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3월 24일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작가 쥘 베른(Jules Verne)우주로 떠난 날
쥘 베른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상 과학 소설가다. 쥘 베른은 1828년 2월 8일, 프랑스 서부 대서양 연안 항구도시 낭트에서 변호사 피에르 베른과 소피 드라퓌 부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경이의 여행' 시리즈로 지구 속 여행, 해저 2만리, 80일간의 세계 일주 등 지금 생각해 보아도 놀라운 내용의 책을 썼다. 과학자는 아니었지만 당시의 첨단 과학 기술을 소설에 잘 녹여 내,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이다. 예를 들어 해저 2만리에서는 잠수함,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는 당시 유일한 비행체였던 열기구가 나온다.
지구에서 달까지는 느린 속력의 열기구 대신 거대한 대포가 등장하는데, 1687년 영국의 물리학자 뉴턴이 달로 가기 위해 초속 12㎞의 빠른 속도로 여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기 때문이다.
쥘 베른의 과학적인 접근 방법은 훗날 이 소설을 읽은 많은 어린이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중 미국의 고다드 박사가 있다. 고다드는 과학을 공부하면서 대포로는 달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연구를 거듭해 1926년 세계 최초로 액체 로켓 발사에 성공한다. 이로써 달 여행용 우주선을 로켓으로 만들 수 있음이 증명됐다.
참고로 많은 양의 폭약을 터뜨려 짧은 시간에 높은 속도를 내는 대포를 이용할 경우, 달에 포탄을 보내려면 포신의 길이만 60㎞가 넘어야 한다.
쥘 베른의 작품 세계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재미와 교양을 추구한 대중문학”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베스트셀러 작가며, 한 세기가 넘도록 전 세계에서 보편적인 사랑을 받은 쥘 베른의 문학적 성취는 결코 쉽게 무시할 수가 없다.
하지만, 쥘 베른의 문학은 약점도 있다.
지나치게 단순화, 도식적인 줄거리, 구체적 배경 묘사와 대조적으로 빈약한 심리 묘사, 애독자가 주로 어린이였다는 점 등이 그의 작품이 푸대접 받는 이유다.
인기 작가이기는 하지만 불멸의 작가로까지 격상되지는 못하는 쥘 베른의 한계다.
베른의 집안을 보면 섹스피어처럼 법을 바탕에 깐 소설을 쓰거나 법률가로 나아갔으면 하는 점도 있다.
쥘 베른의 가문은 대대로 법조인을 배출했고, 드라퓌 가문은 인근 지역에서 오랫동안 명문가로 유명했다. 낭트는 18세기 초에 번영을 누린 프랑스 최대의 무역항 가운데 하나다.
이국적인 무대에서의 흥미진진한 모험이라는 쥘 베른 문학의 핵심 테마를 형성하는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1847년에 19세의 쥘 베른은 파리에서 법과대학에 입학했다. 가업을 계승하라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까닭이다. 파리 생활 중에 쥘 베른은 여러 문학 살롱에 출입하며 문단 인사들과 인연을 쌓았다.
특히 <춘희>의 저자인 ‘아들’ 뒤마와 절친한 사이가 돼, 그의 소개로 <삼총사>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저자인 ‘아버지’ 뒤마가 운영하는 극장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극장장의 비서로 일하게 된다.
1850년에 쥘 베른은 테아트르 리리크에서 첫 희곡인 <부러진 밀짚>을 초연하며 작가로 첫 발을 내딛는다. 같은 해 그는 작곡가 아리스티드 인냐르와 처음 만나 10여 년 넘게 공동 작업을 전개한다.
1851년에 법률 공부를 마친 쥘 베른은 고향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변호사 사무실을 이어받는 대신, 파리에 머물면서 집필 활동에 전념하기로 작정한다.
매일같이 도서관을 드나들며 자료를 조사하며, 에드거 앨런 포와 E. T. A. 호프만 같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은 소설 습작을 집필했다.
1856년에 쥘 베른은 아미앵에서 열린 친구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신부의 언니인 오노린 드비안을 보고 반한다. 그녀는 이미 두 명의 딸을 둔 미망인이었지만, 그는 그런 사실에 아랑곳없이 청혼해 이듬해에 결혼한다.
그 와중에도 틈틈이 작품을 써서 잡지에 투고하고 무대에 올렸지만, 무명작가로서의 생활은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쥘 베른은 생계를 위해 한동안 처남의 소개로 증권거래소에 들어가서 일하기도 했지만, 문학을 향한 열정은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었다.
1886년에는 두 가지 불운이 찾아온다.
첫째는 출판인 에첼이 사망한 것이었다.
둘째는 정신질환을 앓던 조카의 총을 맞아 다리가 불구가 된 것이다. 이때부터는 과거의 낙관적인 태도와 반대로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색채가 두드러졌다.
이는 아마도 저자의 개인적이고 신체적인 불행에서 비롯된 심경 변화로 추정된다. 말년에는 문학 이외에도 정치에 관심을 가져 1888년부터 10여 년 넘게 아미앵 시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작가이자 출판인인 피에르 쥘 에첼의 도움으로 책을 출간하고 대성공을 이루게 된 그는 80여편의 과학 소설과 모험 소설을 썼다. 경이의 시리즈 60여편을 생전에 출판하였다
“베른의 천재성은 놀라운 세계를 묘사했다는 것과, 인간의 위대한 드라마들을 상징으로 단순하게 표현해서 어린아이들조차도 그 상징들을 느낄 수 있게 했다는 점입니다. 아마 제가 지금 그 책들을 다시 읽는다면 감정이나 폭풍우, 대화재 등을 묘사하는 그의 방식에서 제가 많은 영향을 받았음을 새삼 발견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쥘 베른의 책들을 읽고서 유년 시절에 영향을 받지 않았을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글을 쓰면서 그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작가가 과연 있을까요?” - 르 클레지오
“쥘 베른은 우주적인 상상력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매우 드물고 아름다운 능력이다. 이런 재능을 이 정도로 소유한 사람이 제1급의 작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시인이자 놀라운 예언자이며 능력 있는 창조자였음을 어느 누가 감히 부인할 것인가? 과학자, 곧 연구자를 경이로운 것들을 노래하는 시인과 연결시킨 것은 다름아닌 ‘상상력’이다. 자연을 관찰하는 것, 감정들을 묘사하는 것, 그것은 과학과 시정(詩情)이 동시에 하는 역할이다.” - 아나톨 르브라즈
《기구를 타고 5주일》(1863)
《지구 속 여행》(1864)
《지구에서 달까지》(1865)
《달나라 탐험》(1869)
《해저 2만리》(1869)
《80일간의 세계 일주》(1873)
《신비의 섬》(1874)
《챈슬러 호》(1874)
《황제의 밀사》(1876)
《인도 왕비의 유산》(1879)
《마티아스 산도르프》(1885)
《정복자 로뷔르》(1886)
《15소년 표류기》(1888)
《카르파티아의 성》(1892)
《깃발을 바라보며》(1896)
《세계의 지배자》(1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