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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국불교의 무주
삼국시대 불교가 전래된 이래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불교의 저술들에도 ‘무주(無住)’라는 용어가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인물별로 화엄이든 유식이든 선이든 각자가 공부한 분야에 따라서 ‘무주’가 든 구절을 인용하고 있으므로, ‘무주’로서 드러내려는 뜻도 문맥에 따라서 달리 나타난다. 신라시대에는 원측(圓測)․원효(元曉)․의상(義湘)․둔륜(遁倫)․태현(太賢) 등의 저술에서 ‘무주’가 등장하고, 고려시대에는 균여(均如)․지눌(知訥)․혜심(慧諶)․각운(覺雲) 등의 저술에서 나타나고, 조선시대에는 기화(己和)․김시습(金時習)․휴정(休靜)․명안(明眼)․자수(子秀)․유일(有一)․홍기(洪基) 등의 저술에서 주로 나타난다.
① 신라시대
당나라의 현장(玄奘)에게서 유식학(唯識學)을 공부하였던 신라의 승려 원측은 『불설반야바라밀다심경찬(佛說般若波羅蜜多心經贊)』에서 ‘무주처(無住處)’, ‘무주처열반’, ‘무주열반’ 등 유식학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또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에서는 “무주열반(無住涅槃)은 무상(無相)이라고 일컬으니, 생사와 열반의 모습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해심밀경』에서 말하는 ‘머무는 곳이 없다’는 것은 무주열반을 일컫는다.”, “『섭대승론』 10권에서 말하는 ‘부처는 머묾 없이 머문다’는 것은, 생사와 열반이 머묾 없이 머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무주열반에 안주하는 것이라는 말이다.”라고 하여 모두 유식학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나타내는 무주처열반을 위주로 ‘무주’를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인왕경소(仁王經疏)』에서는 “무위공(無爲空)은 생함도 없고, 머묾도 없고, 달라짐도 없고, 소멸함도 없다.”, “삼세법(三世法)은 오는 일도 없고, 가는 일도 없고, 머물 곳도 없음을 안다.”, “마음을 씀에 머묾 없음에 머문다.” 등으로 ‘무주’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 문장들은 모두 『대반야경』에서 인용된 것들이다.
원효의 불교를 요약하면,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非同非異], ‘양변을 떠나고 중간도 아니다’[離邊非中]라는 불이법문(不二法門)인 화쟁(和諍)으로써 모든 긍정과 부정의 대립을 아울러 ‘한 마음이라는 근원’[一心之原]으로 귀일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화쟁의 논리는 곧 ‘양쪽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그 중간에도 머물지 않는다.’는 ‘주무소주(住無所住)’와 같은 내용이다. 『열반종요(涅槃宗要)』에서 “열반이라는 도(道)는 도도 없고 도 아님도 없으며 머묾도 없고 머물지 않음도 없다.”고 하듯이 원효의 저술 여러 곳에서 ‘무주(無住)’를 말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무주(無住)’를 통하여 화쟁사상을 잘 드러내고 있는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의 몇몇 구절들을 예로 들어 보겠다.
“무생반야(無生般若)는 모든 곳에서 머묾이 없고 모든 곳에서 떠남도 없으니, 마음에는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한 마음의 본체는 두 변을 떠나기 때문에 이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들어간다고 일컫는다. 이와 같이 머묾이 없으면 바야흐로 해탈을 얻는다. 그러므로 열반에 머물지만 속박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머묾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제(二諦)에 머물지도 않고 중간에 있지도 않는 것이다. 비록 중간에 있지 않으면서도 두 변을 떠난다. 이와 같음을 일컬어 머물 곳이 없다고 한다.”
“나는 모든 변(邊)을 떠나 머묾 없는 지혜를 얻었다. 그러므로 하나하나의 먼지 속에서 늘 온 우주의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를 볼 수 있다. 온 우주의 모든 먼지 속에서 헤아릴 수 없는 모든 부처를 보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러므로 모든 곳에서 항상 모든 여래를 본다고 하는 것이다.”
신라 화엄종(華嚴宗)의 종조(宗祖)인 의상(義湘)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무주(無住)’라는 구절이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 내용은 곧 화엄의 중중무진(重重無盡)한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설파하고 있는 것이므로, 세계의 본질은 ‘머묾 없는 연기로 시설된 것’이라는 ‘무주’의 가르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원효와 같이 통일신라 초기에 활약한 신라승 승장(勝莊)은 그의 저술 『금강명최승왕경소(金光明最勝王經疏)』에서, “무주(無住)는 말하자면 무주의 방편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이 모든 보살은 생사와 열반이 한 맛이라는 사실을 통달하고서, 열반을 좋아하지도 않고 생사를 싫어하지도 않으며 두루 모든 부처를 받들어 모신다. 열반을 좋아하지 않아서 열반에 들지 않는 것, 이것을 일러 무주의 방편이라 한다.”라고 하여 ‘무주(無住)’의 뜻을 생사에도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의적(義寂)은 『무량수경술이기(無量壽經述義記)』에서 생사에도 머물지 않고 열반에도 머물지 않는 법성(法性)의 무주(無住)를 밝히고 있다. 표원(表員)은 『화엄경문의요결문답(華嚴經文義要決問答)』에서 “다시 서로 말미암는 것을 일러 연(緣)이라 하므로, 연은 머묾이 없다. 일(一)과 다(多)가 연에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것을 일러 기(起)라고 한다.”라 하여 ‘무주’를 통하여 연기(緣起)의 뜻을 밝혔다. 명량(明粮)은 『해인삼매론(海印三昧論)』에서 “몸과 마음은 본래 생멸이 없고, 일체법도 역시 이와 같아서 생도 없고 멸도 없고 머물 곳도 없다. 이것이 바로 보리열반의 본체이니,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 속에서 모두를 알고 일체법 속에서 하나를 안다. 헤아릴 수 없는 법이 곧 하나의 법이며, 하나의 법이 곧 헤아릴 수 없는 법인 것이다.”라고 화엄법계(華嚴法界)의 실상이 곧 무주(無住)임을 노래하고 있다.
둔륜(遁倫)은 『유가론기(瑜伽論記)』에서 “부처는 반연도 없고 머묾도 없다.”고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을 말하고, “열반으로 나아간다면, 현전(現纏)에서 떠나기 때문에 반연이 없다고 하고, 수면(隨眠)에서 떠나기 때문에 머묾이 없다고 한다.”고 설명한다. 태현(太賢)은 『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에서 “무주열반(無住涅槃)은 두 변에 머물지 않는 무위(無爲)의 한 길로서 소지장(所知障)이 깨끗해진 것이다.”라고 말하고, 『성유식론학기(成唯識論學記)』에서도 무주처열반에 관하여 설명하고, 『대승기신론내의약탐기(大乘起信論內義略探記)』에서는 “무분별지(無分別智)에서 깨달음을 얻으면 상(相)에 머물게 되는데, 상에 머무는 것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 마침내 있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깨달아서는 머묾 없음에 머물러 분별을 떠난다고 하는 것이다.”고 하여 깨달음이 분별을 떠나 머묾 없음에 머무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
② 고려시대
고려 초기 화엄(華嚴)의 대가였던 균여는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에서 “부처는 이름을 따르지 않고 깨닫기 때문에 뜻에 머묾이 없다고 한다.”고 하고, 다시 “방편에 통하는 처음에는 이름 속에 법이 있었지만, 진실로 깨달을 때에는 오직 뜻에 머묾이 없을 뿐이고, 달리 진실한 이름이라는 것은 없다.”고 하여, 깨달음은 뜻에 머묾이 없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균여는 자신의 화엄학을 밝힌 『석화엄지귀장원통초(釋華嚴旨歸章圓通抄)』에서 “또 의상(義湘) 스님이 말한 ‘하나의 미진(微塵) 속에 시방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은 동일하게 한결같이 머묾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미진의 머묾 없음은 작고 시방세계의 머묾 없음은 큰가? 동일한 크기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미진은 작고 세계는 크다고 말하는가? 미진과 시방세계는 각각의 자성(自性)이 없고 오직 머묾이 없을 뿐이다.”라고 하여 일(一)과 일체(一切)가 자성이 없고 서로 머묾 없는 연기(緣起) 속에 있음을 밝히고, 다시 “선재(善財) 자기 마음의 여래장이 곧 머묾 없는 법성(法性)의 바다이다. 법성은 둘이 없기 때문에, 선재의 머묾 없는 법성과 선우(善友)의 머묾 없는 법성과 일체법의 머묾 없는 법성이 다만 하나이다.”라고 하여 사람과 사물을 포괄하여 일체법의 본성(本性)이 곧 머묾 없는 법계연기(法界緣起)임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머묾 없는 법계연기가 화엄의 본질이라는 것을 균여는 『석화엄교분기원통초(釋華嚴敎分記圓通抄)』에서도 “‘무엇을 일러 거두어 들임이 곧 펼침이고 펼침이 곧 거두어 들임이라고 하는가?’ 답한다. ‘그 뜻은 머묾 없는 연기(緣起)의 장단(長短: 변화) 때문이다. 이 까닭에 동일(同一)한 연기(緣起)이므로 이상(二相)이 없고, 그 까닭에 거두어 들이고 펼침이 자재(自在)하다고 한다.’”라고 하여 하나고 거두어 들이든 만법으로 펼치든 동일한 머묾 없는 연기임을 밝히고, “머묾 없는 전체 모습이 곧 일승(一乘)이다.”라고 하여 전체 법계가 머묾 없는 연기에 의하여 나타난 모습으로서 결국 우주는 하나의 진실한 법계임을 밝히고 있다.
중국 조사선을 개창한 육조혜능(六祖慧能)의 『법보단경(法寶壇經)』과 조사선에서 간화선(看話禪)으로의 전환점을 이룬 대혜종고(大慧宗杲)의 『서장(書狀)』에 의지하여 선(禪)을 공부하여 고려시대 중기 한국 간화선을 중흥시킨 보조국사 지눌의 저술에도 여러 곳에서 ‘무주’가 발견된다. 『진심직설(眞心直說)』에서는 『금강경』의 구절을 인용하여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말하고, 당(唐)나라 거사 배휴(裵休)의 저술 『중화전심지선문사자승습도(中華傳心地禪門師資承襲圖)』에 사기(私記)를 붙인 『법집별행록절요병입사기(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에서는 “불성(佛性)은… 뿌리도 없고 머묾도 없다.”, “머묾 없고 텅 비고 고요하다.”, “대도(大道)의 근본은 마음이며, 마음의 근본은 무주(無住)이다. 무주는 마음의 본체로서, 신령스럽게 알고 어둡지 않다.”고 청량징관(淸凉澄觀)의 심요(心要)를 인용하고 있으며, 당(唐)나라 이통현(李通玄)의 『신화엄경론(新華嚴經論)』을 발췌 요약한 『화엄론절요(華嚴論節要)』에서는 “내가 여래를 살펴 보니, 과거에 오지 않고 미래에 가지 않고 현재에 머물지 않는다.”, “세간과 출세간에 전혀 머물 곳이 없다.”, “머물 법이 없기 때문에 머물 곳이 없다.”, “한 순간 무한한 세월을 두루 살펴 보니,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고 머무는 곳도 없다.”, “마음을 관찰해 보니 머묾이 없다.”, “머묾 없음을 일러 불(佛)이라 한다.” 등으로 ‘무주(無住)’가 곧 법계(法界)의 본성이라고 하고 있다.
지눌(知訥)의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慧諶)은 지눌에 의해 주창된 간화선의 선풍을 더욱 진작시키기 위하여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하였다. 『선문염송』은 중국 간화선에서 제창된 화두(話頭) 1463칙(則)을 모으고, 이에 대한 여러 선사들의 염(拈)․송(頌)․상당거화(上堂擧話) 등 중요한 말들을 모아서 30권으로 집성한 것이다. 한편 혜심은 제자인 각운(覺雲)에게 명하여 『선문염송』에 대한 주석서를 짓게 하였는데, 이것이 『염송설화(拈頌說話)』이다. 『염송설화』는 『선문염송』의 화두 1463칙과 염․송․상당거화 전체를 빠뜨림 없이 모두 주석한 완전한 주석서이다. 1463칙의 화두 가운데 부처나 보살의 주처(住處)를 다루는 화두가 있으므로, 이 화두에 대한 염․송․상당거화․설화(주석) 등에서도 주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컨대, 고칙(古則: 화두) 73에서 장폐마왕이 금강제보살에게 무엇에 의지하여 머물길래 찾을 수가 없느냐고 묻자 금강제보살은 “나는 머묾 있음에 의지하여 머물지도 않고, 머묾 없음에 의지하여 머물지도 않으니, 이렇게 머문다.”라고 답하여 머묾 없는 곳에 머묾을 말하고, 또 진불(眞佛)이 있는 곳을 묻는 고칙 434에 대하여 목암(牧庵)은 언급하기를 “진불은 머무는 곳이 없으니, 걸음걸음마다 종적이 없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부처 있는 곳에도 머물지 않고 부처 없는 곳에서도 급히 지나간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여 역시 머묾 없음에 머무는 반야무주(般若無住)를 말하고 있다.
③ 조선시대
기화의 저술인 『금강반야바라밀경오가해설의(金剛般若波羅蜜經五家解說誼)』는 『금강경』에 대한 5가(家)의 주해(註解)에다 자신의 주석(註釋)인 설의(說誼)를 덧붙인 것이다. 본래 『금강경』은 『대반야경』의 일부로서 ‘무주(無住)’를 방편으로 반야를 설하는 경전인데, 설의에서 기화의 ‘무주’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육조혜능의 서문에 나오는 ‘무주(無住)가 본체이다.’라는 구절에 대한 기화의 설의는 “텅 비어서 어떤 모습도 없고, 텅 비어서 머묾이 없다. … 머묾이 없으나 머물지 않음도 없고 모습이 없으나 모든 모습에 장애되지 않는다.”라 하고, 묘행무주분제사(妙行無住分第四)에서 야보(冶父)의 주해에 대한 설의에서는 “머묾 없음이 만행(萬行)의 큰 근본이고, 만행은 머묾 없음의 큰 작용이다. 세존의 가르침은 머묾 없음으로 머묾을 삼으므로, 큰 근본이 이미 밝혀 졌으니 큰 작용 역시 알 수 있다.”라 하고, 또 “무심(無心)이 바로 머묾 없음의 뜻이니, 머묾 없는 속에서 큰 작용이 번성하게 일어난다.”라 하고, 이상적멸분제십사(離相寂滅分第十四)의 설의에서는 “만약 참으로 머무는 곳이라면, 머묾 있음에 의지하여 머물지도 않고, 머묾 없음에 의지하여 머물지도 않고, 중도(中道)에 의지하여 머물지도 않으니, 이렇게 머무는 것이다.”라고 하여, 여러 곳에서 머묾 없음에 머무는 반야바라밀과 그 자재한 작용을 말하고 있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머리를 깍고 출가하였는데, 여러 권의 불교저술이 있다. 의상(義湘)의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를 주해한 『대화엄법계도주(大華嚴法界圖註)』에서 김시습은 ‘자성을 지키고 있지 않고 인연을 따라 이루어진다.[不守自性隨緣成]’는 구절을 주해하여 “모든 법은 본래 자성이 없고, 모든 자성은 본래 머묾이 없다. 머묾이 없으니 실체가 없고, 실체가 없으니 인연을 따름에 장애가 없다. 인연을 따름에 장애가 없기 때문에, 자성을 지키고 있지 않고 공간과 시간을 이루는 것이다.”라 하고, 또 ‘하나가 곧 모두이고, 여럿이 곧 하나이다.[一卽一切多卽一]’라는 구절을 주해하여 “허공은 장애가 없고, 살아 있는 부처는 둘이 없다. 연기(緣起)는 머묾이 없으니, 원인과 결과가 동시(同時)이다.”라고 하여, 화엄(華嚴)의 법계연기(法界緣起)를 설명하고 있다.
서산대사 휴정(休靜; 1520-1604)은 『삼가귀감(三家龜鑑)』에서 청량징관(淸凉澄觀)이 황태자에게 말했던 심요(心要)의 앞부분인 “대도(大道)의 근본은 마음이며, 마음의 근본은 무주(無住)이다. 무주는 마음의 본체로서, 신령스럽게 알고 어둡지 않다.”를 인용하여 마음의 근본이 머묾 없음임을 말하고 있다. 또, 『설선의(說禪儀)』에서는 여러 경전의 방편을 언급하면서 “『금강경』은 무주(無住)로 방편을 삼는다.”고 하여 반야경 계통의 『금강경』이 무주를 방편으로 삼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운수단가사(雲水壇歌詞)』에서는 『금강경』 32응화비진분(應化非眞分)의 사구게(四句偈)와 함께 『화엄경』 13권 광명각품제구(光明覺品第九)에 나오는 게송 앞 부분인 “한 순간에 무량겁(無量劫)을 두루 살펴 보니,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고 머무는 일도 없구나. 이렇게 삼세(三世)의 일을 밝게 알면, 모든 방편을 넘어서 십력(十力)을 이룬다.”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두 게송은 뒤에 사찰에서 행하는 장례식의 다비문(茶毘文)에 포함되었음을 『석문가례초(釋門家禮抄)』, 『승가예의문(僧家禮儀文)』, 『작법귀감(作法龜鑑)』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자수(子秀; 1664-1737)는 『무경집문고(無竟集文稿)』에서 “삼계(三界)를 집으로 삼고, 대지(大地)에 머물지 않으며, 한 물건도 버리지 않는다.”고 노래하고, 다시 『무경실중어록(無竟室中語錄)』에서는 ‘무주(無住)’라는 제목으로 “부처는 한 글자도 말하지 않았고, 조사는 양(梁)의 황제를 인정하지 않았네. 넓고 넓어 아무것도 없으니, 대도량(大道場)을 노니는구나.”라 노래하고, 또 ‘시(示)’라는 시(詩)에서는 “몸을 쉬고 목숨을 보전할 곳이, 바로 옆에 있지만 스스로는 알기 어려워. 머묾 없음을 떠나지 않고 머물면, 성불은 이미 흔한 일이네.”라고 노래하고, 또 ‘평암(平庵)’이라는 시에서는 “이 일은 본래 머묾이 없어, 인연을 따라 일어나니 곳곳이 평등하다. 이 소식을 믿을 수 있으면, 집으로 돌아감에 무엇하러 길을 물을까?”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들 시(詩)의 내용은 모두 연기(緣起)로 발생하는 무상(無常)한 세계에는 머물 곳이 없음을 노래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선승(禪僧)들 가운데에는 이처럼 시를 통하여 ‘무주(無住)’를 노래한 이들이 여럿 있었는데, 도안(道安)․추붕(秋鵬)․명찰(明察)․수연(秀演)․새봉(璽封)․해원(海源)․취여(取如)․지탁(知濯)․의순(意詢)․선영(善影) 등을 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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