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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매단상 : 이름에 대하여
1. 이름 드러내기
싱 어게인이라는 가수 재활 프로그램에 대해 얘기하는 주변 사람들이 많다.
무명가수들의 온 몸을 던진 공연에 감동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많은 사람들은 주로 가수와 그 가수가 부른 노래에 대해 주목해서 말하지만 나는 ‘이름’에 시선이 갔다.
그 방송은 번호표를 달고 도전하여 몇 단계를 통과하여 마침내 Top 10에 오르면 번호표를 떼고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영광스런 자리가 주어지는 내용이다.
번호표를 단 상태를 무명(無名)가수라고 불렀으니 이제 10위안에 들면 이제 유명(有名)가수가 된 셈이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말하는 명(名)은 아마 문자 그대로의 이름(name)이 아니라 세상에 알려진 명성(fame)일 것이리라. 수 십년 가수생활을 했으면서도 명성을 얻지 못해 번호표를 달고 나온 가수들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음악성과 가창력은 기가 막힌 데 기획사를 잘못 만나 혹은 홍보에 서툴러, 아니면 외모(外貌)가 TV 출연에 적절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명성이란 참으로 허망하다.
걸그룹 걸스데이에서 열심히 노래해도 아무도 안 알아주던 혜리는 난데없이 가짜 군대 생활하는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에서 에잉 하고 조교에게 앙탈 한 번 부리고 100억을 벌었다든가 무명의 그룹이었던 EXID가 어떤 팬이 찍어 올린 직캠이라는 동영상 하나로 소위 역주행을 하여 인기가수 반열에 올랐다든가 하는 사례나, 혹은 서태지나 나훈아처럼 매스미디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비주의 전략으로 그 명성을 유지하는 하는 사례도 많다보니 도대체 그 명성의 한판승은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연예인들이야 명성을 얻는다는 것은 돈과 명예가 따른 것일 것이고 거기 싱 어게인에 출연한 가수들에게 있어서는
우선 노래할 무대를 얻을 것이고 생활고로부터 벗어날 것이고 마침내는 경연무대에서 심사위원석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동양을 관통하는 속담에 호사유피 인사유명(虎死留皮 人死留名), 즉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이름>이 동양의 유교사회를 지배해 온 기본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종교적으로 말해 보면 종교의 많은 기능 중 하나는 현실적으로 건강하고 건전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다.
서양 혹은 중동에서 널리 유행하는 종교는 대개 사후(事後) 세계(世界)에 대한 믿음에 천국(天國) 등의 내세(來世)를 내세우며 현세(現世)에서 착하게 살아야 내세(來世)에서도 대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통해, 현실세계에서의
개인의 욕심과 탐욕을 제어하여 보다 나는 세상을 만드는 방식으로 교화하는 방법론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구교든 신교든 기독교와 이슬람, 나아가 불교 등도 마찬가지 방법론을 사용한다.
반면에 중국에서 형성된 사생관은 조금 종류가 다르다.
중국의 핵심사상을 담은 책은 주역(周易)과 춘추(春秋)라고 보는데, 역(易)의 핵심은 서양사상의 핵심인 Platon의 이데아론과는 달리 세상 모든 것이 고정된 상태가 아니고 변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진리나 팔자나 운명조차도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라고 본다.
또한 공자가 편찬한 책 <춘추(春秋)>는 원래 역사책인데 그 편찬의 정신은 한 마디로 충신과 효자 등 멋지게 산 사람은 역사에 좋은 이름을 남길 것이요, 착하게 살지 못한 사람은 그 악명을 후손들에게 남길 것이므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역사기록의 기본정신을 담고 있고 그것은 사마천의 <사기>로 이어져 기록의 전범이 되어 춘추필법 춘추정신이란 말을 남겼다.
공자는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제자의 질문에 “야, 임마. 사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죽은 뒤는 알게 뭐냐”는 식의 답변을 남기고 있다.
즉 열심히 살고 충성하면 그 명성이 후손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이고 나쁜 짓을 하다 죽으면 후손들에게 더러운 이름을 남길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도 저도 아닌 무수한 어중이떠중이에겐 이름이 있으나 명성은 없어 족보에 그저 그런 사람으로 남을 테니 사람들은 기를 쓰며 출세하여 명성을 남기길 희망했을 것이다. 보통 사람들도 명성까지는 몰라도 주변의 평판(評判)에 신경쓰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시골 초등학교 졸업식장에서도 축사(祝辭)를 농협조합장이 먼저 하느냐 우체국장이
먼저 하느냐 지서장이 먼저 하느냐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현실이 그 때문일 것이다.
이름에는 정치적 전술과 전략도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충신의 대명사로 기억하는 포은 정몽주의 사례가 그것이다.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이라며 조선왕조 창업에 반대한 정몽주를 살해한 것은 태조 이방원인데 아이러니칼하게도 그를 다시 불러내 충신의 대명사로 만든 것도 이방원이다.
왜냐하면 조선 왕조가 들어선 뒤에는 오히려 불사이군하는 충신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조선왕조 창업의 지분율이 이성계 못지 않았던 정도전을 역사에서 이름을 지운 것도 이방원이었으니
그는 이름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전략가임에 분명하다.
어리석은 대중은 그런 음모를 모르고 충신이니 사육신이니 하는 그들의 전략에 놀아난 것이다.
영화 <황산벌>에서 계백장군의 아내는 조국이 망한 뒤에 명예를 더럽힐 것을 두려워하여 차라리 내 손으로 가족을
죽이고 전장(戰場)을 향하겠다는 모진 남편 계백을 향해 “호랑이는 가죽 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 땜시 죽는 벱이여”라고 절규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살아있음의 가치를 외친 그 아내의 목소리가 일반 민중의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이름을 혹은 자기 이름의 명예를 지키는 것은 생명을 지키는 것만큼이나 중요할 것이다.
특히 우리가 알고 있는 훌륭한 분들이 대개 그러하다.
심지어 위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그 이름을 위해 자기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 사람들이기 마련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제물을 내려주는 불천위(不遷位)들은 그렇다 치고 일반인들도 효자각이나 열녀문으로
이름을 남기기 위해 벼라벨 짓을 다했다는 얘기들도 풍문으로 떠돌기도 한다.
저 멀리 이순신장군이나 논개나 가까이로는 윤봉길 안중근의사나 유관순누나나 매천 황현이나 모두 죽음을 선택하여 이름을 역사에 남긴 분들이다. 그분들뿐만 아니라 저 무명가수 경연대회에 출연한 가수들이나 오디션장의 문을 두드리는 수많은 지망생들이 모두 명성을 얻길 희망할 것이다. 전국적인 명성을 노리는 그들은 차치하고라도 우리 일상에는 보다 유명해지고 자기 이름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 경쟁하고 그 과정에서 무명으로 남는 자와 유명으로 뜨는 자로 나뉘기 마련이다. 이름이 유명해지는 것은 달콤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급식장에서도 유명한 학생 옆자리는 늘 붐비고, 동창 모임에서도 권력과 명성을 가진 자의 옆 자리가 먼저 메워질 것이다. 어떤 영역에서는 그 명성의 정도에 따라 출연료나 강사료가 달라질 것이고 어떤 영역에서는 그 명성에 따라 기부금이나 찬조금의 액수가 달라질 것이다. 설사 그런 정도에 미치지 못한다해도 명성의 정도에 따라 타인이 나를 대하는 태도의 격이 달라질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설사 그런 명성을 추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자들도 그런 말을 통해 또 다른 종류의 명성을 얻고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모든 종교에서 추구하고자하는 진정한 인간의 끝판왕은 아마 이름에 대한 욕심을 버린 인간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노자는 물처럼 낮은 곳을 향하라 말하며 자기는 이름을 남겼고,
부처는 모든 욕심을 버려야 한다는 말로 이름을 남겼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존경하는 모든 역사적 인물들을 재평가하고 차라리 이름을 남기지 못한 <위대한> 인물들을 마치 현충원 무명용사 탑에 헌화하듯 추모해야 할 것이다. 언젠가 교사들과 만주 탐방을 갔을 때 연사들이 저마다 그 곳을 무대로 살다 죽어갔던 윤동주 이육사 김좌진 이청천 장준하 등의 이름을 거론하며 그들의 애국 열정을 추모할 때 마지막으로 나선 내가 “이보세요, 그래도 그 분들은 이름이라도 남겼지. 그 분들 따라다니다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고 죽어 만주벌판에 백골로 버려진 무수한 아랫것들이 더 안타깝지 않소이까.”라고 외쳐 좌중에 찬물을 끼얹고 빈축을 산 적이 있었다.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읽은 직후이긴 했지만 나 또한 이름, 하다못해 깊은 인상(印象)이라도 남기기 위해 그런
아가리질을 한 것은 아닌가 오래 후회하기도 했다.
2. 이름 잊혀지다
멕시코 배경의 만화영화 <코코>를 보면 그 쪽 사람들은 죽음의 끝을 “산 자의 기억 속에서 잊혀짐”으로 보고 있다.
육체적 죽음과 그 뒤의 잊혀짐, 더구나 가족들에게 잊혀지면 다시는 윤회의 강을 건너지 못하는 영원한 죽음의 세계에 머문다는 그들의 사생관은 우리와도 많이 닮아 있다.
Don’t Forget Me 날 잊지 말아 주오라는 인간의 영원한 주문(呪文)은 그래서 여전히 유효하다.
물망초(勿忘草)라는 식물도 있거니와 모란 동백이 질 때마다 나를 생각해 달라고 외치는 가수도 있고 이름을 불러
주세요 나 거기 서 있을께요 라고 호소하는 노래도 있고 하다 못해 고양이도 잊혀지기 싫어 메모리를 외치는 뮤지컬 넘버도 있다.
Memento mori라는 말도 유행하고 있다.
장례식장에 고인의 영정사진을 걸고 무덤에 학생부군 누구 지묘라 새긴 비석을 세우고 족보에 줄줄이 성명을 적는
것도 마지막으로 고인의 이름을 각인시키기 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아마도 사랑의 시작과 끝에도 이름이 있을 것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관심은 그/그녀의 이름을 알고 싶은 것에서 출발하고 전화번호에 그 이름을 신규등록하는 것에서
1일차가 될 것이다. 다소 유치한 인용이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 그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하나의 의미기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도 그런 과정을 말한 것이리라.
나는 학교선생을 할 때 그 반 아이들의 이름을 다 외울 때까지는 학생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저기 김지미, 그리고 그 뒤의 학생, 이리와 봐”라고 호명되었을 때, 김지미는 기쁠 것이고 그 뒤의 학생은 상처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에 공정성, 혹은 편애의식을 없애기 위해 그리하였다.
그래서 담임교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아이들 이름을 외우는 일이었다.
어떤 학생은 중학교 시절 신학기가 시작된 몇 개월 뒤에 담임에게 조퇴맡으러 갔더니 그 담임이 “니가 누군데 왜 나한테 와서 조퇴해 달라는 거냐?”라고 말하던 기억을 떠올리며 치를 떨기도 했다.
아무리 착한 학생이라도 그런 스승을 존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더라도 세월이 흐르면 사람들의 이름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잊혀지게 마련이다.
언젠가 길에서 고교시절의 노스승님을 만나 인사를 드렸더니 나를 잘 기억하지 못해서 “제가 모고등학교 11회 출신입니다”라고 하자 그 스승이 말하길 “아하, 그래, 그 시장선거 나왔던 정 **하고 친구였지. 이제 기억나네.” 그러셨다. 마침 며칠 뒤 그 친구를 만나 선생님 만났던 얘기를 하며 “내 이름은 잊혀졌고, 니하고 친구라고 기억하더라. 기분 묘하데.”라고 했더니 그 정모 친구 왈 “당연하지, 내가 선거비용을 몇 억을 써서 이름 석 자를 홍보했는데...”라고 하였다. 참 맞는 말이다.
이름을 알리기 위해 누군 몇 억을 쓰는데 돈 한 푼 안 들이고 잊혀진 이름이 되기 싫어하는 내가 자본주의의 부적응아임에 분명한 것이었다.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도 비용이 발생하고 비용 없이 기억되려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시대를 뛰어넘는 업적을 세워야 할 것이었다.
군대시절 현충일 즈음에 동작동 국립묘지에 가면 저 위의 6.25 참전용사 묘역에는 드문드문 백발이 성성한 미망인들이 보이고 중간의 월남참전용사 묘역에는 서너명이 모여다니고 가까운 근래 전사한 용사들 묘역에는 수십 명이 엎드려 절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계급에 따라 죽은 뒤 차지하는 땅의 넓이가 다소 차이는 있지만 그들이 죽음으로 국가에 공헌한 것에 무슨 차이가 있으랴. 다만 세월이라는 바람 앞에 풍화되는 과정이라 볼 수 있었다.
살아서 이름을 떨친 자도 있을 것이고 살아서 이름이 있음에도 무명이라 불린 자도 있을 것이다.
설사 살아 명성을 얻었다 하더라도 어떤 자는 세월이 가면 잊혀지고 또 어떤 자는 세월이 가도 잊혀지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고 그렇게 정리정돈되면서 아마 역사는 흘러갈 것이다.
3. 이름의 무게
이름에는 보이지 않는 질량과 무게가 있다.
내 조카 중에 성우(聲優)가 한 명 있는데 이 녀석은 한 20여년의 성우활동을 통해 꽤 많은 재산을 모았다.
그 비결은 성우이기에 목소리로만 출연하여 사람들이 자기 얼굴을 몰라본다는 것이란다.
자기가 가수나 탤런트나 배우였다면 대중들이 이름과 얼굴을 알아보니 거기에 걸맞는 옷과 자동차를 갖추는 등의
소비활동도 해야 하는데 자기는 목소리만 알려져 있으니 츄리닝을 입고 다니든 청바지를 입고 다니든 어쨌든 ‘품위유지비’가 전혀 들지 않아 수입의 대부분을 저축할 수 있었던 것이 요령이라면 요령이라고 했다.
우리가 흔히 “--답게” 생활한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이름값을 하는 것이리라.
돈 많이 벌었다고 자랑은 하면서도 점심값 낼 때 우물쭈물하는 자가 있다면 짠돌이 소리를 들을 것이니
부자라는 명성을 유지하려면 밥값도 자주/잘 내야 할 것이다.
노자는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무명천지지시, 유명만물지모)”라고 했다. 나같은 천한 지식으로 그 뜻을 다 헤아릴 길은 없지만 대충 해석해 보면 다음 같을 것이다.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 지으면(명성화하면) 그것은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이름 없는 것이 천지의 모든 것의 시작이요, 이름을 가지는 것이 만물을 낳는 어머니다 라는 의미일 것이다.
Big Bang을 말하는 것인지 원시적 카오스 상태를 말하는 것인지 태초에 말쌈이 있었다는 요한의 전갈을 말하는 것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름이 가지는 중요성을 말하는 것임에는 분명할 것이다.
서양 근대 생물학이 린네 같은 학자의 이름 짓기에서 시작했고 그 이름짓기는 필연적으로 구분짓기를 나았고
그 구분짓기는 마침내 차별하기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논산훈련소에서나 유격훈련장에서는 모두 번호로 불리우고 앞에 말한 싱 어게인도 그런 차별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출연자를 번호로 불렀을 것이다. 번호로 살기 혹은 이름없이 살기는 이름의 무게감에서 해방되는 대신 이름으로 대우 받기를 포기해야 한다.
나는 이름을 얻고 싶었으나 그것이 너무 힘들고 능력도 안 되어 포기한 경우에 해당되는 인간이다.
교사시절 특별히 교감진급을 포기한 적도 없는데 어느 날 보니 일부 후배들 사이에 “진급에는 관심없이 오직 학생들을 위해 평교사로 가르치는 일에만 매진한 교사” 뭐 그런 평가가 붙어 내가 기겁한 적이 있다.
나는 “진급을 위해 최선을 다했으나 그 길을 잘 몰랐거나, 능력이 모자란 교사”일 뿐이라고 극구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허명(虛名)은 나를 피곤하게 만들 뿐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름은 있으나 그 이름으로 단 한 번의 조명도 받은 적도 없고 명성을 가진 적도 없다.
교사직에 오래 있었으나 책임 있는 자리에서 결재로 이름을 사인하거나 이름을 걸고 뭘 해 본적도 없고,
내가 수업 들어가지 않는 학년 반 아이들은 이름도 모르는 그저 그런 One of Them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이름 있는 사람들과 자리를 함께 했을 때 주최측 사람들은 당연한 듯이 무명인 나를 무시하고
깔보기도 한다. 똑같은 기부금을 냈는데도 소개가 안 되기도 하고, 약속의 우선 순위에서 밀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내 돈으로 밥을 사고도 잘 먹었다든가 고맙다든가 하는 소리를 못 듣기도 하고,
잘못은 상대방이 했는데도 조직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사과하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은 “니 같은 무명과 함께 있어 주는 것만 해도 영광인 줄 알아, 이것아”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럴 때 조금은 속상하기도 하지만 이내 잊고 만다.
무명인사에게도 나름의 장점은 있기 때문이다.
옛날 연애시절 타지(他地)에선 애인과 손잡고 거리를 거닐다가 고향에 오면 떨어져 걷는 것처럼 익명(匿名) 혹은
무명(無名)의 장점을 누려보기도 한다. 그래서 이따금 과속으로 운전하기도 하고 걷기 운동을 하다가 슬쩍 제방뚝
아래나 숲속을 향해 노상방뇨를 하기도 하고 육두문자를 내뱉기도 하고 길모퉁이에서 담배를 빨아대기도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쳐다보면서 눈살을 찌푸리긴 하지만 사진을 찍거나 목격담을 타인에게 널리 전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내가 국회청문회에 나갈 일도 언론에 등장할 일도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오를 일도 없는 무명(無名)이어서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인간임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 이름이 없는 자의 한없는 가벼움이여.
내 어깨 위에 이름의 무게가 없다는 사실이 진정 나를 자유롭게 날아오르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화등선(羽化登仙)은 무명(無名)만이 가진 은총일 것이다.
이름을 얻기 위해 온 몸을 던져 싱 어게인인지 어게인 싱인지 하는 젊은 가수들을 보면서 문득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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