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수필의날 단행본 《글쓰기 · 작가에게 묻는다》
글 밭을 경작하는 농부
- 나의 수필쓰기
류인혜
지금까지 수필쓰기 혹은 수필작법에 대한 글을 여러 번 써왔다. 그때마다 다른 이들도 공감할 수 있는 일반적인 견해보다는 내가 어떤 수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수필은 개인이 살아온 내용과 지닌 기량과 글 쓰는 습관 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기에 ‘내 문학에 수필은 무엇인가.’를 고민한 것이다.
1981년 제15회 전국주부백일장에서 산문부 3등으로 입상했다. 약간의 상금과 홍윤숙 선생의 시집 『사과밭 주인의 집』, 시계(문학의 기초를 닦아주신 아버지께 드림)를 부상으로 받았고, 텔레비전 아침 방송에 입상자들이 나가 동네 아줌마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오래전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제 정신을 일으켜주는 자극이 사라져 습관적으로 쓰고 있으니, 글을 쓰고 싶은 절박함으로 가슴 뛰던 시절을 기억해 두고 싶기 때문이다.
수필공부는 그 후 「여성문예원」에서 조경희 선생님의 특강, 두 달 동안 받은 것이 전부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숙제로 쓴 몇 편의 수필 중 <하늘>이 초회 추천을 통과했다. 당시의 수필 제목을 기억해 보면 <핸드백>, <한 잔의 차> 등이다. 일 년 후 완료작 <우물>을 써서 수필가로 지내온 지 40년이다.
선생께서는 알짜로 가르쳐 주셨기에 아직 그 내용을 기반으로 삼고 있다. 수필의 소재와 작법이 발전해 가고 있지만 배운 그대로를 고수한다. 그래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온갖 수난을 겪으며 걸어온 수필 쓰기다. 다행히 수십 년의 긴 세월 동안 알게 모르게 쌓여서 객관화된 시선이 형성되었다.
몇 년 전 수필 쓰는 일을 내용으로 완성한 글 <쓰는 일, 사는 일>이 있다. 그 원고가 실린 책을 우편 사고로 받지 못했으니 심정적으로는 아직 구중에 떠돌아다니는 글이다. 이제는 더 이상의 ‘나의 수필쓰기’에 관한 이야기는 필요하지 않을 듯하니 그 내용을 가져와 덧붙인다.
읽는다
글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 글을 중단하지 않고 쓰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다. 책 읽기는 세상과의 소통이며 다른 이의 생각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공부다. 하고 싶은 일 중에서 제일 쉬운 것이 공부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분야에도 관심을 가져 온갖 전시회와 연극, 무용, 음악회 또는 국악 공연까지 부지런히 접하여 글을 쓰는 일에 영감을 주고 자극이 되었다.
그런 예술적인 분야보다 다양한 종류의 책에서 얻는 지식은 작가로서의 뚜렷한 길을 보여주었다. 수학 문제를 푸는 것처럼 공식의 질서와 추리의 몰두와 뭉쳤던 매듭이 풀어지는 흥분을 느끼고 싶어서 읽어가는 공부에 매달렸다.
책을 만드는 저자마다 간직하고 있는 아집이 있다. 읽다가 거슬리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는다. 그러나 이론만 가지고는 아무리 노력해도 직접의 경험에 따라갈 수 없는 한계가 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에 꼭 필요한 기본적인 질서를 배우기 위해서는 변하지 않은 진리가 필요했다.
어떤 방법으로 삶의 기준 즉 쓸 수 있는 옥토를 개간했을까. 오랫동안 성경의 구절을 되풀이해서 숙지함으로 얻은 결론은 생명의 가치를 알게 된 일이다. 내게 생명을 주신 분에게 경외심을 가지고 맑게 웃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작자의 웃음은 글에 긍정적인 기운을 불어넣는 일이다. 하늘과 땅이 맞붙어 버려 가슴까지 차오른 눈물이 터져 나오지 않을 때, 나는 성경을 읽는다. 그리고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그 힘으로 수필을 쓴다.
본다
수필을 쓰면서 나를 본다. 글은 나를 보는 거울이다. 수필 속에 담기는 느낌과 생각들이 승화되어 인간에 대한 반감과 도저히 사그라지지 않을 분노마저 희망과 아름다움으로 변화되어 글 밭을 경작할 정신이 자라나게 했다.
사람은 부모가 주신 이름값, 저절로 먹는 나잇값, 비싸게 먹은 밥값을 하면서 자신의 값어치를 보존해야 한다. 그런 온전한 사람으로 산다는 일이 얼마나 난감함의 연속이던지, 글 속의 나를 보지 않으면 내가 가는 길이 온전한지 알아내기 어려웠다. 작가로서의 이름을 내세우며 사는 일에 충실하기 위해서, 원하는 모습을 갖추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등단 초기에는 한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어갈 수 있는 생각은 많지 않았다. 부족을 메꾸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했다. 무엇이 글을 쓰게 할 것인가. 눈을 부릅뜨고 보았다. 보이는 모든 것을 보이는 대로만 보도록 애썼다. 내 생각이 없는 그대로의 삼라만상을 보았다. 자연에 스며있는 순환의 진리와 거스를 수 없는 섭리들로 내면이 충만하게 채워졌다. 그렇게 수필을 썼다.
쓴다
수필이라는 문학의 장르는 진실함이 요구된다. 삶을 정직하게 표현하기 위한 노력은 욕망이 우선되는 인간에게는 신선한 도전이다. 무엇을 선택하든지 소재에 따라서 무궁한 작법이 생긴다. 내가 수필 쓰는 작업을 설명함에 우선되는 것은 나를 비롯하여 누구든지 이해하기 쉽도록 쓰는 것이다. 난해한 단어들로 웃자라는 가지를 잘라 다듬어 가며 내가 생각한 수필의 형식을 만들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수백 편의 수필을 써왔다. 크게 세 가지의 유형으로 수필의 내용이 나누어진다.
먼저 좋은 글 밭을 경작하는 도구로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는 일이다. <류인혜의 책읽기>라고 전재를 두는 것은 저자의 생각과 내 생각의 어떤 것이 융합되어 더 좋은 결과를 갖고 오는가를 찾고 싶기 때문이다. 책을 읽으며 작가와 내가 보고 있는 방향이 같으면 가장 즐겁다. 책을 읽은 후 덮어 두지 않고 그에 대한 감상을 써보는 일이 글쓰기의 준비작업이다.
또 나무 이야기를 오래 써왔다. 이것을 <류인혜의 나무이야기>로 묶었다. 같은 주제를 담은 소재를 계속 생각 속에 담을 수 있다는 것은 혼자 웃게 되는 신나는 일이다. 한 가지 이야기를 만 갈래로 나눌 수 있는 신기함을 남몰래 간직한다. 나무에 관한 이야기는 친구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듯이 즐겁게 쓴다. 지치도록 혹독한 다른 소재의 글쓰기를 떠난 쉼터다.
가장 많은 수필이 원고청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쓰는 수필은 수확물이 담긴 글 창고를 내보이는 작업이다. 작가의 본분은 다른 일이 다급해도 먼저 글을 써야 한다. 40년 동안 원고청탁을 거절한 경우는 서너 번으로 드물다. 청탁내용대로 집중하여 원고매수와 마감일을 지킨다. 초고를 완성한 후 그 서너 배의 시간을 가지고 교정을 한다. 누구나 행하겠지만 이것도 내 수필 쓰기의 기본이다.
청탁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많은 습작이 필요했다. 아침마다 집안일을 끝내고 컴퓨터를 켜는 습관은 작가로서 의무를 지키기 위해서다, 밝은 기운을 원칙으로 삼아 어두운 밤보다 낮에 글을 쓴다. 또 청탁하는 곳에서 내 원고를 원하는 의도가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딱 한 번 편집자의 의도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짐작했다가 원고를 되돌려받은 일을 겪은 후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정신을 깨우는 가시관을 썼다.
내가 쓰는 수필이 소재에 따라 적합한 모양을 갖추기를 노력했다. 내 수필을 읽는 독자는 자신에게 알맞은 메시지를 발견하면 된다. 수필가 모두가 자신만의 수필작법을 완벽히 갖춘다면 수필 문단의 저력은 단단해질 것이다. 부족한 대로 내 수필은 문학의 아름다움을 지향하고 있는 눈이 밝은 사람에게 주고 싶은 길잡이다.
류인혜
innhea@hanmail.net
1984년 『한국수필』 봄호 수필 <우물>로 추천완료
1985년 『현대시조』 가을호 시조 <낮도깨비>로 추천완료
수필집: 『나무에게 묻는 말』 외 6권. 수필선집: 『마당을 기억하며』
인문서: 『류인혜의 책읽기-아름다운 책』. 시집: 『은총』
한국수필작가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역임.
현) 국제PEN한국본부 자문위원.
제18회 한국수필문학상. 제23회 PEN문학상. 제11회 한국문협작가상
첫댓글 류인혜 선생님! 걸어온 세월이 참으로 오래 되셨습니다.
저도 한 발짝 뒤를 따라 그렇게 흘러온 세월을 반추해 봅니다.
아무튼 글 쓰기가 쉽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도 써야 하는 마음이
있기에 필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숨쉬는 그날까지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할지라도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류인혜 선생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