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 앞에 왔는데 기마경찰이 막고 있네요?
옆에 있던 미국인 관광객에게 물어보니 오바마 대통령이 어디 갔다가 3시에 온다고
보안관계상 이렇게 관광객들의 접근을 막고 있다고 하네요.
초대 대통령 죠지 워싱턴 기념탑.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닯았죠?
<오벨리스크>
원래 고대 이집트의 사원 입구에 세워진 1쌍의 커다란 뾰족 기둥.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는 대체로 아스완의 채석장에서 캔 붉은 화강암 덩어리를 깎아서 만들었다. 피라미드형 꼭대기보다 정4각형 또는 직4각형의 밑바닥을 더 널찍하게 만들었으며, 가끔 꼭대기는 호박금이라고 불리는 금·은의 합금으로 씌우기도 했다. 몸체의 사면에는 주로 태양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헌사나 왕의 생애를 기리는 내용을 담은 상형문자로 장식되었다. 일찍이 제4왕조(BC 2613경~2494) 때부터 세웠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시대에 세워진 것은 남아 있지 않다. 제5왕조 때 세워진 여러 태양신전들의 오벨리스크는 높이가 3.3m에 불과해 비교적 나지막한 편이다. 현재 전해지는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오벨리스크는 세소트리스 1세(BC 1971~1928)가 재위하는 동안 세워진 것으로, 한때 태양신 레(Re)의 사원이 있었던 카이로 교외의 헬리오폴리스에 있다. 투트모세 1세(BC 1525경~1512)가 카르나크에 세운 1쌍의 오벨리스크는 높이 24m이고, 정4각형으로 된 밑바닥 길이는 1.8m이며 무게는 143t에 이른다.
카르나크에 있는 하트솁수트 오벨리스크의 아래쪽에는, 채석장에서 이 거석(巨石)을 깎아내는 데 7개월이 걸렸다고 새겨져 있다. 테베에 있는 하트솁수트 사원에는 나일 강을 통해 나룻배로 오벨리스크를 실어 나르는 장면이 나와 있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인부들은 흙으로 만든 경사로를 이용해 따로 떨어진 발판 위로 오벨리스크의 몸체를 들어올리고 그것을 좌우로 움직여 자리를 잡아주었다. 페니키아인과 카나안인 등 다른 민족들도 이집트인들을 따라 오벨리스크를 만들었으나 1개의 돌덩이로 만들지는 못했다. 로마 제국 동안 이집트에서 지금의 이탈리아로 여러 개의 오벨리스크가 옮겨졌다. 적어도 12개 정도가 로마 시로 옮겨갔으며, 그중 하나가 투트모세 3세(BC 1504~1450 재위)에 의해 카르나크에 세워진 것으로 지금은 라테라노의 산 조반니 광장에 있다. 이것은 현재 남아 있는 것 중 가장 큰 고대 오벨리스크로서 높이는 32m, 밑바닥 4면체 길이는 2.7m이며 올라갈수록 조금씩 가늘어져 꼭대기의 4면체 길이는 1.88m이고 그 무게는 약 230t에 이른다. 19세기말 이집트 정부는 1쌍의 오벨리스크를 둘로 나누어 미국과 영국에 각각 하나씩 주었다. 그중 하나는 지금 뉴욕 시의 센트럴파크에 있고 다른 하나는 런던 템스 강변에 서 있다. 이 2개의 오벨리스크는 '클레오파트라의 바늘'로 알려져 있지만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는 역사적 관련이 없다. BC 1500년경 투트모세 3세가 헬리오폴리스에 세운 이 오벨리스크는 그와 람세스 2세(BC 1304경~1237경)를 위한 비문에 새겨져 있다. 전형적인 붉은색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21.2m이고 밑바닥은 직4각형으로 가로 2.36m, 세로 2.33m이고 무게는 180t에 이른다. 이런 돌기둥들을 채석해 세웠다는 사실은 고대 이집트인들의 역학적 천재성과 무한한 인력 동원 능력을 보여주는 하나의 척도가 되고 있다. 오늘날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로서 잘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워싱턴 기념비를 들 수 있다. 이것은 1884년 워싱턴 D. C.에 세워졌으며, 높이는 169m로서 전망대와 내부계단 및 엘리베이터 시설을 갖추고 있다.
워싱턴 기념탑을 지나서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으로 갑니다.
제퍼슨 기념관 앞으로 왔습니다.
제퍼슨 [Thomas Jefferson]미국 대통령 | 브리태니커
소속 국가 | 미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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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곳 | 몬티첼로. |
죽은 때 | 1826. 7. 4 |
직업 | 대통령 |
태어난 곳 | 미국 버지니아 앨버마를 샤드웰 |
태어난 때 | 1743. 4. 13 |
미국의 정치가.
제퍼슨은 부유한 농장주이자 토목기사인 피터 제퍼슨과 제인 랜돌프의 아들로 태어나 민주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지방유지로서 치안판사를 역임했고, 나중에는 버지니아 의회 하원의원이 되었다. 1757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1760년 윌리엄앤드메리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수학과 자연과학에 흥미를 갖고 평생 동안 그 연구를 계속했으며, 외국어로 라틴어 및 그리스어도 열심히 공부했다.
제퍼슨은 1767년 변호사가 되었지만, 법률보다는 정치에 관심이 많아 1769년 식민지 의회의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당시 버지니아를 비롯한 식민지들은 영국의 식민정책에 반대하여 끈질긴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강력한 저항을 주장하는 패트릭 헨리 등과 손을 잡았고 곧이어 그 집단의 지도자가 되었다. 1775년 봄 버지니아 의회는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제2차 대륙회의에 참석할 대표단의 한 사람으로 토머스 제퍼슨을 임명했다. 1776년 6월 제퍼슨은 대륙회의의 독립선언문 기초위원으로 선발되었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존 애덤스도 기초위원이었지만, 그들은 제퍼슨의 뛰어난 재능을 인정하고 그에게 거의 모든 작업을 맡겼다. 나중에 제퍼슨은 이 공식문서에서 미국의 정신을 표현하고자 애썼다. 제퍼슨이 독립선언문에 표현된 이상(理想)을 상징하는 유일한 인물이 된 것은 단지 독립선언문을 썼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같은 헌신적인 조국애 때문이었다.
버지니아 헌법은 제퍼슨이 대륙회의에 참석하고 있던 1776년 6월에 채택되었다. 헌법기초작업에 참여하지 못한 제퍼슨은 1776년 10월 대륙회의에서 버지니아 의회로 돌아오자마자 버지니아의 법률과 제도를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 개혁의 주요목적은 '낡은 귀족정치를 없애고 앞으로도 귀족정치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며, 참된 대의정치의 토대를 쌓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다음 4개 항목의 개혁을 강조했는데 ① 한정상속제도의 폐지, ② 장자상속제도의 폐지, ③ 신앙의 자유, 교회의 특권 철폐, ④ 교육제도의 확립이었다(→ 재산법, 교회와 국가, 공교육).
1779년 독립전쟁 당시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지사가 되었지만, 주지사는 책임만 많고 권력은 거의 없는 자리였다. 1780~81년 겨울에 버지니아군이 영국군과 싸워 아무런 전과도 올리지 못하자, 제퍼슨은 주지사로서 비상시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았다. 의회는 만장일치로 그에 대한 신임을 확인했지만, 제퍼슨은 주지사나 하원의원으로 일하기를 거부하고 평범한 시민으로 살기 위해 몬티첼로로 은퇴했다. 그가 공직에서 은퇴한 것은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내인 마사 웨일스 스켈턴 제퍼슨의 건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사는 1772년에 제퍼슨과 결혼한 뒤 5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그중 2명만 살아남았고, 1781년 가을에 다시 임신했다. 그녀는 6번째 아이를 낳은 뒤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782년 9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제퍼슨은 1782년 12월에 공직으로 돌아와서, 버지니아 대표로 몇 개월 동안 대륙회의에 참석했다. 그리고 1783년에는 연합헌장(Articles of Confederation)에 따라 창설된 연방의회 의원이 되었다. 이것은 1781년에 각 주의 비준을 얻어 성립된 미국 최초의 헌법이다. 그는 연방의회에서 영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고, 미국 화폐단위에 십진법을 채택하는 법안을 성립시키는 등 많은 활약을 했다. 그러나 가장 큰 업적은 1784년에 버지니아가 정부에 양도한 오하이오 강 북서부 지역에 관한 정부안을 입안한 것이다. 이 정부안에서 가장 중요한 항목은 1800년 이후에는 이 땅에서 노예제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는데, 이 조항은 그후 1787년에 제정된 노스웨스트 법령에도 포함되었다(→ 노스웨스트테리토리). 1784년 제퍼슨은 벤저민 프랭클린의 후임으로 프랑스 주재 미국공사가 되어 프랑스의 경제상황과 사회현실을 직접 관찰하고 절대왕정을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 프랑스에 머무는 동안 그는 유럽의 과학자나 지식인들과 자유롭게 사귀었고, 특히 독립선언문과 버지니아 주의 종교자유법을 기초한 사람으로서 라파예트 후작 같은 온건한 정치지도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그는 1789년말에 귀국했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의 초기 단계밖에는 목격하지 못했다.
1787년에는 필라델피아 헌법제정회의에서 헌법이 기초되어 그동안 국가의 기본법 역할을 맡았던 연합헌장을 대신하게 되었고, 이 헌법은 이듬해 정식으로 비준을 받았다. 제퍼슨은 그 헌법에 대체로 찬성했지만, 권리장전이 빠져 있고 대통령의 연임을 제한하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색인 : 미국연방헌법). 그가 1789년 가을 프랑스에서 돌아오자마자, 조지 워싱턴은 그에게 새 정부의 국무장관 자리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워싱턴 행정부의 재무장관은 알렉산더 해밀턴이었는데, 제퍼슨은 해밀턴의 정책이 중앙정부의 헌법상 권한을 넘어섰고 국민 대다수의 이익에 위배되며 공화제도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맹렬히 반대했다. 외교정책에서는 제퍼슨이 프랑스 쪽으로 기운 반면, 해밀턴은 영국에 친밀감을 보였다. 제퍼슨과 해밀턴은 인물뿐만 아니라 정책과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적 정당을 결성하는 문제에서도 의견대립을 보였고, 이 논쟁을 계기로 하여 양당체제의 선례와 유형이 확립되었다. 두 사람은 워싱턴의 1차 임기가 끝나갈 무렵 내각에서 물러났지만, 제퍼슨은 여전히 민주공화파의 지도자였고 해밀턴은 연방파의 상징이었다.
연방파의 존 애덤스가 대통령에 당선된 1796년 선거에서 제퍼슨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798년 연방파가 주도하는 하원이 언론 및 출판의 자유를 규제하는 외국인 규제법과 보안법을 제정하자 제퍼슨은 유능한 협력자인 제임스 매디슨과 함께 맹렬한 반대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이 법률이 위헌이라고 주장하면서, 연방법이 헌법을 위반할 경우에는 지방정부가 법률을 무효로 간주할 권한을 갖는다는 버지니아-켄터키 결의안을 작성하여 통과시켰다. 제퍼슨은 해밀턴을 '공화정부의 적'으로 간주했고, 해밀턴은 제퍼슨을 '선동적인 급진주의자'라고 비난했다. 해밀턴은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의 권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제퍼슨은 개인의 생명·자유·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이 국가의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따금 반대자들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지만, 끝없는 이념 논쟁이 분열과 갈등을 초래한다는 것을 느끼고 두려워했다. 미국 사회를 화합으로 이끌고자 하는 제퍼슨의 소망은 그후 대통령직 수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00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연방파는 패배를 맛보았지만, 민주공화파가 대통령후보로 내세운 제퍼슨과 애런 버의 득표수가 공교롭게도 똑같았기 때문에, 결국 하원이 결선투표를 하여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이듬해 3월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제퍼슨은 지난 12년 동안 연방파가 시행하던 정책을 전면개편하려고 하지 않았다. 제퍼슨이 명분에만 구애되었거나 무절제한 정치적 열정의 위험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면, 그리고 미국 역사상 최초의 정권교체가 가져온 미묘한 상황을 무시했다면, 미국 사회는 안정을 잃고 끊임없는 정치적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갔을지도 모른다. 1803년 제퍼슨은 나폴레옹 1세로부터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사들였다. 그결과 미국 영토는 거의 2배로 늘어났고 루이지애나에서 강대국 프랑스의 권력이 물러났기 때문에 국가는 더욱 안정되었다(→ 루이지애나 매입). 제퍼슨은 1804년 대통령으로 재선되어 나폴레옹 전쟁에서는 중립정책을 유지했지만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난을 받았고, 그가 추진한 출항금지법은 지나치게 강경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제퍼슨은 원하기만 했다면 대통령을 3번 연임할 수도 있었지만, 조지 워싱턴을 본받아 2차례의 임기만 마치고 물러났다. 1809년 3월 4일 그는 후임자인 제임스 매디슨에게 대통령직을 물려주고, 버지니아 주 몬티첼로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 버지니아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대학교 설립이 "나의 마지막 관심사이며, 내가 조국에 바칠 수 있는 마지막 봉사"라고 말했다. 그는 건물을 설계하고, 건축공사를 감독했으며 교수들을 모으고, 교과과정을 짜고 교과서까지도 선정했다.
미국 제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 기념관.
<외출 나갔던 오바마 대통령이 돌아 오고 있습니다.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서 1박 2일 하고 돌아 오는강?
일석이가 백악관 방문할 때 마중나오기로 했는데 늦었네.............ㅋㅋㅋ.
대통령 안전은 확실히 지키는 미국.
헬기 3 대가 동시에 떴는데 1번 헬기가 백악관 쪽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살짝 빠지고
2번 헬기가 백악관 옥상에 착륙하는 듯 하다가 바로 날아가 버리고 3번째 헬기가 드디어 백악관 옥상에 착륙합니다.
2번 헬기가 옥상에 착륙하는 듯이 하고 있습니다.
착륙하는 듯 하다가 도 날아 가버리고 맨 마지막 헬기가 백악관 쪽으로 다가 가고 있습니다.
이 것이 오바마가 탄 헬기입니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제 3대 대통령토마스 제퍼슨 동상>
마국민들이 존경하는 대통령 중에 한 분입니다.
동상의 좌대에 옥수수가 조각되어 있습니다. 특이하지요? 옥수수 농사를 짓는 농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의미라고요.
독립선언문
1743년 출생 ~ 1826년 별세(향년 83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