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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이유가 중시된 연합군의 이탈리아 침공은 충분한 군사적 준비 없이 이뤄졌다. 사진은 시실리 섬 상륙 직후인 1943년 |
뱃멀미가 심해 배 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했던 영옥에게 제임스 파커의 대서양 횡단은 실로 악몽이었다. 배가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은 대체로 날씨도 좋고 항해도 순조로웠지만, 영옥은 흔들의자에만 앉아 있어도 멀미가 나는 체질이었다. 뱃멀미가 너무 심하지 않도록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대부분을 누워서 보낸 영옥은 배가 빨리 도착하기만 기다렸다. 그 와중에도 한 가지 생각만은 계속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실제 전쟁터에 선 자신의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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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륙을 마친 100대대는 부대를 정비해 트럭을 타고 북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독일군이 볼투르노 강을 끼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다고 들었으나 부대가 몬테 마라노에 도착할 때까지 적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폭우가 심해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장병들은 빗줄기가 철모에 부딪쳐 귓가로 흘러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계속 앞으로 갔다. 쏟아지는 비로 땅은 온통 진흙탕으로 변해 있었다.
행군의 선두는 영옥이 속한 B 중대였다. 폴 프로닝 소위의 3소대가 제일 앞에 서서 중대를 인도하고, 영옥이 이끄는 2소대는 중대 후미에서 중대를 따라갔다. 행군을 시작한 지 너덧 시간 지나자 여기저기 낮은 언덕들이 모여 있는 구릉지대가 나타났다. 영옥이 첫 구릉에 오르니 길은 언덕을 따라 내려가며 왼쪽으로 뻗다가 날카롭게 커브를 그리며 오른쪽으로 뻗어 있었다. 이미 첫 구릉 꼭대기를 넘은 앞선 소대들은 길을 따라 언덕을 내려가 선두가 막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요란한 기관총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은 기관총 소리가 훈련소에서 듣던 미제 기관총과 다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길의 오른쪽 끝에서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독일군의 기습이었다.
중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아수라장이 됐다. 일제히 땅에 엎드리거나 길옆으로 몸을 피했다. 몸을 조금이라도 지면에 더 밀착시키려고 윗주머니에 있던 담뱃갑까지 빼 던지거나 맨손으로 땅을 파는 사람도 있었다. 계급이나 체면 따위는 사치였다. 장교고 사병이고 가릴 것이 없었다.
총성이 들려오는 곳을 보니 독일군이 기관총을 쏘고 있었다. 처음으로 본 적군의 모습이었다. 전체 지형은 구릉지대로 여기저기 굴곡이 있어 독일군 기관총과 영옥의 2소대 사이에는 계곡이 있었다.
영옥은 2소대가 계곡을 가로질러 공격한다면 대대 전체에서 2소대의 현재 위치가 독일군과 가장 가깝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독일군은 아직 언덕으로 오르지 못한 2소대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소대가 계곡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기도 어려울 터였다.
원래 미군 전투수칙에 따르면 소대장은 중대장의 지시를 받아 움직여야 했으나 영옥은 중대장 타로 스즈끼 대위가 처음으로 적의 실제 공격을 받고 당황해하고 있는 것을 보고 즉시 명령을 내렸다.
“나를 따르라!”
영옥은 그대로 계곡을 향해 뛰었다. 계곡을 지나 독일군 기관총을 향해 소대를 이끌면서 중대장 타로 스즈끼 대위를 무전으로 불렀지만, 교신이 되지 않았다.
영옥이 기관총 진지로 가까이 접근해 나무덤불 위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기관총 진지를 지키던 독일군이 영옥을 발견하고 슈마이쩌 기관단총을 쏘기 시작했다. 즉시 땅에 엎드린 영옥이 배후에서 공격하기 위해 부하들을 데리고 기관총 진지 뒤로 돌아가자 그 사이 위험을 느낀 독일군은 기관총을 걷고 철수했다. 독일군은 먼저 공격을 가해오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주방어선 보강을 위한 지연작전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전투를 벌여오지는 않았다.
독일군이 기관총을 걷으면서 B 중대도 공격에서 벗어났지만, 첫 전사자가 발생했다. 전사자는 조 다카다였다. 다카다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보병전투로 사망한 첫 일본계 미군이 됐다.
독일군 기관총을 철수시켜 중대를 위기에서 구한 2소대는 영옥의 지시에 따라 독일군 기관총이 있던 곳에 그대로 몸을 숨긴 채 혼돈에서 벗어난 중대가 전진해 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2소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온 중대장 스즈끼 대위가 영옥에게 명령했다.
“길 위로 소대를 올려보내고 길을 따라 소대를 전진시켜라.”
“안 됩니다.”
“뭐? 안돼? 길 위로 전진시키라니까!”
중대장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안 됩니다. 부하들을 개죽음시킬 수 없습니다. 적군이 바로 저기 있습니다. 이쪽 계곡을 건너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영옥이 있는 곳에서는 적군 수백 명이 탱크 세 대까지 거느리고 진을 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눈에 보이는 탱크가 세 대였을 뿐 더 있을 수도 있었다.
“길 위로 행군하라는 것은 네가 적군을 만나기도 전에 내린 명령이야!”
“그럴 수 없습니다. 지금은 적의 위치를 알았으므로 적을 없애야 합니다.”
영옥이 스즈끼 중대장의 명령을 거부하자 화가 치민 중대장은 씩씩거리며 뒤를 향해 뛰어갔다. 중대장의 명령을 거부하고 길옆으로 내려선 영옥은 소대원들을 데리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대대장 터너 중령이 대대 참모들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대대장은 굳은 표정으로 명령했다.
“김 소위, 중대장 명령에 복종하라!”
“안 됩니다. 이쪽으로 계곡을 건너 독일군을 공격하는 것이 옳습니다.”
“김 소위, 이것은 명령이네.”
대대장과 함께 온 러벨 소령도 타이르듯 거들었다. 그러나 영옥은 계속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런 방식은 잘못입니다. 병사들만 희생됩니다.”
그렇게 10여 분 밀고 당기기를 계속했는데도 영옥이 계속 버티자 터너 중령은 단호하게 말했다.
“명령에 불복종하면 군법회의에 회부하겠다.”
“군법회의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길 위로 병사들을 전진시키면 쓸데없이 병사들이 죽거나 다치게 됩니다. 이쪽 계곡을 지나 적을 공격하면 사상자가 생길 수는 있지만, 적어도 적과 싸울 수는 있습니다.”
화가 난 대대장이 일행과 함께 사라진 후 이번에는 군의관 고메타니 대위가 영옥에게 달려왔다. 고메타니 대위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타일렀다.
“영, 오늘은 우리 대대의 첫 전투다. 군법회의 같은 불명예가 있어서는 절대로 안 돼. 제발 내 얼굴을 봐서라도 참아다오.”
영옥은 다른 사람의 명령은 거부해도 고메타니 대위의 말까지 무시할 수는 없었다.
“군의관님, 생각해 보십시오. 저기 독일군 탱크가 세 대나 빤히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길 위로 전진하면 보나 마나 저들이 공격할 것입니다.”
“네가 맞을지 모른다. 그러나 차라리 몇 사람 다치는 것이 전투 첫날 군법회의 같은 일이 있는 것보다는 낫다.”
미군 지휘부나 미국 사회가 과연 일본계 2세들이 어떻게 싸울지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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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에서 미 육군 장교로 활약하던 때의 김영옥(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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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소불가침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했던 독일군은 몇 달 전 스탈린그라드에서 항복했고 아프리카에서도 항복해 수세에 몰리고는 있었지만, 유럽대륙의 독일군은 여전히 건재했다.
서전 이후 계속 전투를 치르며 조금씩 북으로 올라가던 영옥의 부대는 11월로 접어들면서 볼투르노 강을 눈앞에 두게 됐다. 강은 이탈리아 반도를 횡단하는 독일군의 주방어선인 ‘구스타프 라인’에서 남쪽으로 약 25㎞ 지점에 있었다.
독일군은 여기에서 최대한 연합군을 물고 늘어져 구스타프 라인을 더 강화하기 위한 시간을 벌고자 했고 연합군은 가능하면 신속히 강 저지선을 돌파하려 했다. 이에 따라 연합군의 볼투르노 강 도강작전은 그만큼 처절한 전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정도 전투를 하다가는 철수하고 또 어느 정도 전투를 하다가는 다시 철수하던 독일군이 볼투르노 강에서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영옥, 공격로 머릿속 입력
3일 밤 시작된 도하작전에 따라 6군단 전체가 강을 따라 일제히 공격에 나섰다.
도하가 시작되기 전 스즈끼 대위는 영옥을 데리고 대대본부로 가서 작전지도와 공격로를 확인했다. 이 지도는 100대대가 가진 유일한 것이었다. 실전을 치르고 있는 보병대대에 작전지도가 한 장밖에 없다는 것은 연합군이 그만큼 치밀한 준비 없이 이탈리아로 들어갔다는 증거였다. 스즈끼 중대장이 영옥을 데리고 간 이유는 B 중대 장교 중에서 영옥이 가장 정확하게 지도를 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를 정확히 봐 둬라. 우리 중대는 볼투르노 강을 건너 7㎞쯤 북쪽으로 가야 한다.”
스즈끼 대위의 지시에 따라 영옥은 10분이 넘도록 지도 앞에 서서 일대 지형을 머릿속에 입력했다.
100대대는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예정대로 영옥의 2소대를 앞세운 B 중대가 선두에 섰다. 볼투르노 강은 깊은 곳이 가슴까지 차고 폭은 넓지 않았지만, 물이 얼음장같이 차고 물살도 빨랐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병사들은 지역에 따라 강을 가로질러 쳐진 밧줄을 잡고 건너기도 했으나 맨몸인 경우도 많았다.
갑자기 작렬하는 포탄의 섬광이 칠흑 같은 어둠을 밝히기 시작했다. 탄착지점을 잘못 계산한 아군의 오인포격이었다. 포탄이 터질 때마다 강물은 물기둥이 돼 하늘로 치솟았다가 파편과 함께 다시 비처럼 쏟아졌다. 공포로 얼룩진 병사들의 모습이 터지는 포탄 사이로 보였다가 사라지고 다시 보였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 강 건너편에서도 포탄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적군의 포탄이었다. 독일군은 볼투르노 강 유역을 덮은 올리브 숲에 탱크와 대포를 여기저기 감추고 철벽같은 방어선을 구축해 두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볼투르노 강은 붉게 물들기 시작했고 사상자가 급속히 늘어갔다.
천신만고 끝에 강을 건넌 병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뢰밭이었다.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 사이사이로 촘촘히 깔아둔 지뢰는 악마의 선물이었다. 지뢰밭을 통과하면서 100대대에 발생한 사상자만 30여 명이었다.
일단 강을 건넌 영옥은 진흙탕으로 바뀐 작은 도로를 따라 목표지점으로 가기 위해 소대를 이동시켰다. 100미터쯤 움직였을 때 중대본부에서 정지명령이 떨어졌다. 잠시 후 중대장 스즈끼 대위가 영옥에게 뛰어오더니 다그치듯 물었다.
“길을 잘못 든 것 아닌가?”
“이 길이 맞습니다.”
“지도에는 이 길이 아니다. 도강지점에서 5도 정도 오른쪽으로 왔어야 했다.”
“지도에 이 길로 나와 있습니다.”
“이 길이 아니야!”
스즈끼 중대장은 서전이 있던 날 영옥이 자기 명령을 거부했던 것을 떠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 길로 가야 목표지점으로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지도를 읽을 줄 안다고 해서 대대본부로 저를 데리고 가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와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하시는 겁니까?”
“내가 책임을 지겠다. 다른 방향으로 간다.”
스즈끼 대위의 명령에 따라 중대는 방향을 바꾸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옥도 2소대의 행군방향을 돌려 지금까지 왔던 길과는 다른 방향으로 중대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2소대가 중대의 후미가 됐다.
중대장 따르다 더 큰 희생
한동안 중대를 따라가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폭발음이 들려왔다. 앞서 가던 소대가 지뢰를 밟은 것이다. 이 지뢰로 7명의 사상자가 더 생겼다는 보고가 전달됐다. 스즈끼 대위는 모든 장교에게 자기가 있는 곳으로 모이라고 지시했다. 명령을 받은 장교들은 지뢰탐지기를 이용해 조심스레 스즈끼 대위가 있는 곳으로 모였다. 한 발짝만 잘못 디뎌도 자기도 병사들도 가루가 될 판이었다. 영옥은 중대 후미에 있었기 때문에 중대장이 있는 곳까지 가자 다른 장교들은 벌써 다 모여 있었다. 스즈끼 대위는 한쪽 무릎을 땅에 댄 채 고개를 들고 물었다.
“누군가 여기를 빠져나갈 길을 모르겠는가?”
지도를 본 장교는 스즈끼 대위와 영옥밖에 없었다. 영옥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저희는 지도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형을 모릅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스즈끼 대위가 영옥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야 하나?”
“중대장님, 저는 모릅니다. 이쪽 길로 와야 한다고 말씀하신 분은 중대장님입니다.”
“아니다. 길을 인도해 줄 수 있겠나?”
“하지 않겠습니다. 중대장님이 하십시오. 지도를 보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선두에 서라. 군소리 안 하겠다.”
“그러면 제가 다시 선두에 서지요. 여러분이 증인입니다.”
영옥은 다른 장교들을 돌아보며 확인을 시킨 후 2소대로 돌아가 명령했다.
“모두 자기 앞사람 발자국만 따라서 아까 갔던 길로 다시 가라.”
다시 2소대가 선두가 된 중대는 처음 영옥이 가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대는 계단식 밭으로 중대는 밭을 가로질러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한동안 가다 보니 사람 키에 조금 못 미치는 울타리가 나타났다. 울타리는 가축이 밭에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밭의 경계선에 농부들이 키가 작고 튼튼한 사철나무 같은 나무를 촘촘히 줄지어 심은 것이었다. 울타리의 두께는 어깨 넓이 정도였는데 다시 정지명령이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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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지명령을 내린 사람은 이번에도 중대장이었다.
“이제는 어딘지 알겠다. 이 길로 400~500m만 더 가면 목표지점이다.”
“아닙니다. 이 길이 아니라 다음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아니다. 여기가 맞다.”
영옥은 스즈끼 대위가 약속을 어기고 다시 길을 놓고 왈가왈부하자 화가 났다.
“다시는 길을 놓고 간섭하지 않겠다고 조금 전에 약속하시지 않았습니까? 이리 와 보십시오. 보여 드리겠습니다.”
영옥은 울타리를 넘어 한 단 위에 있는 계단식 밭으로 올라서서 저기가 목표지점이라며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순간 기관총 소리가 나면서 총탄이 영옥의 팔 밑을 스치듯 지나갔다. 깜깜한 밤이라 기관총탄에 들어 있는 예광탄 덕택에 탄도가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총탄은 영옥이 올라 있는 밭의 한쪽 끝에 설치된 독일군 기관총으로부터 날아들고 있었다. 영옥은 본능적으로 뒤로 점프해 아래쪽 밭으로 몸을 날려 울타리를 따라 난 얕은 관개용 도랑에 엎드렸다.
스즈끼, 길 놓고 또 왈가왈부
“사격 개시!”
그때 스즈끼 대위가 사격명령을 내렸다.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앞을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병사들과 독일군 기관총 진지의 위치로 봐서 병사들이 쏘는 총탄이 그나마 맞힐 가능성이 있는 목표물이라고는 영옥밖에 없었다. 도랑에 엎드린 영옥은 조금이라도 몸을 더 낮추기 위해 안간힘을 써 가슴이 터질 지경이었다.
“착검! 돌격 앞으로!”
이번에는 대검을 총에 꽂고 돌격하라는 명령까지 들려왔다. 이어서 우르르 여럿이 몰려오는 군화 소리가 뒤를 이었다. 그대로 앞으로 돌격한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어렴풋이 드러나는 형상을 대검으로 찔렀다. 하지만, 병사들이 찌른 것은 딱딱한 울타리였고 병사들은 서로 부딪치거나 울타리에 긁혀 찰과상을 입으며 나뒹굴었다.
그 순간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서 폭발음이 일었다. 영옥의 수류탄이었다. 영옥은 병사들이 대검을 총에 꼽기 위해 사격을 멈췄을 때 가슴에 달고 있던 수류탄 두 발을 떼어냈고 병사들이 돌격하는 동안 안전핀을 뽑고 독일군 기관총을 향해 던졌던 것이다.
수류탄을 던진 후 기관총 소리가 멈추자 영옥이 기관총이 있던 곳으로 다가서는데 바닥에서 구두 밑창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영옥이 구두 밑창을 힘껏 걷어차자 독일군 병사 한 명이 갑자기 뛰어 일어나더니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곧이어 근처에 있던 다른 독일군 병사 한 명도 똑같은 자세로 항복해왔다.
“괜찮으십니까?”
그때 부소대장 마사하루 다케바가 전령 케네스 가네코 일병을 데리고 나타나 걱정스러운 듯 영옥에게 물었다. 병사들은 영옥이 독일군 기관총탄에 맞아 죽거나 심하게 다쳤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괜찮다.”
그 사이 2소대원들이 도착해 영옥이 생포한 독일군 포로 두 명을 보더니 주위를 뒤져 한 명을 더 생포했다. 원래 독일군 기관총 진지에는 다섯 명이 있다가 두 명은 도망가고 세 명이 잡혔는데 이때 생포한 독일군 3명은 100대대가 유럽에서 처음 잡은 포로였다.
영옥은 소대를 이끌고 올리브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가 목표지점에 도착했다. 영옥의 소대는 그곳에서 후속부대가 도착하기를 기다렸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1개 소대 병력만으로는 목표지점을 확실히 지키기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 나머지 병력이 빨리 합류해야 하는데 자기 생각이 옳다고 우기던 스즈끼 대위가 나머지 병력을 이끌고 다른 방향으로 가버린 것이었다. 멀리서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다.
“케니, 가서 중대장님을 찾아 돌아올 수 있겠나?”
영옥은 가네코 일병에게 물었다. 케니는 케네스의 예명으로 영옥도 가네코 일병을 항상 그렇게 불렀다.
“그럴 수 있습니다.”
“좋다. 그럼 가라.”
영옥은 가네코의 자신 있는 답변을 반신반의했으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가네코는 왔던 길을 다시 향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지형상 어둠 속에 왔던 길을 제대로 찾아가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가네코는 중대장을 포함한 나머지 병력을 인도해 돌아왔다. 가네코는 명민한 병사였다.
하와이대학 ROTC 출신으로 장교가 된 스즈끼 대위와 간부후보생 출신으로 장교가 된 영옥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서로 으르렁거리는 것 같았지만 사실 둘은 서로 존중하며 잘 어울렸다. 근본적으로 두 사람은 모두 강한 개성의 소유자였다.
화장지로 지뢰 표시 `앞으로'
이날의 돌격은 일본계 병사들이 유럽전선에서 보여준 첫 ‘반자이 돌격’이라며 미국 언론에 대서특필되기도 했으나 사실 착검한 병사들이 돌격해 찌른 것은 나무울타리였다. 모든 것이 아직 전투경험이 없던 시기에 벌어진 한 편의 코미디였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영옥도 일본계 장병들도 한 가지 사실을 분명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지옥이 갑자기 지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 같은 아비규환의 전쟁터에서 피부나 머리카락 색깔에 따른 인간의 우열은 없었다. 이들 못지않게 이 같은 사실을 똑똑히 보고 있는 사람들은 100대대 지휘부를 구성했던 백인 장교들이었다.
이틀 후 영옥이 이끄는 2소대는 산타 마리아 올리베토에 있는 600 고지를 오르고 있었다. 영옥의 소대는 볼투르노 강 도강작전에서 대대의 선봉에 섰기 때문에 이날은 대대 후미에서 일렬종대로 천천히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영옥은 육군 전투교본에 나오는 대로 1개 분대를 앞세우고 2개 분대를 뒤따르게 하면서 B 중대 후미에서 중대를 따라갔다. 대대가 일렬종대로 600 고지를 오른 이유는 독일군이 문자 그대로 수천 개의 각종 지뢰를 깔아뒀기 때문이었다. 앞서 가는 장병은 지뢰나 지뢰용 전선을 발견하는 대로 흰 화장지로 덮어 표시했고 뒤따르는 장병들은 화장지를 피해 조심스레 길을 찾아갔다. 영옥의 소대가 정상 가까이 올랐을 때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대대장 전령이 나타났다.
“김 소위님, 대대장님께서 찾으십니다.”
대대장은 캠프 맥코이에서부터 100대대와 함께 있다가 1주일 전 대대장이 된 제임스 길레스피 소령이었다. 영옥은 대대장이 갑자기 찾는 영문을 몰라 앞서 가던 1개 분대는 놔두고 뒤따르는 2개 분대만 정지시킨 채 전령을 따라갔다.
산꼭대기에서 30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영옥을 기다리던 길레스피 소령은 영옥이 도착하는 것을 보면서 손을 들어 동쪽으로 인접해 있는 산을 가리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