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 모임] 질그릇에 보배를
2019. 12. 13. 이현래 목사
지난번에
‘그리스도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말씀을 했다. 생각할수록 우리가 비밀을 맡은 자들이다. 십자가에 죽은 사람을 주님이라고 전한 사람들이니까 비밀이다.
황제에게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이 다 버려버린 그 사람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니까 비밀이다. 그분과의 연합이 없이는 성경에 약속한 그 어떤 것도 우리의 것이 될 수 없다. 칼빈도 하나님은 그에게 모든 것, 자기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주었다고 말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다 맡겼다고 한다. 흘러넘치도록 맡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내 것이 되려면 그분과 연합이 되어야만 내 것이 된다. 연합이 없이는 그분은 아무리 넘친다고 하더라도 우리 것이 될 수 없다. 칼빈의 구원의 목표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의 관문에 불과하다. 그 다음에 성화의 과정을 지나서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면 그때는 그리스도가 받은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다 같이 공유하게 된다는 것이 칼빈의 구원의 목표다. 문제는 우리가 그분과 어떻게 연합하는가? 이것이 문제다. 이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임금의 것이 다 내 것이 되려면 내가 임금에게 시집가서 왕비가 되는 것이다. 재벌이 만들어 놓은 많은 재산이 내 것이 되려면 그 재벌에게 시집가는 수밖에 없다. 시집만 가버리면 그것이 다 한꺼번에 내 것이 된다. 여자들은 좋겠다. 시집만 잘 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니까 남자는 뼈 빠지게 만들어놓아도 여자는 시집만 가면 된다. 그 사람에게 결혼만 하면 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예수를 통해서 그 고난 속에 이루어 놓은 것은 엄청나게 많은 것이지만 우리는 그냥 그분과 연합만 되면 그분 것이 다 우리 것이 된다. 이것은 비밀한 일이다. 그런데 예수와 연합만 하면 이것이 다 사실이다. 칼빈의 구원론의 목표가 그리스도와 연합이라는 말은 너무나 맞는 말이다. 그것이 없이는 모든 것이 다 그림의 떡이다. ‘그렇다 하더라.’ 이런 것이다. 이*철씨 집에 돈이 많더라는 것은 그렇다는 것이지 내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이렇다, 이런 분이더라.’ 아무리 해도 내가 그분과 연합이 안 되면 ‘그렇다 하더라.’ 밖에 안 된다. 우리가 어디 가서 전해도 ‘이렇다 하더라.’ 밖에 안 되고, 그 정도 전하기도 어렵다. 예수는 이렇게 넉넉한 분이다 말하기도 어렵다. 남의 이야기고 우리가 물건을 보고 구경한 이야기 같으면 그냥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자랑하려면 내가 없이는 자랑이 안 된다. 왜냐하면 세상이 다 알고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는데 내가 가서 그분이 이렇게 저렇고 한다고 아무리 해보라. 받아들이겠는가? 요즘 찬불가를 들어보면 예수님에게 드린 찬양보다 가사가 훨씬 진한 찬양이다. 아주 많은 찬불가를 만들어서 부르는데 들어보면 찬송가를 다 바꿔야 될 정도다. 내용이 얼마나 진한지 말로 할 수가 없다. 그런 사람을 보고 그렇게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당연하게 생각한다. 성철스님을 보고 그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다 당연하게 생각한다. 요즘 법륜 스님이니 법정스님이니 여럿이 있는데 이런 분들의 영광을 이야기하면 당연하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만큼 수양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는 수양을 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말한 대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니까 어떻게 믿겠는가? 우리는 부처님 선전하듯이 그렇게 할 수 없다. 이것이 어려운 점이다. 우리가 비밀을 가진 사람들이다. 고린도후서 4장4절에 재미있는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만 사람들이 ‘무엇이 하나님의 형상이냐?’ 하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하겠는가?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가? 예수님이 생기기를 다르게 생겼는가? 뭐가 다른가? 이적을 행할 때 같으면 이적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냐 하고 말하면 들을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이적은 다른데 가도 있다. 그것을 가지고도 완전치 못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4:6)고 한다. 이것은 그냥 봐서 아는 그런 영광이 아니다. 환하게 빛이 나는 이런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 교회에서 말씀을 하고 나면 사람들의 얼굴이 빛나더라고 하는데, 그것은 다른 일에도 그런 것이 있다. 기분이 좋으면 그럴 수 있다. 모두 비밀이다. 고린도후서 4장7절에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고후4:7)라는 말이 있다.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는데 이 말도 너무 적절한 말 같다. 나 같은 아무것도 아닌, 성경 말씀대로 하면 흙에 불과한 것, 숨이 코에 붙은 것, 이것이 인생이다. 이 인생 속에 신기한 분을 만나게 되어 신기한 분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 내가 그 안에 있고 그가 내안에 있다. 요즘 내가 그 안에 있다는 이것이 자신감이 생겼다. 내 안에 그가 있다고 할 때는 자신감이 없었는데, 내가 그 안에 있다고 하니까 자신감이 생긴다. 이것이 보배다. 내가 그 안에 있다. 나는 예수 안에 있다. 누구한테도 이것은 쉽다. 내안에 예수가 있다고 하려면 어려운데, 내가 그 안에 있다고 하려면 너무 자랑스럽다. 그리고 확실하다. 이것은 변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이 보배다. 나는 갖고 있지 않은 보배니까 사람을 만나면 누구에게든지 이 내용을 이 보배를 이야기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도 우리 집에 호흡하는 양압기가 있는데 이것을 A/S 하는 총각이 온다. 일을 하고 나갈 때까지 생각을 못하다가 대문을 나갔는데 아차, 저 사람 언제 또 볼지 모르는데 내가 얘기를 안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가는 사람을 다시 부를 수도 없고 해서 망설이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 다시 왔길래 교회를 가봤냐고 했더니 가보지 않았다고 한다. 너는 무엇을 믿느냐고 하니까 불교를 믿는다고 한다. 불교는 절에 왔다 갔다 한 것이지 깊이 공부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 교회에 한번 와보라고 했다. 우리 교회가 이런데 있는데 와보지 않겠느냐 하고 보냈다. 그냥 보내고 나니까 이상하게 뭘 하나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분위기가 안 되어서 자세한 것은 말을 못했지만 우리 집에 또 올 것이니까 교회생활을 몇 권 주어서 보냈다. 군대는 갔다 왔다고 한다. 바빠서 출근하는 길에 우리 집에 왔기 때문에 어제 저녁에 전화를 해서 왔으니 붙잡고 이야기할 형편이 못되어서 이야기를 못했다. 하여튼 뭔지 모르게 무엇을 내놓고 싶고 주고 싶다. 이것이 무슨 비밀이 아니겠는가? 다른 사람에게는 이런 것이 없는 것이니까 비밀이다. 이것이 내 인생의 보배다.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고, 또 살아야 얼마나 살겠는가? 그렇지만 뭔가 보배가 있다. 질그릇에 있다. 이 말이 너무 적절한 말이다. 질그릇에 보배라는 말이 너무 적절하다. 보배를 넣으려면 다 좋은 그릇에 넣지 질그릇에 넣어 놓겠는가. 그런데 질그릇에 보배가 있다. 그러면 세상 같으면 오히려 보배가 빛나지 않아야 할 것 같은데, 좋은 금 그릇에 넣어 놓아야 시원찮은 보물이라도 아주 귀중한 보물로 보일 것이다. 보물을 질그릇에 넣어 놓았으니 누가 보면 보물인지 모르지 않겠는가? 그릇이 질그릇인데 이 질그릇이 곰탕이나 먹는 그릇이다. 옛날에 농민들이 먹는 그릇이지 잘 사는 사람들이 먹겠는가? 곰탕은 사실은 옛날에 소를 잡아먹고 그래도 버릴 수가 없으니까 뼈다귀를 또 삶아서 해먹는 것이 곰탕이다. 그런 것이나 담아 먹는 것이 질그릇이다. 그런데 ‘질그릇에 보배’라고 들으면 보배가 빛나는구나. 질그릇이니까 보배가 더 빛나지라고 한다. 이것은 우리 인생의 경험이다. 나 같은 인생에게 어떻게 이렇게 귀한 것이 있는가? 이 말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는 말이다. 내가 금 그릇이라도 된다면 금 그릇 속에 다이아몬드를 넣어 놓으면 금이나 다이아몬드나 비슷하니까 빛날 것이 없다. 질그릇에 다이아몬드를 넣어놓으면 세상에서는 잘못한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좋은 것을 좋은 곳에 담아야지 할 텐데, 우리는 그 좋은 것을 질그릇에 넣으니까 더욱 빛난다. 주관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다. 금 그릇은 보화를 담아 놓아도 별로 기쁘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보화이기 때문이다. 미인은 남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여기 결혼하실 분이 없으니까 말해도 헛일인데, 여자가 너무 예쁘면 남편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를 사랑한다고 한다. 너무 자기가 예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를 사랑하고, 남들이 다 자기를 사랑하기를 바라지 남편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예쁜 여자와 결혼하면 곤란하다. 옛날에 미인박복이라는 말도 있다. 너무 예쁜데 소박을 맞는 사람들이 있다. 얼굴은 참 예쁜데 소박맞는 여자가 있다. 왜냐하면 자기밖에 모르기 때문이다. 질그릇에 보화를 담아 놓으면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속으로 생각할 때 나 같은 질그릇에 보화를 담아 놓았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니까 얼마나 감사하겠는가! 인생은 생각해 볼수록 아무 것도 아니다. 예수 죽으심 안에서 알고 보면 더 아무 것도 아니다. 뭐가 된 줄로 알았더니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남겨준 자신을 보니까 그 안에서 발견된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비밀이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운명하셨을 때 공관복음에 전부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씌어 있다. 성소에는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이 있다. 커텐이다. 성소와 지성소를 갈라놓은 이유는 사람이 지성소에 못 들어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을 추방하고 난 후에 동산을 막았다고 한다. 화염검과 두루 도는 그룹들로 막아서 못 들어오게 하였다. 왜 못 들어오게 했는가? 저것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으니까 저기에 생명나무 열매까지 먹고 여기서 영생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동산에는 하나님만 있어야 되는데 하나님 말고 하나님이 또 하나 생기면 안 된다는 말이다. 왕궁에 왕이 하나만 있어야지 둘이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쫓겨났다. 다른 것이 아니다. 또 왕이 될 놈이 생겼으니까 당연히 나가야 된다. 벌통에는 여왕벌이 두 마리가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는 나가는 것(분봉)이다. 동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있는 데 또 하나님이 생기면 되겠는가? 내쫓았다. 그것을 상징하는 것이 성소의 휘장이다. 그래서 아무도 못 들어오게 했다. 모세가 산에 들어가서 여호와를 만날 때도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하였다. 접근하면 죽는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는 누구도 못 들어가게 철저하게 막혀 있는 것이다. 법률적으로 대제사장만 1년에 한 번 들어갔다가 나오도록 되어 있다. 들어가 있는 곳은 빛이 전혀 없는 아주 캄캄한 곳이다. 거기서 피를 뿌리고 나오는 것이다. 신에게 갔다가 나오는 것이다. 사람이 신을 만나고 나오는 것이다. 사람은 신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접촉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성소의 휘장이 위로부터 찢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열어버렸다는 말이다. 누구든지 들어와도 좋다고 열어버렸기 때문에 예수 안에 있으면 지성소가 평상시가 되는 것이다. 특별한 장소가 아니고, 일상적인 장소가 된다는 말이다. 성소와 같이 그냥 하나님을 섬기는 그런 장소가 된다는 말이다. 이것이 참 비밀이다. 예수님이 죽었을 때 왜 휘장이 찢어졌을까? 그리고 찢어진 휘장을 누가 보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누가 봤을까? 그것은 제사장들밖에는 못 봤을 것이 아닌가? 그런데 제사장들이 다 예수를 죽인 사람들인데 그것을 일부러 자랑스럽게 말할 리도 없고, 어떻게 소문이 퍼져서 그랬는지 비밀이 새 나간 것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그런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는 다 그렇게 쓰여 있다.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고 써 있다. 이것은 큰 문제였다. 역사적 사건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초대교회 사도들에게 있어서 굉장히 큰 문제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 누구의 말로 하면 실존적으로 아주 중요한 문제다. 지금 우리는 성소의 휘장이 찢어진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세계가 완전히 다른 세계다. 완전히 막혀 있다가 열린 세계다. 완전히 막히고 캄캄해서 그 어떤 사람도 들어올 수 없도록 막혀진 것, 동산에 화염검이 있어서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호랑이도 불이 있으면 못 들어간다. 그런 것이 열렸다는 뜻이다. 불구덩이 같은 것이 확 걷혔다는 말이니까 천지개벽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확 열려 버렸다. 왜 예수님이 죽었을 때 그렇게 열렸을까? 그것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동산에서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된 사람이니까 그런 사람이니까 이게 막힌 것이다. 하나님이 또 있을 수 없으니까 막혀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죽으시니까 뭐가 되었는가?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죽어버렸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없단 말이다. 하나님이 원래 지어서 동산에 둔 그 사람만 남은 것이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살기 위해서 지어 놓은 사람이니까 당연히 문이 열리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기도를 해야 된다. 금식을 해야 된다. 이런 것이 많이 있다. 어떻게 음성이라도 들어본다든지, 무슨 징조라도 얻어 본다든지, 이런 것을 하려고 애를 많이 쓴다. 나도 처음에는 많이 해 봤다. 소리라도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다. 뭔가가 터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언을 해보려고 애를 썼는데 도저히 안 되어서 나는 못했다. 만약 그때 되었더라면 나는 어디로 샜을지 모른다. 그런데 아무리 해도 안 되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접었다. 뒤로 하나님이 찾는 것이 그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사람이구나. 이것을 알고는 해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지 그러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하나님이 찾는 사람을 몰랐더라면 평생 그것은 숙제였을 것 같다. 나는 방언도 못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그때는 성경을 보니까 다 그렇게 보였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이렇게 묻는다. 우리는 성령이 있는지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그랬더니 손을 얹으니까 방언을 하였다고 되어 있으니까 이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하려고 해도 부인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은 그것이 아니고 그 어떤 사람이구나. 이것을 아니까 싹 날아가고 없다. 그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구나. 할 사람은 하고 말 사람은 말고 그것을 꼭 해야 되는 것은 아니구나. 이렇게 알아졌다. 그래서 거기에서 해방이 되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이었다. 처음에 갈 때, 그것이 내가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이 놀라운 이적을 행하는 이런 것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나는 이적에 별로 큰 관심이 많이 없다. 그 안에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는가에 관심이 있지만 이적 자체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지금 와서 생각을 해 보니까 누구를 어떤 사람을 봤기에 내가 그렇게도 원했던 체험, 성령체험이 나에게서 사라졌는가 하면 바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는 그 사람을 봤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 말을 정확하게 하지 못했지만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삭을 통해서, 야곱을 통해서, 늘 계시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면 그 사람을 따라온 셈이다. 막판에 와서 이 사람을 만나니까 내가 따라온 길이 이 사람을 따라 온 길이었구나. 이 사람을 만나려고 왔구나. 이런 확신이 생겼다. 이것이 보배가 아닌가! 알고 보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신기가 있기를 바란다. 조금이라도 신기가 있어야 된다. 더군다나 목회자들은 신기가 없으면 목회가 잘 안 된다. 신기가 약간 있어야 된다. 그래야 사람들이 따라오지 신기가 없으면 맹숭맹숭해서 여간 잘해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이 아닌 사람, 참 사람, 하나님이 동산에서 같이 살려고 만든 그 사람, 그리고 동산의 경작권을 맡겼던 사람, 이 사람에게 다스리며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지키고 다스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작자가 되게 했다는 말이니까 하나님의 동산은 사실 사람에게 맡겨진 것이다. 거기서 하나님의 생명을 번식시키고, 생명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성품을 번식시키는 그런 자리가 아니겠는가? 인생에게서 이것이 낙원이고 행복인데 이것을 잃어버렸으니까 실낙원이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뭔가를 찾고 있는 것이다. 잃어버린 뭔가를 찾고 있다. 뭘 잃어버렸는지 모르니까 못 찾는다. 알아도 찾기 어렵겠지만 보여주어도 안 찾는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원하는 것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못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말을 타고 오는 사람을 원했고, 로마를 정복할 수 있는 사람을 원했다. 이방인들은 어떠했는가? 황제를 원하고, 능력자를 원했다. 그랬지 않은가? 그러니 예수를 내 놓으면 이 사람이구나. 이렇게 하겠는가? 내가 왜 못 뛰어 내리는 사람을 보고 이 사람이구나, 하겠는가? 이것이 비밀이다. 어제도 누가 사랑방에 썼다. 두 사람에게 가서 일치되게 이야기를 했는데, 그러면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서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 이렇게 반문을 하더라고 했다. 나는 생명을 버릴 권세도 있고 얻을 권세도 있다는 이 말이 무슨 말이냐고 질문이 들어왔다고 누가 좀 대답해 달라고 사랑방에 게시해 놓았다. 여러분이 확실한 대답이 있거든 해주기를 바란다. 그 사람들의 말은 예수는 뛰어내릴 수 있었다는 말이다.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인데 안 내려왔다는 말이다. 내가 왜 그 안 내려왔다는 것을 강조하는가 하면 내가 발견한 보화가 그 안 내려온 사람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다. 뛰어내렸다면 나는 다시 구만리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뛰어내리지 못한 그 사람 속에 나의 복이 있다. 내 위치가 발견되고 나라는 사람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니까 나에게는 복이 아닌가? 이것은 세상에 내놓아도 안 가지고 간다. 가져가지 않는다. 도둑놈이 와도 안 가지고 간다. 누가 좀 훔쳐갔으면 좋은데 안 훔쳐간다. 내가 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이 외딴 집에 침입해 오지 않겠는가? 돈이 없으니까 아무도 안 온다. 저기 뒤 윗집은 전망이 좋다. 우리 집은 전망이 좀 막혀 있다. 어떤 사람이 풍수를 좀 아는 데 윗집에서 내려다보면서 자기 집이 전망이 좋지 않느냐고 하니까 그것이 아니고 아래 목사님 집이 자리가 좋다고 한다. 왜냐하면 거기는 무엇이 모여드는 곳이라고 한다. 그런데 요즘에는 가스만 모여들어서 골치가 아프다. 우리 집에서 보면 산 너머 산이 보인다. 그것을 보고 엿본다고 한다. 산 너머 산이 보이는 것을 보고 넘어 다 보는 것이니까 그래서 도둑을 맞기가 쉽다고 한다. 담 너머로 보고 있으니까 풍수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오더라도 가져갈 것이 있는가? 가져 갈 것은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밖에는 가져갈 것이 없으니까 오지 않는다. 오면 잡아놓고 그 보화를 주겠는데, 그 사람에게 주어보았자 가지고 가겠는가? 우리가 보화라고 하는 개념이 아주 다른 개념이다. 예수가 아름답고 영광스럽고 광채가 나고, 여기 보니까 예수의 얼굴에는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이니 한다. 아무리 쳐다봐도 영광이 안 보인다. 쳐다보라. 예수의 얼굴에서 영광이 보이는가? 그런데 이것을 알아보는 사람이 보화를 가진 사람이다. 아무 것도 없고 십자가에 죽어서 내려오지도 못한 그 사람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이 보화로 보인 것이다. 왜? 하나님과 같이 살 수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사람에게 휘장이 열려져 있다.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자기를 가려놓을 필요가 없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기 때문에 못 들어오게 이것을 딱 가려 놓은 것이지 십자가에서 뛰어내리지 못하고 죽은 그 사람 앞에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가려놓고 캄캄한 곳에 계시겠는가?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하시겠는가? 시커먼 곳에 아무도 없이 하루 종일 혼자 있는데, 그 얼마나 외롭고 답답하시겠는가? 돈만 좀 많아도 불안해서 철조망 위에 또 철조망을 이중으로 해놓은 집이 있다. 얼마나 불안하면 그러겠는가? 예수 안에 있는 그 사람을 보니까 불안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이 봐도 불안하지 않다. 하나님이 볼 때 선악과를 먹은 놈은 불안하다. 이놈이 들어오면 난동을 부릴 것이다. 자기가 왕 노릇하려고 하니까 불안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예수를 보면 안심이 되니까 휘장을 열어 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 놓겠는가? 우리 집에는 바깥에 문이 하나 있다. 와야 우리 형제들만 오니까 잠가도 그만 안 잠가도 그만 그렇다. 올 사람이 없다. 하나님 말씀을 들으라고 오라고 하면 바쁘다고 갈 사람이 더 많다. 그래서 문을 잠글 필요도 없다. 성소의 휘장이 왜 찢어졌겠는가?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찢으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사람이 찢어서 올라간 것이 아니고 위에서 찢었으니까 하나님이 찢으신 것이 아닌가? 안심이 되니까 그렇다. 사람을 지으신 후에 안식하시니라고 한다. 사람 같은 사람이 오면 하나님도 휘장 가운데 캄캄한데 계실 필요가 없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을 고생시키고 있는 셈이다. 캄캄한데 가둬놓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못 나오게 하는 것이나 똑같다. 그런데 내가 내 위치에 돌아오면 하나님의 마음을 열게 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자기의 문을 열어 버리면 뭐가 없겠는가? 다 있다. 우리가 인생을 왜 방황하고 헤맸는가? 보화가 있는 창고가 딱 가려져 있으니까 아무리 찾아 다녀도 보화가 없고 구해 놓아 봐야 다 허사이고 우상이다. 우리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비치게 된다. 화가들이 예수님의 얼굴을 그려 놓은 것을 보니까 별스럽게 그린 것이 다 있다. 예술의 자유가 재미있는 것인데 별스럽게 그려 놓은 것이 다 있다. 우리나라에는 예수의 그림이 한 가지 밖에 안 들어와 있다. 예수 그림 종류가 굉장히 많다. 아주 코믹하게 그려 놓은 것도 있고 별 것이 다 있다. 자기들대로 상상을 다 해 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인간적으로 상상을 해 봐도 소용이 없다. 왜 그분의 얼굴에는 광채가 있는가? 하나님께서 안심하시니까 그렇다. 우리 인생에서 하나님이 나를 보고 안식하시고, 나를 보고 만족해하신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 안에 사는 것이다. 내가 안식하니 너희도 안식하라.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편안케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분이 문을 열어 줘야 내가 편안하다. 캄캄한 곳이 한 군데 있는데 집안에서 생각해 보라. 방이 하나 있는데 캄캄한 방이다. 들어가기 무서운 방이 하나 있다고 생각해 보라. 어찌 되겠는가? LA인가 어디 가서 봤는데 총을 처음 만든 사람, 인류에서 총을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지어 놓은 집이 있다. 요즘에는 관광지가 되어서 구경을 시켜 준다. 사람들이 그 총으로 인해 많이 죽는다. 이것이 불안에 걸렸다. 죄책감이랄까, 불안에 빠져서 집을 지어 놓았는데 묘하게 지어 놓았다. 미로로 지어 놓아서 들어갈 때는 내 마음대로 들어갔다가는 혼자서는 나오지 못한다. 들어가면 어디가 출구인지 모른다. 문이 아닌 데도 문처럼 만들어 놓은 곳이 있다. 문이라고 해서 가 열어 보면 아니다. 길이 있을 것 같았는데 가보니까 딱 막혀 버렸다. 그래서 안내자가 없으면 들어갔다가 못 나온다. 이 사람이 불안해서 자기 집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꼭 그 사람만의 문제이겠는가? 알고 보면 아담의 문제다. 자기가 불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소의 휘장이 열려진 사람은 그런 불안이 올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참 놀라운 사건이다. 예수 한 사람 때문에 찢어졌는데,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다 열려져 있는 것도 아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것이지 그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캄캄한 암실이다. 모세가 산에 올라갔을 때 광경이나 성막 안에 있는 지성소나 매 한가지다. 하나님은 빛 가운데 계셔서 참 좋겠다. 아니다. 지금 굉장히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캄캄한 속에서 아무도 없어 외롭게 계신다. 인간만이 유일한 배필인데 인간이 없으니까 어찌되겠는가? 우리가 예수의 십자가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우리가 굉장히 고마운 게 아니겠는가? 그런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고마워하신다. 너를 보니 살겠다. 이렇게 되지 않겠는가? 너를 보니까 살겠다. 밤낮 캄캄해서 말이지 밤인지 낮인지 모르고 여기에 있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는가? 너를 만나니 너무 반갑다. 이렇게 하지 않겠는가?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마17:5) 이렇게 한다. 생각해 보라. 누구를 추천하겠는가?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사람인지 신인지 모르는 사람이 그리스도가 아닌가? 그것 때문에 2000년을 이러고저러고 해도 결론이 확실하게 나지 않는다. 여기 보니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하나님이라 안 해도 된다. 형상이라고 해도 충분하다. 왜냐하면 원래 사람을 만들 때 형상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사람을 형상으로 해서 자기가 나타나려고 만들어 놓았으니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면 다 된 것이다. 사람의 문제도 해결되고, 하나님의 문제도 해결되고, 다 해결된 것이다. 이것이 안 되니까 신이냐, 인간이냐 하고 있다. 지성소에 들어갈 때는 신이고 나올 때는 인간이다. 이것이 대 제사장이다. 신을 만난다는 것은 캄캄한 곳에서 만나는 것이니까 그게 제대로 만난 것인가? 온전하게 만난 것이 아니다. 이중적 인간, 그 사람이 대 제사장이다. 들어가서는 캄캄한 곳에 계시는 하나님과 이야기를 해야 되고, 나오면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야 되는 것이다. 예수님도 그랬다. 아버지를 대할 때는 아들이고 우리를 대할 때는 주님이었으니까 이중적인 사람이다.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오해가 많이 생겼다. 이 사람은 이렇다 하고, 저 사람은 저렇다 하고, 지금까지도 오해가 되고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인간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니까 간단하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4:4)고 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을 비치지 못하게, 그 영광을 비치지 못하게 세상의 악한 신들이 막고 있다고 한다. 그분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렇다고 나 혼자 들어갈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 안에 있는 사람에게 열려진 것이지 아무에게나 다 열려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주님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된다. 그 예수 없이는 아무 것도 하나님과 접촉될 수 없고,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 아무 것도... 이것은 칼빈이 한 말이다. 그와 연합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안 되고,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 그와의 연합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이 연합은 비밀이다. 그런데 비밀스럽게 연합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어렵다. 그리고 성화의 단계를 지나서 그리스도와 연합을 한다고 하니까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 안 되는 이유가 그 때문에 안 된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그냥 믿으면 되니까 믿고 있는데, 성화의 단계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성화에 이른다고 되어 있다. 그러면 그냥 우리에게 성령의 도우심이 오겠는가? 아무나 다 성령이 도와서 거룩하게 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성화의 단계는 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갈 수도 있고, 그렇게 복잡한 과정이다. 거룩한 생활을 한다는 기독교인을 만나보시면 진짜 거룩하게 산다. 그런데 그렇게 살려면 상당히 힘이 든다. 땅도 제대로 보지 않고 다녀야 된다. 언제 YMCA에서 상당심리학 강좌를 열어서 그것을 듣느라고 1년 동안 다녔다. 다니다 보니까 옆에 여자 한 분이 있었다. 이분이 보통 때는 안경을 안 쓰다가 강의를 들을 때만 안경을 썼다. 그래서 나올 때 물어 보았다. 눈이 괜찮은 모양이네요, 그랬더니 아니라면서 안경을 안 쓰면 땅에 있는 것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왜 그러면 안경을 쓰지 안 쓰냐고 하니까 땅에 있는 것이 지저분해서 그것을 안 보려고 안 쓴다고 한다. 땅에 더러운 것이 있는데 안경을 쓰면 더러운 것이 다 보이니까 안 쓴다고 한다. 이 사람은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도 아닌 데도 그러했다. 진짜로 성화 파에서 온 사람들, 성결 계통의 미국 사람들을 만나보니까 굉장히 경건하게 산다. 그렇게 살려면 쉬운 일이 아니다. 상당히 어렵게 살고 있다. 자기들은 익숙해서 괜찮겠지만 하여간 저 사람들은 거룩하게 살고 있다고 보인다. 보이기를 그렇게 보이니까 자기들은 힘든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과정을 통과하는 것은 이중은혜라는 말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은혜와 성화된 것을 합해서 이중은혜다. 이 이중은혜를 통과해야 그리스도와 연합을 하게 되니까 신비로운 연합이다. 그림의 떡이다. 모두 장로교 목사님들이니까 배우셨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가? 예수님과의 연합이 되는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공짜로 받았지만 다른 것은 공짜가 아니다. 왜 내려오지 못한 예수가 우리에게 필요한가? 우리와 연합 때문이다. 내가 그분과 연합하려면 그 자리밖에 없다. 다른 데는 연합할 수가 없다. 내가 언제 성화되어서 그분과 연합하겠는가? 우리는 이 보화를 질그릇에 가지고 있다. 사람이 잘 나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밀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제는 '하나님이다, 사람이다.' 이렇게 해석할 필요도 없는 것 같다. 휘장이 열려 버렸으니까 예수님을 사람이라고 해도 되고 하나님이라고 해도 된다.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도 되고 사람도 된다고 할 필요가 없다. 열렸는데 할 필요가 있는가? 다 열리기 전에 한 말이다. 우리가 신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 굳이 인간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과 우리가 상통하면 되지 않겠는가? 교통하면 되지 않겠는가? 모든 종교적인 노력이 그분과 막힌 담을 헐자는 것인데, 주님이 그렇게 딱 열어 놓았으니까 우리는 아주 쉽다. 내가 그것을 헐겠는가? 내가 죽는다고 휘장이 찢어지겠는가? 나는 죽어봤자 도로 그 사람으로 죽는다. 나로 죽지 내가 죽는다고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는 죽는데 보니까 다른 사람이다. 우리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니고, 우리가 모르던 그 사람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과 직통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그 사람 안에서 하나님과 교통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 교통이 불가능하고 연합이 불가능하다. 예수는 우리의 주님이다. 100번 주님이다. 100번 내 앞에 간 인도자이고, 주님이고, 하나님이고, 좌우간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 우리는 지금 보배를 가진 사람들이다. 문을 닫아놓을 필요가 없는 보배를 가졌다. 자물쇠로 잠가 놓을 필요가 없는 보배를 가졌다. 요즘 보배를 가진 사람들은 은행에 맡겨놓고 가끔 가서 들여다보고 온다고 한다. 지하실에 금고가 있는데 상자마다 이름이 있다고 한다. 그 안에 자기 보석을 넣어 놓았다. 집에 있으면 도둑을 맞으니까 금고에 넣어 놓고 가서 자기만 가지고 있는 키를 가지고 가서 만져보고 다시 넣어 놓고 오는 것이다. 이런 옹색한 보물을 무엇하러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 교회에 그런 재미있는 자매가 한 사람 있다. 시집을 갔는데 시집에서 귀금속을 많이 주었다고 한다. 이 자매가 너무 착해서 이것을 자기가 가지고 있지 않고 시집에 갖다 맡겼다. 시아버지께 맡겼다. 시아버지가 생각할 때는 참 별난 며느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시아버지가 이것을 가지고 있다 보니까 어떻게 보관해야 될지 모르겠는 것이다. 잘못 두었다가 잃어버리면 큰일이다. 생각하고 생각하며 궁리를 하다가 지하실에 헌 물건을 두는 창고 비슷한 곳이 있는데, 라면 박스에 넣어서 한 쪽에 쳐 박아 놓았다. 설마 도둑질 하는 놈이 거기에 들어가겠는가? 그렇게 생각하고 지하 창고에 두었는데 어느 날 대청소를 하면서 그것까지 그만 청소를 해 버렸다. 그래서 홀랑 다 없어져 버렸다. 내가 속으로 그랬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 두어야지 어디다 쌓아 두었는가? 차라리 교회에다 갖다 놓지 했다.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보화를 어디 두기가 어렵다. 우리 집에 보화가 있다고 생각해 보라. 잠을 못 잔다. 사람이 지켜야 하니까 잠을 못 잔다. 세상 보화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우리가 가진 보화는 다 열어 놓아도 안 가지고 간다. 가져갈 사람만 가져가니까 가져가라고 선전하는 보화다. 나는 정말로 보화이기 때문에 선전하는데 듣는 사람은 무슨 별것도 아닌 소리를 하는구나 하고 가 버린다. 가져가라고 내 놓아도 안 가지고 간다. 그러나 우리는 어찌하든지 이것을 나주어 주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비밀을 맡은 자고 보화를 가진 사람들이다. 다 아주 넉넉하고 부자들이다. 세상이 부럽지 않는 사람들이다. 뭐가 부러운가? 부러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가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자랑스럽다. 보화를 가진 사람으로서 자랑이 있다. 그래서 부족한 것이 전혀 없다. 사람들이 모두 불행해 하는 것을 보니까 다 있을 것이 없어서 그렇다. 환경이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인데, 있을 것만 있으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되고 있을 것이 없으면 아무리 있어 봤자 소용이 없다. 지금은 없어서 그런 것 같지만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은 있어도 마찬가지다. 그런 사람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뭘 좀 도와주어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있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고창병이라는 것이 있는데, 옛날에 어린아이들이 못 먹어서 단백질이 부족하면 배가 부어오르는 것을 고창병이라고 한다. 옛날에 그런 아이들이 있었다. 이런 아이들은 개구리를 잡아 먹이든지 쥐를 잡아 먹이면 좋아진다. 왜냐하면 단백질이 부족해서 부은 병이니까 아무리 먹어도 안 된다. 배가 터지도록 먹어야 된다. 왜냐하면 단백질이 없어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개구리를 잡아 먹이는 것이 그 때문이다. 개구리가 보약이다. 단순한 단백질인데도 그것을 먹으면 배가 가라앉게 되는 것이다. 사람도 있을 것이 있어야 만족이 되지 만족이 안 될 것은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만족이 안 된다. 아무리 많아도 안 된다. 지식이 많아도 안 되고, 아무 것도 안 된다. 지식이 많아도 별로 소용이 없다. 그런 지식을 가지고서는 자기가 행복하지 못할 것 같다. 공부로 해서 그렇지 그것으로는 행복하지 못할 것 같다. 우리는 공부를 하지 않았어도 행복하다. 물론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안 하기 때문에 불행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이 다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는데 무엇이 부족하겠는가! 존경하는 여러분! 보화를 가지신 여러분! 존경하고 사랑한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