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11. 예수비전교회 주일낮예배 알고 깨달은 신앙인 유백선 목사
욥기 23:10-15
예수비전교회 주소 // 서울특별시 노원구 한글비석로 24라길 76-5 (상계5동 136-55)
상담 : 유백선 목사, ybs9191@hanmail.net
대표전화 02) 6221-6468, Mobile. 010-8346-6468
예수비전교회 카페에는 삶의 행복과 깊은 감동을 주는 메시지가 더 많이 있습니다. 카페에 들어오셔서 함께 나누시고 예수님의 비전으로 복을 받고 함께 주님의 교회를 세워나가시기 소망합니다.
http://cafe.daum.net/jesusvision91, http://cafe.daum.net/boram9191
인생을 살면서 사람을 괴롭히는 ‘고질병’이 있습니다. ‘고질병’은 오래되어 굳어버린 나쁜 버릇이나 병폐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고질병’에 점 하나를 찍으면 ‘고칠병’이 됩니다. 하나를 바꿔서 해결하면 ‘고친병’이 됩니다. 연약하고 작은 마음(心)에 굳건하고 당당한 신념의 막대기 하나를 꽂으면 반드시(必)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시도해보지 않고 불가능(impossible)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점 하나를 찍으면 ‘나는 할 수 있다.(I’m possible)’가 됩니다. 인생을 살면서 마음을 짓누르는 것이 ‘빚’입니다. 여기에 점 하나를 찍어보면 앞날을 밝혀주는 ‘빛’이 됩니다. 인생에서 꿈이 없으면 절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꿈이 어디에도 없다.(Dream is nowhere)”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을 띄어서 읽으면 “꿈이 바로 여기에 있다.(Dream is now here)”가 됩니다. 하나님을 불신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어디에도 없다.(God is nowhere)”고 말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 계신다(God is now here)”고 말합니다. 부정적인 것에 긍정의 점을 찍은 것이 자신의 마음에 있습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하나의 획도 자신의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16대 황제요, 스토아 철학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121년-180년)가 말했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진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믿음대로 되라.”
여러분! 사람은 경험을 통해서 시야가 확장이 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아는 만큼 보이고, 믿는 만큼 보인다. 보이는 만큼 느낀다. 느낀 만큼 행한다. 보이는 만큼 변화한다. 보이는 만큼 인생이 즐겁다.’ 시인 나태주가 풀꽃을 보면서 말했습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사람이 ‘무엇을 아느냐? 그것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생각과 판단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모르는 것은 보고도 알 수 없습니다. 적게 알면 적게 보입니다. 잘못 알면 잘못 보게 됩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브르디외(Pierre Bourdieu)가 말했습니다. “지식(학벌)과 권력, 자본이 커진 만큼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 아니다. 점점 더 이기적이고, 독점화 되고 있다. 부가 학벌과 정치권력과 경제구조를 지배하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이 올바른 세상이라고 할 수 없다.” 미국의 방송인 오프라 윈프리가 말했습니다.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있다면 인생의 즐거움이란 내가 쓴 에너지만큼 그것을 돌려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즐거움의 정도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지금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는 길을 알고 있습니까? 내가 무엇에 에너지를 쏟고 있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가는 길을 아신다. 나를 단련하신 후에 순금같이 되어 나오게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히 여겼다. 하나님을 알고 깨달아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께서 욥을 통해서 나(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욥은 자신이 가는 길을 알고, 깨달음을 얻기까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욥이 왜 고난을 겪었습니까? 사탄의 시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겪었습니다. 욥은 우스(에돔 사람들이 거주/창 10:22-23) 땅에서 인격과 성품에서 비난을 받지 않는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복을 주셔서 10명의 자식들(아들 7, 딸 3)을 두었습니다. 가정이 화목하고, 가정경제도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큼 풍성했습니다. 양, 낙타, 소, 암나귀와 수많은 종들을 거느렸습니다. 자식들이 생일 때마다 잔치를 열어 함께 기쁨을 나누었습니다. 잔치가 끝나면 ‘자식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지 않았는가?’ 돌아보며 자식들을 성결하게 하고, 숫자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추석을 지나고 자식들의 숫자대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적이 있습니까? 욥은 하나님의 은혜로 풍족한 삶을 살면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와 경건함’을 유지하였습니다. 여기까지 욥의 인생을 다 부러워했습니다. 욥처럼 살고 싶은 소망을 가졌습니다.
욥은 사탄이 시험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시험들을 겪었습니다. 사탄이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러면 틀림없이 주를 향해 욕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물러났던 사탄이 욥의 모든 소유물을 쳤습니다. 소들과 양들, 낙타들을 빼앗기고 종들도 칼에,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서 죽었습니다. 자식들도 큰 바람에 집 모퉁이가 무너져서 죽었습니다. 욥이 감당하기 힘든 불행한 소식을 듣고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땅에 엎으려 하나님께 예배하며 말했습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습니다. 알몸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이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이십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것입니다.” 욥이 재난을 당했지만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탄이 생명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욥의 육체를 쳐서 시험했습니다. 욥의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서 재에 앉아서 질그릇 조각으로 몸을 긁고 있었습니다. 욥의 고통을 보고 그의 아내가 욥에게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느냐?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 2:7-9) 욥이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의 말 같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 화도 받지 않겠느냐?” 욥이 모든 일을 입술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이 일로 욥이 무엇을 알게 되었습니까? “내 모태의 문이 닫지 않아서 내 눈으로 환난을 보게 하였다.(욥 3:10) 내가 그칠 줄 모르는 고통에서 위로를 받고 기뻐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것이다.(욥 6:10)” 욥이 세 친구들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가르쳐서 나의 허물된 것을 깨닫게 하라. 내가 잠잠할 것이다.(욥 6:24) 내가 여러 달 고통을 받으니 고달픈 밤이 내게 작정되었다.(욥 7:3) 하나님은 측량할 수 없는 일을, 셀 수 없는 기이한 일을 행하신다. 그래서 그가 내 앞으로 지나가시나 내가 보지 못하고, 그가 내 앞에서 움직이시나 내가 깨닫지 못한다.”(욥 9:10-11)
여러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시는 측량할 수 없는 일들과 셀 수 없는 기이한 모든 일들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살기가 곤비하면 불평을 토로합니다. 마음이 괴로우면 괴로움을 말합니다. ‘나를 정죄하시 마시고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는지 알기를 호소합니다.(욥 10:1-2) 욥이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생물의 생명과 모든 사람의 육신의 목숨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욥 12:10) 욥은 고난을 겪으면서 자기 인생과 관계하는 사람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다. 그림자 같이 지나가며 머물지 않는다. 이런 사람을 주께서 눈여겨보실까?(욥 14:1-3) 나의 친구는 조롱하고, 내 눈이 하나님을 향해 눈물을 흘린다. 수년이 지나면 나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갈 것이다.(욥 16:20,22) 형제들도 나를 멀리 떠나고, 아는 모든 사람이 낯선 사람이 되었다. 내 집에 머물러 사는 자와 내 여종들도 나를 낯선 사람으로 여긴다. 내 아내도 내 숨결을 싫어한다. 어린 아이들까지도 나를 업신여기고, 조롱한다.(욥 19:13-18)‘
욥이 고난을 겪으면서 자신의 실체(존)를 얼마나 알게 되었습니까? 자신 안에 반항하는 마음과 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무겁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어찌해야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처소에 나갈 것인가?’ 욥이 알고 깨달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가는 길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것입니다. 본문 1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여기서 “가는 길(데레크 이마디/ידמע ךרד/derek ’imadiy)”은 “나와 함께 하는 길, 내가 취한 길, 내 곁에 길”이란 뜻입니다. “알다(야다/עדי/yada‘)”는 말은 “직접 보아서 확인하다, 깨달음, 인정하다, 관찰하다, 조언하다.” 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자신을 아는 일이 가장 어렵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잃고 길 위에서 방황합니다. ’내가 가는 길이 정답일까? 가는 길이 올바른가? 내가 방황하는 이유가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가는 길이 올바른지 알지 못하고 갈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남들보다 멀리 보고, 멀리 가려고 합니다. 남들과 다르게 가고 싶어 합니다. 인생의 갈림길에서 제일 고민합니다.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합니다. 세계적인 작가, 연설가 지그 지글러(Zig Ziglar)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끝을 알 수 없다. 이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삶이 완전히 바뀔 수 있다.”
여러분! 욥이 가는 길을 왜 하나님께서 아신다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신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사화복(生死禍福)을 주관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주를 의지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주를 찾는 사람들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시 9:10) 하나님께서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올 것이고 믿었습니다. “단련하다(베하나니/יננחב/bechananiy)”는 말은 “검사하다, 조사하다, 시험하다, 유혹하다, 시도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단련하실 때 은처럼 하지 않고, 너를 고난의 풀무 불에서 선택하셨습니다.(사 48:10)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합니다.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한다.”(잠 17:3)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실 때 고난의 용광로에서 훈련시켜서 정금처럼 순결한 믿음을 갖게 합니다. 모진 역경과 시련 속에서 그 사람의 인격을 변화시킵니다. 의지가 굳건하고, 영적인 통찰력을 갖게 합니다. 순금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입니다.
한나가 불임으로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한나가 자신의 고통을 눈물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한나가 사무엘을 얻고 나서 찬양했습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신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신다.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신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고,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셔서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신다.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땅의 기둥들이 여호와의 것이다.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삼상 2:6-8)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이 자신의 길을 여호와께 맡깁니다. “네 길을 여호와께 맡겨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실 것이다. 네 의를 빛처럼 나타내신다. 네 공의를 정오의 빛같이 하실 것이다.”(시 37:6-7)
여러분! 하나님을 알고, 깨달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첫째는 바로 하나님의 걸음(진행)을 따릅니다. 하나님의 길을 지키고, 치우치지 않습니다. 본문 11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 발이 그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여기서 “따르다(아하자/הזחא/‘achazah)”는 말은 “잡다, 단단히 매다, 붙잡다, 소유하다, 분배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길을 주목하십니다.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십니다.(욥 34:21) 하나님의 걸음을 따르는 사람에게 구원의 방패를 주십니다. 주의 온유함이 크게 하십니다. 내 걸음을 넓게 하십니다. 내 발을 미끄러지지 않게 하십니다.(삼하 22:36-37=시 18:35-36) 하나님의 걸음을 따를 때 지혜로운 길을 가르쳐주십니다. 정직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그 길을 다닐 때 걸음이 곤고하지 않습니다. 달려갈 때 실족하지 않습니다. 훈계를 굳게 잡아 놓치지 않고, 지키는 것이 내 생명입니다.(잠 4:11-13) “지키다(샤마레티/יתרמשׁ/shamarethiy)”는 말은 “울타리 치다, 보호하다, 시중들다, 주의를 기울이다, 세심히 보다, 책임지다, 자신을 구하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깨달은 사람이 왜 하나님의 길을 따릅니까? 하나님의 길이 영광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일정하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3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는 뜻이 일정하시니 누가 능히 돌이키랴? 그의 마음에 하고자 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나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기 원하십니다.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습니다.(약 1:18,21)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알고, 깨달은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 땅에 그 산물을 내게 하십니다. 의가 주의 앞에 앞서 가고 주의 길을 닦게 하십니다.(시 85:12-13)
둘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깁니다. 본문 12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내가 그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정한 음식보다 그의 입의 말씀을 귀히 여겼도다.” 주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지키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합니다.(왕상 2:3) 여기서 “정한 음식(매후키/יקחמ/mechuqiy)”은 “재정, 편리한, 의무, 지불되는 것”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필요한 것보다 비교가치를 더 크게 둔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밥(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신 8:3)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반드시 복을 받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습니다. 여러 나라에 꾸어주고, 여러 나라를 통치하게 됩니다.(신 15:4-6) 하나님의 말씀을 편리한 것보다 더 귀하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귀히 여기다(짜파네티/יתנפצ/tsapanethiy)”는 말은 “저장하다, 비축하다, 보호하다, 존중하다, 비밀을 지키다, 숨어 기다리다.” 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긴 사람은 믿음의 시련을 견딥니다. 왜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기 때문입니다.(벧전 1:7)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왜 귀하게 여깁니까?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1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내게 작정하신 것을 이루실 것이라. 이런 일이 그에게 많이 있느니라.” 여기서 “작정하다(후키/יקח/chuqiy)”는 말은 “정한 음식”과 같은 단어입니다. 하나님께서 일을 작정하시고, 이루십니다.(잠 16:33)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성령님을 통해서 마리아의 육신에 임하셨습니다. 마리아가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잉태하고 엘리사벳에게 찾아갔습니다. 엘리사벳이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여자가 복이 있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실 것이다.”(눅 1:45) 하나님의 뜻을 알고,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님의 능력으로 행합니다. 그 사람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습니다.(고전 2:4-5)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증거합니다. ‘주의 말씀이 곤란한 중에 나를 위로하십니다.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습니다.(시 119:50) 주의 말씀이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입니다.(시 119:105)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합니다.(시 119:130)’
셋째는 하나님을 알고, 깨달으면 하나님께 지각을 얻어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본문 1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 앞에서 떨며 지각을 얻어 그를 두려워하리라.” 여기서 “지각을 얻는다(에트보넨/ןנובתא/‘ethbonne)”는 말은 “지적으로 분리(구별)하다, 이해하다, 유의하다, 분별력 있다, 인식하다, 느끼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지각에 뛰어나십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빌 4:7) 하나님께 지각을 얻으면 의의 말씀을 경험합니다.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합니다.(히 5:13-14) 하나님께 지각을 얻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압니다.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오, 영생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각(知覺)을 주셔서 우리가 진리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요일 5:20) 이제 오직 진리(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진리를 깨달아 행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고, 기뻐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p. s. 히브리어가 오른쪽에서 표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글방향으로 표기되어 있으니 읽으실 때 양해 바랍니다.
|
출처: 예수비전교회91 원문보기 글쓴이: bsyoo