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금요칼럼 - 스포츠와 국가 그리고 기호의 파노라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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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우 (영국 에든버러 대학교 교수) | | 국기와 국가는 한 나라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도구다. 그러나 그러한 상징물들이 어떠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지난해 말 광화문광장에서 어버이연합이나 엄마부대가 흔든 태극기가 의미하는 대한민국과, 촛불집회에 참가한 시민들이 ‘이게 나라냐’라는 구호를 외치며 떠올렸을 태극기의 의미는, 비록 그 외적인 기호는 같을지언정, 두 그룹이 꿈꾸는 국가는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국가와 국기에 대한 논란이 한창이다. 특히 스포츠가 그 논란의 중심에 있다. 흑인선수들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무릎 꿇기”시위가 바로 그것이다. 기술하자면, 미국 프로스포츠 현장에서 경기시작 전 국민의례로 국가가 연주되고 성조기가 펼쳐질 때, 적지 않은 선수들이 인종차별적인 공권력 행사에 저항하는 의미로,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고개를 숙이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말한다. 미식축구에서 시작된 이 저항운동은, 메이저리그 야구와 NBA농구 등 다양한 스포츠 현장으로 빠르게 전파되었음은 물론, 스티비 원더 등 유명한 흑인연예인들마저도 이러한 “무릎 꿇기”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프로선수들의 이러한 저항을 비애국적 행위로 규정하고, 각 구단주에게 “무릎 꿇기”시위에 참여하는 선수들에 대한 계약을 해지하라고 트위터를 통해 요청한 바 있다. 나아가 팬들에게는 선수들이 무릎을 꿇는 순간, 경기장을 떠나라고 부탁하기도 하였다.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과는 함께 문화를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이 이러한 과격한 요구의 핵심이다. 국가와, 국기, 그리고 애국심. 과연 트럼프 대통령과 흑인선수들은 같은 표상을 바라보며 다른 상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사실 최근 벌어지는 “무릎 꿇기” 운동을 보다 정확히 이해하려면, 미국에서 흑인인권운동의 흐름과, 그 가운데 스포츠가 차지했던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은 노예제도와 백인우월주의에 기반을 둔 인종주의적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X 등의 인권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나아가 흑인들의 인권을 증진하기위한 사회운동이 강하게 벌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무하마드 알리.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라는 말로 유명하기도 한 1960년대의 대표적인 복싱 챔피언이다. 하지만, 알리 선수는 또한 흑인인권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원래 그는 카시우스 클레이 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흑인들이 서구식 영어이름을 따르는 것이 바로 식민주이와 노예제도의 유산이라는 점을 들어,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더불어 알리 선수는 월남전 징집 통지서를 받기도 했지만, 입영을 거부하고 감옥행을 택하였다. 흑인들을 한번도 “깜둥이”라고 조롱하고 차별하지 않은 베트남 사람들에게 총을 겨눌 수 없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1968년 멕시코 올림픽. 육상 200m 경기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한 토미 스미스와 존 카를로스 선수는, 메달 수여식에 검은 양말과 검은 장갑을 끼고 등장하였다. 미국 국가가 연주되고 국기가 게양되는 순간 이 두 선수는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치켜들었다. 올림픽 경기장에서는 미국을 대표하는 선수들이지만, 정작 인종주의가 만연하는 미국사회로 돌아가면 2등 시민으로 차별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모순적인 상황에 대한 저항이었다. 사건 직후 대표 팀에서 퇴출당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그 모습이 여러 나라로 생중계 된 탓에 흑인인권운동에서 이들의 행동이 미친 여파는 결코 적지 않았다.
무하마드 알리, 토니 스미스, 존 카를로스 그리고“무릎 꿇기” 운동에 동참하는 많은 흑인선수들. 이들에게 국가와 성조기가 상징하는 미국은 다분히 백인 중심적이고 유색인을 부당하게 차별하는 국가다. 비록 오늘날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지만, 여전히 그 문화 전반에는 과거 인종주의 유산이 남아 있다. 때문에 트럼프의 애국심이 지칭하는 미국과 흑인선수들이 경험한 미국 사이에는, 비록 그 외연은 같을지라도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 사이에는 뚜렷한 간극이 존재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최근의“무릎 꿇기”운동은 상징적 투쟁의 장으로서 스포츠가 감당해온 흑인인권운동의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저항운동은 미국사회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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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경향, 2017,10,1.[히딩크는 이미 '한국축구 해답' 내놨다, 우리가 지나쳤을 뿐..] | |
지난달 거스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에서 한국 취재진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필요한 게 무엇입니까.’
히딩크 감독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5~6세부터 18세까지 어린 선수들을 발굴해서 모든 연령에 맞는 교육을 해야 한다.”
평범하지만 절대적으로 옳은 답입니다. 육성시스템이 바뀌지 않은 한 한국 축구는 발전할 수 없습니다.
현재 한국 축구의 육성 시스템은 ‘성적 지향형’ 구조입니다. 초등학교는 넓은 경기장에서 11대11로 경기합니다. 개인기보다는 체력이 중요시되고 개인기를 익힐 기회는 줄어듭니다. 게다가 뛸 기회가 적은 저학년은 형들이 뛰는 것만 지켜보면서 제자리걸음을 해야 합니다.
중학교로 가면 사실상 직업선수의 길로 들어섭니다. 공부와 축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축구에 재능이 있지만 공부를 포기할 수 없는 학생들은 축구를 접습니다. 축구를 계속할 학생들은 이때부터 성적 지상주의 속에 내던져집니다. 저학년들은 벤치에서 3학년 형들이 축구하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기 습득, 꾸준한 경기 경험 축적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
중학교 선수 가운데 최고 유망주는 프로산하 고교클럽으로 갑니다. 그 다음은 대개 고교팀으로 가고, 그 다음은 사설클럽으로 갑니다. 프로 산하 클럽 선수들은 양질의 교육을 받습니다. 반면 시설이 열악한 사설 클럽 학생들은 비용도 많이 들고 학업도 제대로 못 받습니다. 장훈고 윤종석 감독은 “사설 클럽 학부모들은 운동장과 숙소를 빌리는데 돈을 또 써야한다”며 “또 적잖은 클럽 학생들은 방송통신고로 옮기면서 공부와는 아예 담을 쌓는다”고 말했습니다. 고교 선수들의 최고 목표는 프로 또는 대학행입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건 대회 성적입니다. 성적 지상주의는 더욱 노골화됩니다. 고교 졸업 후 전망도 불투명합니다. 프로로 간 유망주들은 경기경험 부족에 시달리고 대학 선수들은 졸업 후 직업 선수가 될 가능성이 낮은 상황 속에서 ‘희망고문’을 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안쓰러운 학생 선수들을 살려내려면 한국의 유소년 육성 시스템이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초등학교에서 8대8 방식으로 연령대별 리그가 시행돼야 합니다. 중·고교에서는 1.5살 터울(1·2학년 한 팀, 2·3학년 한 팀) 리그가 분리 운영돼야 합니다. 동시에 대한축구협회가 지도자·학부모를 설득해 프로처럼 승강제를 실시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어린 선수들은 성적이 아니라 성장 지향적인 축구를 배우게 됩니다. 초등학교 선수들은 연령대별로 기본기를 습득하면서 또래 친구들과 꾸준히 경기할 수 있습니다. 공부와 축구를 무조건 병행하면 중학교에 가면서 축구를 포기하는 유망주들은 줄어듭니다. 중·고교 모두 1.5살 터울 리그가 실행되면 저학년들도 계속 경기에 출전하면서 기량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고등학교부터는 직업 준비 과정으로 봐야 합니다. 학생 선수에게 현실적으로 필요한 내용으로 학업을 시키면서 운동에 조금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고교 졸업생들 중 선수로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선수들은 대학이 아니라 프로·실업으로 가야 합니다. 반면 선수로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학생들은 대학교 운동 관련 학과에 입학해 다른 진로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외 학생 선수들은 축구는 취미로만 즐기면서 다른 공부를 하면 됩니다. 이용수 세종대 교수는 “어릴 때부터 20세 전후까지 선수를 철저하게 관리하는 시스템이 새롭게 구축되지 않는다면 한국 축구에 희망을 걸기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http://v.sports.media.daum.net/v/20171001163036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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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터뉴스, 2017,10,4. ['한국 스포츠계의 큰 별 지다' 김운용 전 IOC 부위원장 3일 타계] | |
한국 스포츠계의 큰 별 윤곡(允(谷) 김운용 전 국제올림픽 위원회(IOC) 부위원장이 지난 3일 오전 향년 86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타계했습니다.
고인 관계자측에 따르면 김 전 부위원장은 “최근 평창 올림픽과 진천선수촌 행사등에 참석으로 인한 과로와 김운용컵 태권도를 앞두고 여러 가지 많은 고민이 있으셨다”고 전했습니다. 이후 2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한 뒤, 다음날인 3일 오전 2시 21분 타계했습니다.
고인은 태권도계의 대부로 알려졌습니다. 연세대학교 2학년 한국전쟁 당시 통역장교로 입대한뒤, 미국 보병학교로 세 차례 군사유학을 다녀오며 육군 중령을 역임 한 뒤, 외교관의 길을 걷다 박정희 정권 시절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했습니다. 1971년 청와대 근무시절 대한태권도협회장을 맡으며 태권도와 긴 인연의 첫 발을 뗐습니다.
1971년부터 20여년 동안 대한태권도협회장을 맡은 고인은 1972년과 이듬해에 국기원과 세계태권도 연맹(WTF)을 설립하며 초대 국기원장과 초대 태권도연맹 총재를 지냈습니다. 또한 1988년 열림 서울 올림픽 당시 올림픽 준비위원들을 국기원에 초대하였고, 시범경기와 개회식행사에 태권도 시범을 보이며 서울올림픽을 태권도를 알리는 최고의 홍보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는 태권도를 시범종목으로 채택하는 등 차근차근 영역을 넓혀갔습니다. 결국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태권도를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시키며 태권도의 세계화 시대를 열었습니다.
1986년 IOC 위원에 선출된 이후 대한체육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IOC 집행위원과 부위원장을 거쳤습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개회식 때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선수단이 동시입장이라는 역사적 의미의 업적을 올렸으며, 88올림픽과 2002년 한·일 월드컵 등 굵직굵직한 국제대회 유치에 기여하며 한국 스포츠계의 큰 별로써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태권도와 함께 반평생을 보낸 고 김운용 전 부위원장이 늘 반짝였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2001년부터 고난의 해였습니다. 2001년 7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 112차 IOC 총회에서 안토니오 사마란치 위원장의 후임자 선거에 올림픽 역사상 처음으로 황색인종으로서 도전했으나 국내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역량 평가에 대한 반발이 심해 낙마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2001년도 국가대표최종선발전에서 일부 심판의 편파 판정 의혹과 태권도 협회 간부들이 비리 혐의로 구속되는 등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결국 도덕적 책임을 지며 2001년 11월 15일 대한태권도협회와 국기원장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리고 판정시비가 있었던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에서 뇌물 스캔들 까지 휘말린데 이어, 2004년 세계태권도연맹 후원금 유용 등 업무상 횡령과 외국환관리법 위반 등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 결과 IOC 위원직 제명 위기에 몰렸고, 2005년 7월 싱가포르 IOC 총회를 앞두고 결국 IOC 위원직마저도 스스로 내려놨습니다.
이후 2008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된 고 김 전 부위원장은 또 다시 한국 체육발전을 위해 활동을 이어 나갔습니다. 1974년 황조근정훈장, 1986년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은 데 이어 지난 2015년 체육회가 선정한 스포츠영웅 자랑스러운 태권도인상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고 김용운 부위원장은 생전 ‘국가의 가장 큰 힘은 사람이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스포츠 계의 거장으로써, IOC의 부위원장으로써, 외교관이자 학자로써 우리나라의 스포츠 외교와 태권도를 세계에 한 획을 긋고 떠났습니다.
고인의 빈소는 4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습니다.
http://v.sports.media.daum.net/v/2017100417134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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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경향, 2017,10,4. [일본·대만 기자들에게 비쳤던 이승엽, “왜 은퇴하나요?”] | |
3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이승엽(41·삼성)의 은퇴경기로 열렸던 삼성-넥센전.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던 ‘살아있는 전설’ 이승엽의 은퇴는 아시아 야구의 경쟁자였던 일본, 대만에서도 관심을 끌었습니다. 경기 전 이승엽의 기자회견장에는 100명이 넘는 취재진이 몰렸습니다. 그 가운데서는 직접 야구장을 찾은 일본, 대만 기자도 있었습니다.
국내 취재진의 질문이 이어지는 가운데 2002년부터 한국야구를 취재한 일본의 무로이 마사야 기자는 ‘일본 팬들에게도 한 마디 해달라’라고 부탁했습니다. 어찌보면 이승엽은 일본 야구팬에겐 애증의 선수입니다. 수많은 한·일전에서 비수를 꽂은 이승엽이지만 일본 프로야구 최고의 인기구단인 요미우리에서 4번 타자로 사랑받았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승엽은 “일본에서 8년간 뛰면서 좋을 때나 안좋을 때나, 2군에 머물 때나 응원해주신 열성적인 팬들 많이 있었다. 그 분들에게도 이렇게 감사 메시지를 전할 자리가 돼 감사드린다. 팬 여러분께는 다 만족 시켜드리지 못했지만 열심히 했던 선수로 기억되고 싶다. 꼭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무로이 기자는 ‘일본에서 성공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곧바로 질문을 이었습니다. 그러자 이승엽은 “열심히 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못미쳤다. 2군에 있던 시간도 많았고 폭발력 있지도 못했다”고 일본에서의 경력을 평가했습니다. 이승엽은 삼성에서 자유계약선수(FA)가 된 2004년부터 지바 롯데, 요미우리 자이언츠,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8년간 일본에서 뛰었습니다. 요미우리에서 4번 타자로 41홈런(2006년)을 치던 전성기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승엽에겐 막판 부상 등으로 긴 슬럼프 속에 도전을 마감한 것이 더 쓰라린 상처로 남은 듯 했습니다. 결국 이승엽은 2012시즌을 앞두고 친정팀 삼성으로 컴백했습니다.
하지만 이승엽은 “성공과 실패를 떠나 일본에서 많이 배운 일본 경험이다. 42살까지 뛸 수 있었던 비결도 일본에서 경험을 통해 나태해지면 안되겠다고 느꼈기 때문”이라면서 “일본에서 많은 공부를 하고 왔다. 성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한 대만 매체의 질문은 ‘이승엽 선수는 국제대회에서 항상 잘했는데 어떤 마음가짐으로 나갔나’였습니다. 이에 이승엽은 “태극마크를 달면 대한민국을 대표해 뛰는 자리다. 작은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실패나 실수가 있었지만 극적인 순간 홈런, 안타를 칠 수 있었던 비결은 대한민국만의 끈끈한 선후배 분위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한국이 단기전에 강하다”며 자신을 내세우기 보다 대표팀의 분위기를 선전의 이유로 꼽았습니다.
여전히 경쟁력을 보여주는 시점에서 은퇴를 결정한 것 역시 그들의 시선에서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듯 했습니다. 이승엽은 “내가 물러나지 않으면 구단에서 은퇴시점을 말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은퇴는 2년 전부터 계획한 부분인데 팀 성적이 좋다면 더 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러나 팀이 지난 두 시즌 9위로 마쳤다. 고참으로 책임을 느꼈고, 이제 팀이 변화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한다”면서 “내가 은퇴함으로서 2군에서 1군만 바라보면서 뛰는 선수들이 주인공이 될 기회가 될 것”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대만 취재진은 또 ‘다시 태어나면 야구하지 않겠다는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정말인가’이라는 질문도 했습니다. 수없이 받아봤을 이 물음에 대해서도 이승엽은 불편한 내색없이 “지금 스타가 됐을 때는 너무나 행복하다. 야구선수로서 그라운드에서 누린 행복이 정말 크다. 그러나 과정은 너무 힘들었다. 보통 노력으로는 되는 것은 아니다”며 “다시 만약 기회가 온다면 그냥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고 담담하게 털어놨습니다.
KBO리그 전설이지만 이승엽의 속깊은 얘기에 외국 기자들 역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로이 기자는 자신의 칼럼을 통해 “수많은 극적인 홈런과 성실한 인품으로 사람들을 매료시킨 이승엽이 유니폼과 ‘국민타자’이라는 갑옷을 벗고 그라운드를 떠났다”고 적었습니다.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art_id=201710041620003&sec_id=5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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