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낭 당
마을 입구나 마을의 성소인 고갯마루 , 산록 등에 위치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는 돌무더기를 흔히 서낭당 이라고 합니다 .
신목 [ 神木 ] 과 함께 돌무더기가 있거나 , 돌무더기가 단독으로 있거나 ,
오래된 나무에 신당 [ 神堂 ] 이 함께 있거나, 신당 단독으로 서낭당을 삼아
이것이 마을 공동체 신앙인 서낭당의거소 입니다 .
이러한 서낭당의 형태를 살펴보면 . . .
= 신목 [ 神木 ] 과 돌무더기가 함께 있는 형태
= 돌만 쌓여 있는 형태
= 신목 [ 神木 ] 에 오색의 천이나 베가 걸려 있는 형태
= 신목 [ 神木 ] 과 당집이 함께 있는 상태
이상과 같은 사례에서 돌무더기에 돌을 던지며 나무에 오색이나
천을 걸어 놓는 행위는 개인적인 기원이나 가족의 기원 ,
질병의 쾌유 또는 소원성취를 바랄 때 신에게 기원을 하는 것입니다 .
이러한 개인의 형태에서 서낭당 집이 형성되면서 마을의 공동체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신목이나 돌무더기에 금줄을 치는 신앙의 양산으로 나타납니다 .
서낭당 의 발생
서낭 , 성황 (城隍), 천황당,국사 (시)당,골매기 , 할미당 등으로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불리고 있으며 , 이러한 말은 산왕 (山王), 상왕(上王),성황(城隍) 등에서 유래되었습니다 .
또는 수구탑 , 수구맥이 , 돌선황 , 원탑 , 돌무덤 , 말무덤 등으로 불리는 것은 돌을 탑처럼
쌓아 올린 서낭당의형태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
서낭당의 돌탑을 쌓게된 전설을 보면 . . .
1) 강 태 공 의 전 설
옛날에 강태공은 집의 빈궁은 돌보지 않고 수도에만 전심하여 ,
강태공의 처 마씨는 이를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였습니다 .
그 뒤 무왕 [ 武王 ] 은 강태공의 현명함을 듣고 그를 수령으로 삼았습니다 .
하루는 강태공이 길을 나서자 백성들이 수령이 지나간다 하여 길을
닦아주었는데 길을 닦는 백성들 중에는 강태공의 처도 있었습니다 .
강태공은 마침 영상 (嶺上) 에 있어서 그 처를 발견하고 마차에서 내려 처를 불렀습니다 .
마씨는 기뻐하며 강태공에게 다시 맺어지기를 청하였습니다 .
그러자 강태공은 한 그릇의 물을 구하여
그것을 땅에 붓고 , 그 부은 물을 다시 그릇에 채우면 허락하겠다고 하였습니다 .
이에 마씨는 물은 없고 마음은 급하여 여러 사람의 침을 구하러 돌아다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곳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
사람들은 이 여인의 죽음을 가엾게 여겨 시신을 돌로 덮어 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곳을 지날 때마다 침을 뱉어 그녀를 위로해 주었습니다 .
2) 석 전 전 설 (石戰傳說)
조선 명조 때 국가의 침입을 당했을 때 대비하고자 고갯마루에 돌을
모아 쌓아 놓게 하여 전시에 돌을 사용하려는 데서 서낭당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3) 소 진 량 의 전 설
성조본가 (成造本家) 의 무가(巫歌) 에 의하면 ,황우량씨가 천상(天上) 의 일
천개의 난간(一千欄干) 을 수리공사(修理工事) 를 갔을 때 ,
간악한 소진량이가 황우량씨의 처를 건드리려다 실패하자 ,
그 처를 가두고 갖은 고초를 다 주었습니다 .
이때 황우량씨가 공사를 끝내고 돌아와 소진량을 벌하고 그의 처를 도로 찾았습니다 .
그리고 소진량은 길가의 서낭신이 되어 오가는 행인의 더러운 침을
뱉게 만들어 복수를 합니다 .
그리고 그들 부부는 성주신이 되었습니다 .
이때부터 서낭신이 생겼다는 무가(巫歌) 입니다 .
[소정방 .신승겸 .김총 등 역사상 실제했던 인물들을 사후 서낭신으로 섬긴 경우가 있는데 ,
이들의 공통점은 무장이라는 점 입니다.]
4) 등 금 장 수 전 설
옛날에 등금 장수가 딸을 데리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다니면서
소금 , 멸치 등을 팔아 겨우 생활을 하였습니다 .
마을을 돌아다니다가 고단하고 짐은 무겁고 하여 잠시 앉아서 쉬다가
쓰러져 죽은 장소가 서낭당이라는 이야기입니다 .
이때 돈 있는 사람은 가족의 안녕과 행복과 장수(長壽) 를 기원하며 대나무에 백지 ,
비단 등을 걸어 놓아등금 장수 딸을 위로하였다 하여 돌을 얹어주고 귀신이 붙지 못하게
침을 세번 뱉었다는 이야기입니다 .
[삼척군 원덕읍 갈남리 신남 마을의 서낭당인 해신당의 나무로 만든 남자의 성기들이 있습니다 .
바다에 빠져 죽은 처녀의 넋을 달래지 않으면 바다 사고를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믿음에 따라
남자의 성기 들을 길죽하게 깎아 새끼에 끼워 서낭당 나무에 걸어 놓았습니다]
여러 형태들을 보면 . . .
서낭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지는 오래된 나무에 금줄을 치고 천을 걸어 놓아 소원을 기원하며 ,
신목에 오색 , 견포편 등을 걸어 놓은 헌납속은 민초들의 기원과 연관이 되어있고 ,
또한 , 서낭당에 모셔진 장군상은 인자한 할아버지처럼 애교 있고 미옥한 화상이며 ,
도상의 기법과 채색이 맞지 않고 흑색의 단색 광물성 안료로 그려진 장군의 신상에는
실제로 민중들 자신의 얼굴이 나타나 있으며 , 표정은 밝습니다 .
벙거지에 전복을 입고 칼옷과 활로 무장한 장군상을 보면
마음 좋게 생긴 시골 할아버지의 모습이며 , 으시대거나 뻐김없이 묵묵히 세상을 산
조상들은 신상에서도 멋있는 풍류의 종교화를 표현하였습니다 .
서 낭 신
서낭당집 안에는 서낭신을 상징하는 신체로서 ,위패 ,그림 ,신간(神竿) 등이 놓여집니다 .
위패에는 , , ,
토지지신(土地之神).성황지신(城隍之神).여역지신(濾疫之神) 이라 쓰여 있습니다 .
토지신은 마을의 수호신이며 ,
성황신은 마을에 침입하는 귀신들을 막아내는 신이며 ,
여역신은 온갖 질병을 막아준다고 합니다 .
서낭당에서는 남신(男神) 과 여신(女神) 을 각각 모십니다 .
여서낭당에서는 그림으로 그려진 여성상이 봉안되어 있고 ,
남서낭당에서는 서낭신이 위패로 모셔져 있습니다 .
서낭당에 모셔진 신체로서 먼저 여신의 신상이 모셔져 오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서낭신을 위패로 대신하면서 사회전반에 걸쳐
가부장권이 확립되면서 서낭신도 점차 남신으로 인식되어져 있습니다 .
그러나 이전부터 모셔져 온 여신도 남신과 함께 전해져 왔기 때문에
현재와 같이 서낭당 신체의 두 가지 유형이 공존하게 된 것입니다 .
우리는 대대로 조상을 숭배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생활의 지혜로써
옛 성현들의 가르침을 잘 지키며 살아 왔습니다 .
지금 우리들이 무속이라 부르고 있는 이 신앙은 우리의 할머니의 할머니 ,
그 할머니의 할머니 때부터 내려오면서 부모에게서 우리가
태어나듯이 그냥 자연속에서 자연히 이어지는 것이였습니다 .
어찌보면 ,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생각 합니다 .
신(神) 과 영(靈) 의 중계자로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명(命) 을 빌고,
복(福) 을 빌어주며 , 계파 [ 係派 ] 나 종파(宗派) 와 상관없이
오로지 神 과 함께하는 것이 바로 기복신앙 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