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증법(辨證法, dialectic)의 역사적 정의
변증법 (辨證法) [dialectic] 한 가지 사물을 대립된 2가지 규정의 통일로 파악하는 방법.
변증법이라는 말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어 시대나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 의미를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쉽지 않다. 현재로서는 변증법이란 실재 속에 모순구조가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따라서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별한 논리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보통의 형식논리학에서 모순율은 절대적인 근본원리이므로 이 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A는 B이다"이면서 동시에 "A는 B가 아니다"가 되므로 두 주장이 모두 성립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변증법은 이 모순율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논리학과 대립하는 논리로 이해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에서 변증법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헤겔 이후이며, 그 이전에는 전혀 그러한 의미를 갖지 않았다. 원래 변증법이 대화술이라는 의미였으므로 이는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우리가 사상이 다른 사람을 상대로 대화나 토론을 할 때 우리는 상대의 입장이 어떤 점에서 틀렸는가를 논증해야 한다. 즉 상대의 입장에 어떠한 모순이 포함되어 있는가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상대 입장의 모순을 밝혀낼 수 있다면 상대도 자신의 오류를 깨닫고 인정하고 우리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사상적인 대화란 이러한 방식으로 이뤄질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는 모순율이라는 원리가 처음부터 당연한 것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자신의 입장에 모순이 있음을 지적받아도 결코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을 상대로는 토론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모순율의 인정은 대화를 성립시키는 전제조건인 것이다.
따라서 대화술로서의 변증법은 본래 형식논리학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논리라고는 할 수 없고, 형식논리학을 인정함으로써 비로소 성립한다. 이렇듯 변증법이라는 개념은 헤겔 이전과 이후에 전혀 그 의미가 달리 쓰이고 있는데, 여기서는 역사적 흐름을 따라 그 의미의 변천을 더듬어보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제논을 변증법의 창시자로 불렀는데, 제논의 변증법이란 바로 토론이나 변론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유일부동이며 불생불멸이라는 자신의 스승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을 계승해, 이 입장에서 '운동'이나 '다양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상이 얼마나 자기 모순을 안고 있는가를 논증하려고 했다. 그러나 제논의 변증법은 소피스트들에게 와서는 논의를 위한 논의, 반론을 위한 반론이 되고 말았다.
완전히 논쟁술로 전락해버림으로써 그 적극적 의의를 잃어버린 변증법에 철학의 방법으로서의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변증법을 대화술, 문답법으로 훌륭하게 구사한 철학자였다. 그는 아테네 시가에 나가 많은 사람들을 상대로 철학적인 문답을 나눴는데, 그것은 어떤 질문을 하여 상대방이 대답하면 그 대답을 찬찬히 짚어보면서 상대에게 모순이 있음을 자각시킴으로써 상대로 하여금 진리를 알고 싶어하는 의욕이 생기게 하려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계승한 플라톤은 변증법을 학문의 최고의 방법으로 중요시했다. 다만 소크라테스의 경우 변증법이 실제로 타인과 주고받는 문답술이었던 데 비해 플라톤은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사유방법으로 생각했다. 원래 사상적인 대화는 반드시 실제 상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진리를 찾아 사색할 때는 언제나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면서 자기 자신을 상대로 대화한다고 할 수 있다. 사상의 발전은 이처럼 자기 자신과의 대화에 의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플라톤과 달리 그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변증법을 학문의 방법으로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변증법은 통설이나 추측으로부터 출발하여 추론하는 논의로서, 개연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는 있지만 참된 학문적 의의는 갖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만 사유의 훈련으로서, 참된 인식을 하기 위한 준비의 의미만을 가질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고대와 중세를 통해 변증법이라는 말은 단순히 논리학의 일부인 변론술 또는 논리학 자체를 의미했지만, 근세에 이르자 칸트는 이 말에 다시금 중요한 의의를 부여했다. 칸트에 의하면 변증법이란 가상(假象)의 논리학, 즉 참인 듯이 보이는 오류를 비판하는 논리학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단지 경험적 세계 즉 현상계를 인식할 수 있을 뿐이며 초경험적인 것, 예컨대 신이나 영혼 등에 대해서는 인식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의 이성은 본래 개개의 판단을 종합, 통일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어떡해서든 경험을 초월한 무제약적인 것을 찾으려고 하며 여기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칸트는 이 오류를 선험적 가상이라 불렀는데, 이를 밝히고 비판하는 것이 선험적 변증법의 임무이다. 즉 칸트에게서 변증법이란 플라톤과 같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적극적인 철학의 방법이 아니라 단지 참인 듯한 오류를 비판하는 소극적인 역할로 규정되어 있었다.
변증법에 가장 적극적인 의의를 인정한 것은 헤겔이다. 헤겔은 변증법이 우리의 인식의 발전만이 아니라 존재 자체의 발전 논리라고 생각했다. 즉 모든 사물은 결국 정·반·합의 3단계로 발전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존재 자체가 변증법적으로 발전한다면, 존재는 적어도 발전의 제2단계에서는 모순적 구조를 갖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변증법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변화한다. 즉 변증법은 모순의 실재를 인정하는 모순논리로서 모순율을 부정하는 특수한 논리가 되기 때문이다. 헤겔에 이르러 변증법의 의미가 달라진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처럼 변증법이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지면 존재 속에 모순이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상은 변증법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헤겔은 "만물은 태어나서 유전하며, 만물을 생성하는 것은 사물의 대립"이라고 생각했던 헤라클레이토스를 변증법의 진정한 창시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헤라클레이토스를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할 때, 이는 제논을 변증법의 창시자라고 할 때의 변증법과는 전혀 다른 뜻이 된다.
헤겔의 변증법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에 이르러 유물론과 결합되어 변증법적 유물론으로 계승되는데,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모든 존재, 즉 자연이나 사회도 변증법적 구조를 갖고서 변증법적으로 발전해간다. 자연에서 나타나는 변증법은 자연변증법이며, 사회나 역사를 변증법적으로 고찰하는 것이 유물사관이다.
예> 수학 : + -
역학 : 작용, 반작용
생리학: 앙전기, 음전기
화학 : 원자의 화합과 분해
사회과학 : 계급투쟁 모순률/동일률/배중률
2. 헤겔의 변증법이란 무엇인가
변증법(헤겔의 설명) : 변증법이란 방법적으로 형성된 규칙적인 모순의 정신이며, 이는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다.
○ 매우 흔한 오해 : 변증법이란 말을 듣는 순간 대부분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 - "정립", "반정립", "종합"(3박자). → 헤겔은 한번도 이러한 형식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앞에서 설명된 내용도 오해에 해당한다.>
헤겔 변증법의 예들
예<1>- 사랑
1) 사랑을 하는 개별적 자아로서 한 인간이 있다. 그의 개별성은 이때까지 자기 자신 안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독립해서 그 자신의 발로 선다. 즉 자아는 자신을 긍정하며 자신을 자기 정립으로서 파악한다.
2) 그러나 사랑 안에는 어떤 고유한 것이 일어난다. 사랑에 빠진 자는 그 자신으로부터 나와서 자신을 몽땅 내어 바치는 그런 행위를 한다. 이것은 분명한 자기 부정이며 그 자신의 고유한 자아에 대한 부인이기도 하다. (자아가 이러한 부정에만 계속 머물러 있다면 숙명적인 결과, 즉 예속과 비극적 종말이 초래될 것이다.)
3) 그러나 이제 결정적인 어떤 것이 발생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을 내어 주면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고유한 인격을 포기하면서 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새롭게 경험한다. 그는 타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거기서 자신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깊이로 나아간다. 헤겔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이 단계는 종합으로서 최초의 부정에 대한 부정일 것이다.
→ 자아의 최초의 부정은 스스로 부정된다. 이 이중적 부정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의 새로운 자아를 발견한다.
예<2>
1)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 돌은 돌이다. 그러나 이 언명으로 얻어지는 것은 전혀 없다.
2) 개개의 존재자는 자기 자신과의 구별을 지닌다.
(자기 자신과 동일한 것은 다른 것과는 구별된다. 다시 말하면 사유가 더 많은 어떤 것을 언명하고자 하면 사유는 상이한 어떤 것을 불러들여야만 한다. 예를 들어, 돌은 나무가 아니다.)
3) 나의 의식은 나로부터 어떤 것을 구별한다. 혹은 나는 그 어떤 것을 그것이 관계맺고 있는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구별해 낸다.
(2)의 인식과 함께 우리는 이미 현실의 변증법적 운동 한가운데 서 있다. 나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구별을 인식하려 하며, 따라서 나의 지식을 향상시킨다.)
예<3>
1) 대상은 그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리고 대상은 나와 나의 인식과는 독립적인 존재를 갖는다. 대상은 즉자적으로 대상이다. 대상의 진리 그리고 대상의 본질은 그 자체 안에 갇혀 있다. 헤겔은 이것을 "즉자 존재"라 하며 동시에 그것을 대상의 진리와 본질로서 설정한다.
2) 다음과 같은 관계가 결과한다. 대상이 독립적인 즉자를 갖는다면 현상도 갖는다. 대상은 나에게 현상하며, 나의 의식에 관계한다. 대상은 "나에 대해서" 나무다. 헤겔은 이 존재를 "대타 존재", "대타적 의식의 존재"라 한다. 대타적인 것은 즉자의 부정이다. 즉자가 이를 통해서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 대타적인 것은 "즉자적"이었던 것과 대립해 있는 셈이다.
3) 그러나 대상은 대타 존재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그것은 현상으로서 또한 부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자, 즉자와 대자, 본질과 현상은 나의 지식 안에서 함께 합쳐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대상, 즉 개념(예컨대 나무)이 발생한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무와 두 철자 나-무는 다르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예<4>
1) 자신의 근원적 독립성 속에서 대상은 현존한다.
2) 이 대상은 다른 대상과 구별될 때만 독립적이다.
3) 그러나 이 구별은 그 자신의 관계성을 뜻한다. : 구별된 것은 소위 독립적인 것과 관계한다. 그러므로 부정은 자기 정립과 모순의 통일로 나아간다.
예<5>
1) 개개의 대상은 우선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 그리하여 즉자이다.
2) 그러나 그 대상은 또한 구별, 즉 자신의 대립, 나 혹은 다른 것을 위한 존재를 갖는다.
3) 이 대립은 또한 지양된다. 그리고 즉자와 대타 사이의 통일은 나의 지식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지를 풍부하게 한다. 이 통일은 대자 존재에 있다.
<<이상의 예들은 모두 「쉽게 읽는 헤겔, 정신 현상학」, (랄프 루드비히, 이동희 역)에서 발췌한 것임>>
변증법 이해를 위한 명제 : 현실은 운동 속에 있다.
변증법의 의미 :
사물을 인식하는 정신의 변화과정(혹은 운동과정)을 형식화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헤겔에게 있어서 세상의 모든 것은 정신이기도 하므로 이제 그 정신의 변화과정은 곧 세상 모든 것의 변화과정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헤겔의 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 그래서 이해하기 쉬운 것은 내가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다. 따라서 변증법을 사물 자체의 운동 과정으로서 파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헤겔의 변증법 이해에 있어서의 변증법
1) 최초의 변증법 이해 : 그것은 단순한 이해이다. 그것은 하나의 출발이기도 하다.
2) 최초의 변증법 이해의 부정 :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변증법 이해와 대립시킨다.
3) 대립의 지양 : 자기 부정을 통한 지양과 새로운 자기 정립(변증법이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정립한다.)
→ 여기서 우리는 왜 잘못된 변증법 이해로 출발하는가? 그것이 쉽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정확한 이해로부터만 출발하려 하면 출발하지 못한다.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단순한 것에서부터 자기부정과 지양을 통해서 발전하는 지식의 한 예를 여러분이 스스로 경험하고 있다.
○ 헤겔 변증법 이해의 한 방식
헤겔의 변증법은 순수한 정신의 운동양식이다. 즉 정신이 어떤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1단계) 그것에 대해서 반성하고(2단계) 그 반성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확장하는 것(3단계)을 기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