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적무강은 양위명을 향해 걸었다. 사위가 고요했다. 너무나 고요해 질식할 것만 같은 침묵이 전장을 가득 메웠다.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오직 하나, 적무강의 얼굴이었다. 천 명이 넘는 사내들이 오직 단 하나, 적무강으로 인해 침묵을 강 요받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압도 적인 존재감을 발현하고 있었다. 저벅저벅! 고요한 전장 소겡 오직 그의 발소리만이 들려왔다. 양위명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적무강의 눈이 자신을 향했기 때문이다. 도저히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무심한 그의 눈동자에 자신 의 모든 옷이 벗겨진 듯 오한이 들었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 있는 그의 모든 것이 까발려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으......음!"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앓는 듯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는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려고 애를 썼으나 적무강의 무심한 눈빛은 그런 양위명의 노력을 모두 무력화시켰다. "당신이 이곳의 책임자인가?" "그, 그렇소." 양위명은 적무강의 물음에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의 목소리 에는 숨길 수 없는떨림이 배어 있었다. "당신은 조금 더 이곳에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소." "나도 그.... 러려던 참이었소이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적무강은 나직이 말을 이으며 양위명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추궁의 빛 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압박이 양위명에게 가해졌다. 차라리 왜 이따위로 상황을 만들었냐고 호통 을 친다면 속이라도 편할 것이다. 이것은 대놓고 욕을 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었다. 적무강은 양위명을 지나쳤다. 그의 외면에 양위명은 지독한 자괴 감을 느꼈다. 자신이 이곳의 대장군이며 수천 군사의 우두머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남자에게 나는 단지 이곳의 무능한 책임자일 뿐인가?' 북방의 맹장이라고 소문난 양위명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모멸감이 었다. 하지만 그는 적무강에게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만약 입을 열면 또다시 그의 무심한 시선을 받아야 할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도마 적...... 대협이십니까?" 그때 양위명의 부장이 적무강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물었다. 그 에 적무강의 눈이 그를 향했다. 순간 부장이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 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용기를 내어 적무강을 응시했다. 적무 강의 눈동자에 흥미롭다는 빛이 일렁였다. 그가 보기에는 대장군 양 위명보다 오히려 뛰어나 보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름은?" "소장의 이름은 전광운이라 합니다. 도마 적 대협이 맞습니까?" "내 이름이 적무강인 것은 맞소." "아......!" 전광운이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장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도...마, 설마 십자성의 천라지망에서 죽었다는 그를 말하는 것 인가?" "그럼 낭혈문의 무인들을 홀로 막아섰다는 소문이 사실이란 말이 야? 믿을 수 없어." "그럼 그렇지. 도마가 아니고서야 천하에 그 누가 단지 기세만으 로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을 압도할 수 있단 말인가?" 병사들이 웅성거렸다. 어느새 그들의 눈에는 존경의 염과 강호의 전설을 직접 보았다는 희열의 빛이 떠올랐다. 도마(刀魔). 자신의 여인을 위해 천하를 횡단하며 십자성과 맞섰고, 이제는 천 왕성을 상대로 홀로 도를 뽑아 든 이 시대의 열혈남아. 그것이 강호 에 흘러 다니는 적무강에 관한 소문이었다. 마치 불같이 퍼져 나가는 그에 대한 소문. 특히 홀로 천왕성을 상 대하기 위해 일어섰다는 내용에서 강호의 젊은 무인들은 열광했다. 강호상에 작용하는 수많은 힘의 역학들, 십자성과 천왕성이 대치 하고, 그 사이에서 구대문파가 힘을 모으며 그들을 견제한다. 중소 문파들은 세 거대 단체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자신들에게 조금이라 도 유리할까 셈을 굴리고 있다. 만약 그들 중 하나라도 힘의 역학에 서 벗어나게 되면, 모난 돌이 정을 맞는 것처럼 다른 문파들의 공격 을 받게 된다. 본래 강호의 존재들은 자유로움을 추구하지만 이처럼 서로의 이해 관계와 함께 수많은 견제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져 있어 그 누구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때문에 천왕성의 준동에도 불구하고 십자 성을 제외한 그 어떤 문파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답답한 상황 속 에서 적무강이 홀로 일어섰으니 그 반응이 어떻겠는가? 적무강 그 자신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는 지금 수많은 강호 젊은이들의 우상이 었다. 많은 젊은 무인들이 그의 뒤를 따르려 했고, 그를 닮고자 노력 했다. 본래 그에 대한 소문이 이토록 빨리 퍼져 나갈 수 없었으나, 정보 상인인 만형통과 곽부종의 뜻에 의해 의도적으로 강호에 퍼져 나갔 다. 그들은 적무강이 더욱더 큰 존재가 되길 바랐다. 십자서을 홀로 상대할 수 있을 만큼의 위명을 얻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자신들의 일 역시 편하게 풀리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지금 강호의 모든 눈과 귀는 적무강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사천성에서도 천왕성의 발 호와 관련해 십자성이 분전하고 있었지만 본래 강호는 영웅을 원하는 법, 그들에게 있어 영웅은 적무강이었다. 적무강을 바라보는 전광운의 눈에는 존경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 은 그의 직속상관인 양위명에게도 보이지 않던 표정이었다. "저...는 종남 출신입니다. 그래서 사형들에게 적 대협에 대한 이 야기를 들어 알고 있습니다." "종남이라... 좋은 사문을 두었구려." 적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종남은 무척 좋은 기억으로 그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 가장 어려울 때 받은 도움, 그는 아직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잊지 않을 것이다. 적무강의 말을 들은 전광문의 얼굴엔 기쁨의 빛이 떠올랐다. 그 존재만으로도 일인문파(一人門派)라고 불리기에 손색이 없는 남자가 자신의 사문을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속가제자에 불 과했으나 그는 종남 출신이었기에 적무강의 말에 더욱 기분이 좋아 졌다. 적무강은 그의 기뻐하는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북쪽을 향해 시선 을 돌렸다. "앞으로 더욱 혼란해질 겁니다. 살기 힘들어지는 것은 백성들뿐,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이 있을 겁니다. 부디 자신의 책임을 유기하지 마십시오." "적... 대협." 양위명의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떠올랐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천하를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하지만 자 신은 권력의 암투에 휘말려 이성을 잃고 천하를 혼란에 빠지게 만들 었다. 비록 그 역시 이용당한 것이지만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유구 무언(有口無言)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 사용되는 것이리라. "장성 밖으로 나가려 합니다. 문을 열어 주시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적무강의 말에 전광운이 앞으로 나섰다. 양위명은 감히 앞으로 나 서지 못하고 적무강의 등을 지켜보았다. 넓었다. 그리고 굳건했다. 남자의 등이 이리도 아름다울 수 있다 는 것을 오늘에야 알았다. 그에 비해 자신은...... '허어! 춥구나. 나는 나이를 헛먹었구나. 이 나이가 되도록 천하가 아닌 내 일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았음이니... 정말 부끄럽구나.' 양위명은 씁쓸한 눈으로 적무강을 배웅했다. 적무강이 지나가자 병사들이 서둘러 길을 비켜 줬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건만 병사들은 알아서 적무강이 갈 길을 만들어 줬다. 방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였다. 그때는 적무광의 기세에 눌 려 자신도 모르게 길을 내줬다면 지금은 진심으로 마음에서 굴복해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천 명의 병사들이 만들어 준 길 사이로 적무강은 담담히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그 누구도 북방의 거친 병 사들이 이렇듯 마음에서 우러나 길을 내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적 대협의 무운을 빕니다." 누군가 외쳤다. 그러자 곳곳에서 우레 같은 함성과 외침이 터져 나왔다. "적 대협의 장도에 행운이 깃들기를......" "천왕성의 무리들을 모조리 쓸어버리십시오." "와아아아!" 대동관 전체가 들썩였다. 병사들뿐만 아니라 대동관에 사는 일반 백성들까지 모두 나와 적무강을 환송했다. 그들의 눈에 적무강은 거 대한 적에 홀로 맞서 싸우는 영웅과 다름없었다. 세대를 초월한 수많 은 사람들이 적무강의 장도에 무운이 깃들길 기도했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동관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은 한마음이었다. 끼이익ㅡ! 장성의 문이 열리며 황량한 북방의 벌판이 적무강의 눈앞에 모습 을 드러냈다. "이 말을 타고 가십시오." 병사 중 한 명이 군부에서 기르던 말 한 마리를 끌고 왔다. 그가 고삐를 건네주자 적무강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았다. 열정으로 가득 찬 병사의 눈빛을 보자니 거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천왕성의 무인들이 들어온 길, 이제 그 길을 적무강이 거슬러 가 려 하고 있었다. 휘잉! 바람이 불어왔다. 북쪽의 건조한 바람에 적무강의 피풍의가 펄럭 였다. 적무강은 잠시 남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 올랐다. '아주 잠시간의 이별일 뿐...... 우울해 할 필요는 없겠지.' 그는 피풍의를 입가까지 끌어올려 불어오는 모래 바람을 막았다. 그리고 말에 올라탔다. 그때 등 뒤에서 전광운의 목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전군, 거ㅡ창!" 차차착! 순간 천 명이 넘는 병사들이 일제히 들고 있던 차을 치켜 올렸다. 하늘 높이 치켜든 차이 달빛에 반사되며 은은한 빛을 뿌렷다. 그것은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우, 그리고 존경의 표시였다. 북방 의 거친 사내들이 적무강을 향해 최고의 존경을 표하는 것이다. 이것 은 황제조차 받지 못한 예우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적무강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칠게 말을 몰았다. 히히힝! 말이 투레질을 하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부디 무운을 빕니다.' 척! 전광운이 자신의 창을 내렸다. 그러자 병사들 역시 일제히 창을 내 렸다. 그들의 눈에 멀어져만 가는 적무강의 모습이 보였다. 수천의 시선 이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호호호~! 드디어 저 남자가 밖으로 나온 것인가?" 대동관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모래언덕에서 여인이 일어났다. 그녀가 일어나 팔을 치켜들며 기지개를 켰다. 그녀는 북방의 거친 바 람을 막기 위해 무척이나 두꺼운 옷을 입고 있었지만, 풍만하면서도 육감적인 몸매를 숨길 수는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배웅을 받으며 장성 밖으로 나온 적무강을 바라 보는 그녀의 시선은 무척이나 집요했다. "저자가 낭혈문의 그 지저분한 늑대들을 물리치고, 건방진 그년의 콧대를 꺾은 남자란 말이지? 호호호!" 그녀가 웃을 때마다 풍만한 가슴이 기복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녀 는 개의치 않고 멀어져 가는 적무강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에 탐욕과 함께 욕망의 빛이 일렁였다. "천하가 넓지만 오직 저자만이 나의 배필이 될 자격이 있구나. 나 한소희는 결정했다. 저자를 나의 부군으로 맞아들이기로......" 자신을 한소희라 밝힌 여인은 광오한 선언을 했다. 그것도 천하의 적무강을 상대로 말이다. 그러나 한소희는 자신이 있었다. 이제껏 그 녀가 결심해서 되지 않은 일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한소희의 미모는 화사했다. 너무나 화사해서 마치 한 떨기 꽃을 바라보는 것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미모 속에는 치명적인 독침 이 숨겨져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꿀과 미모에 취해 날아든 어리석은 나비들은 모두 그녀의 가시에 찔려 그녀의 노예가 되었다. 그녀는 이 번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적무강의 사랑이 강호에 유명하긴 하지만 자신의 미모 앞에서는 그조차도 이성을 잃고 말 것 이다. "호호호~! 그를 내 노리개로 삼아 난 천왕성 최초의 여제가 될 것 이다." 그녀의 웃음소리가 초원에 울려 퍼졌다. |
첫댓글 즐감하고 갑니다.
즐감 하고 갑니다
고향설 시인님의 좋은글 "천인혈(天刃血) 제5권 18 "과 아름다운 영상 즐감하고 갑니다.
오늘은 기쁨을 주고 사랑받는 행복하고 즐거운 주말 되세요....
즐독!
다녀갑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한소희란 여자가 천왕성의 여제가 되겠다고 적무강을 자신의 치마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