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상리에 있는 효자 정존후의 정려.
개설
정존후(鄭存厚)의 자는 중직(重職), 호는 고암(顧庵)이다. 겨울에 아버지가 병으로 몸져눕자 정존후는 여러 방면으로 약을 구하여 지성으로 돌보았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매일 천지신명께 빌었더니 하루는 우연히 한 의원이 와서 “부친의 병환에는 다른 약보다는 소의 생간을 끓여 드려야 효험이 있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정존후는 소의 간을 반드시 구하고자 마음먹고 김제군청에 가서 소를 잡게 해 줄 것을 간절히 빌었다. 그러나 군수는 개인의 집에서 소를 잡는 것은 법을 어기는 일이라 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때는 겨울이라 눈이 내리고 날씨가 몹시 추웠는데, 정존후는 아버지의 병환을 생각하니 그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눈 속에 엎드려 돌계단에 머리를 찧었다. 머리가 깨어져 붉은 피가 흰 눈에 물들었다.
이 광경을 본 군수가 크게 감동하여 “법을 효성에 비교하면 마땅히 효가 위일 것이니, 법을 내게 맡긴 뜻이 어찌 효를 무시하라는 것이랴.” 하며 즉시 소를 잡도록 허가하고 “옛날 왕상(王祥)이 잉어를 구한 일이나, 맹종(孟宗)이 눈 속에서 죽순을 얻은 일이 어찌 옛날에만 있던 일이겠는가.” 하며 탄복해 마지않았다. 정존후는 평생을 효성과 우애로써 한 가족을 거느리다가, 1843년(헌종 9) 2월 15일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위치
백산면사무소에서 서흥농공단지 방향으로 들어서 300m쯤 가면 김제에서 익산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온다. 여기서 왼쪽인 익산으로 가는 길로 4.1㎞ 가면 상정인데 1.1㎞ 더 가면 오른쪽에 와룡역으로 가는 새로 포장된 길이 나온다. 이 길로 접어들어 와룡역 쪽으로 900m쯤 가면 삼리교 못 미처 소음방마을이 나온다. 소음방에서 마을회관을 지나면 정존후 정려각이 나온다.
변천
1877년(고종 14)에 명정되었다. 1918년 전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기영이 글을 짓고 여산 송기면(宋基冕)이 쓴 비석이 있다.
형태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팔작지붕 기와집에 겹처마를 둘렀고 호박주춧돌에 홍살문을 달았다. 처마의 하중을 분산하기 위하여 4개의 기둥을 세웠다.
현황
정려각 안에 비가 세워져 있다. 비문에는 ‘효자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정존후지려(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鄭存厚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동래정씨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제 지역 유림들은 정존후를 효의 표상인 왕상과 맹종에 비유하였고, 평생 효의 근원인 양지(養志)와 양체(養體)의 정신을 잃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 이로 추앙하고 있다.
참고문헌
출처
제공처 정보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제공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네이버 지식백과] 정존후 정려 [鄭存厚旌閭]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첫댓글 군태님의 좋은 정보글 잘공유하고 흔적남겨봅니다
효성이 대단합니다
‘정존후계서 효성이 대단하셨기에 증통정대부승정원좌승지겸경연참찬관(孝子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에 이르렀으니 모든 사람들이 배워야 할 사항이라 생각됩니다.’
군태님 자료 감사합니다.
정존후 정려[ 鄭存厚旌閭 ] 자료 잘 봤습니다.
정꿀벌 = 정현정 다녀갑니다♥ 군태 대부님 감동 감사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