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逆) 남파랑길(아홉 번째 - 3)
(고성∼통영, 2023년 11월 25일∼26일)
瓦也 정유순
어제 저녁 통영항 부근에서 식사를 하고 투숙한 곳은 용남면 장평리에 있는 어느 팬션이다. 아침에 눈을 떠 창밖을 내다보니 큰 강 같은 바다가 길게 늘어진다. 육안으로 볼 때는 넓어지는 쪽이 남해 같고 좁아지는 쪽이 육지와 더 가까운 곳으로 생각했으나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햇살을 보고 거꾸로 생각했음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바다 건너 보이는 곳이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 광리항 주변으로 마산만으로 들어가는 견내량해협(見乃梁海峽)이다.
<견내량해협의 여명>
견내량(見乃梁)은 통영시 용남면 장평리와 거제시 사등면 덕호리를 잇는 거제대교의 아래쪽에 위치한 좁은 해협으로, 길이는 약3km, 폭은 약 180m에서 400m까지다. 임진왜란 때 한산대첩의 주요 배경이자, 현재는 거제대교와 신거제대교가 걸쳐 있다. 견내량은 고려시대에는 고려 의종이 1170년∼1173년까지 만 3년간 거제도로 유배되어 전하도(殿下渡)로 불렸고, 임진왜란 때는 옥포해전과 한산해전의 주요 배경지가 되었다.
<견내량(멀리 보이는 곳이 거제대교)>
특히 한산해전은 7월 5일부터 7월 13일까지 견내량에서부터 한산도 앞바다 그리고 안골포 전투를 벌이는 시발점이 되었다. 당시 조선의 수군은 한 번이라도 패하면, 수로의 주도권을 놓칠 수 있는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래서 좁은 해협과 거센 물길이 흐르는 명량(鳴梁)이나 노량(露梁), 그리고 견내량 등 육지와 바다의 폭이 가장 좁아지는 해협은 적을 물리치는 최적의 장소였으나, 지금은 모두 교량이 서있다.
<견내량>
조반을 마친 후 통영시 평림동 해양소년단거북선캠프에 잠깐 들렸다가 미수동에 있는 통영해저터널입구 앞에 당도한다. 한국해양소년단(韓國海洋少年團)은 1962년 부산의 한국보이스카우트연맹의 전신인 한국해양대학교대한소년단 경남연맹의 해양소년대지도자 양성대가 창단됨으로써 활동을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충·효·예의 품성을 연마하여 국가가 필요로 하는 청소년 상과 우수한 해양인력을 양성하고 청소년의 해양활동을 육성하는 곳이다.
<해양소년단거북선캠프>
통영해저(統營海底)터널은 1932년에 건립한 동양 최초의 바다 밑 터널로 길이 483m, 폭 5m, 높이 3.5m 규모다. 예전에는 통영시 당동과 미륵도(미수동)를 연결하는 주요 연결로였지만 충무교와 통영대교가 개통되면서 지금은 차량통행은하지 않고 보도(步道)로만 이용한다. 양쪽 터널 입구에 한자로‘용문달양(龍門達陽)’이라고 쓰여 있는데 ‘용문을 거쳐 산양(山陽)에 통하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산양은 바로 미륵도이다.
<통영해저터널(용문달양)>
<해저터널 안>
해저터널을 나오면 바로 통영시 도천동이다. 도천동(道泉洞)은 동쪽은 명정동과 접하고, 나머지 3면은 바다에 면한다. 통영반도의 남쪽 끝자락으로 해저터널, 충무교, 통영대교를 통해서 미륵도와 연결되며, 당동·인평동·평림동을 관할한다. 당동(堂洞)에는 주민들이 충무공의 위패를 모시고 기신제(忌辰祭)를 지내는 착량묘(鑿梁廟)라는 사당이 있는데 들르지 못했고 <윤이상거리>의 골목을 따라 <윤이상기념공원>으로 향한다.
<도천동 윤이상거리>
윤이상거리는 해저터널을 빠져나와 통영시 해안도로에서 한 블록 안쪽으로 서호시장과 연결된다. 통영 출신의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음악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생가와 인접한 지역의 거리를 2001년 <윤이상거리>로 지정했다. 거리에는 윤이상과 관련된 각종 조형물을 설치·관리하고 있다. 특히 길바닥에는 마산고등학교 교가 등 윤이상이 작곡한 교가의 악보와 가사가 동판으로 만들어 깔아 놓았다. 이 거리는 음악인들의 성지순례 코스로 통영의 아름다움과 함께 윤이상의 발자취를 느껴 볼 수 있는 곳이다.
<윤이상거리>
<마산고등학교 교가 동판>
윤이상공원은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尹伊桑, 1917~1995)과 그의 음악을 테마로 한 기념공원이다. 도천동 윤이상 생가 옆 6,745㎡ 부지에 조성되었으며, 윤이상의 음악 세계를 조명할 수 있는 지상 2층, 연면적 865.5㎡ 규모의 기념전시관과 소공연장이 있다. 기념전시관에는 윤이상이 생전 독일 베를린에서 거주하며 남긴 유품 148종 412점이 전시되어 있다. 독일 정부로 받은 훈장과 괴테메달을 비롯해 사무집기, 생전 연주하던 첼로, 항상 품고 다녔던 소형태극기 등이 있으며, 사진 500여 점이 있다.
<윤이상기념관>
어두운 시대에 뜨거운 열정으로 살다 간 윤이상은 경남 산청에서 출생, 통영에서 서당과 보통학교 과정을 수료하고 1935년 오사카[大阪]음악학교에 입학, 1937년 귀국하였다. 통영여고·부산사범학교 교사를 역임하고 1956년 프랑스로 가 파리국립음악원에서 수학하였다. 1959년 독일에서 열린 다름슈타트음악제 때 쇤베르크의 12음계 기법에 한국의 정악(正樂) 색채를 담은 <7개의 악기를 위한 음악>을 발표하여 유럽음악계의 주목을 받는다.
<윤이상>
그러다가 1967년 동베를린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강제소환 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러야 만 했으나, 독일과 세계음악계의 구명운동을 힘입어 풀려난 후, 1971년 독일에 귀화하고, 1972년 뮌헨올림픽 개막축하 오페라에서의 <심청>을 비롯하여 옥중에서 작곡한 <나비의 꿈(1968)>, 광주 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광주여 영원하라(1981)>와 <화염에 휩싸인 천사와 에필로그(1994)>, 북한국립교향악단이 초연한 칸타타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7)> 등 15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야외음악당에서서>
윤이상거리는 서피랑과 이어진다. 서피랑은 벽화마을로 유명한 동피랑과 마주보고 있어 <제2의 동피랑>을 꿈꾸고 있다. 서피랑을 걷다보면 윤이상과 함께 학교 가는 길, 서피랑문학동네, 99계단과 음악정원, 보이소반갑습니데이! 인사거리, 뚝지먼당 98계단, 피아노계단 등 서피랑의 숨은 보물 길을 만나게 된다. 서피랑은 동피랑과 함께 지역 내 대표적인 달동네로, 해방 이후 집창촌(集娼村)이 형성되면서 지역민조차 찾기를 꺼리는 곳이었다.
<서피랑 올라가는길>
2000년대 들어 집창촌은 자연스레 정비됐지만 마을은 이미 활력을 잃은 상태였다. 2007년 동피랑이 철거마을에서 벽화마을로 거듭날 때까지, 서피랑은 어떠한 변신조차 시도하지 못했다. 그러나 2013년부터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마을 중앙을 관통하는 200m 길을 <인사하는 거리>로 지정하면서 활력을 점차 찾기 시작했다. 거리 곳곳에 예술작품을 설치하는 일에 주민들이 직접 나섰다.
<서피랑으로 가는 골목>
집창촌을 오르내리던 서피랑 99계단은 벽화와 조형물이 조성된 예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주민들이 직접 제작한 크고 작은 예술품이 마을 곳곳에 내걸렸다. 99계단은 첫 계단부터 99로 시작하여 맨 꼭대기 1까지로 거꾸로 새겨졌다. 힘든 인생길, 숫자 하나씩의 무게를 비워가며 올라가라는 의미 같다. 숫자는 계단마다 한쪽에 작품으로 그려진다. 단정하게 혹은 비뚤게, 더러는 뒤집어진 채, 선걸음으로 넉넉하게 읽을 만한 크기로 쓰여 졌다.
<99계단>
역사 유적을 스토리텔링화한 마을 만들기 사업도 병행했다. 서피랑 아랫마을은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의 출생지이자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주배경지로 서문고개, 간창골, 명정샘 등이 등장하는 문학 동네인 것을 활용했다. 이곳에서는 <박경리 문학 동네(서피랑) 골목길 투어>를 수시로 개최, 전국 문학인들이 몰려들면서 서피랑 이미지 변신에도 성공했다.
<서피랑 후박나무>
행정자치부의 ‘2015 희망마을 만들기 사업’에도 선정돼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의 초등학교 등굣길을 활용한 ‘윤이상 학교 가는 길’과 서피랑 내 가장 가파른 서호벼락당에 피아노 계단도 조성했다. 피아노 계단은 기존 140개 계단을 활용해 높은음자리표를 형상화하고 이 중 24개 계단은 실제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 건반과 음악정원도 함께 조성되었다.
<서피랑 등대>
<조타기 포토존>
서피랑은 통영성의 중심인 세병관의 서쪽에 있는 고지대 벼랑이라고 하여 서벼랑·서피랑이며, 서산(西山)으로도 불렀다. 통영성의 서포루(西鋪樓)가 있던 곳이라고 해서 지명이 유래하였다고도 전한다. <1872년지방지도>에는 통영성내 서쪽에 산지와 서표루(西標樓)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서표루의 동북쪽에는 둑소(纛所)가 그려져 있다. 기(旗)의 신(神) 혹은 군대에서 대장 앞에 세우는 기인 둑기(纛旗), 둑신(纛神)을 모신 사당이라고 해서 둑사(纛祠)라고도 하는데, <여지도서>에는 “둑사는 서문 안에 있다. 봄과 가을에 둑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라고 하였다.
<서포루>
<통영고지도>
https://blog.naver.com/waya555/223284177668
첫댓글 와야님에 발자취따라 역사기행 잘하고 있슴니다 !!!
와야님에 산사에서의 노랫소리 귓가에 맴도네요 !!!
가끔은 라이브로 들려주세요 !!! ♡♡♡
건강하신 겨울 지내시길요 !!! ^^
고맙습니다.
좋은 나날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