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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의 ⌜오하기문⌟과 ⌜매천야록⌟에 나오는 <보국안민>과 <대원군>에 대한 기록
당대 유학자로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하여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황현이 쓴 ⌜오하기문⌟이나
⌜매천야록⌟에 안타깝게도 <창의문>이 실려 있지 않다.
⌜매천야록⌟ 1권 640쪽(이장희 번역, 명문당, 2017년)에 ‘보국안민’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4월 18일자(양력) 기록이다. 아래는 동학과 전봉준에 대한 황현의 생각이다.
“전봉준은 가정이 빈한하고 의뢰할 곳 없는 자로 오래전부터 동학의 물이 들어서 항상 울분을 지닌 채 떨쳐 일어날 것을 생각하였다. 민란 초에 여러 사람이 그를 우두머리로 추대하여 난을 일으키고자 하는데. 계략을 짜기도 전에 군중이 흩어지므로 전봉준 또한 황급히 숨었던 것이다. 그 후 얼마 안되어 순찰사와 안핵사사 다투어 수색하기에 긴박함을 알고 동학당의 김기범(김개남), 손화중, 최경서과 모의한 후 개사를 거행하기로 하고 백성을 꾀어 전화위복의 계책으로 삼았다. 동학은‘천리(天理)’를 대신한 것으로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고(代天理物 輔國安民)소리 높여 외쳤다.’우리는 살인과 약탈을 하지 않으면 오직 탐관오리만 용서할 수 없다‘고 널리 알렸다. 이에 백성들이 호응하여 연해 일대 10여 고을이 일시에 호응하고, 열흘이 못가서 수만 명에 이르렀다. 동학교도가 난민과 함께 결합 것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오하기문⌟ 149쪽(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김종익 번역, 역사비평사,2017)에
‘안민창적’과 ‘보제중생’이란 말이 나온다.
미시에 나온 함평군의 보고이다.
“저 무리가 우리 군에 들어와 진을 친 뒤 진지 부근에서 얼쩡거리는 사람은 군인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한 명도 남김없이 죄다 죽였다. 아마 경군에게 뒤를 밟혔기 때문에 영탐이군이 섞여 있을까 두려워서 그랬던 것 같다.”
이 무렵 전라도 도내가 크게 어지러웠다.
도적1)들은 수령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창피와 모욕을 주며 협박했기 때문에 사실상 죽이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또 잇달아 성을 함락하고 병기고와 무기를 약탈했으니, 이들이 도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나 김문현과 홍계훈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아래로 각 읍의 아전과 군교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레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위에서 아래로 보내는 모든 공문에는 감히 ‘도적’이라고 드러내 쓰지 못하고, 단지 ‘동도(東徒)’, ‘저 일당(彼黨)’, ‘ 그 패거리’, ‘저 무리(彼徒)‘라고 지칭했을 뿐이다. ㅇ이런 탓에 위아래에서 서로 주고받는 공문에도 하나같이 위에서 사용한 명칭을 그대로 따라 썼다. 아아! 사람의 생명을 좌우하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장수는 물론이고, 백성의 사정을 살펴서 어루만지고 위로할 임무를 지난 감사가 그 기강과 기개에서 이미 도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기에는 부족할 뿐이니, 이들이 도적과 다른 게 뭐란말인가? 공자는 말했다. “명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리를 잃고, 말이 순리를 잃으면 일이 어그러진다.”
도적들이 함평에서 진을 치고 재주를 과시하며 사람들의 눈을 홀렸다. 평님 한 사람이 열네댓 살가량 된 아이 한 명을 업고 부대 앞으로 나왔다. 아이가 남색 홀기를 쥐고 지휘함에 따라 도적들이 따라가는 것 같았다.
먼저 날라리를 부는 사람이 뒤따랐고, 이어서 인(仁)자 의(義) 자가 쓰인 한 상의 깃발을 든 사람이 뒤따랐다. 이어서 예(禮) 자와 지(智)가 쓰인 한 쌍의 깃발을 든 사람이 뒤따랐고, 또 그 뒤를 백기 두 개가 뒤따랐다. 배기 가운데 하나에는 전서체로 보제(普濟)라는 글자가, 다른 하나에는 역시 전서체로 안민창덕(安民昌德)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어서 황색 바탕에 해서체로 보제중생(普濟衆生)이라는 글자가 적힌 깃발이 하나가 뒤따랐고 그 뒤에 각 읍의 이름을 표시한 나머지 깃발들이 뒤따랐다. 이어서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사람이 말 위에서 칼춤을 추며 뒤따랐고, 그 뒤에 칼을 들고 걷는 네댓 쌍이 뒤따랐다. 이어서 도인 복장에 남바위를 접어쓰고 우산을 든 한 사람이 나귀를 타고 뒤따랐고, 그 뒤에 반소매 저고리 차람에 남바위를 접어 쓰고 우산을 든 채 말을 탄 여섯 사람이 나귀를 탄 사람을 에워싸고 뒤따랐다. 이어서 1만 여명이 총을 들고 두 줄로 뒤따랐다. 이들은 모두 머리에 두건을 둘렀는데, 두건의 색깔은 다섯 가지로 제각각 색이 달랐다. 이어서 죽창을 든 사람들이 씩씩하게 걸으면서 껏어지고 회전하며 때로는 갈 지자로, 대로는 입 구자를 만들면서 저넷를 펼쳤는데 모두 선두의 아이가 쥔 남색의 깃발이 가리키는 것을 쳐다보았다.
요컫대 도적들은 남자아이 가운데 키가 작고 교활한 아이를 뽑아서 진중에 두고 날마다 어떤 진세를 펼칠 것인가를 미리 가르쳤던 것이다. 또 그 아이를 가리켜 ‘신동’이라 부르면서 보고 듣는 사람들의 정신을 홀렸던 것이다. 이 수법은 제나라 전단이 연나라와 전쟁할 때 무명소졸을 신이 보내준 스승이라고 받들면서 군령을 내릴 때마다 신이 내린 지시라고 한 일을 흉내 낸 것인데 어리석은 백성은 그런 줄도 모르고 아이가 진짜 신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정읍의 도적들은 자신들이 살던 집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림으로써 결전에 임하는 필사의 각오를 드러냈다.
도적 무리가 나주의 아전에게 통지문을 보냈다. (151, 152쪽이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4월 18일자고 계속되는 기록이다.)
우리가 오늘 정의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까닭은, 위로는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우리가 지나가는 고을에서 탐관오리는 징벌하고 청렴한 관리에게 상을 주어 관리로 인한 폐단과 백성의 고통을 바로잡고 혁파할 것이다. 또한 세금으로 거둔 쌀을 서울로 운반하는 데 따른 폐단을 뜯어 고쳐 백성의 오랜 골칫거리를 영원히 없애버릴 것이다. 또한 임금께 아뢰어 국태공(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존칭)을 받들어 국정을 대리하게 하고, 나라를 어지럽히는 불충불효한 무리 및 아첨이나 일삼는 무리를 모조리 파면하게 할 것이다. 우리의 진실한 의도는 고작 이런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너희 관리들은 어째서 나라의 형편과 백성의 사정은 생각하지 않고, 각 읍에 군대를 보내 공격 위주로 사람들을 마구 죽이는 것이냐? 이것은 진정 무슨 심보인가? 너희가 저지르는 짓거리를 따져보면 맞붙어 싸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 잘못도 없는 관리와 백성이 함께 죽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옛 비결에 ‘광주와 나주 사이에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룬다고’고 했고, 신라 말기의 풍수가 도선은‘광주와 나주 지방은 영원히 인적이 끊어진다’고 했다. 정말 소름이 끼치고 무섭기 짝이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뜻을 직접 관아의 너희에게 알리는 것이니, 각 고을에서 징발한 병사들은 모두 집으로 돌려보내 농사일에 전념하게 하라. 그리고 갇혀 있는 동학교도들을 바로 풀어준다면 우리는 너희가 관할하는 지역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 한 임금의 백성인데 어찌 공격할 생각을 가지고 있겠는가? 이러한 우리의 뜻을 수요할 것인지 아닌지 속히 회답하기를 바란다.”
동학농민군은 4월 19일자에 함평에서 초토사에게 글을 올렸다.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김종익 번역, 역사비평사,2017)152, 153쪽이다.
그 내용이다.
피맺힌 원한을 가슴에 품고 있는 호남의 유생들은 삼가 거듭하여 절을 올리며, 엄정한 위풍으로 백성의 하소연을 잘 들어주시는 귀하에게 글을 올립니다. 저희는 하늘과 땅 사이에서 임금의 덕에 교회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저희가 어찌 함부로 분별없이 불의한 짓을 저질러서 스스로 죽을죄에 빠져들겠습니까? 무릇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근본이 튼튼하면 나라가 편안하다’는 옛 성현의 남긴 가르침은 지금도 여전히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요지입니다. 또한 감사와 수령은 백성을 다스리고 기르는 벼슬아치입니다. 이들이 역대 어진 임금들의 법으로 백성을 다스리기만 하면, 비록 천 년의 세월이 흐른다 해도 이 나라는 지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수령은 나라의 법을 무시하고 나라의 근본인 백성조차 안중에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탐욕과 포학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아무 때나 불필요하게 부과는 군전, 원곡의 회수를 독촉하는 환곡, 정해진 액수에다 명분도 없이 더 징수해가는 세미,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각자기지 잡역, 인척의 징계도 마다하지 않는 몰염치, 세금의 가혹한 징수와 독촉도 꺼리지 않는 전운영(전운소), 논밭의 면적을 거짓으로 부풀려 세금을 거 받아가는 균전관, 강압적으로 금품을 요구하며 가혹하게 구는 각 관아의 군교와 하인배, 하나같이 참고 견딜 수 없는 것들뿐입니다. 그래서 백성들 가운데 열에 여덟아홉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먹고 입을 것도 없어 여기저기 길바닥에 나앉아 노인과 아이들을 데리고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있습니다. 도무지 살아갈 길이라고는 만에 하나도 없는 이 불쌍한 백성은 죽기도 쉽지 않기에 여러 번 함께 모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해당 고을의 수령에게 호소하면 세상을 어지럽히는 부류로 간주되고, 감영에 호소하면 도둑 떼로 지목됩니다. 이렇듯 저희를, 세상을 어지럽히고 도둑으로 몬 감사와 수령들은 임금이 몸소 거느리고 지휘하는 더없이 중요한 군대를 별 어려움도 없이 출정시키고, 여러 고을에서 병사를 징발하여 창칼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마구 죽이고 있습니다. 선정을 베풀어 백성을 다독여야 할 사람이 진실로 이렇게 해도된단 말입니까? 오늘 저희의 행동은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비록 손에 무기를 들었다고는 하나, 이는 잠시 몸을 보전하려는 수단에 자니지 안습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지만, 오히려 저희는 모든 백성이 마음을 합치고 온 나라가 함께 의논해서 위로는 국태공(대원군)을 모시어 부자의 윤리와 군신의 도리를 온전하게 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안정시켜 종묘사직을 온전히 보전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죽어도 변하지 않을 것을 맹세할 수 있습니다. 삼가 엎드려 비오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계속되는 4월 21일에는 도적 1만 여 명이 장성에 도착하여 월평의 삼봉에 아래 진을 쳤다는 기록이 4월 23일에는 장성전투에 대한 기록, 전라 감사 김문현을 파직하고 김학진이 전라 감사로 임명된 기록이 나온다.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김종익 번역, 역사비평사,2017)160쪽에 국태공에 대한 언급이 다시 나온다.
“홍계훈이 역참을 통해 도적들이 초토사에게 청원한 글을 조정에 올렸다.
왕비는 그 글을 읽다가 ‘위로는 국태공을 모시어’라는 대목에 이르러 영휘를 돌아보며 꾸짖었다.
“천한 놈들 같으니. 내가 차라리 왜놈의 포로가 될지언정 차마 임오년(1882년 임오군란)의 일을 다시 당하지는 않겠다. 내가 무너지면 너희는 죽게 될 뿐이니 여러 말을 하지 마라”
영휘가 힘껏 왕비의 뜻을 따랐다. 마침내 비밀리에 일본2)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정을 논의하는 조정에서는 이런 사실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하기문⌟는 4월 27일에 전주가 도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전라 감사 김문현이 달아났다고 쓰고 있다. 황현은 계속해서 4월 28일, 29일, 30일에 전주성에서 있었던 전투를 기록할 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4월 25일자에 선포된 것으로 알려진 그 유명한 무장봉기 포고문(창의문)에 대한 언급이 없이 지나간다.
황현이 포고문(창의문)이 나왔는데 그 사실을 몰랐을 것인가?
동학을 난으로 규정하고 눈을 부릅뜨고 바라본 자가 동학농민군이 발표한 문서를 놓쳤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알았으나 그 내용이 자신이 신봉하고 있는 주자학적 질서를 거부하는 것이라서 기록하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없었기에 기록하지 않은 것인가?
그렇다고 하면 후세 사람들이 여러 고을에 보낸 통지문을 종합해서 만든 것인가?
⌜매천야록⌟815쪽에서 저자 황현이 상세한 것은 ⌜동비기략⌟을 참조하라고 하는데 ⌜동비기략⌟이 ⌜오하기문⌟보다 더 자세한 기록이란 말인가? ⌜동비기략⌟을 찾으려고 조사해보니 책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찾아 볼 것이다.
P.S
동학농민군이 함평초토사에게 보낸 글은 멸망이 임박한 조선의 정치사회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결국 조선의 멸망은 주자학을 신봉한 그리하여 철저한 문관 위주의 계급제도를 형성한 관료사대부들의 안일과 향락, 폭정과 학정, 위선과 소중화를 자처한 자기 기만적인 도학정치의 결과물이다. 이를 철저하게 비판하고 평가하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조선을 넘어설 수 없다. 조선 멸망에 대한 비판과 성찰, 평가가 없이 세워진 한국은 조선사회의 연장에 불과하다.
저자 황현 또한 주자학자로서 그 사회에서 누리는 모든 양반의 기득권을 누린 사람이다. 그는 벼슬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서 올곧게 살았으므로 동학란에 대한 책임을 부패하고 타락한 민씨척족과 왕비와 동학 지도자들에게 돌린다. 그는 주자학이 형성한 조선의 계급제도와 당파가 이끌어온 양반의 특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으로서 충효와 중화사상의 물에 젖어 있어 주자학과 그 당파들이 조선 상놈과 노비들에게 저지른 불의와 폭력, 수탈과 학정에 대하여 일점의 회의와 느낌과 반성이 없다. 이는 양반 주자학자로서 위정척사파의 한계일 것이다.
2023.5.2.화.인시
우담초라하니
미 주
1) 도적 무리 : 당시 유학자인 황현은 동학농민군을 동비(東匪), 도적의 무리로 칭하였다.
2) 일본: 민영휘는 익히 알려진 대로 일본이 아닌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는 청나라의 오기일 것이다. 그리고 '천진조약'에 근거하여 일본에 청나라 군인이 조선에 파병된다는 것을 알린 사람은 당시 일본에 주재하고 있었던 청나라 대사 왕봉조 이다. 황현저 이민수 번역의 <동학란(동비기략초고)>을유문화사, 1985, 136쪽은 중궁이 민영준에게 화를 내자 민영준이 '비밀히 왜의 후원을 청했다' 고 한다. 고종은 청나라에 청병을 요청했고 민비는 일본에 도움을 요청한 꼴이다.
참고도서
황현 저, 이장희번역 ⌜매천야록⌟ , 명문당, 2017년
황현 저, 김종익 번역 ⌜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역사비평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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