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차이나 타운
성모당을 떠나 제물진두 순교성지에 거의 다 와가는 지점에 차이나타운이 있어 아침 겸 점심이라도 때우려 들어갔다. 다른 도시에도 차이나타운이 있지만 인천 차이나타운이 가장 크다고 한다. 개항당시 청나라 조계지여서 역사성도 가지고 있다.
높다란 중국식 패루(牌樓)가 중국 고유의 붉은색과 황색의 호화로운 색채를 뽐내며 서 있는 안쪽으로 상가가 길게 나 있다. 듣기로는 우리가 먹는 짜장면도 이곳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알다시피 짜장면은 중국 전통음식이 아니다. 산동반도에서 면장을 볶아서 먹던 작장면(炸醬麵)이 우리 입에 맞도록 변형된 음식이 짜장면이다.
원조 짜장면 집을 찾을 여유가 없기에 입구 부근에 東寶城(동보성)이라는 집에 들어가 짜장면을 먹었다. 제물진두 성지는 바로 인근에 있었다.
제물진두 순교성지 - 인천지역 최대의 순교터 |
인천시 중구 항동1가 1-13
인천시 중구 제물량로 240
제물진두의 교회사적 의의
1800년대 중후반 흥선 대원군이 조정을 통치하던 시기, 조선은 전략적 요충지로서 서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 외세의 침입이 잦았던 인천 지역은 서양 세력이 조선으로 드나드는 관문이자, 선교사들에게는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었다. 하지만 외국과의 통상과 이질적 사상의 침투에 완고했던 조정은 외세와 함께 천주교 신자들을 조선 침략의 공범으로 내세워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곳은 한국인으로서는 첫 번째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1821-1846년)가 부제품을 받고 입국하여 1년여 간 조선교회의 사정을 둘러본 후, 1845년 4월 사제품을 받기 위해 인근의 포구에서 작은 목선을 타고 중국 상해로 떠났던 역사적인 곳이기도 하다
. 또한 1888년 7월 22일에는 제7대 조선대목구장 블랑(Joannes Marie Blanc) 주교의 초대로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 4명(프랑스 국적 2명과 중국 국적 2명)이 이곳 제물포항을 통해 순교자 땅인 조선에 첫발을 내디뎠다. 이로써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도 생활이 시작되었다.
인천지역 최대의 순교터 - 제물진두의 순교자들
1868년 4월 독일의 상인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에 의해 일어난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南延君) 무덤 도굴사건과 잇따른 서양세력의 침공과 관련해 조선 정부는 천주교인들에게 책임을 물어 서양 배와 관련된 장소에서 신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진두(津頭), 곧 나루터에서 신자들을 공개 처형함으로써 서양세력의 배척하는 척사(斥邪) 의식을 고조하고 천주교를 금하는 경종 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한 것이다.
이에 대한 결과로 1866년 병인박해 이후 인천 제물진두(祭物津頭)에서는 우리나라의 첫 번째 영세자인 이승훈 베드로(李承薰, 1756-1801년)의 증손자인 이연구와 이균구 등 열 명이 처형되었다.
1868년 무진년(戊辰年) 4월 부평 읍내에 살던 ‘순교자들의 행적 증거자’ 박순집 베드로(朴順集, 1830-1911년)의 이모인 김씨(1810-1868년), 남편 손 넙적이 베드로(1800-1868년), 사위 백치문 사도 요한(1826-1868년), 이 마리아의 손자 등 4명이 체포되어 서울 포도청에서 신문을 받고 인천으로 압송되어 제물진두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그리고 1871년 신미년(辛未年) 5월에는 남양에 살던 이승훈의 손자인 순교자 이재의 토마스(李在誼, 1785-1868 )의 두 아들, 곧 증손자 이연구(李蓮龜)와 이균구(李筠龜) 형제가 미군 함정을 살피다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어서 인천에 살던 이승훈의 다른 손자 이재겸(李在謙, 이승훈의 3남 순교자 이신규 마티아의 아들, 1968년 체포되어 1871년 유배지에서 사망)의 부인 정(鄭)씨와 그의 손자 이명현(李明玄), 신자로 추정되는 백용석과 김아지도 체포되어 이곳에서 함께 효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제물진두 성지의 개발의 현재와 미래
제물진두 순교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있으나, 인천교구는 2010년 교구 성지개발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고 김진용 마티아(2012년 선종) 씨가 규명한 인천시 중구 파라다이스 호텔 부지 언덕 일대와 지척인 차이나타운 입구 한중문화관 옆 부지를 2011년 10월 21일 매입해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제물진두 성역화를 추진하였다. 2013년 7월 11일 제물진두 순교기념관(경당) 기공식과 부지 축복식을 갖고, 2014년 5월 15일 교구장 최기산 주교의 주례로 제물진두 순교성지에 건립된 순교기념 경당 축복미사를 봉헌했다. 이어 2015년 1월 20일부터 경당에서 순례자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인천교구는 인천 남동구 장수동에 ‘이승훈 역사문화 기념관’ 건립 사업을 추진 중인데, 이 같은 성역화 사업이 하나씩 마무리되면 강화도 갑곶 순교성지를 비롯한 인천 지역의 모든 성지를 잇는 성지순례길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현재 매달 마지막 주 토요일 인천 답동 주교좌성당에서 제물진두까지 걷는 ‘제물진두 순교자 현양 도보순례’를 해오고 있다.
제물진두 성지는 차이나타운에서 지척 간이었다. 10시 50분 도착. 처음 온 사람은 다 와서 보고도 성지가 아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다른 건물 사이에 있는 듯, 없는 듯 끼여 있다. 한번 와본 모세 형제가 아니었다면 앞에 두고도 찾을 뻔했다.
아마도 국내 천주교 성지 중 터가 가장 작지 싶다. 대지 33평에 건축면적 13평이라면 일반 가정 주택이라고 해도 좁은 규모이다. 좁은 터의 나무가 키만 크듯이 건물은 공간이 좁다 보니 높이만 15m나 된다.
건물의 외관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꽃 모양이자 하느님께서 순교자들을 감싸는 두 손 모양을 형상화했다.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좁다.
입구 옆에 위로와 자비의 예수님 상이 있는데 왼팔로 십자가에 달려 있으면서 오른 팔로는 슬픔과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이끌어 올리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대좌에는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힘드니? 내 손을 잡아라. 나는 항상 너와 함께 있겠다.”는 말씀이 새겨져 있다. 순교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만 사랑해서 천상의 기쁨을 얻은 것처럼, 우리도 절망과 아픔의 역경 속에서도 늘 오른팔을 내려 손잡아 주시는 예수님을 생각하면 힘이 솟을 것 같다.
오른쪽 벽면에 걸린 순교자 10위의 명패를 따라 좁고 긴 통로를 들어가면 촛불봉헌 성모님 상이 나오고 좁지만 높은 기념경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벽면 높이 십자가 모양의 유리화 사이로 내려오는 빛은 마치 순교자들을 은총으로 감싸 안는 하느님의 빛처럼 여겨진다.
또 한편 벽에 걸린 순교화 속에는 1845년 제물포를 통해 중국으로 사제품을 받으러 갔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좌)와 1888년 이곳을 통해 조선에 들어온 4분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우)의 모습이 순교자들과 함께 담겨 있다.
그림의 윗부분에는 10명의 제물진두 순교자가 구름 속에 싸여 찬양을 받고 있고, 그림 중앙에는 포졸과 구경꾼들로 둘러싸인 가운데 순교 장면이 그려져 있다.
답동 주교좌 성당에도 양쪽 신부님과 수녀님만 빠진 같은 그림이 있는데 다들 인천교구 순교자 10분의 순교의 영광을 드러낸 것이다. (인천교구 답동 주교좌 성당편 참조)
이제 인천교구 순례의 마지막 답동 주교좌 성당이다.
답동 주교좌성당 - 인천 지역 선교의 기초가 된 최초의 본당 |
인천시 중구 답동 3-1
인천시 중구 우현로50번길 2
설립과 정착
인천 지역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이전이었다. 그 후 이 지역에서는 기해박해와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인천 · 부평 · 강화 등지에서 순교자를 탄생시켰으며, 박해 후에 살아남은 신자들은 각처에서 소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생활을 하다가 답동 본당 소속이 되었다.
인천교구 최초의 본당이자 주교좌성당인 답동본당은 1889년 7월 1일에 설립되었으며 설립 당시의 이름은 제물포(濟物浦) 본당이었는데, 그 후 인천 본당으로 불리다가 1958년경부터 답동 본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주보는 사도 성 바오로.
제물포 본당의 초대 주임이 된 빌렘 신부는 우선 성당으로 마련한 가옥에서 1889년 7월 8일 첫 미사를 집전하였다. 다음 해 어렵게 대지 3,212평을 매입한 빌렘 신부는 여기에 성당과 교리실을 건축하려고 계획하다가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전임되었다.
그 뒤를 이어 부임한 2대 르비엘(E. Le Viel, 申三德) 신부 역시 임시성당을 짓고 성당 건립기금을 모집하는 등 본당 발전에 애쓰다가 신병으로 요양을 가고 1893년 4월에 3대 주임 마라발(J. Maraval, 徐若瑟) 요셉 신부가 부임하였다. 이로부터 약 10년간의 재임기가 성당의 기초가 완비된 시기였다.
그는 무엇보다 성당을 짓기에 돌입하여 초기 현대식 성당을 많이 설계했던 코스트(Coste, 高宜善) 신부에게 성당 설계를 의뢰하고 이에 따라 기초 공사를 시작하였다. 이듬해 8월 수녀원이 완공되어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에서는 수녀 2명을 파견하여 제물포 분원을 창설하고 보육 사업과 무료진료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해성보육원’(海星保育院)과 ‘해성병원’(海星病院)의 전신이었다.
한편 성당 건립 공사는 1894년의 청일전쟁(淸日戰爭)으로 중단되었다가 전쟁이 끝난 후 재개되어 1895년 8월 11일에 정초식이 거행되었고, 1897년 7월 4일 마침내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 성당의 건평은 396평이었고, 형식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전면에 세 개의 종탑을 갖춘 형태였다.
성장과 발전
1904년 부임한 4대 드뇌(E. Deneux, 全學俊) 에우제니오 신부는 답동 본당의 역대 신부 중에서 가장 약 30여년 동안 재임하면서 일제 치하의 어려움 속에서도 본당의 성장에 노력하였다. 1909년부터는 박문학교를 개교하여 직접 학교를 운영해 나갔고 1917년 4월 2일에는 남녀를 통합하여 ‘인천박문학교’로 개칭함과 동시에 설립자 겸 교장이 되었다.
1935년 드뇌 신부는 연로하여 활동이 어렵게 되면서 임종국(林鍾國) 바오로 신부를 보좌 신부로 맞이하였다. 그러다가 1937년 드뇌 신부가 서울 주교관으로 휴양가면서 임 신부가 최초의 한국인 주임 신부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1959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본당에 재임하면서 해방과 6·25 동란 등을 겪으면서 여러 가지로 본당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33년부터 4년간 시잘레 신부의 설계에 따라 1896년에 지은 성당 개축 확장공사에 들어가 1937년에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평신도 단체 설립에 노력하여 1938년에 부녀 회원으로 구성된 소화 데레사회를 조직하였고, 회장단과 복사단을 정식으로 구성하였으며, 1937년에 발족한 성모회의 활동을 활성화해 나갔다.
1942년 노기남(盧基南, 바오로) 주교가 제10대 서울교구장에 오름으로써 방인 교구로 설정되자, 교구 안에서는 가장 먼저 재정적 자립을 선언하고 모든 신자가 이를 위해 협력하였다. 이 무렵 본당의 신자 수는 약 3천 명 정도에 달하였다. 그러나 일제 말기에 이르러 탄압이 심해지면서 성당 종을 탈취당해야 했고, 1945년 4월 1일에는 일제의 소개령(疏開令)에 의해 박문학교 남학교 교사가 헐리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본당 신자들은 가장 먼저 탈취된 종을 찾아왔고, 새로 복사단과 사목회를 구성하였으며, 가톨릭 청년회와 성모회, 학생회인 용심회 등을 중심으로 갖가지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교세의 확장으로 1946년 소사 본당, 김 포본당, 1952년에는 부평 본당, 1955년에는 송림동 본당, 1959년에는 백령도 본당이 분리되었다.
인천교구의 분리설치와 본당의 변모
답동 본당에 큰 변화가 있게 된 것은 1958년 10월, 인천과 부천, 그리고 인근 도서 지역이 서울교구에서 분리되어 인천 감목 대리구로 설정되고, 그 사목이 메리놀 외방전교회에 위임되면서였다. 이에 따라 1959년 11월 16일자로 메리놀 외방전교회 버크(J. Burke, 장) 요한 신부가 6대 본당 주임 겸 박문유치원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1961년 6월 6일, 인천 감목대리구가 인천 대목구로 승격되고 맥노튼(W. J. McNaughton, 羅吉模) 주교가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되면서 답동 본당이 주교좌 본당으로 설정되었다. 이어서 1963년 부임한 7대 본당 주임 설리반(H. Sullivan, 薜立安) 헨리코 신부를 끝으로 1968년 4월 8대 주임으로 강의선(姜義善) 힐라리오 신부가 부임한 뒤부터는 한국인 신부가 주임을 맡아 오고 있다.
1981년에는 1937년 확장 개축한 성당이 사적 제287호로 지정되었다. 1989년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답동 대성당 100년사를 간행하였으며, 사제관과 수녀원을 신축하였다. 한편 답동 성당은 2009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앞두고 성당 성역화 작업을 전개하여 1단계로 성당 마당을 공원화하여 지역주민 누구나 와서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2월부터 정부의 예산 지원을 받아 성당 종탑과 종에 대한 보존 작업 및 출입문과 지붕 등 일부 시설에 대한 보수 공사도 진행하였다. 2010년 8월에는 인천시 중구와 함께 답동 성당 일대에 대한 역사문화공원 조성사업을 통해 성지를 보존하고 지역주민들과 역사 · 문화적 가치를 공유하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11시. 성당 바로 아래에 있는 공영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성당 경내에 들어갔다. 공영주차장은 성당이나 교구에서 운영하는 것 같았다.
지금의 답동 성당 건물은 1897년에 완공된 옛 성당을 토대로 1933년부터 1937년까지 4년간 시잘레 신부의 설계에 따라 외곽을 확장 개축한 310평 규모의 건물로, 초창기 교회 건축의 백미(白眉)로 꼽히는 아름다운 성당이다.
정면에 3개의 종탑을 갖춘 고전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인 답동 성당은 같은 건축 양식으로 세워진 전주교구 전동 성당과 매우 흡사하다. 답동 성당은 주로 순수 자연석을 사용한 이전의 서양식 성당과 달리 돌과 벽돌을 섞어 지은 것으로, 내부 기둥과 2층 바닥을 콘크리트로 하는 등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을 혼합했다. 붉은 벽돌을 주재료로 썼지만, 건축미를 살리기 위해 중요한 곳에는 화강석을 사용하기도 했다.
답동 성당 건축미의 절정은 정면을 장식하는 3개의 종탑이다. 경사진 지붕에 날개를 단 듯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8각형의 중앙 종탑은 전체적으로 웅장하면서도 안정적인 형태미를 더한다. 양 끝에는 작은 8각탑 2개를 두어 20세기 초 한국 교회의 보편적인 건축 양식을 그대로 반영했다. 중앙 종탑과 좌우의 작은 종탑 꼭대기에 얹혀있는 북 모양의 작은 탑은 처마 밑 돌림띠의 석재 양식과 함께 정면 외관을 정중하고 화려하게 수놓았다. 성당 정면에서 눈에 띄는 장식은 한 가운데 형식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장미 문양의 장미창뿐이다. 또 성당을 빙 둘러싸고 있는 반원형 아치 형태의 창문들은 종래의 성당 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교한 장식 대신 화강석으로 단순하게 처리됐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 왼쪽에는 주보 성인 성 바오로 상이 있고 오른쪽에는 성모님 촛불 봉헌대가 있다.
성당 내부는 두 줄의 원형 열주로 좌우 아치식 회랑을 형성하였으며 중앙 제대 뒤에는 드리워진 15개의 스테인드 글라스로 벽을 장식하고 가운데 예수성심상과 그 좌우에는 성모님과 성 요셉상을 모셨다. 오른쪽 회랑 앞벽에는 바오로 주보성인을 왼쪽 회랑 앞에는 성녀 소회데레사를 모셨다.
성당의 내벽은 모르타르 위에 수성 페인트를 칠한 것이다. 제대부 벽면은 진한 청색으로 나머지는 미색으로 칠했다. 성당 내부의 기둥은 모두 원형 아치 형태로 연결되어 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서면 벽면 기둥에 부착된 십자가의 길 14처와 함께 화려한 색채의 창문 유리화가 신자들을 압도한다. 본당 설정 9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1979년 6월 제작에 들어가 6개월 만에 완성된 이 유리화는 매우 추상적이어 언뜻 이해하기 어려우나 제대 뒤쪽의 유리화 15점에는 장미 문양이 그려져 있으며, 좌우 창문 유리화 16점에는 성경의 주제가 녹아있다고 한다. 곧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십자가에서 숨진 예수를 안고 슬퍼하는 성모 마리아를 그린 피에타, 그리고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등을 강렬한 톤으로 형상화했다.
벽면에 순교화 한 점이 걸렸다. 제물진두 순교화인데 인천 지역 순교자 10분의 현양을 주제로 한 성화이다. 1215년에 그린 유화(油畵)로 김종은 레오나르도 작이다.
그림의 윗부분 구름 속에는 제물진두 순교자 10명을 그렸는데 왼쪽에서부터 ①손넙적이 베드로 ②김씨(손넙적이의 처) ③백치문 사도요한(손넙적이의 사위) ④이 마리아의 손자 ⑤이연구(성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 ⑥이균구(이연구의 동생) ⑦김 아지 ⑧정씨(성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 이재겸의 처) ⑨이(손)명현 ⑩백용석이다.
지상에는 처형 장면을 그 시대의 사회상을 인물들의 모습과 표정으로 표현하였으며 공중에는 성령의 상징인 비둘기의 군무(群舞)를 그렸다.
다음은 성당 오른쪽 인천교구 역사관이다. 역사관 가는 길목에 성모상과 길 건너 건물 앞에는 예수성심상이 있다. 그리고 성모상 바로 옆에는 누운 십자가가 있다.
이 십자가는 1974년 가톨릭 회관 설립 당시의 회관 정면에 설치된 십자가로 2018년 철거될 때까지 인천교구와 함께했다. 일부러 쓰러뜨려 놓았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를 때 세 번이나 쓰러지는 고통이 연상된다.
그리고 가까이 작은 규모의 경당 형태의 묘와 형구 돌이 있다.
선교사 미라발 형제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형제 선교사로 형 요셉과 동생 장 밥티스트이다. 형은 한국에 와서 원주 부엉골 본당 주임으로 있다가 용산 신학교에 학생을 가르치다 제물포 성당(현 답동 주교좌성당)의 3대 주임으로 있으면서 1895년 초기 고딕 성당을 축성했다. 동생은 1889년 한국에 왔으나 발병하여 요양하다가 이듬해 선종했다. 두 형제묘는 합장하여 제물포 외국인 묘지에 있다가, 지금은 인천교구 성직자 묘원에 이장되었다. 이 경당은 이장 이전에 있던 경당 형태의 묘인데 없애지 않고 이렇게 보존하고 있다.
형구는 충북 고불선원 고암스님이 보관하고 있다가 2021년 인천교구에 기증된 것이다.
인천교구 역사관
항구 산업도시와 교회를 주제로 구성된 역사관은 첫 개항장이자 산업화 시기 대표적 산업도시였던 인천과 호흡을 같이해온 교구 발자취를 담고 있다. 연면적 823㎡에 3층규모로, 7개 전시실, 그리고 소성당을 갖췄다. 원래 이 건물은 1986년에 주교관으로 건립되어 사용하였으나 2018년에 교구청이 신청사로 옮겨가면서 문을 닫았다. 이후에 내부를 개조하여 교구 설정 60주년 기념으로 2021년 3월에 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1~3전시실은 교구 설정(1961년) 이전을 다룬다. 파리외방전교회 조선대표부로서 인천을 비추고, 6ㆍ25전쟁 후 서해 5도에서 동고동락한 메리놀 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헌신과 인천 최초 성당인 답동 성당의 역사를 보여준다. 4~5전시실은 교구 설정 이후를 다룬다. 1962년 인천대목구의 정식 교구 승격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공의회 정신을 따르려는 교구와 초대 교구장 나길모 주교의 노력을 조명한다. 개발 시기 고통받는 이와 연대한 교구 행적과 ‘민주화의 거목’ 김병상 몬시뇰도 소개한다.
6전시실은 역대 교구장 삶과 영성을 다룬다. 생전 머물던 공간을 보존, 책상과 침대 같은 일상용품 등을 전시한다. 특별전시실(7전시실)은 ‘태암관’으로 조성됐다. 인천 근대 계몽운동에 헌신하고, 교구 초석을 다진 태암 장기빈 선생 유품이 전시된 공간이다. 이곳에는 장 선생과 자녀(전 국무총리 장면 박사, 화가 장발, 장정온 수녀, 항공공학자 장극 교수), 손자(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의 삶과 영성도 녹아있다. 한편, 소성당에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제2대 조선대목구장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ㆍ성 샤스탕 신부 유해가 모셔져 있다.
역사관 전시 유물은 천주교 고도서와 희귀본 46점ㆍ제구 등 일상 신앙유물 62점ㆍ역대 교구장과 교황 관련 유물ㆍ당대 사건을 생생히 증언하는 서한과 공문서ㆍ기록 사진 등이다.
그런데 이를 어쩌나 오늘이 월요일이라서 인지 임시 공휴일이라서인지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아쉬운 순간이다. 다시 성당 앞 광장으로 나왔다.
내려다보는 광장의 왼쪽에는 14처가 마주보고 있는 십자가의 길이, 오른쪽으로는 여러 채의 부속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1시 반. 이로써 인천교구는 다 돌았다. 양근성지에 갈려고 전화를 해보니 오늘 쉰다고 한다. 그래서 남한산성 순교성지를 가기로 하고 지하철 역으로 이동했다. 오후 6시 반까지는 서울역에 와야겠기에 시간을 아지 못해 점심을 거르며 이동했다.
남한산성 순교성지 - 걸어 들어와서 시신 되어 나가다 |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446
경기도 광주시 중부면 남한산성로 763-58
남한산성 - 민족의 치욕의 현장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수도 한양을 지키던 조선시대의 산성이다.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재의 남한산성으로 보인다. 성의 둘레는 약 8km에 달하고 높이는 7.3m가량이다. 한편 이곳에는 백제 전기의 유적이 많이 있어 일찍부터 백제 온조왕 때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
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갖춘 것은 이괄의 난을 겪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된 인조 2년(1624)이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 때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는데, 강화가 함락되고 양식이 부족하여 인조는 세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 뒤 계속적인 수리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시설은 동·서·남 문루와 장대·돈대 등의 방어시설과 비밀통로인 암문, 우물, 관아, 군사훈련시설 등이 있다.
남한산성은 우리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이 잘 정비된 곳으로 손꼽히며, 험한 지형을 활용하여 성곽과 방어시설을 구축함으로써 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축성술의 시대별 발달단계를 잘 나타내는 좋은 자료로 인정받아 2014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00년 후 - 천주교 박해의 순교성지
1636년 병자호란시 호국을 위한 몸부림을 친 남한산성은 약 200년이 지난 뒤에는 박해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천주교의 '호교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다. 이로 인해 남한산성 한 모퉁이를 치명터로 만들었다. 당시 이곳이 치명터가 된 이유는, 1626년에 산성리가 형성되고 1795년부터 광주 유수가 성안에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박해가 계속되는 동안 광주 일대에서 체포된 수많은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모진 형벌을 받으면서 배교를 강요당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속의 모든 부귀와 육신의 고통을 버려야만 했다.
박해의 자취는 대부분 사라졌지만 그 흔적이나마 남아있는 곳은 다음과 같다.
▲포도청과 감옥터
1842~1843년(헌종 8~9년)에 편찬된 <경기지(京畿誌)>에 수록되어 있는 <광주부읍지(廣州府邑誌)>와 1846년에 편찬한 <중정남한지>, 그리고 1871년(고종 8년)에 편찬된 <경기읍지(京畿邑誌)>에 수록되어 있는 <광주부지(廣州府誌)>에서 남한산성에 포도청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포도청은 포도군관청을 줄여서 표기한 것으로 서울의 좌.우포도청과 마찬가지로 남한산성의 경우도 감옥이 포도청에 딸려 있었다.
감옥은 헐거운 천막과 판자로 이루어진 일종의 오두막 같은 형태로 흙바닥에 엉성한 멍석을 깔아 놓은 외양간이나 창고 같이 지어져 비와 추위를 피하기 힘들었다. 순교자들은 이러한 감옥에 갇혀 있다가 유수나 판관에게 끌려가 신문을 당하고 다시 갇히기를 반복하였고, 그중에는 감옥에서 20여년이나 감옥 생활을 하다 순교한 분도 있다.
따라서 감옥은 단순히 갇혀있던 곳이 아니라 성체조배실과 같이 하느님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영혼을 정화하며, 순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자신을 수양한 신심 단련장 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옥사하신 분이 22명이나 되고, 교살형이나 교수형의 경우는 대부분 감옥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옥 터는 또한 순교 터이기도 하다.
▲연무관 · 제승헌 터
연무관은 본래 군사들의 훈련과 무술 시합을 열던 곳이고 제승헌은 판관의 숙소 및 집무실이었으나 유사시에는 남한산성을 근거로 수도 남부를 방위하던 수어청 중군의 본영으로도 사용되었다. 대박해로 인해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오게 되면 수어영의 전영장을 겸하던 판관에 의해 이곳에서 심문을 당하였다. 따라서 연무관은 혹독한 고문 속에서도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던 순교자들의 신앙의 고백 터이며 순교 터이다.
▲시구문(屍口門) · 암문(暗門)
시구문은 시체가 나가는 문이고, 암문(暗門)은 적의 관측이 어려운 곳에 설치하는 일종의 비밀통로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16개의 암문이 있는데, 그 중에서 동문(좌익문)에 인접한 11번째 암문(동안문)이 가장 규모가 크다. 동문에 계단이 있어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하였으므로 수레나 일반인들의 통행을 위해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이 문을 일러 시구문이라고 불렸다. 물이 빠지는 수구문(水口門)이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屍口門)이 된 것이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희생당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시구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와 옆 계곡에 버려졌다. 따라서 시구문 밖 계곡은 남한산성 순교자들의 무덤과 같은 곳으로 본 성지를 순례하는 교우들은 반드시 이곳을 찾아와 순교자의 정신을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문 밖 형장
조선 후기 학자 이기경(李基敬)은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글 <벽위편(闢衛篇)>에서 한덕운 토마스 순교자의 처형지를 언급하면서 “동문 밖에서 백성들을 모아놓고 한덕운을 처형하였다” 고 했다.
이곳은 남한산성의 옛길이 지나는 곳이고 한 때 물레방아 간이 많아 사람들이 운집했던 곳이어서 처형 터로 이용되던 곳이다. 1801년 남한산성의 첫 순교자이신 한덕운 토마스는 바로 이곳에서 참수당하였는데, 순교자는 망나니에게 “내 머리를 한 칼에 베어주시오”라고 말해 망나니가 놀라 두 번을 헛손질을 하고 세 번째 칼에 맞아 순교했다고 한다.
남한산성 순교자 현황
남한산성은 한양의 군사적 요지로 천주교 박해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는데, 이미 최초의 박해인 신해박해(1791년) 때부터 신자들이 남한산성에 투옥되었다는 전승이 내려오고 있으며, 신유박해 때에는 최초로 순교자 한덕운 토마스가 탄생하였다.
이어 기해박해와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약 300명에 달하는 천주교 신자들이 참수, 교수, 장살 등의 방법으로 순교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순교하신 분들 가운데 일부분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순교자 가운데 행적이 밝혀진 분은 최초의 순교자인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비롯하여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일가인 김덕심 아우구스티노, 김윤심 베드로, 김성희 암브로시오, 김차희, 김경희, 김윤희와 이천 단내 출신 정은 바오로, 정베드로 등 36명에 이른다.
특히 병인박해 때에는 백지사(白紙死)라는 특이한 형벌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는데 이것은 사지를 묶고 얼굴에 물을 뿌린 뒤에 한지를 덮는 일을 거듭하여 숨이 막혀 죽도록 하는 형벌이다. 너무 많은 신자들이 잡혀오자 피를 보는 일에 진저리를 낸 포졸이나 군사들이 쉽게 처형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형벌이 바로 백지사 형이다
▲교회측 자료(증언 기록) 15위
성명 | 세례명 | 순교일 | 순교형태 | 나이 | 거주지 | 비고 |
한덕운 | 토마스 | 1801. 12 | 참수 | 50 | 광주 의일리 | |
김덕심(만집) | 아우구스티노 | 1841.01 | 옥사 | 43 | 광주 구산 | |
정여삼 | 바오로 | 1866.10 | 옥사 | 45 | 용인 삼베일 | |
이화실 | 1866.10 | 옥사 | 40 | 용인 삼베일 | ||
윤서방 | 1866.11 | 옥사 | 45 | 이천 용산리 | ||
정은 | 바오로 | 1866.12 | 백지사 | 63 | 이천 단내 | |
정양묵 | 베드로 | 1866.12 | 백지사 | 이천 | ||
이 | 요한 | 1866 | 교수 | 38 | 광주 먹방리 | |
오 | 안드레아 | 1866 | 교수 | 34 | ||
서 | 아우구스티노 | 1866.02 | 장살 | 38 | ||
이종여 | 1866.02 | 장살 | 24 | 충북 진천 | ||
홍성국 | 요한 | 1867.04 | 56 | 광주 새말 | ||
이 | 요한 | 1869.02 | 50 | 광주 먹방리 | ||
이치재 | 1871.09 | 40 | 광주 새말 | |||
서 | 바오로 | 미상 | 50 | 양지 |
▲ 광주부 옥사자 12명(1867. 01.09 이전)
▲ 광주부 옥사자 4명(1868.01.04. 이전)
성명 | 세례명 | 순교일 | 순교형태 | 나이 | 거주지 | 비고 |
김준원 | 아니체토 | 1845. 12 | 참수 | 광주 하후현 | 김선영신부의 증조부 | |
김윤심(보명) | 베드로 | 1868.02 | 옥사 | 68 | 광주 구산 | 김성우 성인의 아우 |
김성희 | 암브로시오 | 1868.02 | 옥사 | 54 | 광주 구산 | 김성우 성인 외아들 |
김차희 | 1868.02 | 옥사 | 40 | 광주 구산 | 김덕심 차남 | |
김경희 | 1868.02 | 옥사 | 54 | 광주 구산 | 김윤심외아들 | |
김윤희 | 1868.02 | 백지사 | 35 | 광주 구산 | 김성희 6촌 |
▲교회측 자료(가전 전승 기록) 6위
▲관찬 자료(《광영계록》)에 이름만 언급된 22위 (교회측 자료 순교자와 동인인물로 추정)
*서태순(徐泰淳) *이조여(李祖汝), 22 이학록(李學祿), 23 이정현(李正鉉), 24 엄쾌길(嚴快吉), 25 서상철(徐相哲), 26 이기좌(李奇佐), 27 권경보(權京甫), *김준원(金俊元), 28 오선장(吳善長), 29 김하상(金夏商), *정원명(鄭原明), *정성재(鄭成才), 30 한동원(韓東源), 31 이재금(李在琴), 32 한경조(韓敬祚) 이상 16위 1867.01.09 이전 옥사
*이장복(李長卜), *정오복(鄭五卜), 33 윤재현(尹在鉉), 34 김상희(金尙喜), 35 송일지(宋一知), 36 송칠지(宋七知) 이상 6위 1868.01.04 이전 옥사 (이상 성지 홈페이지)
성지 조성
수원교구는 남한산성 순교성지의 교회사적 의미를 살리고자 1998년 9월 30일 남한산성을 성지로 선포하고, 공영주차장 인근 작은 개천 옆으로 1978년에 마련한 부지 위에 순교자현양비(2004년 9월)와 한옥 양식의 성당을 건립하였다. 성당 뒤편 야산에는 야외 미사터와 십자가의 길 14처를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다.
2015년 4월 25일에는 기존의 협소한 성당을 대신할 새 성당을 맞은편에 건립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새 성당은 철근 콘크리트 구조와 목구조를 혼합한 한옥 형태의 2층 건물로 웅장하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을 지니고 있다. 기존의 성당 건물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복자 한덕운 토마스를 기념해 토마스홀로 명칭을 변경해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전 11시 반 경에 답동 주교좌성당(성 바오로 성당) 순례를 마치고 인천에서 지하철과 버스를 연달아 타고 걷기도 했다. 적어도 서울역에 오후 6시 반까지는 가야하니 시간이 여유가 없어 점심도 못 먹고 바로 출발했다. 역시 거리가 있어 오후 2시가 되어서 교구에서 조성한 남한산성 순교성지에 도착했다. 여기 순례해야 할 곳은 교구에서 남한산성 성지성당과 순교현양탑이다.
남한산성 성지성당
먼저 성지 성당에 가니 문은 무겁게 잠겨있다. 게시판을 보니 화요일부터 주일까지만 개방한다고 되어있다. 그리고 여는 날도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 45분까지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 오늘이 임시공휴일이지만 월요일이라서 문을 닫은 것이다. 요즘은 성지나 성당 사무실이 공휴일에 문을 닫는 곳도 있다. 그리고 평일에도 출퇴근 시간을 지킨다. 사무실 종사자도 직업인이기에 그렇게 복무 계약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아무도 그들을 나무랄 수는 없다.
하지만 순례자나 관광객들을 생각한다면 이는 아쉬운 처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적지나 박물관은 공휴일이라고 해서 문을 닫지 않는다. 세계유산에 등록되고 국가사적지이기도 한 남한산성은 주말이나 공휴일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따라서 교회의 입장에서는 선교의 못자리를 가꾸는 때도 되는 것이다. 월요일이 임시공휴일이라고 그렇다고 하지만 그래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남한산성 순교현양탑
성당 바로 앞 길 건너 높다란 순교현양탑이 있다. 현양탑 윗면에는 형구 태장(笞杖) 모양의 십자가가 새겨졌고 대좌 앞면에는 현양비 건립 취지와 일자, 대좌 뒷면에는 남한산성 순교자 38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성당 바로 경내에는 남한산성의 피에타라는 제목으로 남한산성 최초의 순교자인 한덕운 토마스가 순교자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을 새긴 조형물이 있다. 한 토마스는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의 시신을 돌보고 장례를 치루었다는 죄명으로 1801년 신유박해시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조형물은 우리에게 되묻고 있다.
“우리는 타인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순교자를 기억하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무인가요?”
복자 한덕운 토마스는 누구?
1752년 충청도 홍주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한덕운은 1790년 윤지충으로부터 십계에 대해 배운 뒤 입교하여 신앙생활에 전념하였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일을 행하고, 열심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이었다.
1800년 10월 한덕운은 가족을 이끌고 광주땅 의일리로 이주해 살았다. 그러던 중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회의 동정을 살펴 볼 목적으로 옹기장수로 변장하고 서울로 올라가 청파동·서소문 등지를 돌아보다가 순교자 홍낙민 루카와 최필제 베드로의 시신을 발견하고 이를 거두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 약해져 배교하고 석방되어 있던 홍낙민의 아들 홍재영 프로타시오를 만나자 부친을 따라 순교하지 못한 사실을 크게 질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한덕운은 위험을 무릅쓰고 순교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주는 모범(즉 연령활동)을 보였고, 홍재영을 질책한 사실과 함께 그의 마음 안에 있는 순교의 원의를 드러내었다.
이와 같은 연령활동으로 인해 천주교 신자로 체포된 한덕운은 형조에서 “제가 한 활동은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여긴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니, 지금에 와서 형벌을 당한다고 어찌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라고 최후 진술을 하였다.
남한산성 동문 밖에서 1801년 12월 27일(양력 1802년 1월 30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자신이 턱을 괴어야 하는 나무토막을 직접 손으로 받쳤으며, “한 칼에 내 머리를 베어 주시오”라고 말하였다. 그의 의연한 모습에 두려움을 느낀 망나니는 헛칼질을 하였고, 세 번째 칼질에서야 겨우 한덕운의 머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한덕운 토마스의 영성은 한국 천주교 연령회 활동의 기원이 되며, 또한 냉담자 권면활동의 본보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시복되었다.
한덕운 토마스처럼 이 곳을 찾는 순례객들도, 각자의 삶의 환경에서 죽어가는 영혼들을 찾아가 기도하고 또 이미 돌아가신 영혼들이 영원한 안식의 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신앙심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덕운 토마스 순교자의 영성은 각 본당 연령회원들의 활동에 꼭 들어맞는 것이므로, 모든 연령회원들이 찾아와서 한 토마스 순교자가 보여준 연령을 위한 자발적 봉사활동의 숭고한 정신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또 배워야 할 것이다
날씨가 좋고 시간만 넉넉하다면 앞의 성지 순례도를 참고로 하여 비록 개발된 성지는 아니더라도 옥터, 연무대, 동문, 시구문 등을 돌아보아야 하겠으나 그런 여유가 없어 이번 순례는 이 정도로 마친다.
이번 23차 순례는 2박3일 동안 의정부교구와 인천교구를 중심으로 총 18곳의 성지를 순례하여 양적으로는 성공적이었으나 일정에 급급하여 봐야할 곳을 놓친 아쉬움도 크다. 원래 인천교구에다 남한산성 성지까지 순례하리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사전 자료도 정리하지 못하여 빚은 결과다. 악천후에다 택시를 주로 활용하다 보니 시간 여유가 없었음으로 변명하려 한다. 앞으로 남은 일정을 짜는데 참고가 될 것이다. 더욱이 일만위 무명순교자 동산에서 지적해준 촌철처럼 마음을 찌른 순례자의 자세는 성지 순례를 하는 한 두고두고 마음에 새길 것이다. 함께한 형제님들께 거듭 감사를 드린다. (김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