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태우가 착복한 비자금 때문에 전두환까지 걸려들어 ]◈
노태우는 그의 둥지로 날아든 김영삼에게 정권을 넘겨준 후 1995년 11월 16일 그 김영삼에 의해 감옥으로 갔다. 1995년 10월 19일 민주당 박계동 의원이 노태우 비자금 4,000억 원을 폭로해서다. 노태우는 선거자금으로 7,000억 원을 조성해 3,000억 원은 김영삼에 건네주고, 4,000억원을 착복을 했었는데 그것이 들통난 것이다. 3,000억 원을 김영삼에게 건네주었다는 것은 노태우 회고록에 기재돼 있다. 노태우가 착복 용도로 숨겨둔 4,000억 원이 드러나자 정국은 회오리쳤다. 찬스에 강한 김대중이 10월 27일 중국에서 김영삼에 화살을 날렸다. “나는 노태우로부터 20억 원을 받았다"
이에 여론은 김영삼에게로 향했다. “노태우가 정적인 김대중에게 20억 원을 주었으면 노태우 밥상머리에서 대통령이 된 김영삼은 도대체 얼마를 받았다는 것이냐, 김영삼은 밝혀라.” 노태우로부터 3,000억 원을 받은 김영삼이 겁이 났다. 조사가 되면 큰일이었다. 양심은 오간 데 없이 자기에게 날아오는 화살을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돌렸다. “저놈들, 쿠데타로 정권 잡아 광주에서 학살하고 도둑질해 먹었다. 잡아넣어라.” 노태우는 11월 16일에, 전두환은 12월 3일에 각기 구속 수감되었다. 노태우의 비자금이 발견되면서 전두환까지 벼락을 맞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마무리됐던 5.18이 다시 도마 위에 오르게 되었다. 노태우의 4,000억 비자금이 들통나지 않았다면 5.18에 대한 날치기 재판도 없었을 것이다.
노태우는 은닉자금 4,000원이라는 낚시로 구속된 후 12.12와 5.18에 대한 피의사실이 추가된 케이스였고, 전두환은 12.12와 5.18이라는 낚시로 구속된 후 그 위에 정치자금이 추가된 케이스였다. 김영삼은 여론의 비난을 피하기 위해 전두환에 대한 재판이 '정치재판'이 아니라 '비리재판'이라는 프레임으로 몰고 갔다. 전두환은 안양교도소에서 김영삼 정권의 '역사바로세우기'의 부당성에 대한 항거로 단행한 28일간의 단식으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혼수상태로 빠지기 며칠 전, 손녀 생일에 편지를 보냈다.
“수현아, 몹시 보고 싶구나. 이 할아버지는 수현이가 태어나기 전 용감하고 정의로운 일을 했다. 그런데 16년이 지난 지금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수현이의 생일도 축하해줄 수 없는 곳에 와 있단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라. 이 할아버지는 수현이와 우석이를 정말로 사랑한다. 잘 모르는 아이들이 학교에서 놀리면 화내거나 싸우지 말고 우리 할아버지는 나라가 어려울 때 최선을 다해 일한 훌륭한 대통령이었고, 어린이를 몹시 사랑한 대통령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말해다오.”
◈[ 역대 정치자금의 성격 ]◈
노태우는 선거자금으로 검은 돈 4,000억 원을 순전히 개인적으로 착복했지만, 전두환이 자금을 걷은 것은 이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전두환은 민정당 대표이기 때문에 당을 위한 정치지금을 조달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장관 등 요직을 맡은 공직자들에게 "너희는 절대로 돈 먹지 마라. 오로지 일만 열심히 하라. 돈은 내가 챙겨 주겠다.”며 재벌들로부터 받은 자금 중 일부를 덜어내 통 크게 부하들에 주었다. 그 부하들은 전두환을 통이 큰 주군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노태우는 부하들에게 인색했다. 그의 손에 들어온 돈을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앙심을 먹은 자금관리자가 정보를 유출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자금 조성의 방법에 대해 우리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전두환은 재벌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개인 재산을 받았다. 그래서 경제 및 사회에 미치는 마이너스 파급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김대중과 노무현의 자금 조성 방법은 사회에 매우 해로운 영향을 끼쳤다. 김대중은 강원랜드를 지어서 많은 국민들을 투전이라는 정신병에 걸리게 했고, 수많은 가정을 파탄시켰다. 노무현은 바다이야기로 돈을 벌었다. 이 역시 국민을 사행심에 도취하게 만들어 수많은 인생과 가정을 파탄시켰다.
역대 정치자금의 성격
노태우는 선거자금으로 검은 돈 4,000억 원을 순전히 개인적으로 착복했지만, 전두환이 자금을 걷은 것은 이와는 그 성격이 달랐다. 전두환은 민정당 대표이기 때문에 담을 위한 정치지금을 조달해야 할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장관 등 요직을 맡은 공직자들에게 "너희는 절대로 돈 먹지 마라. 오로지 일만 열심히 하라. 돈은 내가 챙겨 주겠다.”며 재벌들로부터 받은 자금 중 일부를 덜어내 통 크게 부하들에 주었다. 그 부하들은 전두환을 통이 큰 주군으로 인식했다. 그런데 노태우는 부하들에게 인색했다. 그의 손에 들어온 돈을 부하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앙심을 먹은 자금관리자가 정보를 유출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자금 조성의 방법에 대해 우리는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전두환은 재벌들이 개인적으로 소유한 개인 재산을 받았다. 그래서 경제 및 사회에 미치는 마이너스 파급효과가 없었다. 그런데 김대중과 노무현의 자금 조성 방법은 사회에 매우 해로운 영향을 끼쳤다. 김대중은 강원랜드를 지어서 많은 국민들을 투전이라는 정신병에 걸리게 했고, 수많은 가정을 파탄시켰다. 노무현은 바다이야기로 돈을 벌었다. 이 역시 국민을 사행심에 도취하게 만들어 수많은 인생과 가정을 파탄시켰다.
김영삼은 대통령에 출마할 때 노태우로부터 3,000억 원을 받았다. 이에 추가하며 선거자금을 받고, 그것도 부족해 기업들로부터 비자금을 받있다. 기업으로부터 받는 비자금은 주로 그 아들 김현철을 통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한보사태'다. 1997년 IMF라는 산사태가 발생하기 직전, 한보그룹 회장 정태수는 김현철 등에 뇌물을 주고 그 대가로 5조7,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대출을 받은 상태에서 부도를 냈다. 5조7천억의 대형 펑크는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워야 했다. 이렇게 국가를 망쳐놓고도 김현철은 많은 비자금을 세탁해 감췄다. 김기섭 전 안기부 운영차장에게 70억 원을 맡겼다. 이성호 전 대호건설 사장에게 72억 원, 친구 박태중에게 132억 원을 맡겨 관리한 것이다. 이에 더해 두양그룹 김덕영 회장 등 고등학교 동문 기업인들로부터 매월 6천만 원씩을 받아 모은 큰돈이 있었다. 300억에 육박하는 돈인 셈이다. 이로 인해 그는 1997년 5월 17일에 구속됐다.
김대중, 월간조선 2020년 5월호에 의하면 김대중의 비자금은 1조6,500억 원(13억5000만 달러)이었다. 아래는 2001년 12월 19일 전 민주당 박정훈 의원의 처를 인터뷰한 매일신문 기사의 일부다. "밤중에 대우직원 몇 사람이 사과상자에 돈을 담아, 우리집으로 가져오면, 건너편 아파트에 살던 김홍일 의원이 가져갔다. 돈냄새가 진동해 머리가 아팠다. 신권은 휘발유 냄새, 구권은 퀘퀘한 냄새가 나는데 거의 구권인 것 같았다.” 1988년에 당시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김홍일 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벌어졌던 진풍경이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박정희가 스위스 비밀계좌에 수조 원 또는 수십조 원규모의 비자금을 숨겨두었다고 주장하던 빨갱이들, 전두환이 스위스은행에 천문학적인 비자금을 숨겨두었다고 거품을 물던 빨갱이들, 그빨갱이 두목이 미국에 숨겨둔 천문학 규모의 비자금과 돈냄새에 사람이 질식할 정도로 아파트에 돈을 쌓아놓았다는 그 아들의 비리에 대해서는 왜 말이 없는가.
노무현에 대한 비리는 태광실업 회장 박연차의 지원을 둘러싼 권양숙과 그 아들 노정현에 얽힌 비리가 기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액수로 보면 수십억 원 단위에 불과한 상대적 푼돈이었는데 그는 당시 인기가 바닥을 친데다 열우당원들로부터도 비난을 받고, 검찰 조사까지 받는 처지가 되다 보니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불과 수십억 원 단위에 목숨을 잃은 사람이 됐다.
◈[ 전두환의 정치자금 ]◈
김영삼은 노태우로부터 3,000억 원을 받아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밝히지 않고 전두환 정치자금만 문제 삼았다. 김영삼이 노태우로부터 3,000억 원을 받았다는 사실은 노태우가 그의 회고록에서 밝힘으로써 뒤늦게 들통이 났지만, 그는 자신의 문제는 덮고, 노태우와 전두환의 도면 문제 삼아 감옥에 낳았다. 양심이 매우 불량한 인물이었다.
1996년 2월 16일, 김영삼의 검찰은 전두환에 관련된 것으로 짐작되는180여개 계좌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했다. 이 180여 개의 계좌 중에는최규하 대통령의 영부인 '홍기' 여사의 계좌까지 들어가 있었다. 홍기 여사에 대한 압수수색은 홍기 여사의 동의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검사는 영장발부 판사를 속이고, 홍기 여사의 계좌를 슬며시 끼워 넣기까지 한것이다.
김영삼의 검찰은 전두환에게 정치자금을 기탁한 재벌들을 하얏트 호텔에 불러 전두환에 얼마씩 주었느냐고 물었다. 재벌들이 주었다는 총 금액을 더하니 2,205억 원이었다. 그 중 600여억 원은 민정당 운영비와 대통령 통치자금으로 사용됐고, 청와대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 전두환이 보유한 금액은 1,600여억 원이었다 한다.
전두환은 왜 1,600억 원을 퇴임 시까지 가지고 있었는가? 제13대 총선이 자기 퇴임일(1988.2.24.) 이전에 치러질 것에 대비해 확보하고 있었다 한다. 그런데 노태우가 선거를 그의 취임 이후인 4월로 연기함에 따라 전두환이 사용할 시기를 넘긴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은 노태우에게선거를 치르는 데 사용하라고 550억 원을 주었다. 나머지 1,000여억 원 가운데 400여억 원은 자기 계열의 민정당 후보자들이 선거자금에 쪼들리자 명예매의 일상에서 군인본 식으로 나누어주었다.
나머지 600여억 원은 1988년 여름 5공 청산 소동이 벌어질 때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전두환은 왜 600억 원을 1988년 여름까지 소유하고 있었는가? 통상의 상식인들은 그 600여억 원을 전두환이 착복하려고 한 것이 아니냐,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어 보인다. 지금과는 달리 그 때는 전두환이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이 되고 민정당 명예총재가 되었다. 전두환 자서전 3권 596~641쪽에는 퇴임 이후 그가 국가를 위해 하고 싶어 하는 의욕찬 과제들이 나열돼 있다.
전두환이 가지고 있었던 600여억 원은 개인적인 목적으로 쓰려고 남겨둔 것이 아니라 57세의 젊은 나이로 대통령을 마치고 나서, 그가 터득한 국가경영의 노하우를 적극 활용하여 국내에서 그리고 외교 분야에서,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그 활동비로 남겨둔 것이라 한다. 사정이 이와 같은데도 불구하고 김영삼은 2,205억 원 모두가 '포괄적 뇌물'이라며 기업을 잘 봐주는 대가로 받은 '대가성 뇌물'이라고 뒤집어씌웠다. 이 2,205억 원과 다른 대통령들의 비리자금을 비교해보라. 왜 가장 규모가 작은 전두환만 비리의 상징으로 매도돼야 하는가? 그 2,205억 모두가 어떻게 해서 다 뇌물이라는 것인가? 그런데도 법원은 이 2,205억 원을 모두 추정금으로 판결했다. 재판이 아니라 독재였다. 당시 법원은 전두환에게 5.18에 대해 없는 죄도 만들어 씌웠고, 추심금 액수도 인민재판으로 뒤집어씌웠다.
전두환은 그 600여억 원을 가지고 퇴임해서 국가를 위해 봉사할 활동사금으로 남겨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이해를 돕기 위해 저자의 이야기를 잠시 보태고자 한다. 저자는 43세의 갓 대령이 된 상태에서 저자의 연구능력을 국방이라는 좁은 분야에 가두어 둘 것이 아니라 국가 차원으로 확대하고 싶었다. 7년 동안 국방연구원에서 저자와 함께 경력을 쌓았던 연구원들만 가지면 못할 일이 없을 것 같았다. 대령으로 예편해 그들과 함께 연구소를 차리고 싶었다. 아무리 연구원이 훈련돼 있다 해도 불과 10명도 안 되는 인원을 가지고 어떻게 국가 단위의 연구를 할 생각을 했다는 말인가?
정부의 모든 부처에는 산하 연구소들이 있다. 그들은 각 장르에 걸쳐 기본 연구들을 한다. 그런데 그 기본 연구 자료들을 정책으로 뽑아낼 수 있는 능력들이 부족해 보였다. 그런 유휴 자료들만 가지면 저자는 불과 수 명의 연구원만 가지고도 '이슈 페퍼'를 생산해 공직사회는 물론 국민 일반에게도 국가경영에 대한 사고방식을 계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돈이었다. 돈을 구하기 위해 저자는 브리핑 차트를 들고 재벌들을 찾아다니려 마음먹었다. 그런데 저자는 전력증강 사업이었던 "율곡 13년에 대한 평가'라는 제하에 무기 구매 과정에 잉태된 비리 시스템을 사례 위주로 연구했다. 보안사를 통해 그 연구내용을 보고받은 건두환은 국방장관 이기백과 공군총장 김인기를 불러 질책을 했다.
이에 저자는 장관 이기백, 차관 황인수, 기획관리실장 황관영 등에 의해 문제아로 낙인찍혀 연구소를 떠나 미국으로 갔다. 저자의 꿈도 여기에서 멈췄다. 나이 43세의 대령이었던 저자도 이러했는데, 57세에 대통령직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떠나는 전두환이야말로 국가사회에 기여하고싶은 것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래서 저자는 600억에 대한 전두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이를 한 단계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하나회를 구성했던 배경부터 살필 필요가 있다. 전두환 회고록 109~111쪽에는 그가 왜 하나회를 만들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있다. 세간에 왜곡돼있는 내용과는 전혀 다르다.
● 하나회는 이해관계 모임이 아니라 정신적 모임
저자는 전두환보다 11년 후배다. 생도 때, 동기생들의 눈에 뜨이지 않을 만큼 은둔형의 생활을 했다. 어쩌다 동기생들을 만나면 일상에 관한 이야기만 잠깐씩 나누고 주말이면 늘 혼자 독서를 했다. 같은 동기생들끼리 모여 국가의 장래를 진단한다거나 어떤 방향으로 국가에 충성해야 한다는 식의 거창한 문제는 각자의 머리에만 있었다. 그런데 전두환 회고록을 보니 그는 저자의 사관생도 생활에서는 상상조가 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해 있었다. 아래는 [전두환 회고록] 3권 109-111쪽에 기재된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육사에 정식으로 입교한 뒤 나는 노태우, 김복동과는 동기생으로서의 단순한 우의 이상의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우리들의 대화 주제는 생도생활과 관련한 일상적인 화제를 벗어나 국가, 군, 충성, 역사 등에까지 미쳤다.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우리들은 서로의 국가관과 역사관이 일치해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앞으로 힘을 합쳐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자는데 뜻을 같이하게 되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도원결의'를 머리에 그렸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나중에 최성택과 박병하 두 사람이 합류해 다섯 사람이 되자 우리는 이를 '오성회'라 이름지었다. 5성 장군의 꿈을 갖자는 것이었다. 나중에 백운택과 손영길이 합류해 7명이 됐지만 이름은 그대로 오성회였다. . . ”
“3학년이 되자 학교는 진해에서 태릉으로 옮겨졌다. 주말 외박을 나가면 을지로에 있는 최성택 집에 모여 진지한 토론을 벌이곤 했다. 내일의 한국을 위해 우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1-2차 세계 대전은 왜 일어났는가. 새벽 2시까지 토론이 이어지곤 했다. . . 이 모임이 훗날 하나회의 모태가 되었다. 동기들에는 학연, 지연, 과외활동 단위로 하는 모임들이 있었다. . . 내가 주도했던 오성희는 점차 후배들로 이어져 갔다. '나라도 하나 만족도 하다. 충성을 마친 곳도 하나'라는 뜻으로 하나회가 되었다. . 진급과 보직 등에서 하나회 회원들이 상대적으로 앞서가긴 했지만, 그것은 그들이 하나회 회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충실함의 성적이었다."
저자는 하나회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김영삼 때 처음 알았다. 그만큼 그들은 티를 내지 않았다. 알고 보니 하나회에 대한 육사인들의 반응은 세가지였다. 그들과 가까이 지내는 사람, 경쟁의식을 갖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이다. 김영삼에게 아부하여 하나회를 해체시킨 당시 권영해 국방장관은 하나회에 대해 경쟁의식과 적개심을 가졌던 사람이고, 저자는 무관심하게 자기 목표를 향해 소리 없이 전진했던 사람들 중 하나이다. 결론적으로 하나회는 세간에 매도된 바와 같이 '끼리끼리 해먹는 사조직'이 아니라 국가에 충성하는 방법을 토론하는 분임조(QCC) 같은것이었다. 분임조 토의가 가장 훌륭하게 발전해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 그리고 기업을 위해 늘 토론을 하여 지혜를 창출한다. 일본의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가장 부러운 원동력인 것이었다. 분임조 토의가 가장 훌륭하게 발전해 있는 나라가 일본이다. 이들은 국가를 위해, 그리고 기업을 위해 늘 토론을 하여 지혜를 창출한다. 일본의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는 가장 부러운 원동력인 것이다.
전두환은 요직자를 임명할 때, 혼자 결정하지 않고 관세장관들의 회견을 먹러 갈래로 청취한 후 결정을 하였고, 국무회의에서도 주요 사건에 대해 친절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에 토론을 시킨 후, 공개적으로 경부을 내렸다. 전두환의 토론문화는 생도 시절에 구성한 56명 단위의 하나회 멤버들과 시작한 토론에서 습관화된 것이었다. 한 사안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모두 취합하여 그중 좋은 생각을 선택하는 리더는 유능한 리더가 아니다. 그러나 토론은 곱하기 효과를 낸다. 각자는 다른 토론자의 말에서 새로운 발상을 하게 된다. 토론자들 사이에서 발상과 발상이 토스되면 취합의 수단에서는 얻을 수 없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지혜가 창출된다.
전두환은 생도 때부터 때로는 밤을 새워 독서를 했고, 장교생활을 하면서도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독서를 했다. 대하소설 [덕천가강], [지휘관참모], [불모지대], [베리아] 등 국가경영에 대한 책을 많이 읽었고, 중령-준장 때에는 청와대 각 방을 다니면서 “여기가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요?" 물으며 국가경영의 메커니즘을 공부했고, 보안사령관이 되어서는 특히 경제 분야 전문가들을 개인교사로 초청해 아침 공부를 했다. 대통령 재임기간에는 그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난 역사를 창조했다. 이렇게 학습이 몸에 밴 인물이라면 57세라는 젊은 나이에 퇴임해서 똑똑한 후배들과 함께 국가를 위해, 하고 싶어 하는 일이 매우 많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 정치자금에 따른 부패 일소를 주도한 죄 ]◈
● 자생력 있는 정당 만들기
전두환은 대통령이 되자마자 생각했다. 정당이 정치자금을 내는 사람들에 휘둘리지 않고, 고고한 자태를 지니면서 독립정당이 되려면 자생력이 확보돼야 한다고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당의 운영은 당비만으로 충당토록 했고, 정치인은 정치자금을 모으지 못하도록 조치했다. 이후기업인들이 관례에 따라 정치자금을 제공해도 이를 받지 않았다. 당원의 부패를 예방하기 위해 민정당 기간요원 전체를 유급당원으로 충원했다. 이는 정당 역사상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이렇게 운영해 보니 당원들로부터 갹출된 당비는 연간 100억 원이 못됐다. 그런데 중앙당과 지구당을 운영해 보니까 연간 300억 원이 지출되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1선거구에 2명을 당선시키는 '중선거구제'를 실시하려고 했지만 이 역시 노태우의 반대로 실패했다. 대통령이 민정당을 탈당해, 초당적 입장에서 국정을 운영할 생각도 해보았지만, 정당의 기반이 없는 국정운영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 결과 정당정치에 소요되는 정치자금을 대통령이 직접 기업인들로부터 갹출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갹출에 3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정치자금은 절대 강요하지 않는다. 둘째, 이권의 대가로 자금을 수수하지 않는다. 셋째, 오금 창구는 오로지 대통령 한 사람에 국한한다.
● 정치자금 창구 일원화
이전까지는 정치자금 모금의 창구가 다원화돼 있었기 때문에 부패가 심화되었고, 이 정치부패는 사회 각 분야로 전염되었다. 전두환은 중간관리자들로부터 발생하는 갖가지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대통령 창구 한 개만 열어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는 모금창구가 대통령비서실장, 경호실장, 여당인 공화당 등 여러 개 있었다고한다.
정치자금은 전두환만 걷었고, 다른 대통령들은 걷지 않았는가? 15대 대통령 선거가 진행 중이던 1997년 10월, 김대중 비자금이 불거져 검찰이수사에 착수할 찰나에 있었다. 이에 김대중은 이런 말을 했다. “여야 정치인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정치자금을 받았다. 하지만 이는 우리나라 관행상 죄가 되지 않는다. 수사를 하려면 모두 해야 한다. 특히 김영삼대통령 비자금을 공개하면 나도 공개하겠다." 이에 김영삼은 침묵했고,김대중에 대한 수사는 없었던 일로 돼버렸다.
노무현이 처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시기는 1988년 총선이었다. 당선되고 나서 노무현은 선거자금을 "원도 한도 없이 썼다."고 말했다. 김영삼은 부산에서 승부를 내기 위해 노무현을 공천했고, 세가 불리했던 노무현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자금을 돈사태가 날 정도로 뿌려주었다. 소문에 의하면 노무현은 자기 돈은 단 한 푼도 안 쓰고 오히려 김영삼이 뿌린 돈으로 여유자금까지 마련했다는 보도들이 있었다.
● 자기들은 원도 한도 없이 써놓고
2000년 캄보디아 훈센 총리는 무려 7박 8일씩이나 스케줄을 잡아 전두환을 초청했다. 전두환으로부터 경제를 발전시킨 비결을 공부하고 싶어서였다. 돌아오는 길에 리콴유 싱가포르 전 총리를 만나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 리콴유 전 총리는 “1995년의 5.18특별법 제정과 전두환의 투옥은 지나치게 잘못된 것”이라는 말로 전두환을 위로했고, 그 이야기는 리콴유 회고록에도 기록돼 있다. 이처럼 세계의 모든 나라 대통령들이 이른바 '통치자금'을 관례적으로 사용하고 있고, 이 나라의 모든 역대 대통령들이 관행으로 사용해 왔던 정치자금, 통치자금을 김영삼은 오로지 전두환에게만 인정하지 않았다. 이는 상식이 아니라 횡포였다. 그역시 실력에 대한 콤플렉스의 노예일 수 있다.
사용 내역을 묻지 말라는 '특수활동비'가 국정원에도 있고, 대통령에게도 할당돼 있다. 그런데 김영삼은 자기는 '원도 한도 없이' 정치자금을 뿌려댔으면서도 자기가 사용한 것은 숨기로 전두환에게만 '정치자금이고 통치자금이고 다 인정할 수 없다. 전두환이 기업으로부터 받은 도은 100% 다 대가성 있는 검은 돈이니, 받은 돈 2,205억 원 모두를 다 토해내라,"고 강요했다. 이는 누가 봐도 제정신이 아니다. 이미 수많은 누군가의 뱃속으로 들어간 돈을 어떻게 전두환 혼자 다 토해내라는 것인까. 그렇다면 김영삼도 노태우로부터 받은 3,000억 원과 1988년 총선에 '원도 한도 없이' 뿌렸다는 천문학적인 정치자금 모두를 토해내야 할 것이다.
10.26 직후 합수부 수사관들이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던 김계원 비서실장실을 압수수색하다가 금고에서 9억5천만 원 상당의 현금과 수표를 발견했다. 이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 사용하는 통치자금의 일부였다. 통치지금은 박정희에게도 있었다. 전두환은 9억5천만 원 모두를 박근혜에 전달했다. 이후 박근혜는 그중 3억 5천만 원을 전두환에 가져와 10.26 사건의 진실을 철저히 규명해 달라고 했다. 전두환은 그중 일부를 국방장관 노재현과 계엄사령관 정승화에게 전하고 일부를 합수부조사비용으로 사용케 했다. 이런 사실을 놓고 세간에는 전두환이 9억5천만 원을 혼자 꿀꺽했다느니 등 헐뜯는 유언비어들이 난무했다.
이처럼 정치자금은 박정희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금고에 모아둔 9억5천만 원을 받은 사람은 박근혜였다. 이때에 박근혜는 통치자금의 존재를 인식했을 것이다. 그리고 박근혜는 청와대 재직 시에 국정원으로부터 특활비라는 명목의 비자금을 받아썼다. 그로 인해 전직 국정원장 세 명이 감옥살이를 하고 있다. 이런 박근혜가 무슨 논리로 전두환으로부터 추징금을 훑어내기 위해 일가친척의 재산까지 빼앗는 전두환법을 만들어 탄압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 전두환만은 정치자금 걷을 수 없다. 대법원 인민재판 ]◈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크게 두 가지 죄를 덮어씌웠다. 하나는 내란을 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205억원 모두가 뇌물이라는 것이다. 전두환을 인격체로 본 것이 아니라 사상적 '웬수'로 취급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대법원은 사실상 인민군 군법회의였다. 일국의 대법원이라는 집단이, 자나깨나 대한민국을 부흥시키고 국위를 선양하는 일에 밤과 낮을 바쳐온 전두환의 목을 매단 것이다. 북괴가 전라도의 김대중 세력과 합세하여 일으킨 국가전복 폭동을 전두환이 일으킨 내란이라고 판결했고, 김대중과 김영삼 등이 아들들과 함께 원도 한도 없이 거두고 뿌렸던 정치자금을, 유독 전두환만은 거두지도 사용하지도 말아야 한다며, 8년에 걸쳐 재벌로부터 받은 자금 2,205억 원을 모두 토해내라고 판결한 것이다.
1) 광주시위대는 전두환의 헌법질서 파괴행위로부터 헌법을 수호하기위해 결집된 준 헌법기관이고, 이들이 벌인 시위는 빠른 속도로 전국에 확산됐어야 했는데, 전두환이 이를 초기에 무력으로 진압한 것은 내란이다.
2) 기업이 대통령에게 대가를 요청하지도 않았고, 대통령이 대가를 세공하지 않았다 해도 전두환이 기업에서 받은 돈은 무조건 다 뇌물이다.
이 판결은 전두환에 대한 인격살인 목적으로 내려졌다. 추징금 2,205억. 이 판결이 발표되자 멋모르는 국민들은 전두환이 퇴임할 때 꿍쳐가지고 나온 비자금이라고 생각하고 전두환에 대해 분노했다. 정치자금으로 인한 비리를 차단해보자는 참신한 뜻을 가지고 그가 처음으로 도입한 정치자금 창구 일원화는 결국 악인들로부터 공격당하는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 전두환 추징금 징수에 나타난 역대 대통령들의 횡포 ]◈
추징금이라 해도, 대법원 판결이 난 후에 적법 절차에 따라 회수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은 1995년 12월 3일, 전두환이 구속되자마자 추징에 나섰다. 1995년 12월 27일, 검찰은 전두환의 큰아들을 불러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다 알고 있으니 순순히 내놓으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대법원 판결이 나자마자 전두환이 가지고 있던 자산 312 여억 원을 즉시 추징해 갔다. 이후 전두환은 역대 정권의 동네북이 되었다.
김대중: 승용차 등을 압수해갔다.
노무현: 2003년 2월, 막 대통령에 오른 서슬 퍼런 노무현은 대통령 자리에 앉자마자 전두환에게 화살을 날렸다. '재산명시명령신청'이라는 재산 자백서를 법원에 제출하라고 요구함과 동시에 "미납 추징금 가운데 의미 있는 금액을 자진 납부하라."고 통보했다. 이미 재산이 거덜 나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전두환은 변호인을 통해 "부동산 등 나의 명의로 되어 있는 모든 재산을 다 헌납하겠으니 검찰은 이를 매각해서 추징금에 충당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검찰은 이를 거부했다. 대신 법원을 통해 전두환에게 '재산목록'을 제출하라고 강요했다. 이에 전두환은 사저의 별채를 포함하여 형체를 가진 모든 물건에 대한 목록을 제출했다. 값이 나가는 물건은 없고, 리스트에는 목록만 수십 페이지를 장식했다.
● 29만 원의 공작
이 많은 재산목록 중에는 휴면통장에 기재돼 있는 이자 29만1,680원이포함돼 있었다. 법원이 모든 것을 제출하라 하니 이 이자 29만1,680원도 기재한 것이다. 병풍, 액자, 피아노, 찬장, 책상, 에어컨, 의자, 진돗개 등 모든 것들이 목록에 나열돼 있었지만, 금전으로 표시된 재산은 휴면통장에 붙어있는 이자 한 개뿐이었다. 야비한 검찰은 이 29만 원을언론에 노출시켰다. 언론으로 하여금 전두환이 '그가 보유한 전 재산이 29만 원뿐이니, 배 째라 하는 식으로 나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졸지에 전두환을 29만 원으로 조롱받게 한 것이다. 검찰의 인격이 저자거리 인격보다 못하고, 영혼에서는 아기가 진동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에 제출한 재산목록은 2003년 10월에 경매됐다. 진돗개 두 마리값까지 합쳐 18억 168만 원이 추정됐다. 경매장이 된 사저에는 사람들이 들끓었고, 이에 주눅 든 진돗개 두 마리가 경매 딱지를 단 채, 한 구석에 웅크리고 있었다. 이 모습을 지켜본 한 이웃이 경매에 참여해 진돗개를 사서 전두환 가족에 넘겨주었다. 가져갈 것이 동이 나자 노무현은 ·전두환의 부동산과 사저의 별채를 팔아 696억 원을 또 훑어갔다. 여기까지 추징해간 총액은 312억원+18억+696억 원, 계 1,026억 정도가 된다. 2004년에는 이순자 여사가 옛날부터 상속받고 저축한 자산 120억원 상당의 채권을 빼앗아 갔다. 모두 1,246억이 추징된 것이다.
박근혜 : 2013년 2월 박근혜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박근혜 역시 대통령이 되자마자 전두환을 찍어 내렸다. 2013년 6월 27일, 득달같이 ‘전두환법'을 밀어붙인 것이다. 정식 명칭 '공무원 범죄에 관한 몰수 특례법'은 가족은 물론 일가친척, 사돈의 팔촌이 가진 재산까지도 몰수하여추징금을 완납시켜야 한다는 법이었다. 이는 헌법이 금지하고 있는 연좌제법이요 전두환을 타킷으로 한 '위인설법'이었다.
하지만 박근혜는 언론을 동원하여 전두환을 희화화했다. 그리고 그 여세로 법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박근혜 검찰은 7월 16일 이른 아침 전두환 사저를 급습했다. 이와 동시에 형(전기환), 동생(전경환). 처남(이창석)의 집과 사무실, 딸의 아파트, 둘째 아들의 집과 사무실, 막내아들의 장인 집과 회사들, 심지어는 둘째 아들과 이혼한 전처의 집에까지 들이닥쳐 압수수색을 했다. 전두환의 비서관을 지냈던 손삼수 사장의 사저와 회사사무실, 큰누나의 아들 사저와 회사들을 모두 압수수색하여 돈이 될 만한 것들에 압수 딱지를 붙였다.
금속탐지기로 모든 집안을 탐지했고, 대여금고까지 뒤져 아이들의 약혼반지, 결혼 패물들까지 압수해갔다. 큰아들 회사의 허브빌리지 등을 뒤져 미술관을 지은 후 전시하려고 수집한 미술품과 조각품을 모두 압수해갔다. 장인-장모의 초상화, 둘째 아들이 미국에 있을 때 그린 그림 40점, 전두환이 조카에게 써준 글씨, 김대중이 대통령 되기 전에 큰아들 내외와 민정기 비서관에게 써준 휘호 등 재산 가치와는 무관한 모든 것들을 다 훑어다 경매에 붙였다. 전두환의 조상을 모신 선산, 장인이 나무를 심어 가꾸어 온 야산과 농장, 장남의 출판사, 장인이 4명의 딸에게 물려준 안양의 땅 등 비자금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모든 재산을 다 훑어갔다.
주위에서는 법적 대응을 하자고 했지만, 전두환은 이미 초연의 강을 건너가 있었다. 빼앗기는 것도 애국이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있었다. 그는 '단군 이래 최고의 호황'이라는 선물을 만들어 이 나라 국민에게 주었지만, 그 호황 속에서 무리무리 자란 아이들은 그 나무를 뿌리 조차 남기지 않고 없애 버렸다.
◈[ 유난히 전두환에 악랄했던 박근혜, 왜 그랬을까? ]◈
10.26 이후, 박근혜를 포함한 3남매를 진정으로 보호해준 사람은 전두환이었고, 박근혜를 이용해 사적인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은 최태민이었다. 10.26 이후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를 다 지휘하면서 전두환은 최태민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최태민이 10.26 이후까지도 박근혜를 이용해 욕심을 채우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전두환은 최태민을 전방 군부대로 격리시킨 적이 있었다. 10.26 이후 박근혜는 전두환을 여러 차례 찾아가 최태민과 함께 '구국봉사단', '새마음 봉사단'을 계속 운영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하지만 전두환은 이 간청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가 모셨던 박정희 대통령의 명예를 보존하고, 그 자녀들을 최태민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전두환은 근혜양 자매를 여러 차례 청와대로 초청했고, 때가 되면 섭섭하지 않게 마음의 표시를 해왔다. 10.26이 터지자 영남대학교 분쟁이 일었다. 영남대학교 관계자들이 박근혜를 상대로 분쟁을 일으킨 것이다. 전두환은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당시 교육부 장관 김옥길 여사와 의논했다. 이에 감독인 장관은 장관이 관여할 사안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다. 알아보던 중, 청와대 비서실장을 할 때 영남대학교 설립과정에 직접 관여했던 사람이 이후락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소재를 알아보니 이후라 씨는 신병 치료를 이유로 장기간 미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전두환의 부탁을 받은 이후락이 즉시 귀국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여 주었다. 이외에도 박정희 대통령이 남긴 MBC 지분, 육영재단 등을 박근체가 다 맡도록 도와주었다. 전두환은 박정희에 대한 충성심을 그 자식들에게도 바친 셈이다.
2002년 박근혜는 한나라당 이회창과 결별하고 뛰쳐나와 '미래연합'이라는 당을 창당했다. 초라한 창당이었다. 박근혜가 사람을 전두환에 보내 2002년 대선에 출마하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요청해왔다. 이에 전두환은 박근혜 심부름꾼에게 완곡한 매너로 그의 뜻을 전했다. "성공하기가 매우 어렵다. 설사 성공하더라도 끝까지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니, 생각을 접는 것이 좋겠다.”
정리해 보면, 박근혜는 전두환으로부터 지극한 배려를 받았으면서도 오로지 최태민과 함께 '구국봉사단'이니 '새마음봉사단'이니 하면서 함께 활동하지 못하게 한 억하심정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2002년의 대선 출마 지원 요청을 무시했다는 데 대한 앙심도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전두환법'은 오늘 '박근혜법'으로 둔갑하여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 박근혜의 숨겨진 사상
박근혜가 왜 전두환에 대해 이렇게 가혹했는가에 대해 시각을 조금 더 넓혀볼 필요가 있다. 박근혜는 2002년 5월 11일 순전히 개인 자격으로 김정일 전용기를 타고 평양에 가서 3박 4일 동안 백화원초대소에 머물면서 평양시 곳곳을 안내받았다. 국빈 대접의 10배가 넘는 극진한 대접이었다. 귀환할 때는 김정일의 배려로 판문점으로 왔다. 이때부터 박근혜는 한국에서도 김정일이 최고, 미국에 가서도 김정일이 최고, 김정일 홍보대사 노릇을 했다. 2004년에는 김대중, 2014년에는 이희호를 만나 자기 아버지가 김대중에게 가했던 탄압에 대해 용서를 빌었다.
2007년 7월 5.18 영화 [화려한 휴가]를 구태여 광주에까지 가서 관람했다. 5.18묘지를 여러 번 참배하고 눈물을 흘렸다. 2013년 1월부터 5월까지 TV조선과 채널A가 경쟁적으로 5.18은 북한이 일으킨 게릴라전이었다는 취지의 방송을 하자, 박근혜는 무조건 "근거 없는 허위사실"이라며 방송 관계자들을 중징계 처벌하고 "이제까지 방송한 것은 다 허위였다.”는 요지로 사과를 하도록 강요했다. 독재였다. 이렇게만 하지 않았다면 박근혜는 지금쯤역사의 진실을 밝힌 공로로 상왕이 돼 있을 것이다. 그는 제주 4.3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국가가 상주 노릇을 하기로 공식화했다. 한국전에 참전하여 통일을 저지시킨 중국의 전승절을 축하하기 위해 시진핑과 나란히 망루에 섰다. 정신 나간 대통령이었다. 이 정도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연 전두환을 이념의 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