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장 의문의 살인(殺人)
②
여풍은 남궁청운 일행을 내전으로 안내하며 물었다.
"남궁당주, 우연히 들르신 것이오? 아니면 폐보에 변고가 일어났음을 알고 오신 것이오?"
이때 남궁소연이 끼어 들었다.
"저희들은 사천성의 신도문으로 가던 중이었어요. 태자당에 가입하기로 되어 있는 사천당문의 금적수재 당세곤 소협을 만날 약조가 되어 있었거든요."
"오! 사천당문이 백 년만에 배출한 기재라는 금적수재도 태자당에 합류하기로 했단 말이오?"
"네, 그래서 사천성으로 가던 중이었는데 마침 본성에서 보낸 전갈을 받았어요. 오늘밤 구천마교가 흑석보를 급습할 예정이니 일정을 뒤로 미루고 도움을 주라는 내용이었어요."
"아, 그랬었구려."
"전갈을 받고 달려오느라 끼니는 말할 것도 없고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했지 뭐예요? 지금 몹시 배가 고파요. 보주님, 흑석보의 주방장 요리솜씨는 어떤가요?"
끊임없이 종알대는 남궁소연의 천진난만한 모습에 여풍과 여웅 두 부자는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허허허! 역시 무림군왕성 일월단의 눈과 귀는 천하를 꿰뚫어 보고 있구려.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었구려."
여풍의 찬탄에 이어 이번엔 여웅이 두툼한 입술을 열었다.
"안심하십시오. 흑석보 주방장의 솜씨는 복건성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대가입니다. 아마도 남궁소저와 일행분들의 입맛을 맞추는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남궁소연의 아름다운 자태는 평소 과묵한 성격인 여웅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어 놓고 있었다. 그는 내전 안으로 들어서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봐라! 어서 주방으로 달려가 우삼(于三)에게 일러라! 그간 갈고 닦은 솜씨를 총동원하여 복건성 최고의 진미요리를 올리라고 해라. 참! 술은 뭘로 한다? 남궁소저... 혹 좋아하시는 술이 있으면 하교하십시오. 어떤 술이라도 즉각 구해다 올리리다."
그러나 뒤따라 오던 비천검 철무영이 그의 말을 끊었다.
"술은 됐소이다. 오늘 목숨을 잃은 동도들 수백 명의 체온이 채 식지도 않았거늘 어찌 술을 마신단 말이오? 호의는 고마우나 사양하는 게 도리일 것이오."
철무영이 정색을 하며 말하는 바람에 여웅은 그만 귓뿌리까지 시뻘개지고 말았다. 그는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 제가 잠시 이성을 잃었소이다. 혈육과 다름없는 무사들의 죽음을 두고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충언에 감사드리오."
깨끗이 잘못을 시인하고 머리를 숙이는 여웅의 솔직담백함에 철무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도리어 이 철모가 부끄럽소이다."
두 청년의 눈빛이 마주쳤다. 그들은 서로의 호방한 성품에 단번에 호감을 느낀 듯했다.
대전 한가운데 거대한 식탁이 차려졌다.
여풍 부자와 태자당 일행은 주방장 우삼이 최고로 요리솜씨를 발휘한 덕분에 진수성찬을 들고 있었다.
일행은 풍성한 요리를 나누어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장내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기 그지없었다. 특히 흑석보주 여풍은 연신 남궁청운의 무공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남궁청운은 문득 고개를 들며 말했다.
"여보주님, 소생이 이곳에 온 것도 인연인가 합니다. 그래서 두 분께 한 가지 청을 드릴까 합니다."
여풍은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흔쾌히 말했다.
"허허, 무엇이든 말씀해 보시오. 은공의 청인데 무엇인들 마다하겠소? 내 반드시 들어드리리다."
남궁청운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쾌히 승낙해 주시니 감읍할 따름입니다. 청이란 다름이 아니고 여소보주를 저희 태자당에 입당시켜 달라는 것입니다."
"......!"
순간 여풍의 얼굴에는 당황기가 떠올랐다.
만일 자신의 목숨을 달라면 쉽게 줄 수도 있었다. 어차피 남궁청운이 아니었다면 오늘밤 목숨을 부지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러나 이 청만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여웅은 그의 일점혈육이자 장차 흑석보를 물려받을 위인이었다.
더구나 무림군왕성은 오랫동안 경원해 왔었다. 자식을 태자당에 입당시킨다는 것은 흑석보가 군왕성에 굴복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가 눈살을 찌푸린 채 침묵만 하자 여웅이 나섰다.
"아버님, 남궁당주의 청을 받아들이시는 것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또한 소자도 큰 물에 뛰어들어 좀더 많은 배움을 얻고 싶습니다."
남궁소연이 생긋 웃으며 거들었다.
"그래요. 여소협의 천품에다 무림군왕성의 신공을 익히기까지 한다면 분명 수년 안에 절정고수의 반열에 들 수 있을 거예요."
여풍은 고개를 들어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키지 않았으나 여웅의 눈빛이 확고한 것을 보고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것인가?'
마침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남궁당주, 우둔한 자식 잘 부탁드리겠소."
힘없이 말한 후 여풍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야공은 빛 한 점 없이 어둡기만 했다.
③
백육호는 고개조차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반면 사사영은 몇 방울의 눈물을 떨군 후 빠르게 자신을 추스렸다. 그녀는 걸레쪽이나 다름없이 된 옷을 찾아 대충 나신을 가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백육호는 감히 그녀를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더욱 숙였다.
"공자님, 그렇게 자책하실 일이 아니에요. 이번 일은 소녀의 품행이 방정치 못해 일어난 거예요. 게다가 공자님께서 드신 탕약으로 인해 예상치 못한 열기가 일어나... 아무튼 공자님께선 아무 잘못도 없어요. 계속 공자님께서 자책하신다면 소녀야말로 몸둘 바를 모르게 될 거예요."
사사영의 말은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비좁은 술통 속에서 일어난 일!
두 사람이 육체적으로 하나가 되고만 것이다. 서로간에 원했든 원치 않았든 그들은 이미 부부의 연을 맺고 말았다.
백육호는 여전히 자책을 금치 못하며 기어 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소저, 뭐라해도 내가 죽일 놈이오. 와류를 뚫기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소저에게... 감히... 그런 짓을 하다니, 나야말로 가증스런 놈이오."
술통 배의 내부는 여전히 숨막힐 듯한 열기가 가득했다.
그로 인해 두 사람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자세 또한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의식을 차린 백육호가 두 손으로 술통 벽을 버티고 있었고, 사사영은 두 발을 모아 가슴 앞으로 당긴 채 몸을 구부리고 있어 약간이나마 편한 자세를 취할 수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제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은 몸이었다.
좁은 술통 속에서 그들은 예기치 않은 정사(情事)를 치르게 되었다. 말하자면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사사영은 순결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조금도 슬프지가 않았다. 아니, 도리어 백육호가 완전히 건강을 회복한 것에 기쁘기 한량없었다. 게다가 그는 공력까지 크게 증진되어 있었다.
다만 어쩔 수 없는 처녀의 본능으로 그녀는 한동안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었다.
'이건 하늘의 뜻이야. 어찌 이분의 잘못이랄 수 있겠어. 내가 계속 슬퍼하면 이분은 더욱 자신을 자책하시게 될 거야.'
마침내 그녀는 마음을 다져 먹었다.
살며시 고개를 들어보니 코앞의 백육호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녀는 은은히 가슴이 아팠다. 동시에 그가 믿음직스럽다는 느낌이 솟아올랐다.
그녀는 몸을 움직여 백육호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
백육호는 당황했다. 사사영은 더욱 그의 품으로 파고들며 달콤한 음성으로 말했다.
"안아주세요. 공자님. 그리고... 눈을 감으세요. 소녀가 고백할 것이 있답니다."
"......?"
백육호는 어리둥절했다. 코끝으로는 소녀 특유의 육향이 밀려들고 있었다.
"솔직히 소녀는 기뻐요. 공자님의 여인이 되었으니까요. 이건 진심이에요. 공자님도 함께 기뻐해 주신다면 저는 더욱 행복할 거예요. 공자님은... 어떠신가요?"
한껏 용기를 낸 사사영이었다.
비록 경황중이었으나 첫 경험을 한 순결한 처녀의 입으로 그런 말을 꺼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통속이 어두웠기에망정이지 그녀의 얼굴은 노을처럼 붉어져 있었다.
"고맙소. 소저......."
백육호는 가슴이 뭉클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사사영의 등을 안으며 감동을 금치 못했다.
사사영은 낮게 웃었다.
"후훗, 공자님께서는 소녀와 다른 생각이신 모양이군요. 자꾸 엉뚱한 말씀만 하시니 말예요."
백육호는 당황했다.
"아, 아니오! 난, 나는 염치가 없을 뿐이오."
사사영은 짐짓 토라진 음성으로 샐쭉거렸다.
"공자님이야말로 소녀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천박한 여인으로 만드시는군요. 알았어요, 공자님의 마음속에는 후회만이 가득하다는 것을......."
백육호는 다급히 말했다.
"그, 그렇지 않소. 난 이 순간이 꿈이 아닌가 할 정도로 행복하오. 정말이오. 만약 꿈이라면 영원히 깨고 싶지 않소이다."
마침내 백육호는 진심을 털어놓았다.
그는 얼굴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사실 그동안 얼마나 사사영을 그리워했던가?
사사영은 느낄 수 있었다. 맞닿은 백육호의 가슴에서 쿵쾅대는 심장의 고동을 그녀는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침내 그녀의 눈꼬리에서 희열에 찬 눈물방울이 또르르 흘러 내렸다.
그녀는 백육호의 손을 힘주어 잡은 채 마침내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흑흑흑......."
"소저, 내가 또 무슨 잘못이라도?"
백육호는 깜짝 놀라 그녀의 손을 당기며 물었다.
"아니에요, 공자님. 그게 아니에요."
사사영은 고개를 도리질하며 백육호의 손을 끌어 입을 맞추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자신의 벅찬 감정을 입맞춤으로 대신한 것이다.
백육호는 그녀의 행위에 날아갈 듯한 희열을 느끼며 몸을 떨었다. 그는 부드러운 손길로 사사영의 젖은 뺨을 쓰다듬었다.
"사랑하오, 사사영 소저. 내 생명을 바쳐 당신을 사랑하겠소."
"사랑해요, 공자님. 너무 너무......."
백육호의 머리가 숙여지며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사사영의 손이 그의 목을 휘감았다. 두 사람의 입맞춤은 격렬했다.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듯.......
"악양(岳陽)의 목화루(木畵樓)라 하였소?"
"예, 중추절(中秋節) 해질 무렵에 만나자고 하셨어요."
백육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육노야에게 목화루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십 년을 붙어 지내며 육노인에게 별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귀가 따갑도록 들어온 백육호도 목화루는 금시초문이었다.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던 사사영이 탄성을 발했다.
"아! 목화루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백 년 묵은 노백주(老白酒) 때문에 장소를 그곳으로 하신 거예요."
"하하! 술 때문이었군. 육노야가 늘 칠주야 동안 술독에 빠져 지냈으면 원이 없겠다고 우스개 소리를 하곤 했었소."
백육호는 사사영을 힘주어 안으며 오랜만에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반면 사사영은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그녀의 입에서 엉겁결에 튀어나온 목화루는 동정호변에 위치한 다루(茶樓)였다. 그곳은 매년 중추절이 되면 부모님과 함께 향차를 마시며 호반의 야경을 감상하던 곳이기도 했다.
백육호는 의아한 듯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날짜를 그토록 멀리 잡았을까? 중추절이라면 일 년 가까이 남아 있지 않소?"
사사영은 가슴이 뛰었다.
"그건... 아! 그래요. 육노야께서 대륙에 도착하는 대로 급히 해결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셨어요. 그 일이 무엇인지는 말씀 안 해주셨지만 기일이 걸리는 일이라 여유를 두고 약조를 하신 것 같아요."
"그것 참 이상한 걸. 육노야에게 중요한 일이라면 내가 모르는 것이 없는데......."
백육호는 고개를 숙여 사사영의 눈을 바라보았다. 순간 사사영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나 곧 독하게 마음을 먹었다.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엄청난 비극이 일어날 거야. 절대로 그렇게 되서는 안돼. 이분이 살아가야 할 앞날을 위해서도 난 거짓말을 해야 해. 그것도 완벽한 거짓말을!'
"공자님, 그렇다면 육노야도 공자님에 관한 모든 걸 알고 계시나요?"
"......."
백육호는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그는 육노인의 고향과 성장과정은 물론 취미와 좋아하는 음식까지 모르는 것이 없다고 생각해 왔으나 정작 자신은 육노인에게 아무 것도 밝힌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육노인도 자신에게 말하지 않은 비밀 한두 가지는 있을 법했다.
"그렇구려. 소저의 말이 옳은 것 같소. 육노야에게도 가슴 깊이 담아둔 비밀이 있을 것이오."
사사영은 긴장을 풀며 백육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 과연 잘한 짓일까?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거짓말을 했건만... 훗날 재앙의 불씨가 되지나 않을지.'
사사영은 한숨을 쉬며 백육호의 손을 끌어당겨 지그시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그것은 불안을 떨치기 위한 행동이었다.
한편 백육호는 뭉클한 젖가슴에 손이 닿자 처음에는 흠칫했으나 곧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서 그녀의 육봉이 만져졌다.
그는 정열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더구나 상세가 회복된 데다 공력까지 급증한 터라 이처럼 가까운 곳에서 여체를 느끼게 되자 참을 수 없는 욕망이 일어났다.
그의 숨이 조금씩 가빠졌다.
사사영은 화제를 돌리고 싶었다. 그녀는 스스로 넝마 같은 옷을 벗어버리고 그의 가슴으로 밀착해 들어갔다.
"안아줘요, 공자님."
그녀의 예기치 못한 공세(?)에 백육호는 가슴이 불이 확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소저!"
그는 뜨거운 입술을 그녀의 입술로 가져갔다. 입술과 입술이 불꽃을 내는 듯 뜨거운 열기를 발산했다. 이제 사사영은 알몸으로 그의 무릎 위에 올라앉아 있는 자세였다.
백육호는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안은 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사사영의 몸이 뒤로 젖혀졌다. 그 위에 뜨거운 입술이 누비기 시작했다.
땀에 젖어 짭짜름했으나 사사영의 젖가슴에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백육호는 서슴없이 그녀의 가슴을 입술과 혀로 핥아나갔다. 동시에 손으로는 그녀의 나신 구석구석을 애무했다.
"아아!"
사사영은 고개를 젖히며 숨가쁜 신음을 터뜨렸다. 사내의 힘찬 무엇인가가 그녀의 깊은 곳으로 밀려든 것이다. 그녀는 전신을 바르르 떨며 그의 목에 매달렸다.
파도에 술통이 흔들렸다.
출렁출렁.......
술통이 아래 위로 규칙적으로 흔들릴 때마다 그녀는 입술을 딱딱 벌리고 있었다. 불덩이 같은 사내의 욕망은 그녀의 몸을 통째로 불살라 버리려는 듯했다.
망망대해(茫茫大海).
술통은 바다 위를 끝없이 표류하고 있었으나 술통 속에 들어있는 남녀는 내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