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잠와(潛窩) 최진립(崔震立) -경주 내남
2017.06.02 16:01
카테고리 명문종가
최진립(崔震立) 1568년(선조 1)∼1636년(인조 14). 경주
시호: 정무(貞武) 淸白守節曰貞 折衝禦侮曰武
청렴결백하게 자신의 지조를 지킨 것을 정(貞)이라 하고,
적의 창끝을 꺾어 외침을 막는 것을 무(武)라고 한다.
시장(諡狀) : 대사간 만랑(漫浪) 황호(黃㦿) 찬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
신보(臣輔)의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동생 최계종(崔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4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부장을 제수받았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 때 결사대 수백명을 인솔하고 서생포(西生浦)의 적을 격멸한 데 이어 양호(楊鎬)‧권율(權慄)과 함께 도산(島山)에서 대승하였다.
1600년 여도만호 겸 선전관(呂島萬戶兼宣傳官)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1607년 도총도사에 제수되자 비로소 관직에 나갔다. 뒤에 울산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사면되어 가덕첨사(加德僉使)를 제수받았다.
경흥부사‧공조참판을 거쳐 1630년(인조 8) 경기수사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겸하였다.
1634년 전라수사를 거쳐서 1636년 공주영장으로 병자호란을 맞자 감사 정세규(鄭世規)를 따라 참전하여 용인 험천(險川)에 이르러 청군을 만나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저서로는 《정무공기실(貞武公紀實)》 2권이 있다.
1637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1647년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었다. 경주의 숭렬사(崇烈祠), 경원의 충렬사(忠烈祠)에 제향되었다.
용산서원(龍山書院)
충신증병조판서최공정려비(忠臣贈兵曹判書崔公旌閭碑)
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행가선대부공조참판겸오위도총부부총관(贈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行嘉善大夫工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 최공(崔公) 정려비명(旌閭碑銘) 서문을 병기하다.
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지제교(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敎) 황호(黃㦿)이 찬술하였고,
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겸경연참찬관춘추관수찬관예문관직제학상서원정(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 신익전(申翊全)이 글씨를 썼으며,
자헌대부형조판서겸지의금부사예문관제학세자좌부빈객오위도총부도총관(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義禁府事藝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五衛都摠府都摠管) 김광욱(金光煜)이 전액을 썼다.
오호라. 이것은 고(故) 참판(參判) 최공(崔公)의 정려문이다. 상께서 정려문을 세울 것을 명하니 그의 고향 사대부들이 이 문을 세웠다. 그리고 이 비를 세우는 것은 썩지 않게 하기 위하여 도모하였던 것이 틀림없다. 내가 생각하기에 “공의 의열(義烈)은 해와 별과 같이 빛나고 그 깨끗한 기운은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우니 어찌 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난 날을 돌아보건대 절개에 죽은 신하는 평소에 그 군주가 알아주지 않는다. 그 군주도 그 실상을 몰랐기 때문에 군자가 상해를 입은 것이니 이에 지금 공에게 군신을 본 것이니, 서술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우리 성상께서 계해년에 반정을 일으켜 주관(周官)의 정치를 본받아서 사라져간 문신과 무신들의 공적을 다시 변별하여 풍속을 일으킬 수 있어서 드디어 이미 잊혀진 공을 일으키셔서 덕진첨사(德鎭僉使)를 더하셨다. 어사(御史) 이경여(李敬輿)가 포상할 것을 청하여 상께서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시기도 하였고 병인년에 경흥부사(慶興府使) 및 기순변사(朞巡邊使) 우치적(禹致績)이 순찰사(巡察使) 이명(李溟)에게 포상할 것을 아뢰니 그 실질을 자세히 조사할 것을 계하하셨다. 그 높은 절개가 가상하므로 상께서 표리(表裏) 1습(襲)을 내리셨다.
어사(御史) 이행원(李行遠) 이 돌아와서 공이 청백을 매우 상세히 아뢰었고 재상인 윤방(尹昉)과 김류(金瑬) 가 번갈아 가며 추천하니 상(上)께서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시켰다. 경오년 여름에 상(上)께서 특별히 전라도우수사(全羅道右水使)에 제수하였다가 채 부임하기도 전인 가을에 특별히 공조참판(工曹參判)을 제수하였다. 조정의 제도에 아경(亞卿)에 무신(武臣)을 임명하는 것은 드물다고 하여 공이 사양하였다. 상이 비답을 내려 말하기를 “계해년 이후로 국중에서 모두 생각을 고쳐먹을 것을 생각하였지만 더러운 것에 깊이 물들어 있어 고치기 힘들었는데 경(卿)만이 홀로 염치있고 청렴하게 우리 백성들을 사랑하니 나는 심히 가상하다. 그에게 준 바 아경의 직임은 경에게는 실로 합당하다. 지금 특별히 경기수사(京畿水使)에 제수한다.”고 하였다. 상께서는 인견(引見)하여 위로하고 장려하고 “청렴한 자를 얻어서 수사(水使)로 삼았으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셨다.
계유년에 삼도통사(三道統禦使)를 겸대케 하셨지만 공은 사양하시니 상이 비답을 내려, “나는 경이 재화를 좋아하지 않고 염치 있고 성실하였으므로 경(卿)을 서용한 것이다. 경은 이 뜻을 알고 사양치 말고 자기 직분을 다하여라.”라고 하였다. 갑술년에 다시 전라도우수사(全羅道右水使)를 제수하고 상이 또 인견하여 위로하였다. 대개 공이 스스로 상과 맺은 것은 상이 알아준 것이니 다른 것이 아니라 상이 공을 대우함이 이와 같이 한 까닭이다.
염치있고[廉簡], 청렴하고[淸簡], 염치있고 근면하다[廉勤]고 하신 것은 비록 원래의 공이지만 상에게서 하나를 얻을 수 있었겠는가? 병자년 가을에 조정에서 병조에게 명령을 내려 공을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옮기게 하였고 겨울에는 북쪽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을 때 상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을 때, 공과 순찰사(巡察使) 정세규(鄭世規)가 군사들을 이끌고 전쟁에 나아갔다. 세규가 공에게 이르기를 공은 나이가 지극하니 다른 장수로 바꾸겠다고 하고 공을 물러나게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군부(君父)께서 포위되어 있는데 노신(老臣)이 감히 살기를 도모하겠습니까? 내가 늙어서 장군을 맡을 수 없다면 행군을 맡을 수 있습니다.”고 하고 말에서 뛰어 내려 분개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군중(軍中)에서 이것을 본 사람들은 감격하며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군대가 용인(龍仁)의 험난한 내에 이르렀을 때 적이 철기(鐵騎)로 대적하니 공 한사람만이 서서 활을 쏘는 대로 적군이 죽어 넘어갔다. 적군이 점점 불어나서 종자가 급하다고 고하니 공께서 “내가 죽을 곳은 이곳이다.”고 하시면서 드디어 그곳에서 죽었다. 다음해 정축(丁丑) 년에 시체를 얻었는데 그 모양이 살아 있는 듯하였고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있었다. 그 뜻이 상의 신하로서 그 은혜를 흠뻑 입은 자가 아니겠는가. 봉록과 자리를 탐낸 자였다면 새나 쥐처럼 숨었을 것이다. 무릇 신하는 평소에 이익을 보고 의를 보지 못하였다면 그 급하고 어려운 때를 만나 살 줄은 알아도 죽을 줄은 몰랐을 것이 뻔하다.
염치있는 자들은 구차하게 살지 않고 깨끗한 자들은 절개에 죽을 줄 아니 상께서 매우 공을 잘 알아 주셨다. 지난 번에 공이 한번 죽은 것이 아닌 것은 천리가 갑자기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심이 생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둡구나. 비록 전쟁에서 이겨 적을 물리치더라도 그 전공이 이 공에게 더하여져 상이 알아주신 것을 보답하는 것이 어찌 이와같이 적단 말인가. 사건이 점점 분명해 져서 마을에서 공이 죽어 대적한 양상을 소로 아뢰니 상이 예관(禮官)의 의논에 의거하여 특별히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를 추증하고 본도로 하여금 특별한 일로 다루게 하여 관을 파견하여 치제하게 하였다.
예조판서(禮曺判書) 김시양(金時讓)이 차자(箚子)를 올려 말하기를, “그가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다는 뜻이 본디 마음 속에서 정한 것이었지, 갑자기 전사한 사람과 비할 것이 아니니, 문을 세워 그의 충성을 드러내기를 청합니다.”라고 하니 이에 정려를 세우라는 명이 있었다. 정세규(鄭世規)는 이로 인하여 올라서 대하여 아뢰고 또 그 아들 동량(東亮)에게 관직을 명하였다. 아아 지극하구나. 상(上)의 은혜는 시종 변함없으니 여기에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성이 최(崔)요, 휘(諱)가 진립(震立)이며 자가 사건(士建)이고 본관이 경주이다. 애초에 공은 포의(布衣)였는데 당시 임진왜란을 난하여 붓을 버리고 의를 부르짖으며 적을 소탕하여 베어 죽인 것만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그의 공에 대하여 말해 주지 않으므로 상급이 미치지 않았다. 갑오년에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정유년에 원수(元帥) 권율(權慄) 좇아 서생보(西生堡)에서 싸워 공을 세웠다. 도산(島山)의 싸움에서 양호(楊鎬)가 공의 이름을 본디 알고 있었으므로 공을 곤궁한 데에서 구원하였다. 전후 싸움에서 창상을 입고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으나 기운을 더욱 떨치니 사람들이 그의 용기에 감복하였다. 경자년에 선조는 어사(御史)를 파견하여 힘껏 싸우는 병사들을 호궤함에 공도 그로 인하여 궁궐에 이르러 선조에게 사례하자, 상께서 특별히 자방(咨訪)을 내리시고 활과 화살을 하사하셨으며 수령을 제수하실 것을 명하셨다. 이것은 우리 선조께서 공의 재목을 배양하셔서 뒤를 도모하시고자 하신 것이다. 무신년에 마량진첨사(馬梁鎭僉使)를 제수하여 그의 업적을 드러내니 도신에게 들리었다.
신해년에 경상도좌수우후(慶尙道左水虞候)에 제수되어 치적이 마량(馬梁)에서 많아서 또 조정에 보고되었다. 황응양(黃應暘)이 적을 좇아 돌아와서는 자주의 공의 청렴함을 일컬었다. 갑인년에 경원부사(慶源府使)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통정대부에 이르렀는데 북쪽 지방사람들은 지금까지도 얼음에 움이 돋았다는 소리를 외고 있다. 신유년에 융관(戎關)의 서쪽으로부터 연좌되어 죄를 지은 적이 없는 데도 울산에 2년동안 유배되었다가 우리 성상의 윤음을 만나게 되었다. 그곳에 이르기를 공은 평생 스스로 수립한 것이 이와 같이 크고 걸출하며 또 만년에 큰 운수를 만나기는 하였지만 끝내 병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니 베푸는 일이 어찌 시운과 관련된 것이 아니겠는가.
공은 융경 무술년에 태어나서 숭정 병자년에 돌아갔으니 수명이 69세였고 언양현(彦陽縣) 동오지연(東烏池淵) 묘향의 산에 장사지냈다. 공은 일찍이 판서(判書) 이시발(李時發), 권음(權吟), 참찬(參贊) 윤의립(尹毅立)과 지기(知己)를 허여하였고, 참찬공(參贊公) 나와는 외왕고(外王考)가 되므로 곁에서 그의 유풍(遺風)을 들었다. 그 실마리를 받들어 그의 우아함을 논한다. 다만 그의 맑고 충성스러우며 큰 절개를 제일로 쳐서 서를 지어 뒤에 이곳을 지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식(式)하여 절을 하게 할 것이다. 어찌 감히 군더더기말로 명을 말할 것인가. 명은 다음과 같다.
유명조선국충신의 정려(有明朝鮮國忠臣之閭)로다. 오호라.
숭정 기원후 80년 정해년(숙종 33, 1707년) 5월 일
출처 :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 글쓴이 : 樂民(장달수) | 원글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