 사랑도 파괴하고, 모녀지간의 사랑도 파괴하고, 부부지간 사랑도 깨뜨리고, 우정도 깨뜨리고, 다 사랑을 깨뜨려버리면 세상이 지옥이 되니까. 그래서 온갖 세상 문화는 가정을 파괴하려고 그러고, 사랑을 파괴하려고 그래요.
저는 끝까지 가정을 지키려고 그러고, 저는 교회서도 교회 어떤 프로그램이 가정에 이만큼이래도 위해가 될만한 프로그램은 없애 버립니다. 그건 처음부터 그래요. 처음부터 위해가 될 만하다. 그건 없애버립니다. 예를 들어서 철야를 왜 없앴느냐. 여러분, 철야하면 남자는 대개 안나오고, 부인들만 몇 사람 나와요. 그럼 철야하러 나온 부인들의 남편들이 자기 부인이 하나님을 보고 열심낸다. 그리 보는 사람이 많지 않고, 대부분은요, 목사님 보고 열심내는 것으로 알고 있어. 그 기분나빠서 그 남자가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그 안나오거든. 보나마나. 그래서 제가 무안 가서 바로 철야 없애버렸더니 남자들이 하나씩 둘씩 나오는 거라. 다 나왔어 나중에. 심지어 양조장 주인까지 다 나왔어. 제가 올 때 두 사람인가 안나오고 다 나왔거든. 두 사람은 기념으로 안나오는데 아직도. 세상에... 예배 마치면 부인들 빨리 집으로 쫓아보내고, 그렇게 움직이지 않는 남자만 데리고 일하고, 부인들은 빨리 집으로 보내주거든, 아이들도 보내주고. 그래서 어떻게 그런 목사가 있느냐? 한번 가보자. 그래 왔다가 그저 출석하고 출석하고 해서 시골 교회인데 남자, 여자가 비슷한 거야. 거득하고 그래서 없앨 것만 없애도. 비본질적인 것, 사랑에 위해가 되고, 가정에 어떤 위해가 될만한 것은 다 없애. 싹 모든 프로그램 없애. 개인의 심령이 평안하고, 가정이 정말 천국의 모델하우스처럼 사랑을 배우는 정말 신학교 이상의 신학교가 되면요, 거기 왜 복이 임하지 않겠어요? 왜 충성을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했는데, 그 교회가 100명 넘어보려고 별의 별 몸부림 다 쳤는데, 100명이 안되었거든요 사실은요. 제가 갔을 때 54명에서 60명 이랬는데, 아무 프로그램 안했는데, 없앨 것만 없애도 금방 100명 넘어서 가지고, 그렇게 성장하거든 보니까.
그래서 다시 말씀드리는데, 사랑을 배우는 겁니다. 그래서 사랑은 배워야 되요. 가르쳐야 됩니다. 사랑은 그저 느끼는 감정, 감정의 노예가 사랑이 아니고, 사랑을 배우고 가르치고 의지로 실천해야 되요 그걸. 이지적으로 의지적으로 실천해야 사랑이지, 자기가 뭐 좋아한다고 싫어한다고, 그건 감정이에요. 감정. 그런 감정의 노예가 사랑이 아니라는 거에요. 감정을 동반하지만 감정의 노예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의지를 가지고, 결단을 하고, 실천을 해서 사랑을. 그게 진짜 사랑이고 배워야 되요. 우리가 여태까지 사랑을 배운다는 건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사랑학 Agapelogy라는 단어가 없었다는 거 아니에요? 여태까지. 그냥 감정에 이끌리는 대로, 감정의 노예로 끌려가는 걸 사랑이라고 생각했어. 그건 사랑이 아니에요 그거는요.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을 때, 원수가 죽고 못살고 사랑스럽겠어요? 그런 게 아닙니다 그게. 이 시간에 사랑이 무엇이 사랑이며 무엇이 사랑이 아닌지, 다 할려면 시간이 많이 가지만 간단하게 사랑을 좀 정의하고 끝내려고 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안물으면 아는데 물으면 잘 몰라요 다. 제가 어디 가서 물었더니, 아이고 목사님, 제가 그것도 모릅니까? 사랑은 눈물의 씨앗 아닙니까. 여러분, 사랑은요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이 잘못된 거야. 사랑이 무엇이냐고 명사형으로 묻는 게 아니고,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거냐. 그래서 어떤 분은 그 사랑한다는 말이 상태동사라는 거에요. 상태동사. 동사는 동사인데 어떻게 하는 상태가 사랑하는 거냐. 상태동사라.
사랑을 제가 몇가지로 정의했는데 첫째, 사랑은 관심을 기울이는 겁니다. 관심을 기울이는 것.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관심이야 관심. 따뜻한 관심, 애뜻한 관심, 깊은 관심, 포기할 수 없는 관심, 지속되는 관심. 여러분, 혹시 사랑하면 자꾸 그쪽으로 눈이 돌아가죠? 마음이 끌리고, 눈이 돌아가고, 나중에 꿈에 나오고, 사무치고, 포기할 수 없고. 그 애뜻한 그런 관심. 그게 사랑이라는 거에요.
앞을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면요, 이리 봐. 이리 봐. 이만큼 관심 있다는 거에요. 이만큼. 여러분, 이렇게 두꺼운 러브레터 받아본 적 있습니까? 이 좀 읽어보면 될텐데, 읽다가 말다가 자다가 졸다가, 안깨고 자다가 졸다가 그러니 참. 그 아가서에 보면요,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도 생기지 않았다.’ 그런 말이 있어요. 신랑은 다 컸는데, 신부감은 너무 감각이 없어.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고 안통해 한마디로. 그 얼마나 신랑되는 사람이 속이 상하겠어. 하나님은 완숙한 신랑감인데, 우리 인간들은요 불감증 환자가 되어가지고, 전혀 사랑에 감정도 없고 대화가 안돼. 그리고 사랑한다고 그러면 누워 자 그냥. 졸아. 다 졸며 잘새.
두 번째, 사랑은 이해하는 겁니다. 이해하는 것. 여러분, 사랑하면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강의가 좀 길어도 이해하고, 점심때가 다 지나가지만 이해하고, 뭐 좀 늦게 와도 이해하고, 못생긴 것도 이해하고, 누가 못생기고 싶어서 못생겼나 뭐. 하여튼 사랑은 이해하는 거에요. 이해한다는 말이 한문으로 하면 그 뜻을, 이치에 맞게 풀어간다 이런 뜻인데, 이해한다. 그거 보다는 제가 영어를 못하고, 영어를 기분 나빠하지만, 영어가 좀 나은 것같애. understand라는 거에요. understand. 여러분, 사랑하면요 내려서는 겁니다. 내려오는 것. 자꾸 여성 상위니 그런 미친 소리하지 말고, 자기를 낮추는 거에요. 언더스탠드하는 거야. 낮은 데 서는 거에요 사랑하면요.
저 그저 청화대 막 고관대작에 거들먹거리고 앉아있는 게 사랑이 아니고, 작업복을 입고, 안전모를 쓰고, 찝차를 타고, 반바지를 입고, 저 모내기하는 논에, 물론 TV 카메라 갖다놓고 이제 뉴스 시간에 5분만 하지만, 대통령이 백성들을 이해할려고 한다는 거 아닙니까? 그 곁에서 보는 것. 낮은 자로 내려와서 곁에서 보는 거에요. 곁에서 보는 것.
여러분,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5분만 한게 아니고, 말구유간에 와서 낮은 사람들, 소외당한 세리, 창녀, 그런 어부, 뭐 이런 사람들하고 몸을 함께 비비대면서 함께 먹고 주무시고, 저 높은 높은 별을 넘어서 이 낮고 낮은 땅에 내려오시는 거에요. 말구유간에, 음부에까지 내려가는 겁니다. 자꾸 올라가는 게 아니고, 자꾸 높아질려고 하는 게 사랑이 아니라는 거에요. 끝없이 그저 understand하는 것.
세 번째, 사랑은 책임을 지는 겁니다. 죄가 있던지, 허물이 있던지 내가 다 책임을 진다.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마라. 그것도 내가 다 책임진다. 물론 택시값도 내가 내고, 극장표도 내가 다 끊고, 사랑하면 내가 다 책임지는 거에요. 내가 다. 뭐든지 다. 사랑하는 쪽에서 다 책임을 지죠. 그게 사랑이라는 거에요. 무책임한 건 사랑이 아닙니다. 남의 집 귀한 딸을 몸을 망쳐놓고, '다 그런 거야~ 뭐 다 그런 거지~' 그건 무책임 한 거지.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런 무책임한 건 사랑이 아니야. 그건 일순간에 암논처럼 다윗의 장자 암논이 다말 공주의 몸을 망쳐놓고, 이 계집을 끌어내라. 그건 무책임한 놈이지 그게. 그건 사랑이 아니야. 그건 욕정이지. 사랑은 끝까지 책임지는 거에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다 책임지겠다.' 죄는 우리가 지었고, 허물은 우리가 있는데, 예수님이 다 짊어지는 거에요. 다 책임지는 거에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마. 다 책임진다. 들의 백합화를 봐라. 누가 입히냐 누가. 공중에 나는 새를 봐라.'
네 번째, 사랑은 대상을 존중하는 겁니다. 대상을 소중히 여기고, 귀중히 여기고, 존중히 여기는 거에요. 얼마나 소중이 여기면 독생자의 피로써 우리를 샀겠어요?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걸로 우리를 산게 아닙니다. 독생자의 피로 값주고 우리를 사신 거에요.
다섯 번째, 사랑은 희생이죠. 희생. 자기를 깨뜨려서, 자기를 희생해서 대상을 채우는 것. 나를 채우는 게 아니고,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게 아니라, 대상을 기쁘게 하고 대상을 채우는 거에요.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에요.
여섯 번째, 사랑은 함께 있고 싶어하는 마음이야. 여러분, 사랑하면 함께 있고 싶죠? 함께 있고 싶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그냥 함께 살려고 결혼하지 않습니까? 결혼해가지고 함께 있고, 포옹을 하고 안아본다 그것만 갖고 안돼. 그래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더 사랑하면 하나가 될려고 그래. 함께가 아니고 하나. 함께 보다 더 깊은 관계가 하나인데, 어떻게 둘인데 하나가 되느냐? 예수님 말씀 들어봐요.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곁에가 아닙니다. 내 앞에가 아니고, 너희가 내 안에.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자기 속에 집어 넣어버리던지, 자기를 우리 속에 들어오던지 해서 하나가 되려고 해요.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거에요.
왜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고 구체적으로 다 설명을 하냐면요, 그 말라기 첫마디에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이게 하나님이 한이 맺혀가지고, 나보고 가서 설명을 좀 하라는 거에요. 내가 어떻게 사랑했는지, 내가. 설명할 사람이 별로 없다. 네가 가서 설명 좀 해라.
일곱 번째, 사랑은 주는 겁니다. 주는 것. 자기에게 있는 무언만 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주는 거에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는 거야. 교회에다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시는데, 자기의 살을 우리에게 주시고, 자기의 피를 우리에게 주시고, 영을 우리에게 주시고, 능력을 주시고, 이름도 내 이름으로 가라. 내 이름으로. 카드도 내 것가지고 가. 폰도 내 것 가지고 가. 다 가지고 가라 다. 뭐 안주시고 아껴놓고 꼬불쳐 놓으신 게 있습니까? 다 주셨지 않습니까? 살을 주고 피를 주고 이름을 주고 영을 주셨으면 다 줬지. ‘내 살인데 네가 먹어버리라. 내 피인데 네가 마시라. 내 피가 네 안에서 흐르고 싶으니까, 내 피를 마시라. 그리고 마음을 열면 내 영으로 네게 들어가겠다.’ 그래서 자기를 주는 거에요. 주는 거.
여덟 번째, 사랑은 끝까지 믿는 마음이야. 여러분, 끝까지 믿는 게 사랑입니다. 사랑은요, 중간에 가다보면 그럴 줄 몰랐다는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 진짜 사랑은요, 속아도 속은 줄 모르는 겁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예수님 모른다고 세 번이나 잡아 뗐어요.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나중에는 맹세하고 저주하고 그저 모른다고 잡아뗐어요. 그래도 예수님께서 또 찾아가. 그 갈릴리 바다에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베드로는 아주 뭐 결단이 빠르죠. 자꾸 예수님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헷갈리게 하니까, 맘 잡고 그저 고향으로 돌아가겠다 하고 베드로가 딱 결단하니까, '우리도 가겠노라.' 하고, 갈릴리 출신들이 줄줄줄 일곱 명이나 따라가니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눈치도 없이 따라가 또. 그런데 누가 이기느냐. 끝까지 믿는 예수님이 이기는 거에요.
그래서 그날 아침에 밤새도록 그 물고기도 잡히지 안게 해가지고, 또 얼마 잡아가지고 나왔을 때에, 먹을 때는 개도 안건드린다고 암말 안하고 있다가, 다 먹고 나서 예수님께서 꼭 하늘로, 하나님께로 올라가기 전에 꼭 한번 듣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한번이라도 단. 꼭 한번만이라도 듣고 올라가고 싶은 말이 있는데, 누구로부터 아무도 '사랑합니다.'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베드로 불러가지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윽박질러 절 받기야. 그래 베드로가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한 게 생각나니까, 차마 사랑한다는 말 못하고요,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러고 말았어요. 아 그 좀 '주여,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 그것 좀 하면 될텐데, 그것까지도 안되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니이다.' 그 정도 하고 말아요. 그 아쉬워서 한번 더 물어봤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내 양을 치라.' 세 번째 또 주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하니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내 양을 치라.'
그게 유일하게 정말 12 사도가 한번도 하지 못했던 말을 그렇게 베드로 입에서 나왔는데, 예수님께서 그 베드로에게 가서 그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잡아뗀 그 베드로에게 가서 여전히 베드로에게 그렇게 했지만, 베드로에게 묻는 거에요. 만약에 '베드로 너 저기 비켜. 야고보,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해봐. 그 다음 주부터 베드로 교회 안나옵니다. 그 허물많은 베드로. 세 번씩이나 잡아 뗀 그 베드로에게 가가지고, 다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거기다가 내 양을 치라고 맡기는 거야.
실수했다고 여러분, 그렇게 사람을 함부로 버리면 안돼요. 여러분, 실수보다 그 존재가 훨씬 더 크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허물과 실수보다 존재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 작은 어떤, 누구는 실수 안합니까? 그런 실수 그걸 너무 확대하지 말라고. 그런 실수가 있고 죄가 있으면, 허물을 덮어주고 내가 담당하고 그 믿어주고 그게 사랑이라는 거에요. 믿어주는 것 다시. 얼마나 베드로를 믿어줬으면요, 끝까지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잡아떼고 갔는데, 얼마나 사랑했으면 자기 피로 값 주고 산 양을 거기 또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하겠어요. 마침내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서 죽기까지 순교합니다. 끝까지 믿는 사랑이, 끝까지 믿는 믿음이 사랑이라는 거에요. 속아도 속은 줄 모르는 게 사랑이죠.
아홉 번째, 사랑은 대상을 기뻐하는 겁니다.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사랑은 곧 기쁨이죠. 음성조차도 즐겁고 발자국 소리도 그 기다려지고, 이런 게 사랑이라는 거에요. 전에 제가 작은 교회에서 목회를 할 때, 한 여학생이 어떻게나 저를 존경하고, 저를 사모하고, 저를 따르고, 도시 취직을 못가요. 보내놔도 주일마다 또 올라와. 그 완행 버스 몇 번을 타고. '그래 제발 올라오지 말고, 그 돈벌어가지고 길바닥에 깔아 버리겠다. 오지마라.' 해도 계속 오는 거에요. 그래 몇 교회 가도 전혀 설교는 귀에 안들어오고 계속 온다는 거라. 그래 그러면 그게 아니다. 사람만 쳐다보는 건 신앙이 아니니까, 그리하지 말고 그 마산서 어디 찾아봐라. 사천 정동면까지 매주 오는 거에요. 그래 기어이 어디 알아보라 했더니, 어디 알아 등록을 했다는 거에요. 마산에 가서. 그래 어떤 교회에 등록했느냐 하니까, 그 교회 목사님 이름에 '우'짜가 있더랍니다.
그러니까 이름도 생각만 해도, 이름만 생각해도 즐겁고, 음성 조차도 즐겁고, 그런 그 사랑이란 게 대상을 즐거워하는 거에요. 대상을 기뻐하는 것. 그 사랑의 기쁨이라는 그런 노래가 있죠? 프레지트 아모르라는. 사랑은 기쁨이죠.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한다 그런 말도, 그 물론 우리 보고 한말도 되지만, 스바냐서에 보면 그런 말이 나오죠? 기쁨을 이기지 못한다. 사랑은 기쁨이라는 거에요. 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에게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이요 사랑하는 자들아.' 기쁨이야 기쁨.
마지막으로 사랑은 섬기고 싶은 마음이야. 사랑은 섬김을 받으려 하는게 아니고,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줄려고 왔다는 거에요. 여러분, 러시아의 민요 중에 그 '백만송이의 장미'라는 민요가 있어요. 러시아 민요. 우리나라의 심수봉씨가 그걸 부르고 했죠? 여러분, 어떤 사람이 백만송이의 장미나 보낸다는 것은 뭘한다는 거에요. 그만큼 사랑한다는 거에요. 그만큼 사랑한다 그런 뜻이죠. 근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장미를 백만송이만 보낸 줄 아세요? 억만 송이도 더 보냈을거라. 해마다 보내고, 내다보도 안하는데 그래도 보내고, 장미만 보냅니까? 진달래부터 시작해가지고, 진달래도 보내고, 내다보도 안해. 개나리도 또 보내고, 벚꽃을 보내고, 또 장미꽃 보내고, 모란꽃을 보내고, 가을에 국화까지 일년 내 보내. 이 싸가지 없는 것들이 내다 보도 안하고 말이야. 그 또 과일나무를 아주 나무채 통째로 보내죠. 온갖 철마다 다른 과일 계속 보내도, 그게 하나님이 사랑해서 보냈다는 걸 인식을 못해요. 그냥 보내기를, 그냥 과일을, 과일바구니만 덜컹 사서 집어던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얘기했죠. 제가 먼저 향기부터 사악~ 나게 꽃을 피워서 꽃부터 선사하고, 그 향기를 가지고 우리 코를 간지럽게 하고, 잎을 푸르게 한 다음에 그리고 과일을 듬뿍 담아서 그렇게 보내는데도, 그게 하나님의 사랑인 줄을 모르는 거야. 불감증 환자들이야 전부다. 온갖 오곡백과며 그렇게 아름다운 채소며, 우리에게 또 남편을 주신다는 건 뭘 의미합니까? 그 남편이 그 남자가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남자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를 사랑하도록 남편이란 그릇에 하나님이 사랑을 담아가지고 하나님의 선물이죠. 아내를 주신 것은 뭘 말합니까? 아내라는 그릇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사랑을 담아서 보낸 사랑의 그릇이야. 자식들도 마찬가지야. 하나님의 선물이죠. 태의 열매는 하나님의 선물이로다. 온갖 우리 주변에 누리는 게 하나님의 선물 아닙니까?
여러분, 우리 남편들 이리 봐요. 아내가 천사보다 열배나 낫지 않습니까? 무슨 천사가 밥해 주고 빨래해 주고 애 낳아주고 밤마다 안아주고 품어주고, 그런 천사가 세상 어디에 있어요? 그 천사가 열배나 낫지 않습니까 아내가? 또 아내들 봐요. 남편이 여러분, 천사보다 열배나 낫지 않습니까? 매월 봉급 봉투 통째로 다 갖다 주고, 밤마다 안아주고 품어주고 지켜주고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주고, 그런 천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런 천사 있으면 우리 남편들 다 사표 냅시다. 여러분, 목사가 천사보다 열배나 낫지 않소. 무슨 천사가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다 가르쳐주고, 그런 천사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그래 우리가 사람이 귀한 줄 알아야 돼. 남편이 귀하고 아내가 귀하고 자식들이 귀하고, 성도가 귀하고 목회자가 귀한 걸 그런 걸 알아야 돼. 그 다 하나님의 선물들이야.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배워서 사랑함으로써, 천국의 시민될 준비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다 부족하죠. 타락을 했으니까 오죽하겠소. 부족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그 부족한 걸 서로 채워주면서 또 사랑을 배워서 하나님을 배워가고 하나님을 닮아갈 줄로 믿습니다. |
출처: 요시야 원문보기 글쓴이: 요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