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노는 토요일
걸어서 태백 한 바퀴!
걷기는 가없이 넓은 도서관이다.
길을 따라가는 동안 온갖 우연한 만남은 우리를 근원적인 철학으로 초대한다.
- 다비드 르 부르통 <걷기 예찬> 중
#1. 안개
아이들과 왕언니 산소에 인사가던 밤
피재 마루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한발 헛딛으면 천길만길 낭떠러진 듯
아슬아슬 삼수령 고갯길을 넘어갈 때
고개를 쭈욱 뽑은 허민이가 풀어놓은,
우리 마을에서 제일 착한 어머니 얘기
예찬이네 집에 땅거미 지도록 놀던 날
어서 가라는 말씀 대신 간식을 내셨지.
어둑한 길로 자전거를 끌고 앞서는데
고물 티코를 몰고 갈 길을 비춰주셨지.
수줍음 타는 새댁들 모아 인사시키고
심술궂은 사내아이들 품어 준 왕언니.
꿈처럼 하늘 가신 왕언니 산소 갈 때,
용돈 모아 산 국화 한 송이씩 들었지.
공원묘지 더듬어 인사드리고 오는데,
우리 갈 길 만큼만 안개가 걷히더라.
민아, 왕언니가 뒤에서 비추시나보다.
정말 그런가 봐요! 정말 그런가 봐요!
마을 아이들 호위 차량은 왕언니 티코,
깊은 밤 안개 속이라도 무섭지 않았다.
#2. 걸어서 태백 한 바퀴.
철암-장성-황지-철암.
친구, 이웃, 자연과 더불어 놀며 쉬며 가는 길.
#3. 철암 석공 앞 삼거리
6학년 현희 언니랑 다섯 살 민아 언니 손잡고
달리듯 걷는 세 살 김현아.
키다리 제로니모 최선웅 선생님과
당차게 걷는 현진이.
중학교 중간고사가 낼모레인데,
은정이를 보내며 아버지가 하신 말씀.
"이렇게 좋은 기회는 꼭 가야하는거야!"
#4. 마을 전체가 솜이불을 덮은 듯 포근합니다.
안개가 걷히니 시리도록 파란 가을 하늘입니다.
#5. 언덕 위에 삼방동, 산 할아버지 구름 모자 썼네.
저기 비탈에 미애씨가 세들어 살던 집이 있습니다.
#6. 가희는 인사를 참 잘해요.
어물전 아저씨께도
채소 파는 할머니께도
진흥수퍼 태현이네 할아버지께도
길 건너 안씨상회 어머니께도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철암시장이 울리도록 크게 인사하는 가희.
가희랑 걸으며 언니 따라 인사하는 김민아.
인사 참 잘한다!
권은정 건모 남매, 장진호와 숨은 진혁 형제, 최선웅 선생님
김현아 민아 자매, 임현희 가희 자매, 김현진 서현 자매, 권예원, 박미애 선생님과 사진 찍는 해리포터.
#7. 근현대문화유산
해발 700미터에 70미터 규모 거대한 저탄장과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촬영한 선탄장은 유형문화재.
이웃과 인정이 있는 철암마을에
친구, 이웃, 자연 더불어 자라는 아이들은 무형문화재.
#8. 신설교에서 본 옛 철암도서관
2003년 4월 4일~2007년 2월 10일
철암어린이도서관/공부방 옛 건물.
북한사투리를 쓰는 마할머니네 건물입니다.
고쳐서 도서관 만들라고 3층을 내주셨습니다.
꼿꼿하되 인정 많으신 할머니는
일본어, 한문, 영어를 잘 쓰셨습니다.
도서관 선생 아랫층에 불러다
반찬 챙겨주시고 라면 끓여주시고
진한 커피 타주셨습니다.
몇 해 전 겨울에 언 길에 낙상하여
큰 수술을 받고 노인요양원에 가셨습니다.
얼마간 목발 짚고 걸으시다가
휠체어를 타셨고 점차 침대생활을 하셨습니다.
어느 날 아들, 손자 자랑하시다가
철암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 하셨습니다.
북녘땅이 고향이면, 철암은 마음의 고향입니다.
사무실에 부탁하니
직원이 가족과 통화를 했습니다.
그날 어떤 절차와 상황으로 나가지 못했습니다.
다른 날 가족과 다녀가셨는지 모르겠습니다.
목발, 휠체어, 침대생활...
차츰 기력이 약해지셨고,
찾아오는 이웃이 줄었습니다.
올해들어 다른 시설로 옮긴 할머니를 뵈었습니다.
이젠 도서관 선생을 몰라보십니다.
도서관을 내어주신 일도,
선생 불러다 베푸신 일도
다 잊으셨습니다.
한마디 말씀 하지 않으셔도
온유한 눈빛과 꼿꼿한 자세는
마할머니 그대로입니다.
#9. 철암 명당, 철암교회.
신설교나 남동교에서 보면 언덕 위 철암장로교회와
그 너머 시루봉이 잘보입니다.
옛 도서관을 비워주고 갈 곳이 없을 때
왕언니 계미정 어머니가 철도 관사 창고를 내주시고,
철암장로교회 목사님과 어른들이 교회 건물을 빌려주셨습니다.
더부살이하면서 부탁드리고 도움받은 일 헤아릴 수 없습니다.
도서관에 큰 손님 오면 집사님과 권사님들께서 상차려주시고,
모임이나 행사에 교회 예배당 내주셨습니다.
아동부에서 용돈을 모아 건축기금 후원하고,
어른들이 건축비를 내셨습니다.
새 도서관으로 이사할 때는 바이올린 연주에
액자와 거울 등 선물을 챙겨보내셨습니다.
마을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자리에 서서
교회 성도가 아니라도 두루 섬기고 돕는
철암교회에 고마운 일이 많습니다.
#10. 좋은 친구들, 철암역 앞 거리.
어둑한 저녁에 철암역에 내리면 길 건너 구멍가게가 불 밝히고 오가는 손님 맞아주었습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잘하는 식당에는 끼니때마다 역무원들이 붐볐습니다.
큰 방 찬장에는 아저씨가 근처 산에서 딴 머리만한 버섯이 볼만했습니다.
신설교 쪽으로 가면 도장집이 있는데 진열장에 조막만한 짚신이 곱습니다.
할아버지가 삼은 짚신입니다. 할아버지께 인감도장을 팠습니다.
옆 집엔 늦은 밤까지 고삼 여학생이 아르바이트하는 치킨점이 있었습니다.
건너에는 이발소 할아버지, 딱 한잔 식당 할머니 댁.
돌아서서 남동으로 내려가면 오래된 찻집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기만 해도 옛 추억이 살아날 듯한 곳인데,
철암을 찾는 예술가들이 자주 들렀습니다.
그리고 40년 넘은 삼광만화방과 오락실.
어느 날 오락실 앞을 지나가는데, 남자아이가 게임기 버튼을 다다다닥 누르며 노래를 부릅니다.
"잘먹고 잘싸 감사~"
도서관에서 음식 나눠먹을 때 젖가락을 서로 부딪히며 부르는 식사송을
게임기 버튼 누르며 부르다니,
배꼽잡고 웃었습니다.
전에 있었고, 그랬던 일입니다.
지금은 큰 길을 내면서 헐었습니다.
빈자리지만 지금도 보이고 들리는 추억입니다.
지난 봄에 철암역장님이 길가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도로정비하니까 깨끗하지요. 그래도 북적거리던 때가 사람사는 것 같았어요."
아이들은 새 길을 걸으며
아이들의 추억과 역사를 만들겠지요.
#11. 광활 선생님 마을인사 거점 연립상가.
방학 때 광활 선생님이 오시면 첫주에 마을 돌아다니며 인사합니다.
남동 경로당과 지은이네 할아버지, 문화연쇄점 형우네 할머니 뵙고,
연립상가 3층 백연이네 집에 가면 점심 전후입니다.
백연이네 어머니는 국수를 삶거나 라면을 끓여주시기도 하고,
커피나 차를 대접해주십니다.
#12. 서현 언니 손 잡고.
세 살 김현아가 피내골부터 남동교까지 잘 걸었습니다.
남동교 건너 엄마 품에 안겼습니다.
#13. 전차동 철길 건널목.
건널목 사무실에 상철암 아파트 아랫층 아저씨가 계십니다.
그 아래 샛길로 내려오면 희준, 희민, 희찬, 희열 사형제네 집이 있습니다.
어머니가 막내를 가져 만삭이실 때, 희민이와 찾아뵈었습니다.
마을 아이들 나눠먹을 과일이랑, 모아둔 장난감, 직접 만드신 신발모양 비누를 주셨습니다.
비누가 예뻐서 도서관 책장에 오래 두었습니다.
희민이네 할아버지는 철암에서 유명한 중국집을 운영하셨습니다.
희준이랑 희민이는 할아버지 손재주를 물려받았는지,
손을 잘 씁니다.
장성초등학교로 전학가서 핸드볼팀 선수가 되었습니다.
#14. 남동교 건너 돌구지로.
#15. 남동교 아래 할아버지 댁 마당에 도토리.
남동교 아랫집에 할아버지께서 마당에 앉아 계십니다.
마당에 마대를 깔고 도토리를 말립니다.
햇볕에 잘말리면 껍질이 잘 벗겨집니다.
작년에 아이들과 피냇재와 일월산에서 주운 도토리를 말려서
이웃 어른께 보태드리고 묵을 먹었습니다.
#16. 천의 얼굴 저탄장.
저탄장이 그저 검기만 하냐면 아니에요.
하루에도 빛의 방향이나 세기에 따라 다르고,
계절마다 천의 얼굴입니다.
겨울에 눈내린 저탄장은 한폭의 수채화 같습니다.
#17. 강원탄광 전설과 광부의 길.
철다리 뒤에 강을 가로지르는 콘크리트 다리가 있었습니다.
아이들과 다리를 건너 폐석을 줍고, 언덕 위 갱구에 가서 '용아 나와라.' 소리쳤습니다.
산기슭에 난 오솔길은 돌구지와 강원탄광을 잇는 광부의 길입니다.
숱한 전설과 추억이 깃들어 있어,
해마다 가을 배추 수확할 쯤이면 돌구지 살던 분들이 추억따라 오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